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존 오스본)
John Osborne(1929-1994)은 1929년 런던의 풀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오스본은 상업 예술가이자 카피라이터였고, 그의 어머니 넬리 베아트리체는 술집 여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성질이 괴팍했으며 번번히 병에 시달리곤 했다. 그는 1941년 결핵으로 숨진 아버지의 죽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 당시 빈번했던 공습과 전쟁의 광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후 3류 학교인 세인트 마이클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장에게 동맹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직업 배우에 투신했었다. 그는 우연히 순회 극단에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며 생활을 이어가다가 그 후, 극단의 무대 감독보로 일했다. 하지만 곧 극단이 파산하자 그는 런던으로 나와 배우생활을 하였다.
그는 배우 생활을 하면선 몇 몇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6살 때는 《성난 얼굴로 뒤돌아 보라》(1953년)로 정체된 극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그 자신은 앵그리 영맨의 선구적 대변자가 되었고, 쇼 이래로 최대의 충격파가 되었다. 이 극의 중요성은 형식보다는 내용, 인물 및 언어의 혁신성에 있다. 《연예인》(1957년)과 《폴슬리키의 세계》(1959년)의 공연에 실패한 뒤, 매우 사실에 입각하여 자료를 효과적으로 다룬 기교와 서사극 형식의 숙달로 성공을 거둔 《루터》(1961년)를 발표했다. 그 후 최대의 걸작 《인정받을 수 없는 증언》(1964년)과 《나를 위한 애국자》(1965년), 《현재의 시간》(1968년), 《암스테르담의 호텔》(1968년) 등이 있고 시나리오로 《톰 존스》(1964년)와 《경장 여단의 임무》(1968년)가 있다.
배우로서 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로 일약 각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연극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는 고루하고 안이한 전후 영국 사회에 대한 하층계급의 분노를 주인공 지미 포터가 폭발시켜 준 데 있는데, 형식적인 새로움은 없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를 생생하고 통열한 웅변으로 쌓아올린 것은 일찍이 영국무대에서는 볼 수 없던 일이었다. 다음 작품 <연예인(演藝人)>(1957)은 뮤직홀과 그 연예인의 세계를 파헤친 작품으로, 로렌스 올리비에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브레히트식(式)의 비사실적인 구조와의 결합 실패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값싼 저널리즘의 그릇된 가치와 그 속의 속빈 인간들을 공격한 뮤지컬 <폴 슬릭키의 세계>(1959) 역시 실패를 했다. 그러나 브레히트류의 사극 <루터(Luther)>(1961)로 대표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 다음 그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허용될 수 없는 증언>(1964)은 지미처럼 생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서 자신을 파괴해 가는 바람둥이 변호사의 성격을 분석한 것으로, 단순한 항의를 넘어서서 작자의 철학의 확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하나의 사극 <애국자> (1965)는 동성연애자인 한 스파이의 파멸을 다루고 있다. <현재>(1968)는 처음으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역(役)의 성격은 <증언>의 주인공과 같지만 다만 그녀는 환상과 현실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호텔>(1968)은 <현재>보다 호평을 받았다. 1972년에 공연된 <초연감(超然感)>은 관객 개발을 위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으로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의 무궁함을 과시해 주고 있다.
상업 예술가와 술집 여종업원의 아들로 태어나 194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얻은 보험금으로 데번에 있는 벨몬트 칼리지에서 기숙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고 교장에 반대하는 수업거부를 한 뒤 학교를 떠났다. 런던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잠시 무역 언론지에서 일하다가 청소년 배우들의 순회극단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연극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곧 연기를 하게 되었고 후에는 지방에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 극단의 배우 겸 감독이 되었으며 극작에도 손을 대었다. 첫번째 연극 〈그의 내부의 악마 The Devil Inside Him〉(1950)는 친구요 스승이며 그의 첫사랑이었던 여배우 스텔라 린든과 함께 쓴 것이었다. 1956년 배우로 런던에서 첫 공연을 했으며 같은 해에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영국무대극단(English Stage Company)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이 연극의 형식은 혁명적이지 않았지만 내용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여파가 초라하고 희망이 없다고 보는 20~30대의 영국인을 무대 위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주인공 지미 포터는 비록 노동자의 아들이지만 정부의 교육제도를 통해서 중산층의 가장자리라는 편치 않은 경계선에 위치하게 된다.
