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기억 (5)
— 무사히마 돌아오그라 —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할지 모른다는 공비를 기다리며 그렇게 매복을 했다.
공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 쪽으로 오지 않고 다른 부대의 차단선을 다시 뚫고 사라진 것 같았다. 소대장이 다시 명령을 내렸고, 상황이 끝났다. 맥이 빠져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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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거의 한 달 만에 처음으로 고향 집에 전화를 했다.
“아버지, 접니다…”
“현석이?! 너 살아 있냐? 무사하나?”
“아버지, 전 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고 있으이소.”
“그래, 알았다 알았다. 다 필요 없다. 무사히마 돌아오그라.”
공중전화 뒤로 고향에 전화를 하려는 나 같은 병사들 수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길게 통화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들으니, 휴가를 나올 예정이던 내가 한 달 동안 아무 연락이 없자 고향의 부모 형제들은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전을 나가 있어서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다들 내가 죽었거나 크게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 날에는 빌린 부대의 건물에서 다시 나가 야외에서 작전을 한다.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자는 마지막 날.
고향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밥을 먹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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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색정찰과 매복이 이어지는 매일.
믿을 수 없는 군대의 실태를 보기도 했다.
어느 날 경상도 사투리가 아주 진한 K상병이 내 참호로 왔다. 원래 철강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온 후임이었다. 일도 잘하고 부대 생활도 잘했는데, 이상하게 상근예비역이었다. 상근예비역은 당시 1년만 현역부대에서 근무하는 제도였다.
그 친구가 나한테 물었다.
“이 상병님, 이거 말인데요.”
K3용 탄약을 내밀어 보였다. 링크로 결합된 200발들이 탄통.
“…K100탄이잖아? 이거 왜?”
“사실은 제가 이걸 어떻게 장전하는지 몰라예.”
“뭐라꼬?!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했는데?”
“탄창 끼워서 어떻게 했는데… 그게…”
“…야, 말이 되나… 진짜.”
당시에는 기관총 사수 집체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근예비역 제도 때문에 병력 교체가 잦으면서 사수가 부사수에게 제대로 총기 교육도 안 하고 나간 부작용이 이렇게 터진 거다. 당시 정예 예비사단, 우리 보병 중대 기관총 사수들 중에서 탄띠로 기관총 사격을 해 본 애가 없었다. 정말이다. 다들 한 발씩 약실에 탄을 넣고 영점사격 한 번 해 보거나 탄창에 장탄하고 사격을 하든가.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니미 기관총과 닮은 K3는 탄띠로 급탄을 받거나 소총 탄창을 결합해서 쓸 수도 있다. 사실 나도 배운 게 아니라, 밀덕이라 어디서 보고 알고 있었던 거다.
여튼 이 친구에게 기관총 밑에 200발들이 탄통을 결합하고 탄띠로 장전하는 법 등을 가르쳐줬다. 고맙다고 하고 갔다.
나는 좀 무서워졌다. 우리 전쟁 나면 지는 거 아닐까. 이렇게 개판인데.
나중 일이지만, 나는 전역 휴가를 나가기 전 당시 대대장인 중령님에게 이 사건을 소상하게 이야기하고 나갔다. 제대하니까 부대에 남기고 가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대장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표정만으로 하는 재판이 있었으면, 기관총 관련 병력은 전원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갔지 않을까.
전역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니, 대대 K3 기관총 특기 애들과 간부들은 모조리 야간 사격 훈련을 나가고 집체 교육이 뜨고 난리가 나 있었다.
나는 자부심이 있다. 최소한 내가 꼰지른 덕분에 아주 미소하나마 대한민국 육군 전투력이 올라갔을 테니까. 아, 다만 이걸 내가 꼰지른 거라고 이야기하면 모포말이 정도가 아니라 연대 짬통에 묻힐 수도 있어서, 조용히 미소만 지어주고 사단 휴양소로 전역병 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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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작전 기간이 길어지자 강원도 전역에서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광으로 생계를 꾸리는 도시에서 밤마다 이동이 통제되고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돌아다니니, 지역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군도 최선은 다하고 있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대간첩 작전에 털어 넣었다.
언젠가는 얼룩 베레모를 쓴 덩치 좋은 사람들이 보병부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고급 공사 도구들을 들고 와서 거대한 참호를 만드느라 난리 법석이었다. 저따위로 넓게 참호를 파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포탄이 안에 떨어질 수도 있고, 수류탄이 들어오기도 쉽다. 물어보니 어느 사단의 전차중대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까지 차단과 매복에 밀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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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침이 바뀌었다. 더 적극적으로 수색정찰을 해서 빨리 적을 색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강원도 여기저기로 이동하며 작전을 했다. 사단 마크나 부대 식별이 가능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가렸다. 일부러 지휘관들이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매스컴에 노출되는 정보를 교란해서 남은 공비에게 위장 정보가 전달되도록 하려는 의도다.
