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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강 1군단 특공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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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구월산유격대
유격전사 추천 0 조회 81 10.09.27 20: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九月山 遊擊戰

 ※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8『전장사례연구(제4집)』,1988.9.30

. 일반상황

  (1) 작전기간

    (가) 내륙작전기 : 1950.12.17-1951.1.21

    (나) 도서작전기 : 1951.1.22-1952.6

  (2) 작전배경

(가)   북한의 반공세력과 6.25  

(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북한에 무혈 입성한 소련군은 해방군을 자처하면서 갖은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율과 공포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지역의 애국청년들과 소련군과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또한 소련에 의해 급조된 김일성 정권은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현물세제, 노동법령 등 허울좋은 명목을 내세워 토지의 무조건 몰수와 중류이상의 국민과 지주들을 강제로 추방했고 과도한 현물세와 강압적인 노력동원 등 기만적인 정책으로 국민들의 피로는 갈수록 더해 갔으며 반항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투옥했다.

  또 그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을 마구 숙청해 버렸다. 이와 같은 김일성 정권의 학정에 항의, 1945년 11월 23일 소련군정을 반대하여 일으켰던 신의주학생 의거사건을 위시하여 1946년 3월 11일 함흥학생 의거사건 평양학생사건 등 반공적 의거사건은 8.15 해방후 북한의 각지역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이와 같은 북한의 동포들은 해방초기부터 줄기차게 반공의 횃불을 들고 공산당과 싸웠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은 1948년 2월 수많은 청년들을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했고 국민의 소유 일체를 군사력 증강에 바칠 것을 강요하면서 남침 준비를 서둘렀다. 그 결과 200만명이 넘는 동포들이 북한을 탈출하였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수많은 애국동포들은 지하에 숨어 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산독재와 허위에 찬 만행을 저질러온 김일성 정권은 한반도의 적화를 위하여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남침을 개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화가 한반도를 휩쓸게 되었다.

    (나) 유엔군의 북진과 민중 봉기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공격을 개시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전격적인 북진을 감행했다.

  한편,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소식은 구월산 일대의 지하에 숨어살던 수 많은 반공 애국청년들에게도 전해져서 지역별로 치안대를 조직, 고장의 치안확보와 향토보호에 자발적으로 나섰으며, 여러지역에서 북한군이나 공산당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한국군이 진주하기 전인 1950년 10월 13일 신천, 재령지방의 민중봉기는 가장 규모가 컸던 반공의거로서 약 300명으로 조직된 애국적인 광복 동지회가 주동이 되었으며, 많은 남녀학생들과 청년들, 애국 시민들이 호응해서 만행을 자행하는 악질 공산당원과 북한군에 대항하여 싸웠었다.

    (다) 유엔군의 철수와 유격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황해도지역 주민들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현물세 없는 추수도 하고 파괴된 학교와 교회도 복구하여 평화로운 종소리도 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북진을 계속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득이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그해 12월 5일에는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20일경에는 38도선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구월산 일대의 지역은 완전히 적의 포위망 속에서 고립되었으며 향토 치안을 담당하던 반공무장 청년대는 산악지역이나 도서를 근거지로 밀려오는 북한군에 대항하는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 작전지역의 특징

  (1) 기 상

  황해도는 기후적으로 북동부의 산지와 남서부의 평야지대로 구분하여 동북부는 비교적 한냉하며 남서부는 온화하다. 이 지역의 강우량은 연간 900밀리에서 1,200밀리이며, 월평균은 100밀리 정도이다. 연중 최대의 강우량을 나타내는 달은 7월로서 230밀리에 이른다. 기온은 연평균 섭씨 10도이며, 동기에 있어서 최저 기온은 1월로서 평균 섭씨 -16도이다. 하기에 최고 기온은 8월로서 월평균 섭씨 25도를 나타낸다. 안개는 조조 또는 심야에 주로 발생하며, 정오전에 소산되는 복사무로 대부분 형성된다. 복사무는 여름과 가을에 월 2-4일간 발생하며, 계절과 관계없이 때때로 불어오는 강풍은 서해 일대에 2미터 이상의 파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2) 지 형

