|
|
[빛과 소금] ‘감사의 전례’인 미사의 의미 – 감사 기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와 우리의 삶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성체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은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어떻게 제대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성변화(聖變化)는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미사 거행 전체의 중심이며 정점은 성찬 전례에서 사제가 바치는 감사 기도입니다. 감사 기도는 감사와 축성의 기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는 감사 기도에서 심오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두 요소인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청원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 잔을 들고 하신 말씀에서 그 축성의 힘이 흘러나옴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감사 기도에서 사제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도록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그것은 사제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말을 하지만, 그 말의 효력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헌물들을 변화시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유다의 배반에 대한 강론」, 1,6).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라고 불린 성령 청원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사제가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특별히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감사 기도 안에는 두 번의 성령 청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성령 청원은 예물에 대한 축성 기원으로 ‘성찬 제정 말씀’ 전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제대에 봉헌된 예물, 곧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2양식).
이때 사제는 예물에 두 손을 펴 얹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임하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두 번째 성령 청원은 미사에서 영성체하는 우리 모두의 일치를 위한 기원으로 ‘성찬 제정 말씀’ 다음에 위치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간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2양식).
그러므로 미사의 희생 제사에서 성령의 힘으로 변화되는 것은 빵과 포도주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미사가 거기에 참례하는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단지 예식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성찬례 거행은 참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결합시킴으로써 이것을 이루십니다.
전례 탐구 생활 (66) 강복과 축복
강복과 축복은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사실 말은 다르지만 의미는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일을 우리말로 ‘강복’이라고도 하고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둘 다 라틴말 베네딕시오(benedictio)의 우리말 표현이며, 라틴말 전례서에서는 구별 없이 한 단어로 씁니다. 다만, 옛날 가톨릭에서는 이 ‘베네딕시오’를 우리말로 옮길 때 ‘강복’이란 말을 썼고, 같은 뜻을 개신교에서는 ‘축복’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일치 운동을 강조한 직후 1960년대 중반에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가 교회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 ‘강복’과 ‘축복’을 혼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우리를 강복하소서.” 하던 것을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미사 통상문」을 새로이 개정하면서 ‘축복’(祝福)이라는 말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자는 국어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행위, 또는 그러한 복을 ‘강복’이라고 하고, ‘축복’은 사람이 하느님께 복을 빌 때만 쓰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천주교 용어집」에도 이런 구분이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행위 주체에 따라 ‘축복’과 ‘강복’을 구분하여 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제는 교우들이나 성물에 ‘축복’하고(=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고), 하느님은 (사제를 통하여) ‘강복’하신다(=복을 내려 주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한국어 문법의 기계적 적용에만 집착하며 실제 교우 대중이 신앙생활에서 사용하는 용법을 무시한다는 점 때문에 처음부터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이 어원상 ‘복을 빈다’는 뜻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오래 사용되는 동안 의미 변화를 일으켜,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축복이 복을 비는 것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뜻한다고도 정의하고 있습니다.
실제 전례문에도 원칙을 벗어나는 약간의 혼용이 보입니다.
- 미사의 마침 예식 때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우들에게 ‘강복’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하지만 복음을 봉독하기 전 부제는, 똑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제에게 ‘축복’을 청합니다. “축복하여 주십시오.”
- 감사 기도를 바칠 때 사제는 빵과 성작 위에 ‘강복’합니다. “이 거룩하고 흠 없는 예물을 받으시고 강복하소서”(감사 기도 제1양식). 그러나 같은 감사 기도에서 예수님은 빵과 잔을 축복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거룩하신 손에 빵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전능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거룩하신 손에 이 귀중한 잔을 드시고 다시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신 다음 …….”
기원 미사 감사 기도는 예수님께서 빵을 ‘축복하시고’, 우리가 ‘축복의 잔’(1코린 10,16)을 봉헌한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용어 사용의 문제는 언제나 복잡합니다. 현재로서는 ‘강복’과 ‘축복’의 원칙적 구별은 인식하고, 공식 전례에서는 전례문에 나오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일상에서는 두 단어를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사제에게 강복을 청할 수도, 축복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말속에 숨은 하느님 은총은 헷갈리는 법이 없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질 것입니다.
