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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통해 순종을 테스트 하시는 하나님
출 16: 13-30
어느 조각가가 파르테논 신전에 장치할 석상을 만들기 위하여 커다란 대리석을 찾던 중 길가에
버려진 대리석을 발견하고 자신의 작업실로 운반하여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대리석을 파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리석이 내는 고통의 신음소리였습니다.
조각가가 “왜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고 물으니 대리석이 “당신이 지금 나를 날카로운 정으로 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조각가가 크게 노한 소리로 꾸짖기를 “이 어리석은 대리석아 내가 너의 볼품없는
모습을 다듬지 않으면 네가 어찌 훌륭한 신전의 기둥이 되겠는가? 잠시만 참아라! 그러면
너는 이제 후대에 영원히 존경과 찬양을 받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답니다.
버려진 대리석이 망치로 쪼개지고 다듬어지는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대리석은 영원히
영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쪼개지고 다듬어지는 고통의 시험을 통하여 훌륭한 작품으로 변하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이 쪼개지고 다듬어지는 시험을 통하여서 비로소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도착한 것은 애굽에서 떠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2월15일 날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가지고 먹고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아끼고 절약해서 양식을 먹고 살았을 텐데 이제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을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원망은 당연한 원망이었습니다.
저도 이 신 광야를 가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신 광야는 사방이 사막입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사막이었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입니다.
원망보다는 기도했으면 좋으련만 아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의 양식을 내려 주십니다.
이 하늘의 양식이 우리가 잘 아는 ‘만나’입니다.
‘만나’라는 단어는 ‘만후’라는 단어입니다.
‘만후’라는 단어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처음으로 보는 이 특별한 양식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라
고 던진 질문에서 그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이 만나는 새벽에 이슬이 마른 후에 내렸는데, 작고, 둥글고, 서리같이 세미하고(14절),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았습니다(31절).
그런데 이 만나는 땅에서 난 것이 아니었고 하늘에서 비같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만나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하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이 하늘의 양식이 모든 광야에 내린 것이 아니었고 언제나 내린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일정한 장소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했던 40년 동안만 내렸습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비상양식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내려 주신 비상식량이었습니다.
만일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그 땅의 소산물을 먹자마자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는 하나님이 광야에 내려 주신 비상식량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5: 12)
양식을 통해서 순종을 테스트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광야이기에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만나를 주셨는지 그 이유를 출 16장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을 다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
니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지키나 지
키지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나의 율법을, 나의 말을, 지키나, 지키지 않나 시험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나 순종하지 않나 이것을 보시려고 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나를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항상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만한지를 먼저 시험해 보십니다.
말씀대로 순종을 하는지를 테스트 하십니다.
테스트를 해 보신 것은 더 큰 은혜를 내려 주시기 위해서 테스트 해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100세 얻은 자식,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순종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테스트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
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 16-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테스트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테스트’ 하기 위해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테스트를 했을까요?
필요한 양식만 거두고, 남기지 말라
하나님의 첫 번째 테스트는 필요한 양식만 거두고,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
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한 사람당 한 오멜 씩 만 거두라고 했습니다.
오멜은 애굽의 양을 재는 기구인데 토기로 된 사발입니다.
한 오멜은 약 2.4 리터입니다. 한 되 2홉 정도 됩니다.
가정의 대표가 식구만큼 거두어 옵니다. 5식구면 다섯 오멜, 열 식구면 십 오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많이 거둔 자도 오멜로 되어 보면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열심히 많이 거둔다고 했는데, 오멜로 되어 보면 식구만큼만 남는 것이었습니다. 일도 보면 잘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손도 빠르고, 남 쉴 때 안 쉬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멜로 되어 보면 똑같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똑같습니다.
또한 만나를 필요한 양만 거두고 다음날 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합니다.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그들 중의 일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일 이 만나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지금 자신들이 처한 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거나,
주시는 것을 잊어버리면 내일 굶을 뿐만 아니라,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왜 필요한 양만 거두고, 남겨두지 말라고 하실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테스틀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신뢰하지 않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필요한 양식만 거두고 또 다음날까지 남기지도 말라고 하신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삶을 오늘도 책임지시며,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책임지시고, 내일 뿐 아니라 언제나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하나님이 필요한 양만 거두고, 내일을 위해 남겨
두지 말라고 했으면 필요한 양만 거두고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을 먹이신 하나님이 내일도 먹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사람들이 내일이 불안해서 욕심껏 거두고, 내일을 위해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이 확신! 이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먹이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먹이실 것이라는 이 확신!