  지대내에는 언진산맥, 마식령산맥, 멸악산맥의 줄기가 동에서부터 서로 뻗어 있으며, 중앙에는 북한 최대의 곡창인 재령평야가 있다. 중요고지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오봉, 아사봉, 삼봉 등이 중부지역에 높이 솟아 재령평야를 비롯한 저지대를 감제하고 있으며, 서부에 덕산, 불타산, 동부에 멸악산, 주지봉 등의 고지 군들이 지대내의 저지대를 감제하고 있다. 이러한 고지군은 표고 600미터에서 1,000미터에 이르는 험한 산들이며 기복이 심하고 무성한 산림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선은 많은 굴곡과 돌출한 반도 및 만 등이 있으며 서해는 백령도, 초도, 석도를 비롯하여 많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3) 사회심리

  황해도는 안중근, 김구, 장덕수, 이승만씨 같은 민족적 선현들이 출현한 지역으로서 민족운동의 온상이며, 또 기독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지역의 많은 청년들은 일찍이 애국적인 선배들의 감화와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북한의 어느 지역보다도 반공사상이 투철하여 적치 5년간 김일성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와 폭동 등 온갖 방법으로 공산당과 싸웠다.

 . 피·아상황

  (1) 개 요

  황해도는 지형적 특징으로 북진 당시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재령강 서쪽지역에는 아군이 진주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치 못하여 지하에 숨어살던 많은 반공 애국청년들이 자치적으로 치안대, 자위대, 특공대 등을 조직하여 향토치안을 유지하고 미쳐 도주하지 못한 북한 공산당원들의 기습을 격파하면서 구월산에 숨어있는 공비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철수하게 되자 이 지역은 다시 적의 지배지역이 되었으며, 이곳은 반공 애국청년들은 아군의 재진격을 믿으면서 북한군이나 중공군에 대항, 산속을 전전하면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끝내는 인근 각 도서로 철수 각 지역별로 유격대를 편성하고 도서를 기지로 하여 적후방에 상륙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2) 적 군

(가)   1단계(내륙작전)

(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자 공산당 정치요원을 선두로 당시 평남 진남포에 주둔했던 북한군 제26여단 주력이 북두리에 상륙했으며, 일부는 사리원에서 재령, 안악, 온정리 방향으로 우회 북두리에 상륙한 주력과 합류 장련, 은율, 송화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 부대는 소총, 경기관총, 대전차포 정도의 경장비로 무장되어 있으며, 보급은 현지조달로 충당하였고 사기는 저하된 상태였다.

(다)   2단계 (도서작전기)

(라)      북한 제26여단은 구월산 유격대 및 지방 반공유격대에게 예상외로 타격을 받게되자 북한은 제21, 23 2개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며, 또한 전선이 38도선 부근 에서 고착되자 1951년 4월에는 북한군 제6군단이 황해도 및 서해안 경비를 담당하고 그 예하 제17사단과 중공군의 일부가 동원되어 아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한 본격적인 대유격작전에 투입하였다.

  (3) 아 군

    (가) 제1단계(내륙작전기)

  한국군과 유엔군의 철수로 중공군이 개성과 해주를 점령함으로써 재령강 서쪽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의 주민들은 피난길 조차 차단 당한채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각지역의 반공무장 청년들은 산속을 전전하면서 북한군과 지방 공산당원 그리고 중공군에 항쟁하는 유격대로 변했으며, 향토수호를 위하여 결사 항쟁을 계속했다. 한편 장련에 체류하고 있던 현역장교인 김종벽 대위는 빈약한 무기로 구월산의 공비와 연일 혈전을 벌리고 있는 고향 청년들을 보고 이들과 같이 싸우기를 결심, 1950년 12월 7일 약 60여명의 장련 특공대를 기간으로 인근지역의 반공청년들을 규합 유격대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구월산 유격대의 전신인 연풍유격대인 것이다.

    ※ 병 력 : 약 750명(1개 중대 80-120명) , 장 비 : 미 상

    (나) 제2단계(도서작전기)

      1) 구월산 유격대의 탄생

  증가되는 적의 압력에 의하여 1951년 11월 22일 웅도로 철수한 연풍유격대는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임하면서 인근도서인 초도, 석도, 취라도, 피도 등에 피난해온 각지역의 청년들과 또 면단위, 군단위의 지역별 청년무자대를 규합하고 또 당시 초도와 석도에 들어온 수월부대(은율지역 청년무장대), 백마부대(평지, 정주지역 청년무장대)등을 흡수 구월산 유격대를 탄생시켰다.