그러다가 우리는 이윽고 휴전선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비무장지대 근방 지뢰가 있을지 모르는 곳도 수색정찰을 한다고 했다. 모두가 그 명령에 분노했다.
그때쯤 겨우 방탄복이 나왔다. 지금 자주 보는, 방탄판이 들어가 있어서 적의 소총탄조차 막아주는 그런 게 아니다. 연대장님이 입으시던 세련되고 가벼운 그런 것도 아니다. 두껍고 더럽고 무겁고 영문으로 안내문이 붙은 그런 놈이었다. M1969인가, 베트남전 때나 입던 그런 것이다. 색이 바래서 누렇게 뜬 물건. 냄새도 지독했다.
이것도 적의 소총탄은 막아주지 못한다. 포격 시의 파편이나 권총탄 정도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물건이다. 아예 방탄복에 붙은 영문 설명쪼가리에 그렇게 적혀 있다. 어쨌든 없는 것보다야 훨씬 좋다… 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 사라졌다. 그걸 입자 추운 날씨에도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지뢰가 묻혀 있을지 모른다는 그곳으로 우리는 들어갔다.
중대에 지뢰탐지기가 3대 나왔다.
우리는 수색정찰을 하러 깊은 숲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비무장지대 부근은 사람이 거의 출입하지 않는다. 자연이 아름다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 말은 인간이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풀이 무성해서 지형 파악이 잘 안 될 정도였다. 야생동물도 엄청나게 많았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몇 번을 빼고는 무사히 수색정찰이 끝이 났다. 중대장님이 걱정한 지뢰도 터지지 않았다.
숲 안에 흐르는 개울물은 너무나 맑았다. 실컷 마시고,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머루를 따 먹기도 했다. 휴식 시간에 다들 담배를 피울 때, 나는 머루를 잔뜩 따서 수통 안을 채웠다.
하지만 공비는 잡지도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이제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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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 들리겠지만, 작전이 오래 지속되자 다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햇빛 좋은 날, 산 중턱에 텐트를 치고 정비를 했다. 그날은 빵이 그렇게 많이 나왔다. 현지에서 전역하는 전역병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몫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어느 병장 선임이 몰래 라디오를 켜 놨고, 거기서는 [영턱스 클럽]노래가 나왔다.
"다른 여자 생긴 거라면
혼자 있고 싶어서라면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 거야
우리 사랑을 위해"
멍하니 그걸 들으며 빵을 먹었다. 야간에는 또 작전을 나가야 한다.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아주 잠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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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작전을 나가기 전에 군종 신부님이 찾아왔다.
군대에는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에 따라 군종병과 군종장교가 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에 미사나 기도회, 법회를 열어준다. 종교를 믿는 많은 병사들은 이런 행사에 참가하고, 거친 군대 생활에서 잠시 쉴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이들이 해야 할 가장 크고 많은 임무는,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마지막 위안을 주는 일이다.
우리가 실전 작전에 투입되어 있는 동안, 우리가 있던 곳에 찾아온 군종장교는 가톨릭 신부님 한 분뿐이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다. 신부님은 우리를 위해 간식을 가지고 작전지역까지 찾아와 주셨다.
우리가 다시 목숨을 걸고 수색작전에 투입되는 날 아침. 햇빛이 찬란하게 비쳤다.
지저분한 몰골에 냄새나는 전투복을 입은 우리들을 위해 신부님은 기도를 해주셨다.
대략 이런 기도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아버지의 자식들이 또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섭니다.
부디 그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쏜 정의의 탄환이, 부디 북괴뢰가 보낸 공비의 심장을 꿰뚫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정의가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주의 권능을 믿습니다.
아멘."
살벌한 기도문이지만, 그때 우리는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모두 기원했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종교를 가진다면 그때는 가톨릭 신자가 될 것이다.
그때의 군종 신부님 덕분이다.
(사진은 1952년 강원도 철원 어딘가 미사장면이다)
(다음화에 마지막 회)
여담 — 상근예비역
상근예비역 애들은 다들 몸도 좋고 마인드도 괜찮은 애들이었다. 노가다판을 구르다가 와서 체력이 끝내주던 P일병, 시골에서 운동하다가 와서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은 몸을 가진 마초맨 C일병. S대 국문과에 다니는 키 크고 머리 좋은 후임병 한 명도 상근. 강원도 깡촌에서 소 키우다가 와서 산에서는 펄펄 날던 선임 J상병도 상근. 되레 만기를 다 채우는 (나 같은) 애들 중에 폐급이 많았다.
물론 상근예비역 제도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다. 선임들 중에 상근이 워낙 많으니 소대 왕고참도 중대 왕고도 빨리 되었고, 병장 시절에 터치할 사람이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