이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확신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 26- 33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
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
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
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
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주님의 이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오늘까지 매일 매일 먹이신 하나님이 내일도, 모레
도, 장래에도 먹이실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갈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더 큰 양식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부른 복음 송을 다시 한번 가사를 음미해보면서 불러보겠습니다.
저는 이 노랫말이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심의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
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테스트’ 하기 위해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테스트를 했을까요?
안식일은 거두러 나가지 말라
23절부터 30절을 보면, 육일 째 되는 날에는 갑절의 양식을 거두고 안식일 날에는 양식을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평일 날에는 만나를 그 다음 날까지 남겨두면 썩고 냄새가 나는데, 안식일을 위해 남겨 놓은 만나는 썩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두러 나가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 전일에는 두 배로 거두게 하셨나요?
그래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며, 그래야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행하는 것 중에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정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기에 이 날을 복된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날은 일을 안 해도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
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날 복을 받아야 일주일 동안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 날 복을 받지 못하면 일주일 동안 복을 받지 못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 복을 놓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 중에 최고의 복인데 왜 그것을 놓칩니까?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복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순종의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 순종의 테스트에 합격을 했더라면 하나님이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만 주시지 않고,
이들이 생각지 못한 더 놀라운 양식을 주셨지 않았을까?
민수기를 보면 이들은 늘 만나와 메추라기만 준다고 원망합니다.
이제 입에 인이 박혀서 못먹겠다고 합니다. 채소, 고기를 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광야에 식량이 없어서 주신 비상식량만이 아니라,
나의 말을 지키나, 지키지 않나 시험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순종하나 순종하지 않나 이것을 보시려고 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항상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만한지를 먼저 시험해 보십니다.
테스트를 해 보신 것은 더 큰 은혜를 내려 주시기 위해서 테스트 해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테스트에 꼭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삶
출 16: 13-30
방금 읽은 말씀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곧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12)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에 덮이게 하심으로써 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셨고, 아침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된 희한한 물질을 날마다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보고 서로 "이게 뭐지?" 라고 물었던 말 "만 후"에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치고 있는 그 주위에 아침마다 이슬이 맺혔다가 그 이슬이 마르고 나면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14)이 남곤 했는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31) 같았다고 했으며 해가 뜨겁게 쪼이면 스러지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기한 양식을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몇 가지 제약을 두셨습니다.
그 첫째는, 매일 매일 각 사람의 머리 수대로 하루 먹을 분량의 양식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많이 거두거나 몇 일분의 식량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일 매일 그 날 거둔 것을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제7일 즉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 것이며, 그 대신 그 전 날, 즉 제6일에 이틀 분의 식량을 거두어 그것으로 그 다음날 안식일 아침의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하신 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과가 주목할 만 합니다.
먼저, 본문 20절에 보면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실은 본문 24절에서 보는 대로 제 6일에 미리 거두어서 그 다음날 안식일을 위해 예비했던 만나는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한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27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베푸신 일, 백성들이 그 식량을 거둠에 있어서 지키도록 정하신 규칙들, 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명령 앞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확인한 그 모든 사실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을 위한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매일 매일의 양식과 삶의 염려를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매일 매일 그 날 분의 식량만을 거두고 또 다음날까지 남기지도 말라고 하신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삶을 오늘도 책임지시며,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책임지시고, 내일 뿐 아니라 언제나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9절의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하신 말씀은 또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말고 쉬라 하실 때에는 우리가 일 안하고 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의 양식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하는 염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염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둔 양식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먹게 된 사실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되새겨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6:1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6:19),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4)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의 풍족함은 자연이나 인간 스스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17∼18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꼭 같은 땅에 왜 평일에는 만나가 덮이고 안식일에는 그것이 없으며, 또 꼭같은 만나인데 왜 보통 때 그 다음 날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끓고 냄새가 나는데 안식일 전 날에 거두어 안식일 아침까지 둔 것에는 벌레도 냄새도 없었다(24)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자연의 어떤 