    ※ 병 력 : 약 2,500명(매연대 약 300),  장 비 : 소총 1,200정, 따발총 37정, 경기관총 4정

      2) 표범기지 설치 및 작전기지

  1951년초 극동군 사령부 정보국은 적후방 지역에 대한 정보수집과 필요한 경우 유격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백령도에 표범기지사령부를 설치 각도서에서 활동중인 반공무장 부대에게 제한된 무기, 탄약, 식량, 피복 등을 보급하면서 이들을 예하에 흡수하였다. 표범기지 예하의 부대로 들어간 부대들은 당나귀부대 칭호를 가지고 작전지휘와 제한된 보급지원을 받으면서 적후방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 작전경과

  (1) 내륙작전기(제1단계)

  1950년 12월 중순 개성과 해주가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재령강 서부 구월산을 중심으로한 일대의 지역은 적의 포위망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더욱이 전선이 38도선으로 남하하게 됨에 따라 적의 지배지역이 되어버린 황해도 지방에는 공산당의 정치요원이나 북한정규군이 진주하게 되어 향토단위로 뭉쳤던 무장청년들은 그들의 향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북한요원에 대한 혈전을 벌렸다. 그러난 인원 및 장비가 열세한 각지역 무장청년들은 북한 정규군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이 마을에서 저마을로 이산에서 저산으로 전전하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아군이 철수한 후 1개월 반동안 각지역 반공무장 청년들의 결사항전은 공산당 정치요원이나 북한군 진주를 불허하였으나, 그후 계속 증가되는 북한군에 의해 부득이 도서지역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미쳐 철수하지 못한 일부 반공 청년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속에 숨어 들어가기도 했다. 내륙작전시의 유격대의 주요활동은 다음과 같다.

작 전 명

작 전 지 역

작 전 기 간

작 전 부 대

작 전 결 과

북한정치

부대섬멸작전

북두리

지 역

1950.12.22

: 북한 정치요원 50명

아군 : 연풍유격대 4중대, 서하면 치안대

적사살 53, 포로 2

*적 완전소탕격퇴

저도

1950.12.23

: 북한 정치요원 47명

아군 : 연풍유격대 4중대

1차

저도전투

저도

1950.12.25

-12.26

: 북한 26여단 1개 대대

아군 : 연풍유격대, 서하면 치안대

적사살 : 27, 노획 : 소총50정외다수, 적 격퇴

보광리

공비토벌작전

보광리

조광동

1950.12.27

-12.28

: 북한 구월산공비

아군 : 연풍유격대

납치인사 구출 : 9, 적사살 : 20, 포로 : 101, 노획 : 소총30외 양곡 등

온정리

적부대

기습작전

온정리

1950.12.31

-1951.1.1

:북한 제26여단 일부

아군 : 연풍유격대, 서하면 치안대

적사살 : 9, 포로 : 70, 장비 다수 노획

2차

저도전투

저도

1951.1.6

-1.7

: 북한 제26여단 주력

아군 : 연풍유격대, 서하면 치안대, 지역주민 700 여명

적사살 : 60, 포로 : 38

북두리전투

북두리

1951.1.8

-1.9

: 북한 제26여단 3, 5대대

아군 : 연풍유격대, 서하면 치안대, 지역주민 1,000여명

: 북두리교두보 확보, 아군 : 운봉-장련으로 철수

장련기지

철수 및 대조리

매복작전

장련, 은율, 대조리

1951.1.12-

1.14

: 북한 26여단 2개 대대

아군 : 연풍유격대

장련기지철수, 대조리 매복, 적사살 : 123, 노획 : 소총 73외 다수

장련기지

탈환작전

장련지역 일대

1951.1.16-

1.17

: 북한 26여단

아군 : 연풍유격대

장련기지 재탈환 후 철수, 적사살 : 57, 포로 : 3, 노획 : 공용화기 다수

웅도철수작전

화천-가당리-웅도

1951.1.22

: 북한 26여단

아군 : 연풍유격대

웅도로 철수 : 연풍유격대 750, 피난민 250

내륙차단작전

기지 : 구월산 오봉산작전지역 : 해주,사리원,재령, 신천, 악안, 장련

1951.4-

1953.7

: 북한 17사단, 미상중공군

아군 : 구월산 유격 7연대(각 지역에서 활동중 구월산으로 피신자)

