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실패한 ‘김옥균의 3일천하’
1884년 우정국 낙성식에는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우정국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니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생도들을 다시 작아서 보호하기가 좋은 경운궁으로 이동시키고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환관 유재현을 처단하였고, 문신문신조영하와 민태호, 민영목등을 고종은
“죽이지 마라!, 죽이지마라!”
했지만 결국 살해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민씨 대신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청나라와 연락하여정나라군대의조선개입을 요청하였다.
그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9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번수.(邊樹) 등 일행 9명은찬덛궁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일본 공사관에 숨었다가12월12일 인천주재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츠지 가프사부로의 일본 선박치토세마루호에 승선했다.
인천(제물포)에 있던 일본상선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와 인천감리홍순학을 대동하고다게초에에게 국적 서재필과 김옥균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품속에 비상약을 쥐고 자살을 각오했다.
한참을 우물 쭈물대던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어쩔수 없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배 안의일본인들이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장츠지가츠사부로 역시 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말하길,
“당신을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
며 힐난했다.
“내가 이 배에 조선개화당인사를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때문이니 이들을 하선시킬수는 없다.
임의로 이 배를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그들을 따돌렸다.
츠지 선장의 배려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김옥균의감신정변이 3일 천하(실은 46시간)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이분들이 나폴레온의 자세를 취한것은 황제가 된듯한
기고만장에서 온것일까?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長奇)에 도착하였다.
**나가? 낭아? 긴소매:long sleeve:낭아소대, 반소매:한소대,
전미주체전때 만난 한국스키드 사격대표선수는 김옥균의 손자라고 했는데 인터넷에보면 김옥균은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했으니 나는 헷갈린다.**
첫댓글 그때 그들은 역적이 분명한데 지금 우리에게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