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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기도와 찬송
시편 71 : 1-16
오늘 저녁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시편 71편을 누가 지은 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를 쓴 사람은 나이 많으신 분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가령 본문 9절에 보면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했고, 18절에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했습니다.
인간의 역경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나이 많아 그렇지 않아도 몸이 불편한 처지에 있는데, 비극적인 말로를 당하여 이제 다 늙은 몸마저 원수들의 노리는 바 되어 죽음의 협박을 당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이 늙은 몸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얼마나 처량한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상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확신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로 일생을 싸워 왔고 이제 백발이 휘날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모두가 주님의 은혜였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아니하셨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다고 간증하실 분이 한두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에는 혈기와 여러 가지 탐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는 너무나 경험이 없어서 막 나가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30대의 시절에는 피곤을 모르고 마구 덤비기 쉽고, 40대의 시절에는 투쟁심과 명예욕이 많아 자칫하면 남들과 원수 맺기 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공자 선생도 그의 말 가운데 "육십에 이순(耳順)하고"했습니다. 사람이 한 육십 세는 되어야 이런 풍파 저런 풍파 다 겪어서 그 귀가 순해진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오래 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때를 무고히 지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시편을 쓰신 나이 많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구원과 소망의 확신이 철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인생을 살아갈 때 송죽같이 지조를 지키며 굽히지 아니하는 신앙자로서의 모습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한 투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한 그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삶의 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이 많아 그의 마지막 날이 임해 오는 것을 육감으로 느끼면서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준 편지의 한 대목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한 방울의 기름도 남김이 없이 주님을 위하여 몽땅 쏟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운 것을 내다보는 노사도 바울의 회고 간증입니다.
얼마나 장한 인생의 개선가입니까? 그는 일평생 불의와 부정, 시험과 유혹, 마귀의 도전을 받으며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 혼자는 마귀와 싸워 이길 도리가 없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의 일생은 선한 싸움의 승리 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모든 일이 무엇입니까?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같은 것이 우리에게 도전해 와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체험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워 승리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개선 장군 같이 당당한 모습을 엿보는 듯합니다. 장한 신앙의 투사입니다.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장거리를 달리는 운동 선수는 땀이 흐르고, 숨이 차고, 팔다리가 아프고, 가슴이 터져 와도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전 코스를 다 달리고 골인하는 운동 선수의 모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얼마나 영광스러워 보입니까?
그리고 바울 사도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금보다도 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보이지 않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정조를 지켰습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의 앞에 내다보이는 영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여 끝까지 싸우고 끝까지 달리고 끝까지 지킨 모든 사람에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불의와 짝해 버리고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젊은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아무 목사님이 그렇게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부르짖고 청년 운동의 선두에 섰기 때문에 무척 존경하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정부와 밀착이 되어서 그분이 아무리 이제 사회 정의를 위해 부르짖어도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설득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선한 싸움을 끝까지 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나실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머리칼에 삭도를 대지 않아 길게 자라게 했고 독주를 마시지 않아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언제나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덤벼들곤 하였으나 삼손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아마 인류 역사 가운데서 삼손만큼 힘이 센 사람은 삼손 전에도, 삼손 후에도 없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위대한 삼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위력은 놀라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손이 원수나라 블레셋 여자 간첩 들릴라에게 그만 빠지기 시작하면서 종래는 그의 힘의 원천을 말하게 되었고, 그 머리칼이 들릴라에게 밀려 버려 맥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고, 그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는가 하는 사실은 우리가 거울로 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정말 사람이 참되게 살아가고 지조 있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간곡히 호소합니다. 2절 이하를 보세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성도들은 이러한 탄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올 수가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좌절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께 소망을 두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는 이 시인의 체험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내 오른팔과 왼팔을 구별할 능력을 갖추게 된 이래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을 기대었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그의 이성을 사용하게 된 때부터 하나님을 선하심에 의지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가 우리를 은혜롭게 보살펴 주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의 영예에 대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돌보심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도움이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어릴 때부터의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큰 긍휼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봉사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졌을 때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이 시인의 논리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쓰러지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나를 도우신 주께서 내게 도움이 끊어진 지금 나를 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당한 논리입니까! "그러므로 나는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주를 항상 찬송하리이다"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찬송하는 것을 매일 나의 일과로 삼으며 모든 경우 주님을 찬송하겠다는 결심의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진 시인이 무엇을 하나님께 요청합니까?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님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수치를 당치 아니합니다.