[빛과 소금] ‘감사의 전례’인 미사의 의미 –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뜨거웠던 적은 언제였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내 삶에 울림을 주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나요? 우리가 하느님의 악기라면 그 악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하느님의 숨결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숨결로 흙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을 하느님 모습을 닮은 최고의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첫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와 죽음의 노예와도 같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한낱 ‘빵’으로 상징되는 육신의 온갖 욕망과 물질적 만족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영으로 사는 거룩한 존재임을 일깨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성경 말씀을 봉독하시고 나서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가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모든 성경 말씀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루카 24,27)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들려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이 독서 방식에 따라서 교회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루카 24,44)에서 매번 ‘주님에 관한 기록들’을 찾으며 하느님 말씀을 읽고 해석해 왔던 것입니다. 전례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하느님 말씀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본질이 그 수신인, 곧 읽는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적인 생명력을 지닐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특히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은 봉독되거나 선포되지 않는다면 과거의 기록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단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의 힘을 믿고 그 말씀이 뜻하는 것에 응답하고 일치하고자 하는 신앙인을 만나야 합니다. 곧 기도하는 신앙인,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신앙인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말씀은 거룩한 전례 거행 안에서 듣고 응답하는 공동체와 함께 자라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은 전례 거행과 하느님 말씀의 이 긴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완전히 의지하여 그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전례 거행 자체가 새로운 구원 사건이 되고, 새로운 의미와 놀라운 효력으로 말씀 자체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3항)
코로나-19로 미사에 참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일상 안에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그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전례 주년과 성모 공경]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의미(11월 21일)
해마다 11월 2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自獻) 기념일’(Feast of the Present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은 성모 마리아의 부모가 예루살렘 성전(聖殿)에서 세 살 된 아기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사실과 함께, 마리아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봉헌의 삶으로 초대되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날이다.
마리아 자헌 기념일의 유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의 봉헌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새로운 교회’라는 이름의 성모 성당을 세우고 543년 11월 21일 축성하였다고 한다. 이 축일은 7~8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도 전해졌고,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제르마노가 이 축일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9세기경에 이미 남부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에서 축일을 지냈다.
마리아 자헌의 기념일로는 11세기 비잔틴 가톨릭교회에서 최초로 문서화되었고, 1373년 아비뇽에서는 교황에 의해 축일 전례를 거행했으며, 14세기경에는 영국에서도 축일을 지냈다. 15세기에 들어와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 의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소개되었고,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마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16세기 중엽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전례력에서 제거되었지만, 1585년 식스토 5세 교황이 축일을 전 교회의 축일로 재제정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모가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했다거나, 마리아께서 자헌하셨다는 사실은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았고 2세기의 위경(야고보의 원(原)복음과 위(爲)마태오 복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의하면,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늙도록 아이가 없다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에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아이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한 사제가 성모님이 성전에 도착하자 그녀를 두 팔에 안고 축복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주님이신 하느님이 그의 이름을 온 세대에 영광스럽게 하셨다. 마지막 때에 주님은 당신 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당신의 구원을 드러내실 것이다.” 말을 마친 사제는 마리아를 제단의 셋째 계단에 앉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아킴과 안나, 그리고 사제가 마리아를 봉헌하기도 전에 주님의 은총이 마리아에게 쏟아져 내렸고, 마리아는 두 발로 춤을 추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뒤돌아보지 않고 스스로 성전으로 들어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 마리아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 동방 교회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로 지내고 있다.
마리아 자헌 기념일의 의미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에서 “외경적인 요소는 차치하더라도, 탁월하고 모범적인 가치를 보이고 있는 이 축일은 특히 동방에서 기원하여 유서 깊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마리아 공경, 8항)고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 봉헌 기념일이 지닌 ‘탁월하고 모범적인 가치’는 세 살 된 어린 마리아가 종신 동정을 하느님께 약속하셨고 자발적으로 영혼 육신을 바치기로 결정하셨다는 데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로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며, 오직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마리아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그의 모친 안나의 태중에 잉태하시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은 은총을 받았다.
성교회의 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원죄의 물듦이 없으신 마리아는 비록 어렸을지라도 그 지혜의 발달이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세 살 때 자발적으로 자기를 하느님께 바쳤으며, 날마다 하시는 성전의 일을 당신 지혜로써 판단하여 사람들이 놀랄 만한 처리를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 예수님을 인간으로 파견하시고자 마리아를 원죄 없는 지극히 순결한 어머니로 사전에 준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리아를 그 어린 나이에도 성령으로 이끄시어 자헌하게 하시고 성전에서 봉헌생활을 하게 하시어 평생의 봉헌생활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은 신비롭고 놀라우면서도 마땅하고 합당한 하느님의 섭리이심을 믿어야 하겠다.