숨겨진 이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어떤 조작을 통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오직 그렇게 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행하는 수고는 실상 얻을 것이 없는 헛수고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껴서 그 다음날까지 남겨둔 것도 벌레와 냄새로 헛수고가 되고 말았으며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일부 이스라엘 백성이 들에 나가 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백성을 향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이기를 원하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이러한 가르침들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여 책망 받을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거 뭐 하나님이 세우시는 계명과 율법이 고작 먹는 양식에 관한 자질구레한 간섭인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있어서 그 근본의도는, 복잡하고 까다롭고 종종 그 의미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외형적 행위의 요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은혜의 프로포즈에 있으며 우리에게는 오직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결코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짐을 내가 지겠고 너희는 그저 나만 믿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안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과 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게 하시고 오직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 속에 들어있는 근본적인 복음의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삶의 문제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 보다 더 확실한 안식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이 진정한 안식의 비결을 소유한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정하시고 일을 멈추고 쉬라 하신 것이 어디 하나님 자신의 어떤 이득을 위해서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정해주신 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6일간 힘써 일한 후 하루를 쉼으로써 심신의 피로를 풀고 활력있는 삶을 위한 재충전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실제로 경험케 하심으로써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참된 안식의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안식일 뿐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정해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는 것은 한 주간 중 하루를 안식하게 하시는 은혜일 뿐 아니라 한 주간 전체를 평안 속에 살 수 있는 비결을 소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안식의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지 못해서, 또는 알아도 믿음으로 확인해 볼 용기를 내지 못해서, 또는 세상적 관심, 인간적 염려, 물질적 욕심이 보다 강해서 주일에도 안식보다는 계속적인 일과 돈벌이를 택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곤 합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의 안식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평안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모든 안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외면하고 스스로 얻고자 하는 안식은 진정한 안식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염려를 굳이 스스로 하려는 것 보다 더 어리석고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수고만큼 헛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일하고 애쓰고 벌어들이고 남기고 모아두는 모든 것에서는 냄새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어리석고 욕심스런 삶은 반드시 벌레가 끓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렇게 벌레 먹고 냄새나는 삶을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일하든지 쉬든지 모으든지 쓰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벌레도 없고 냄새도 없는 삶,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풍기는 삶, 남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삶을 사는 지혜를 새롭게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지낼 때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만나를 주셨듯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기 전 광야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그 하늘양식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하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은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
출 16: 13-36
오늘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약식을 내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
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
세와 아론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
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리고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게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친히 하늘의 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하늘의 양식을 내리셨습니다. 밤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을 덮었고 아침이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들에 내려 있었습니다. 이슬이 마른 후
보니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들이 보였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이 무
엇인지 알지 못해 서로 물었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15-16절"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
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
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하셨느니라" 이렇게 해서 백성
들은 이제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들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양식
을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그들을 먹이셨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백성들은 거
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시요 하늘의 양식으로 먹이시는 아버지이신 것 깨닫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그들
은 새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인류로 지어진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으
로부터 직접 양식을 받는 영광을 입은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
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의 전 기간을 이 하늘 양식으로 먹이시면서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의 양식을 먹게 되면 이것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의 첫 소산을 거두
는 날 이 양식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제 가나안의 양식으로 먹게 될 것이
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더 풍성하고 기름진 것으로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의 양식은 만나보다 품질이 떨어지고 만나는 고급음식이고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관계 가운데 먹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어떤 관계 가운데
먹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맛으로 하자면 애굽의 음식들이 더 맛있을 수도 있습니다.
