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는 어디에 있는가
오길순
벽옥색 윤슬이 멸치 떼처럼 남실거렸다. 신의 지문은 평화라는 양, 잔잔한 문양들이 끊임없이 흘렀다. 사막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어 아름답다더니, 두바이가 그러했다.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태양빛도, 페르시아 만 물결 위에서 제 몸이 부서지도록 노래를 불렀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돌고도 싶었다. 한라산봉우리 롤러코스터 타듯, 굽이굽이 모래언덕을 탐험하고도 싶었다. 외교부 메시지가 손사래를 쳤다. ‘인간이여, 분수를 지켜라’ 메르스가 쐐기를 박았다.
동유럽 가는 길목, 불시착한 두바이의 한나절이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다. 외계인의 굳어버린 발바닥을 콩고물보다 보드라운 모래사장이 곰살갑게도 어루만져주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해변 같은, 나폴리 카프리 같은, 묵호항 논골담에서 내려다 본 동해 같은 청람색 페르시아 만이 ‘너도 세계인들 속에 끼면 선남선녀’라며 유혹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는 해수욕을 하고 나면 긴장했던 세포도 편안해질 거라는 듯, 은근히도 불렀다.
관문
허공에서 밤을 새운 4월 초의 아침, 두바이 국제공항은 쓸쓸했다.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텅빈 여명도 을씨년스러웠다. 일행 증 한 명이 시간을 잘 지켰더라면 공항의 기둥들이 사원의 옥기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삼성물산이 건설했다는 지상 828m, 세계 최고라는 버즈 칼리파(Burj Khalifa)와, 입장료만 7만 원쯤이라는 버즈 알 아랍 호텔 예약도 물거품이 되었다. 화폐보다도 소중한 게 시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연방국(UAE)의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스 알 카이마, 아즈만, 움 알 카이와인, 푸자이라 등 7개 토후국 중 두 번째로 큰 토후국(Emirates)이다. 1971년 영국령에서 벗어난 7개 부족들이 그 해 12월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정부를 수립했다. 오늘날 무역 금융 교통 관광 등의 중심지가 되기까지 ‘불가능은 없다’는 토후국 지도자의 한 마디가 비밀의 열쇠가 되었나 보았다.
한국인 청년 가이드는 관광객보다도 두바이 소매치기를 믿는다고 말했다. 손목을 자르는 형벌로까지 지켜낸 그들의 정직이 돋보였다. 얄팍한 주머니를 지키느라 애쓴 여행길도 있었는데 어느새 어깨가 느슨해졌다. ‘정직’이 긴장 이완제 같았다.
쇼핑몰에서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도 남달라보였다. 아바야를 입고 히잡에 다이아몬드까지 장식한 눈이 큰 처녀의 여유로운 걸음이 ‘금수저’인가 싶었다. 아랍부호의 후예가 그러할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두바이는 바닷물을 식수로 활용했다. 그런데 그 담수시설을 대한민국 ‘두산’이 건설했다고 한다. 사막의 갈증을 해결해 준 ‘두산’이 자랑스러웠다. 유목민의 생명 줄을 마련한 우리나라가 당당하게 여겨졌다.
저 멀리 쉐이크 모하메드 왕궁이 아련했다. 왕궁으로 가는 유일한 길, 왕의 광장에서였다. 세계의 지도자들 대부분 저 왕궁을 방문했다고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를 외치며 걸었을 것도 같았다.
햇빛에 반사되는 광장의 대리석이 빛나고 있었다. 아라비아 타일 장인의 눈빛 같았다. 무한궤도도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마름질하려 했을까? 시선 멀리 빛났을 장인의 눈빛이 틀니를 끼우려는 치과의사처럼 정교했을 것 같았다.
폭염 속에 서 있는 식물의 근기도 놀라웠다. 쥐똥나무 비슷한, 구불구불하게 전지한 곡선 울타리를 지나노라니 땀방울도 좀 걷혔다. 섭씨 38도 쯤은 일상이라는 듯 늘어진 진녹색 나무가 대견해보였다.
두바이는 3대 째 세습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국민적 저항이 없는 것은 지도자의 청사진을 신뢰한 때문일 것이다. 정치가들은 사랑과 이익 공포를 정치에 활용하기도 한다는데. 국민들은 공포 없는 미래를 확신하나 보았다.
