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사진작가는 몇대의 일본 카메라를 몸에 숨기고 다시 밀항을 해서 한국에 돌아오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최민식 사진작가는 주로 인물 사진,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을 카메라로 담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을 찍은 이유 중 하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미술공부하라면서
사온 GHKRK 밀레의 그림집을 보면서 밀레가 주로 그린 가난한 사람들에 큰 느낌을 받습니다.
거기에 인간가족 사진집을 보면서 인물사진의 위대함을 느끼고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촬영합니다
가난을 기록한 사진작가 최민식
▲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
가난을 기록하는 이유는 세상에 가난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난을 알린다? 네 알려야 합니다. 저 아프리카 아이들이 오늘도 굶어 죽어가는지 우리는
관심도 알지도 못합니다. 뉴스 기사나 책으로 백날 알려봐야 그 처참함을 바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다릅니다. 사진은 만국공통어라서 바로 보고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최민식은 가난한 사람을 촬영해서 세상에 알립니다.
'소년의 집'이라는 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2년 간 일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면 소년의 집에서는 타이핑한 편지와 부산 자갈치 아줌마들이 만든 손수건과 함께 최민식 사진작가의
사진을 넣어서 두꺼운 주소록에 있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편지를 발송 했고 그중 일부가 회신을
했습니다. 그 회신하는 편지에는 1달러에서 수백 달러까지 성금이 돌아 왔는데 그 돈으로 소년의 집은 운영되
었습니다.
물론, 이런 가난한 사람을 허락도 없이 찍어서 돈을 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던 것은 아니고 저도 서픈짜리
동정심 그것도 초상권 허락도 받지않고 무조건 촬영하는 모습은 분명 옹호 받을 수 없습니다만 이 당시인 50~
70년대 까지의 한국은 그런 초상권 따질 정도의 여유가 있던 나라도 아니였습니다
해외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미국의 원조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 경제 자체가 미국의 위성국가 수준의 원조경제로 돌아가던 시절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인들의 성금과
구호품으로 살아갔습니다. 이렇게 사진을 통해서 국내에 많은 성금이 들어오게 한 역활을 최민식 사진작가는
했기에 최민식 작가의 초상권이나 가난을 팔아먹는 사진작가라는 비판을 누구러트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비판에 타협했다면 이런 사진을 평생 촬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겠죠
사진작가 최민식은 도촬이라는 비판에도 평생을 캔디드(몰래 찍기) 사진 기법을 통해서 가난한 혹은 일상의
사람들의 표정을 몰래 몰래 담았고 그 몰래 담은 사진들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담은 자연스러운 표정의 사진들이었기에 그 어떤 사진 보다 우리가 쉽게 최민식 사진작가의 사진에 동화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옹골참이 때로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최민식 사진작가는 평생 인물을 흑백으로 촬영 했습니다. 인물사진은 색정보를 제거한 흑백으로
담는 것이 좋긴 합니다.
저도 인물을 촬영할 때는 컬러 보다는 흑백이 더 좋다고 봅니다. 특히 인물의 미세한 떨림이나 표정등은 색이
제거된 흑백 사진에서 더 쉽게 도드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컬러는 틀렸고 흑백만 옳다는 식의 말
을 하는 모습을 인터뷰에서 봤는데 그 모습에서 옹고집이 있는 분이시구나를 살짝 느꼈습니다.
뭐 그 옹고집이 있었기에 평생 이런 기록사진을 담을 수 있었겠죠. 소명의식은 때로는 고집도 필요하니까요.
이런 가난한 사람들을 찍은 그러나 미소가 지어지거나 큰 감흥이 있는 사진들은
해외에 알려져서 60,70년대에 해외에서 많은 초청을 받기도 합니다.
해외 사진전에서 입상을 하기도 하고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의 사진을 반대했던 군부 독재 정권
이런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아주 싫어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죠. 최민식 사진작가가 사진을 담은 사진집 '인간'의 1집을 발간 한 후 울릉도에 침투한
무장공비가 인간이라는 사진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최민식 작가와 출판한 동아일보사에 다그쳤고 간첩 내통으로 걸려들어갈 뻔 하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약 100여번의 간첩신고를 받기도 합니다. 70,80년대는 똘이장군이 뛰어놀던 시절이고 북한은 늑대들
이 살던 시절이라서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하면 어린 학생도 과감하게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간첩신고해서 잡으면 3천만원을 받으니 인간 로또가 바로 간첩이었습니다.
그런데 400미리 망원렌즈를 끼고 멀리서 사람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니 신고가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그때
마다 해명을 해야 했습니다.
최민식 사진작가의 사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찍었고 이 사진들은 북한이 "봐라! 남한에 넘쳐나는 거지들
봐라" 식으로 정권 유지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진집 출판을 검열하고 정부에서 압박을 하기도 했습
니다.