메추리기를 먹느니 부추와 함께 고기를 싸먹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의 먹음은 사망 가운데서의 먹음이어서 그들의 생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먹음이어서 그들의 생명과 기쁨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먹었어
도 그것은 온전한 안식이 성취되지 않는 가운데 먹음이어서 온전한 생명의 양식은 못되
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의 양식은 온전한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서의 하
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 가운데서 양식을 먹는 것이요, 가나안의 복됨으로 먹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양식 또한 온전한 양식은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식 또한 사망
의 가리움 가운데서 먹는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정복되지 않은 시대 가운데 주신
가리운 관계 가운데 먹는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그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양식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의 양식을 먹었다면 우리
야말로 진정 하늘의 양식을 먹게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
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새인류를 위한 하늘의 양식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썩지 아니하는 하늘에 속한 만나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
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것에 대한 행동화된 신
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행동화된 신앙고백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삶으로 고백하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마음의 믿음이 중요하고 행위가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동을 통한 신앙고백적
삶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그러한 행동화된 신앙고백의 한 부분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
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늘의 만나를 내리셨고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어 생명의
양식을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진 밖 광야에 나가 이 양식을 거두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
었고 더러는 적게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거둔 것을 오멜로 되어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
까?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이
본문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을 권면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
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울은 여기 출애굽기 본문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 모두
가 함께 모았고 각인의 분량을 따라 오멜로 되어 나누어주었을 때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
었던 것으로, 그래서 마치 많이 거둔 자의 유여한 것으로 적게 거둔 자의 부족한 것을 보
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해석을 따라 본문을 이
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각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는 매일의 만나를 하나님께서
는 공급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여한 것으로 적게 거둔 자의 부족함을 채웠습니다.
혹 욕심스럽게 남긴다고 해서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겨 보았자 그것은
몇 시간이 못 되 썩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바로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성취시키셨습니다. 그 때 교회는 서로 자신의 유여한 것으로 형제의 부족
함을 채웠고 교회에는 핍절함이 없었습니다. 마치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가 부족함
없이 매일의 양식을 거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주신 부요
함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부요하신 은혜를 기꺼이 형제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일이 오늘 우리의 교회 가운데서도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이에 모세가 말하였습니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하루의 양식으로 붙일 것은 붙이고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라
는 말이겠죠? 내일을 염려함으로 양식을 남겨두지 말라는 말이겠죠? 그런데 백성들 중
일부가 이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않고 양식을 아침까지 남겼습
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
은 단지 하루를 위한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했고 아마 그 백성들은 크게
책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양식을 거두었고
사막의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들은 스러져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되는 것이 안식일이 문제였습니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썩고 냄
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일단 백성들은 한 사람에 두 오멜씩을 거두었고 회중의 대표자들
이 모세를 찾아와 이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는 말이 23절에 기록되어 있습
니다. 23절"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
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백성들은 모세의 명대로 했고 아침까지 간수하였습니
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냄새로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모세
의 말입니다. 25-26절"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
즉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그런데 백성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27절에, 백성 중 더러가 안식일을 어기고 양식을 거
두기 위해 들로 나갔습니다. 물론 허탕치고 돌아 왔겠지요. 이에 대한 여호와 책망이 무
엇입니까? 28-29"--------"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움 중에 백성의 대표인 모세를 책망하
셨습니다. 크게 진노하셨을 수도 있었음에도 다시 한 번 그들을 용서하시고 엄히 경계하
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백성들은 제 칠일에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였
습니다. 백성들은 그 양식을 만나라 하였는데 그것은 깟씨 같이 희었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맛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민수기에 보면 그들이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
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삼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상품인 것이지요. 구약에서 기름을 섞어 구운 것
이 최상품 아닙니까?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안식을 위하여 이틀의 양식을 거두게 하셨고 그리하므로
백성으로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
명의 역사를 제 칠일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안식의
양식을 먹음 안에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의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함께 안식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행케 하
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주기를 자기 생의 주기를 삼아 살므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
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의 양식으로 만나를 주셔서 자기와 동
행케 하셨던 이 생명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늘의 안식으로 교회에서 완성하셨
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새생명의 만나로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부활하셔서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임재
하신 그의 상에서 그와 함께 한 몸의 교제의 생명으로 삽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제 교회는 이 생명의 교제를 누리
며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에 거하시는 역사의 끝날까지 소망 가운데 주와 동행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영원한 안식의 날까지 소망 가
운데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
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
을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나타나실 것이고,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덧입
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소망 중에, 날
마다 허락하시는 주의 새로운 양식을 먹으며 주와 함께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이 양식을 간수케 하는 모세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대
대 후손에 전하도록 간수케 하셨고 이에 모세는 아론을 시켜 그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여호와의 궤에 넣어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그후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 곧 가나
안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고 기록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한 오멜의
만나를 간수한 것은 단순히 역사적 증거물로서 후손에게 전시해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니
겠지요? 언약궤에 보관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
손에게 주신 만나를 보관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들과 생명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 있음을 인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여기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우리 생명 또한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것에 있음을 명심하고 이 생명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로 주와 함께 신실히 동행하
실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