그는 이같은 처지에서 좀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 상승욕구를 위협하는, 전통적으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바라본다. 지미는 계속 노점에서 일하면서 중산층 출신의 아내와, 그녀의 친구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포터의 좌절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오즈번은 관객이 이같은 좌절을 예리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2번째 작품인 〈연예인 The Entertainer〉(1957)은 자신감에 차 있던 과거에 비해 위축된
당시의 영국에 대한 비전을 투영한다. 이 극의 주인공은 쇠퇴해가는 코미디언이다. 오즈번은 연예관에서 연예를 즐기던 전통의 퇴조를 영국의 활력 쇠퇴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1958년 오즈번과 감독인 토니 리처드슨은 우드폴영화사를 세우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연예인〉(1959)을 제작했으며, 헨리 필딩의 소설 〈톰 존스 Tom Jones〉(1963)를 오즈번이 영화로 각색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를 다룬 서사극인 〈루터 Luther〉(1961)는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반항적인 주인공을 창조해내는 오즈번의 능력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그의 〈영국을 위한 연극 Plays for England〉(1962)에는 왕족에 대한 풍자인 〈밤베르크의 피 The Blood of the Bambergs〉와, 지배와 복종의 놀이를 하는 근친상간적인 한 부부에 대한 연구인 〈Under Plain Cover〉가 포함되어 있다.
지미 포터의 장광설은 다른 어조로 〈인정받지 못할 증언 Inadmissible Evidence〉(1964)의 좌절된 변호사에 의해서 계속된다. 〈나를 위한 애국자 A Patriot for Me〉(1965)는 앨프레드 레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살았던 동성연애자인 오스트리아의 한 장교를 묘사하여, 제국의 몰락과 일반적 행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의 위험에 대한 오즈번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수에즈 서쪽 West of Suez〉(1971)은 쇠락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유형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동정심과, 혼란되고 신경과민적인 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식민주의자의 이데올로기상의 적수들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오즈번이 자서전인 〈좀더 나은 계층의 사람 A Better Class of Person〉(1981)의 1회분에 밝힌 대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 나타난 분노의 대부분은 오즈번 자신의 솔직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이 싫어했던 어머니의 삶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중하류층 영국인들의 평범한 삶을 공격하고 자신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 배우로서 무대와 접하게 되었던 오즈번은 연기가 가능한 역할 창조의 능숙함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장광설 혹은 열정적이고 통렬한 대사를 연극의 요소 가운데서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영국의 연극을 상류층의 삶을 그리는 잘 짜여진 연극으로부터 당대의 삶을 박력있게 사실적으로 다루는 연극으로 방향정립을 했다는 점이다.
1959년, 「장거리 주자의 고독」으로 호손덴 상을 수상하며 문단에서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전후(戰後) 영국 문단을 풍미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 그룹의 일원으로, 소외받는 노동자와 반체제적인 청춘의 삶을 묘사한 작품세계로 호평받았다. 이 시대 가장 훌륭한 영국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2010년 4월 타계했다.
성난 젊은이는 1950년대 영국에서 새로운 지식인 부류로 떠오른 문학세대이다.
대부분이 노동자 계급이나 중하층 출신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출신도 몇 명 있었지만, 상당수는 전쟁 후에 세운 대학에서 국비로 교육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통 있는 영국의 유서 깊은 집안과 영국성공회 및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엘리트주의자들을 거침없이 공격했으며 전후 복지국가의 구태의연함에 대해서도 수치스러워했다.
존 웨인의 소설 〈급히 내려라 Hurry on Down〉(1953)와 킹슬리 에이미스의 〈행운아 짐 Lucky Jim〉(1954)에서 드러난 움직임은 1956년에 이르러 이 운동의 대표적인 작품이 된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ack in Anger〉로 구체화되었다. 왕립 극장의 대변인이 26세가 된 이 연극의 저자 존 오즈번을 가리켜 '앵그리 영 맨'이라고 하자, 이 말은 지속적인 계급 차별에 대한 분노와 지식인인 체하거나 '엉터리' 같은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들 하층계급의 매너리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오즈번의 동시대 작가 모두에게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오즈번의 2번째 희곡 〈연예인 The Entertainer〉(1957)에서 주연을 맡게 되면서 '성난 젊은이들'은 당시 10년간의 지배적인 문학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또 그들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밖에도 〈옥상방 Room at the Top〉(1957)을 쓴 소설가 존 브레인과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58)을 쓴 소설가 앨런 실리토가 있으며, 〈햄릿과 스테프니 그린 The Hamlet and Stepney Green〉(1956)을 쓴 극작가 버나드 콥스, 〈보리를 넣은 닭고기 수프 Chicken Soup with Barley〉(1958)를 쓴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 등이 이 작가들에 속한다. 미국의 비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추진력은 1960년대초에 고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