풍요로운 삶, 삭학들의 프로젝트
“가이드님, 오일이 다 바닥났다면서 저들이 어떻게 저리도 잘 사나요?”
그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부질없는 물음이라는 듯 심드렁했다.
“녜. 잘 삽니다.”
무심한 화답의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잘? zal?’
그들의 황금발견이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바꿨을 것이다. 1966년대 석유수출은 어촌을 벼락부자로 만들었을 터였다. 우물물처럼 나오는 검은 황금수. 하루아침에 부호가 된 양치기 목동들에게 가난이란 말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지도자는 세계의 석학 2천명을 초빙했다.
“여러분, 지금 우린 잘 살고 있습니다. 순전히 오일 덕분입니다. 그런데 오일이 바닥나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손들이 영원히 잘 살 수 있도록 미래를 설계해 주십시오.”
캠브리지 옥스퍼드 하버드 예일 등에서 온 2천명 도시공학자들은 대수선을 시작했다. 국회의원 한 사람 없는 나라에서 오로지 지도자가 결정한 개혁개방프로젝트가 국민프로젝트로 성공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조상의 축적물 위에 새로운 탑을 올렸다. 조상들의 누적된 탑이 오늘의 두바이인 것이다. 유목민의 설움을 겪지 말자. 피의 전쟁사를 자손에게 넘기지 말자. 상식을 초월한 도전정신 또한 무서운 가속도로 전진했을 것이다.
물류시장을 개방하자. 국제통상을 활성화하자. 관광업을 살리자. 세계적 부호들을 유치하자. 예상은 주효했다. 국제금융센터를 영입하고 규제는 과감히 철폐했다. 소득세 증여세 상속세도 없는 저 세금 정책은 누구에게나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3200여개 물류시장이 개방되고 글로벌 기업이 상주했다. 대형 상사들도 국제 무역을 활성화 했다. 정직을 기본으로 한 사회질서 또한 달러창고로 거듭나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기본질서가 요구되고 있다. 오른쪽 보행 지침이 십여 년이 지났어도 정착되지 않은 느낌이다. 지하철, 병원 심지어 학교에서도 좌우측이 소소히 충돌하곤 한다. 아름다운 자유는 원칙을 철저히 지킬 때만이 보장된다는 말이 실감나곤 한다.
몇 년 전, 어느 구청에서 진로지도를 할 때였다. 우측통행이 철저한 학교는 아이들도 명랑해 보였다. 어떤 충돌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복도통행이 정연했다. 아름다운 우측통행! 그 한마디 원칙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다.
바스타키아와 모스크
바스타키아는 유목민인 베두인 지역에 이란인이 첫 정착을 했다는 마을이다. 헐어버린 양가죽 천막과 연한 황토색 전통마을이 대비를 이루었다. 옛 조상들의 찌그러진 집기들이 흩어진 듯 연출되어 있었다. 우리의 아득한 옛 모습도 그러했을 것 같았다.
1970년대 가옥 위에 굴뚝처럼 생긴 자연의 에어컨, 윈드 타워에서 코코넛야자수 한 모금 마시면 땀방울도 좀 씻어질 것 같았다. 문득 <알리바바와 사십 인의 도둑>의 배경이 이곳인가 싶었다. ‘열려라 참깨!’하면 착한 하녀 모르지아나가 수박 한 쪽 들고 나오지 않을까? 악당같은 도둑들이 삼십육계 줄행랑치게 한 모르지아나의 지혜는 어린 날의 교훈이 되었었다.
커다란 종려수 아래 풀집이 고즈넉했다. 초가집 비슷했다. 종려수 나무로 기둥을, 잎사귀로는 지붕과 벽을 지었다니 대추야자까지 주는 종려수는 그들에게 영혼수와 다름없어 보였다.
풀집 옆 하얀 모스크, 이슬람사원이었다. 모래알 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로 마당이 정갈했다. 투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돔이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모자를 보아뱀이라고 말한 어린 왕자가 돔을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 생떽쥐베리도 모스크 앞에서 <<어린 왕자>>를 쓰지 않았을까?
라마단
이슬람 교력으로 9월이면 그들은 라마단 의식을 치른다.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한 달 동안 금식의 고통을 견딘다. 검은 실과 흰 실을 구분하는 한 낮 동안의 금식은 세상사랑을 배우는 시간인가 보았다. 불평도 화도 안 내고 타인의 흉도 안 본다니 ‘강렬한 목마름’, 또는 ‘타오르는 메마름’이라는 라마단은 지옥 불같은 마음도 승화하는 시간인가 보다. 오벨리스크처럼 높은 종루에서 금방이라도 종소리가 울릴 것만 같아 귀를 기울였다.
