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냉장고 이병철 1 내 애인은 몸 없는 냄새 혀 없는 소리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애인은 물 없이 내리는 비 듣지 않고 젖는 땅속의 귀 한 호흡으로 얼음을 찬 침묵으로 불을 울어봤자 물질이 아니어서 울면 날아가고 쏟아져도 녹고 마는 슬프고 예쁜 체온 2 냉장고에 넣으면 죽은 사랑은 부활한다 이것은 오래된 믿음이다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집을 나섰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렸다 심령대부흥회 전단지를 떼어냈다 지상의 모든 온도를 빨아먹어 코끼리만큼 무거워진 유골함을 집어 들고 돌아왔을 때 끔찍한 문열림 경보음 방 안에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3 추위를 피해 더 추운 곳으로 스웨터와 신발과 칫솔과 반지 애인이었던 물질과 함께 냉장고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체온이 떨어지고 수분이 응결되자 우리는 하나의 단백질 덩어리 탯줄도 없이 서로의 아이가 되었다 급속 냉동된 이 사랑은 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천 년 넘게 꺼내먹을 만큼 유통기한 긴 구원은 신도 발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겨울호 ----------------------- 이병철 / 2014년 《시인수첩》에 시, 《작가세계》에 평론 당선. 시집 『오늘의 냄새』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 『낚;詩-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사랑의 무늬들』 『시간강사입니다 배민 합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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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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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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