로마서 5장3절 이하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면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절대로 수치를 당치 아니합니다. 실망치 아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의 보이는 소망은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되는 경우보다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소망하는 대로 된다고 해도 거기에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에서는 한숨이 있고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수치를 당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절대로 우리에게 수치를 주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원수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은 능력이시기 때문에 원하시기만 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안전과 휴식을 누립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반석 위에 서있는 집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산성에 피한 사람은 원수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피한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29)
요한 일서 5장 18절에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절대 안전을 보장받았습니다.
더구나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소원합니다. 8절에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중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를 찬송하기를 좋아합니다. 온종일, 아침과 저녁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 일곱 번씩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를 부르고자 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 오후까지 수유리 영락 기도원에서 우리 교회 권사님들의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저도 같이 올라가 있었는데 우리 권사님들이 기도원 예배당에 가득히 모여 앉아 함께 찬송부르며, 기고하며, 말씀 들으며 어떻게 하면 영락교회 권사로서의 책임을 바로 감당해볼까 하고 같이 의논하며 결의하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흐뭇했던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돈으로 살 수 있으며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이겠습니까?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데 예배당 안에서 부르면 식당에서 식사준비를 위해 수고하시는 생활부원 권사님들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찬송을 들으며 같이 바가지 장단을 맞추어 찬송을 부르며,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이와 같은 광경은 교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9절 말씀 보세요.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이 시인은 연로함의 약점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고 있습니다. "내 힘이 쇠약하나이다" 몸의 힘과 마음의 활기가 쇠약해집니다. 강한 시력이 쇠약해집니다
힘있고 분명한 음성이 쇠약해집니다. 튼튼하던 팔다리가 쇠약해집니다. 이것이 자연 현상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18절 말씀대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육신의 사람, 겉 사람이 후패해 갈 때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자연현상을 의젓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도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도 잠깐이면 그렇게 됩니다. 내가 언제,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고 놀랄 정도입니다. 지나갑니다. 날아갑니다.
이 시인은 육신적으로 이렇게 쇠약해지는 가운데도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항상 함께 계십니다.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건강해도 병들어도, 젊어서도 늙어서도, 살았어도 죽었어도 언제나 함께 하시마 약속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2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했습니다.
제 가정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제 집에 애가 셋이 있는데 큰애가 대학 졸업반이고, 둘째가 대학 2학년이고, 막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4, 5년 안에 이 셋이 다 가정을 이루게 되면 두 식구밖에 남지 않겠다는 생각하니 이것이 분명한 현실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아니합니다. 자녀도 부모를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아니합니다. 정말 주님 없이 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둘째 부분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기쁨과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실까요.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살수록 여러 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고 더 차원 높은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소망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안에 두었습니다. 16절에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좀 바꿔 말하면 젊어서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바른 말도 못할 때가 많았지만 이제야 눈치 볼 것이 있습니까? 이제는 주의 의만, 바른 말씀만 전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늙어서 할 일은 "내가 얻은 경험으로써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할 분 아니라 후손의 유익을 위해 내 관찰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렇게 함으로 그것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보이겠나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기사를 전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장 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얼마나 요긴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연로하신 그리스도인이 가진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기도합니다. 21절에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편 92편 12절 이하에도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전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했습니다. 연로하신 하나님의 사람이 받는 축복을 말합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 얼마나 복됩니까!
22절 이하에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간구한 다음에 소망과 신념을 가지고 찬송하려고 합니다. 그의 찬송은 권태를 모르는 찬송입니다. 소시에 뿐만 아니라 노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 믿고 거기에 따라 그의 찬송도 계속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적인 인생행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의 손길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된 것이고, 이 신비한 사실을 자기 자신만의 경험으로 만족할 수가 없고 대대로 전파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24절에 "내 주의 혀도 종일토록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이 찬양과 감사가 곧 자기의 원수들에게 주는 수치요, 무안이며, 갚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믿음과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대신하여 그 갚음이 되게 하는 신앙인의 높은 인격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일생이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참인간의 맛을 아는 것이 될 것이며 인생을 바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다 이 위대한 무명 시인처럼 일생을 영광스럽게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