초도로 철수, 적사살 200여명, 포로 15, 시설파괴 60여 개소

피해 : 전사 59, 실종 79

 

  (2) 도서 작전기

  점차로 증가되는 적의 압력에 의해서 부득이 웅도로 철수한 연풍유격대는 부대정비와 훈련에 임하면서 부대를 증편해 갔다. 이렇게 부대는 정비와 훈련이 거듭되고 증편됨으로써 연풍 유격대원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계속 증편되는 많은 병력과 피난민에 대한 급식문제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 갔다. 이에 연풍 유격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석도를 후방기지로 하고 각 도서에 부대를 분산 배치하였다. 또한 식량과 무기노획을 위하여 자주 육지에 상륙하여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주요 작전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 전 명

작전지역

작전기간

작 전 부 대

작 전 결 과

식량노획작전(1차상륙작전)

월사리반도, 학 계리, 석탄리, 삭교리

'51.2.21-2.23

: 북한 26여단

아군 : 연풍유격대

적사살 38, 포로 19, 노 획 : 소총 36, 중기 2, 양곡 800

봉화산매복작전(2차상륙작전)

월사리반도(봉황산)

'51.3.21-3.25

: 미상

아군 : 구월산 유격대

적사살 226, 포로 5, 노 획 : 소총 71, 기관총 9, 중기관총 5, 양곡 700가마, 소 40두

감정리식량노획작전(3차상륙)

감정리일대

'51.3.27-3.28

: 미상 1개 중대

아군 : 구월산 유격대

적사살 57, 포로 3, 노획 : 소총 19, 경기관총 1, 중기관총 1, 양곡 800가마

양곡노획작전(4,5차상륙)

광암포일대, 어양리일대

'51.4.12-'51.5.5

: 미상

아군 : 구월산유격대

적사살 24, 포로 6, 노 획 : 소총 6, 경기관총 1, 양곡 300가마

웅도피습

웅 도

'51.6.18

: 미상 2개대대

아군 : 구월산 유격대제2연대

적사살 21, 노획 : 소총 5

피해 : 전사 216(주민200), 실종 : 410(주민400)

*석도의 8연대와 교대시킴

피도함락

피 도

'51.12.11

: 미상 2개중대

아군 : 구월산 유격대잔류병력(32명)

전사 : 32명

청양도, 웅도의 함락

청 양 도

'51.12.16

: 미상 2개중대

아군 : 구월산 유격대(65명)

전사 8, 석도로 철수

웅 도

'51.12.18

: 미상 1개 대대

아군 : 구월산 유격대(150명)

전사 32, 행방불명 75, 웅도 철수

 

 

 

 . 작전결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구월산 일대에서 미쳐 남하하지 못한 많은 반공애국 청년들은 도서나 산속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계속했고 점차 적의 무기를 노획, 무장을 하고 편성을 강화해 나갔다.

  이들의 초기 유격적은 출신지역을 드나들며 적후방 행정질서를 교란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군 정보장교나 유우엔군과 접선되면서부터는 장비도 더욱 강화되고 조직도 통합 확대되어 대담한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1951년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서해안 유격부대들의 작전은 그 규모는 작았지만 정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전과도 상당히 올렸다. 이들 유격대들은 적후방 병참선 파괴, 민심교란, 적을 후방경계부대로 투입하게 함으로써 적의 전방병력의 증원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전투정보의 입수 및 지하에 숨어살던 많은 반공인사를 구출해 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북한지역에서 실시되었던 반공투쟁에서 그 어느 지역보다도 조직적이고도 격렬하게 유격전이 전개되었던 곳으로 소위 북한이 제2의 서울이라고 불렀던 구월산 북단의 장련지방이었다.