십여 년 전 명동성당의 종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얼마나 제 몸을 쳤기에 균열 되었을까? 깨져버린 종소리가 늙으신 성자처럼 여겨졌다. 허공을 휘저으면서 은근히도 달려온 종소리는 끝내 내 몸의 솜털까지도 가만가만 어루만져주었다. 무지한 영혼을 잠 깨우려는 듯, ‘댕 대앵’ 한낮의 정오를 울리던 종소리.
수크 마디나 류 메이라
천 년 전 아랍의 재래시장을 재현해 놓은 류 메이라에서 삼원색 유리공예작품이 시선을 끌었다. 아라베스크 문양 접시들도 호기심을 주었다. 천연색 램프 하나 사고 싶었지만 먼 여정에 미련을 접었다. 비단처럼 쌓인 수공예작품들도 젊은 날을 떠올렸다. 거실카펫 하나를 위해 애썼던 젊은 날, 갚아도 남는 월부 값은 월급날마다 마음을 휘저었다. 이제 버려도 주워갈 이 없을 그것들을 위해 목숨 걸 듯 살았던 젊음이 그래도 그리워진다. 허공에 집을 짓는 거미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헤맸던 날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현관에 놓을 작은 실크카펫 한 장 값을 물으니 이백만 원쯤 되었다. 유리가루로 모자이크한 듯 섬세한 카펫 한 장을 위해 일생을 건 장인 정신. 물레 앞의 우리네 할머니들처럼 밤을 새웠을 여성을 생각하니 카펫 값이 오히려 저렴하게 여겨졌다.
여인들은 긴 원피스를 입고 폭염을 견뎠다. 온 몸을 감싸는 옷이 오히려 과학적이라고 한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긴 옷 속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고는 밤 연회를 즐긴다고 한다. 속눈썹이 긴 여인들이 더욱 미인으로 보였다. 신비를 감춘 밸리 댄스 또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음료수가 그리웠다. 마침 본젤라또 아이스크림 상점이 보였다. 눈웃음이 예쁜 아가씨가 붉은 색 아이스크림 2컵을 15유로에 내 주었다. 하얀 요트가 떠있는 호숫가, 대추 야자나무 아래 벤치에서, 남편과 나누는 아이스크림 맛이 원두막 수박을 연상시켰다.
아가씨는 떠나는 우리를 불러 영수증을 다시 발행해 주었다. 환율을 절대 속이지 않는다더니 정말 다시 계산하는 처녀가 두바이 대변자 같았다. 정직은 어디서나 기쁨을 준다.
수상택시라고 하는 전통목선 뗏목배 '아브라'는 통통통 소리와 함께 크릭(Creek)을 건넜다. 불과 오 분 만에 서울강남에 비유되는 신흥부촌에 도착했다. 조금 전 출발한 구 도시는 강북에 비유된다니, 5분 사이 빈부가 엄연해 보였다.
인공섬 팜 아일랜드(Palm Island)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 가는 길은 모노레일 길이었다. 팜 제벨 알리(Palm Jebel Ali), 팜 데이라(Palm Deira)등 세 개의 인공 섬 중 하나이다. 1인당 15유로를 내고 모노레일에 오르니 페르시아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오길순(수필가, 시인, 시낭송가,동화지도및구연가)
1999년 7/8월호 <<책과인생>><삼베홑이불>당선
2000년12월호 <<한맥문학>>시<까치는 어디로 떠났을까> 당선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협낭송위원회부위원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시민위원장및부의심의위원장.
한국산문문학회장및편집장(전),강남문협부회장(전)계간문예창작자문위원,설송문학상, 일붕문학상, GS문학상, 서울문예상, 길림신문주최세계문학수필대상,2011.에세이아카데미아주최네티즌선정수필1위.사임당 백일장 장원,
2017.한국문협작가상, 2020.검찰총장표창, 저서:수필집<<목동은 그후 어찌 살았을까>>2001.9.25.범우사
수필집<<내 마음의 외양간>>2016.10.16
전자책 1. 목동은 그후 어찌 살았을까
2. 무지개 풍선의 징검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