이렇게 있는 것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도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체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검열을 당했습
니다
지금이야 찍던 말던 정부가 신경 안쓰고 그런 사진 세상에 알린다고 한국이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실제로 가난하다고 쳐도 크게 개의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때나 전두환 때는 젖과 꿀이 흐르는 한국만을 해외에 보여주고 싶은(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몰
지각함이 만연했던 시대라서 최민식 작가의 사진은 결코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숨겨진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또한, 어른들도 분명히 싸움을 하거든요.
그런데 마치 어른은 싸우지 않는 것처럼 혹은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 처럼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 당시 한국이
었고 현재 중국이 이런 모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 참 비슷한 나라에요. 88올림픽 때 판자촌이 성화 봉송로 카메라에 걸린다면서 가림막으로 막거나
강제 철거하고 중국도 성화 봉송로에 가난한 동네 나온다고 거대한 판자로 다 막던데요.
이렇게 정부의 탄압이 들어와서 한 때 작가는 '인간'이라는 사진집 출간을 못할 뻔 했으니 독일인인 '임 세바스찬'
신부가 인간 4집 부터 8집까지 모두 맡아서 판매를 해주었습니다.
전국의 성당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판매를 해서 최민식 사진작가를 도왔고 그 혜택을 우리 국민 모두가 받고 있습
니다.
현재 인간 13집 까지 나온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최민식 사진작가의 사진 대부분은 현재 '국가 기록원'에 기증 되어서 국가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죠. 한 때는 가난한 사람 찍지 말라고 했던 국가가 이제는 그걸 보관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물 사진 작가 최민식
오늘 별세 하기 전까지 최민식 사진작가는 계속 사진을 찍으러 다녔을 듯 합니다.
작년에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사진을 찍고 계시더군요. 저는 국내최고의 다큐사진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내 최고의 인물 사진작가 말할 수는 있습니다.
최민식 작가의 사진을 보다보면 어떻게 이런 표정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표정이 하나하나 다 살아 있습니다. 캔디드라는 몰래 촬영하는 기법으로 촬영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기회가
있어도 그걸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이 최민식 사진작가는 사진계에서는 주류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전공으로 한 것도 아니고
독학으로 배워서 평생 한 카테고리 사진만 촬영했기에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사진계의 평가는 좀 미지근 했죠.
특히 최근에는 생활사진가들도 거대한 대포 같은 렌즈로 가난한 사람들을 촬영하기도 하고 더 이상 가난을 가
난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다른 의도나 별 느낌이 없는 사진으로 보게 된 사진 홍수시대에 더 이상 가난은 주목
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최민식 사진작가는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던 말던 큰 신경을 쓰지 않듯 자기가 갈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때로는 공안정권이 프랑스 문화원장과 결탁해서 필름을 빼돌리셔 폐기 처분 하기도 하고 수 많은 질타와 질시
혹은 비판이 있었지만 그의 사진찍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초상권 문제가 최근에 붉어지고 실제로 사진 속 주인공이 전시회를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할 때도 돈이
없다면서 사진을 줄테니 가져가라고 하기도 했죠. 분명 이 초상권 부분은 최민식 사진작가의 옹고집이 좋아보
이지는 않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냥 넘어 간 것은 아쉽지만 그렇게 사진 한장 한장 찍을 때 마
다 초상권에 조마조마 하면서 촬영을 했다면 우리는 뛰어난 최민식 작가의 인물 사진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
니다.
휴머니티를 담은 사진작가 최민식
가난한 사람만 기록했다면 그의 사진이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찍었지만 그 사진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의 가장 보편적 소재이자 가장 어려운 소재인 인간을 담은 사진작가 최민식
위 사진은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줘야 하는데 생선을 팔던 손에 비린내가 가득하고 그렇다고 수돗가도
없어서 누나를 시켜서 젖을 물리는 사진입니다. 사진은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위 사진속 행동이
길어야 5분 내외였지만 이렇게 영원히 박제되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큰 느낌을 줍니다.
이런 사진이 없었다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밥이 없어서 굶고 다녔다는 말에 라면 사먹으면 돼지 왜 굶어? 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최민식 사진작가는 누구도 쳐다 보지 않았던 일상의 우리들과 특히나 평생 제대로 된 사진 한장 찍어보지 못했
을 가난한 사람들을 기록 했고 그 기록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일상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국가 기록물을 보세요. 온통 대통령 사진들만 가득합니다. 누구하나 가난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았던 50~70년대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가난을 기록했던 사진작가들이 있었기에 그 시절의 고통과 서러움 그
리고 아스라한 추억을 떠올리고 목도할 수 있습니다.
저 하늘나라에서도 '인간군상'이라는 주제로 부감샷을 찍고 있을 고(故) 최민식 사진작가가 그려지네요.
인간, 이 오묘한 소재를 우리는 너무 쉽게 담고 쉽게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네요.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