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8월 ~ 1965년 8월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에 한 시골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어요. 한국 정부는 우선 순위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어요. 1958년 서울 청계천 판자집 마을에 야학이 생겼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습니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습니다. 그가 보니까 본 광경은 이랬어요. 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겁니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요.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겁니다. 불과 6년 만에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40% 가까이 늘어난 거예요.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 현황을 조사했습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 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어요. 굶어도 아이들은 학교에 보냈습니다.
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어요.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겁니다.
하지만
1960년 국제 언론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했습니다. 1960년 1월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이에요. 한국 7년째 원조 의존 자립 경제는 여전히 어려워합니다. 설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몰랐습니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 거라는걸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라는 걸요.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오. 그리고 바로 다음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은 390만 달러였습니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어요. 10배 이상 차이가 났죠.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어요.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요?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요.
1961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썼습니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 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조 없이는 생존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된다는 건 환상입니다. 냉정한 평가였죠. 실제로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만한 게 없었어요. 공장도 별로 없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습니다.
1962년 1월
울산의 첫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아무것도 없던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뿐이었죠. 196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예요.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맞았어요. 당시 한국 사람들도 잘 몰랐습니다. 뭘 만들어 팔아야 할지요?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거예요.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3명이 내렸습니다. 광부들이었어요. 탐광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들이었죠.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들이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됐습니다. 1965년 1월 독일 쇼피 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들은 지하 1000 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꺼리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한국 청년들은 그 일을 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요.
1964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가 7936명 간호사가 1만 1057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보낸 돈이 1억 달러가 넘었어요. 그 돈으로 공장설립에 투자했습니다.
1965년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이게 얼마나 논란이었는지 아세요? 서울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왜 일본과 손을 잡는 거예요?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나라잖아요. 그런데 또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정부는 밀어붙였습니다.
1965년 8월
뉴욕타임스가 이렇게 썼어요. 한국은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감정보다 경제를 택한 것이다. 과연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기술자들이 일본 공장으로 연수를 갔어요. 몇 달씩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습니다.
1966년 3월
일본 니케이 신문이 한국 연구생들을 취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작은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퇴근후에도 숙소에서 공부한다. 이런 열정은 전후 일본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던 겁니다. 일본 기술자들도 놀랄 정도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