  1950년 10월 15일부터 약 2년간에 걸쳐 구월산 일대의 유격작전에서의 종합적인 전과 및 피해는 대략 다음과 같으며, 이 수치는 광범위한 자료와 참전자 증언에 의한 것으로 실제의 전과 및 피해는 더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     전과 : 사살 984명, 포로 296명, 장비노획 : 소총 333, 경기관총 14, 중기관총 13, 박격포 4, 무반동총 19, 양곡 3,000여 가마, 시설 파괴 60여 개소

·     피해 : 전사 357명(주민 200명 포함), 실종 480명(주민 400포함)

. 분석 및 교훈

   구월산 유격작전은 비정규전 지후체제에 의한 특수부대의 지원과 지도하에 실시 계획된 유격전이 아니었고 돌변하는 상황에서 전투경험이 없는 토착민이 오직 향토수호라는 열정만으로 공산당을 타도하기 위해 수행된 극히 초보적인 유격전으로서 정규전과 통합되지 못했고, 부대운용 및 작전임무가 부적절하였으나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교훈은 귀중한 자료로서 비정규전을 발전시키는 거울이 될 것이다. 현교리는 유격전의 성공요소를 "저항의지, 유리한 지형, 효과적인 지도력, 주민지원, 노력의 통합, 정보활동, 외부지원, 선전의 이용, 군기" 등을 들고 있다.

  (1) 저항의지

   북한 공산 치하에서 5년간 생활했던 주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종교적으로 불만이 컸었고 이에 따라 자연히 남한의 민주주의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특히 북한군이 패주시 그들이 자행했던 만행을 목격한 수많은 주민들은 더욱 공산당을 증오하게 되었다.

  또한 장련지방은 황해도의 기독교 본거지로서 이 지역의 청년들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반공사상에 투철하였으며, 종교를 부정하는 북한의 탄압에 이념적으로 강한 저항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신력의 기본이 되는 저항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온갖 난관을 극복 할 수 있었으며 유격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2) 주민지원

  공산당의 학정에 불만을 가진 주민들은 공산당과 투쟁하는 유격대에게 자발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더욱 구월산 일대의 주민들은 유격대원과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유격대의 투쟁이념과 주민이 일치함으로써 작전에 필요한 정보, 물자 인원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3) 외부지원

  1951년초 백령도의 표범기지사령부가 설치되어 지극히 제한된 지원과 지휘를 받았으나 유격대 고유의 특성을 무시한 부대운용으로 작전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4) 유리한 지형

  적이 접근하기 곤란한 구월산과 서해 연안의 도서를 기지로 이용함으로써 적의 기동과 화력의 효과를 감소하였음은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5) 노력의 통합

  구월산 유격대는 유격대 상호간 또는 유격대와 저항의지를 갖은 주민들과 상호 유기적인 협조 및 노력의 통합으로 작전의 성과를 최대화 할 수 있었다.

  (6) 선전의 이용

  선전은 주민으로부터 기지획득을 위한 선전과 적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적에 대한 선전,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고취시키기 위한 자체선전이 있다. 구월산 유격대는 벽보, 정신훈화 등을 통하여 이러한 선전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7) 효과적인 지도력

  구월산 유격대는 실병지휘 경험이 있는 현역장교인 김종벽이 지휘함으로써 효과적인 통솔이 되었다고 본다. 김종벽이 구월산 유격대장직을 해임당한 후 2개월만에 석도에 갔을 때 전 대원과 섬 주민들이 부대장으로 보직시키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던 것은 재임시 부하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8) 정보활동

  유격전은 적의 지배지역에서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 강한 적과 대항하여 작전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된다. 그러나 구월산 유격대의 정보활동은 소극적이었다. 고작 주민들로부터 재보되는 막연한 정보를 가지고 작전에 임했었다. 목표지역에 대한 감시활동이나 주민들을 이용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정보활동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기초로 작전에 임했더라면 작전의 성과는 더욱 컸을 것이다.

  (9) 군 기

  유격전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과 또한 엄격한 군기가 유지되어야 한다. 정규군 부대의 군대지휘 통제체계와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명령에는 절대 복종할 수 있는 규율이 유지되어야 한다. 구월산 유격대의 군기는 잘 유지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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