어린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자헌하셨고, 어렸을 때부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으셨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들의 죽음을 직접 당신 품으로 안으셔야 할 때까지 믿음을 내려놓고 의심하고 부정할 수도 있는 수많은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처럼 우리도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미사를 드릴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봉헌하여 성모 마리아처럼 보다 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결심을 드리고 그 실천의 힘을 간절히 청해야 하겠다.
한편 어린 마리아의 유년시절을 그토록 거룩하게 바친 자헌의 삶에는 그 부모이신 요아킴과 안나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거푸집대로 종이 탄생 되듯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딱 그 거푸집의 역할을 한다. 부모의 크기와 모양이 자녀의 성장을 좌우한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요아킴과 안나는 부모로서 아기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고, 아기 마리아를 자신들의 소유로 보기보다 하느님의 딸로 굳게 믿고 하느님께 마땅히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딸을 봉헌하고 교육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마리아는 부모의 교육에 따라 아이 때부터, 이성으로는 미래를 인지하지는 못했겠으나,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구세주의 뒤를 충실히 따를 준비를 철저히 하였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도 예수님의 유년기에 그렇게 참 어머니의 보살핌과 교육을 어린 예수님께 안겨주셨다. 우리도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로 보지 말고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임을 깊이 인식하고 현세적으로 기르기보다 먼저 영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성장하고 살아가도록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전구로 드리는) 자헌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저의 육신과 오관, 정신과 능력을 봉헌하며
제 생애의 온갖 기쁨과 고통을 맡겨드립니다.
제가 언제나 이 봉헌에 충실하도록 전구하여 주소서.
남은 생애를 아드님과 어머님을 섬김에 불태우고
하늘에서 영원히 아드님과 어머님을 찬미하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빛과 소금] ‘감사의 전례’인 미사의 의미 – 기도합시다
미사의 시작 예식에서 교회는 주님의 현존을 알리고(인사),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며(참회 예식과 자비송), 주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대영광송). 하느님의 현존, 자비, 영광은 시작 예식을 아우르는 핵심 주제입니다. 사제는 함께 모인 공동체의 이름으로 앞서 행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주례자의 첫 기도인 본기도를 바칩니다. 이 기도는 아주 간결하여 미사 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내용을 지나치기 쉽지만, 그 안에는 신앙의 진리와 전례 기도의 특징을 잘 담고 있습니다. 본기도는 주례 사제가 신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의 묶음과도 같습니다.
본기도는 권고, 침묵, 기도, 백성의 환호인 ‘아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손을 모으고 신자들을 향해 “기도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이 기도의 공동체적 성격은 언제나 ‘우리’를 주어로 삼고 있는 권고와 기도문의 형식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그분 앞에 함께 모인 교회, 곧 하느님의 백성은 ‘우리’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그들과 같은 자세를 취하며 자신도 그 백성의 일원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 이끄는 존재로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도록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사제직의 고귀함은 사제가 거룩한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고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하느님 대전 앞에 서 있을 때 가장 빛납니다.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은 미사 거행의 본질적 요소로서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때의 침묵은 신자들에게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간청하는 내용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능동적이고 내적인 참여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어서 사제는 팔을 벌리고 그날 미사의 지향을 담은 본기도를 바칩니다. 이 기도는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곧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받아들이시도록 교회의 모든 기도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사제의 동작과 자세도 ‘천사의 손에서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는 향 연기’(묵시 8,4 참조)처럼 하늘을 향한 신자들의 기도의 마음을 동반합니다. 무엇보다 이 자세는 십자가에서 팔을 펼치시어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본기도는 그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아주 간결하고 그 구조가 명확합니다. 먼저 본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전능하시고 영원하신”과 같이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수식어가 덧붙여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업적에 대한 ‘기념’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전례 시기에 따라 거행되는 그날 미사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그다음에 비로소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간구의 내용이 자리합니다. 끝으로 사제는 삼위일체 성격의 맺음말로 기도를 마무리하고, 신자들은 “아멘”으로 환호함으로써 사제가 바친 청원에 함께 참여하고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습니다.
본기도는 간결한 표현 안에 신앙의 진리를 담아낸 아름다운 교회의 기도입니다. 매일 미사에서 사제가 바치는 본기도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기도가 좀 더 단순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하느님을 부르고 잠시라도 고요한 침묵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크신 사랑을 먼저 기억하고 필요한 은총을 겸손되이 간구합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