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표 고무신 / 최재경
내 살보다
뙤약볕 여름날
찬바람 불 때까지
뒤축이
(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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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서정의 원심력과 구심력
- 최재경 2시집『 가끔은 아주 가끔은 』 1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를 발표하는 시인을 만나면 반갑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고, 多辯多辭로 겉칠을 하지 않아도 오랜 세월을 나눈 知己가 되어 좋다. 며칠이라도 보지 못하면 궁금해진다. 만난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을 터이지만, 무슨 작품을 썼을까, 어디를 다녀왔을까, 오늘도 그의 눈빛은 사슴처럼 맑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만남을 기다린다.
최재경 시인이 그러하다. 그의 작품은 먼 곳의 무지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조우하는 자연과 세상의 작은 떨림들을 노래한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사물들의 속삭임이 그에게는 확성기의 소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미세한 현상들이 그에게는 映像처럼 크게 보이는 듯하다.
창포꽃이 수줍다 도랑물이 앙알거리고 뽀얀 종아리가 눈부시다
준비한 말이 뱅뱅 돈다 숨소리 들릴까 물장난을 친다
숲속에서 오월 첫 사랑 쑥국새가 보고 갔다.
― 첫사랑
시인은 도랑물을 바라보며 서있다. 그 물가에 창포가 꽃을 피우고 있다. 도랑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 창포 하얀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눈부신 창포의 종아리를 보면서 그는 정신이 아뜩하여 준비한 말까지 잊는다. 창포와 대화(숨소리)를 나누기 위해 손으로 물방울을 튀겨 是是非非 걸어보지만, 창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무안해진 시인에게 쑥국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와 같은 심상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에는 첫사랑의 추억이 정서적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서경적 묘사의 뒤에 숨어 있다. 이처럼 정서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서경적 묘사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는 것이 최재경 시인의 개성이기도 하다.
그의 심중은 <물불은 세월교 건너/ 모퉁이 돌아 비 내리는 들녘/ 수리봉 아래 빈 집으로 들어설 때/ 그대는 저기쯤 다래 숲이 있는/ 풍경 속> (어딘들 꽃 피지 않으랴부분)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대에 대한 시인의 마음은 <섬으로 가려면 아득한데 / 흰 뼈만 들어낸 나무 배/ 마음만 푸르게 흘러갈 뿐/ 떠나지 못해 삭>고 있다. 그는 이런 묘사를 통하여 시인의 정서와 지향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시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
2 ‘생활을 시처럼, 시를 생활처럼’ 살아가는 시인은 흔치 않다. 시와 같은 삶을 영위하도록 현실 생활이 호락호락 놓아두지 않는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어느 정도 사람다운 품격을 지니면서 살기 위해서는 순수와 결별해야 하는 게 현대 시인 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인들은 순수를 지향하며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활은 그와 달리 생활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게 마련이다. 최재경 시인은 ‘시를 생활처럼, 생활을 시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바로 생활의 반영이고, 생활이 시와 오버랩 된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들어오지도 못하고 대문간에 쪽지 한 장 너를 보러 왔더니 너도 없고 시인도 없고 뒤 안에 복사꽃만 지더라 뜰아래 살구꽃만 지더라.
― 너를 보러 왔더니, 부분
최재경 시인이 <빗장 지그시 닫고/ 봄바람 타러 갔었는데/ 들로 산으로 꽃구경 갔었는데> 벗이 찾아왔던가 보다. 그가 집에 돌아와 보니, 대문간에 쪽지가 한 장 붙어 있다. 그 쪽지에 써있는 내용을 마지막 연으로 구성하고 있다. 시인을 만나러 왔더니, 시인은 없고, 복사꽃과 살구꽃만 지고 있더라는 전갈이다.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시인이 얼마나 아쉬워했을 것인가는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이런 傷心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그만의 서정적 더듬이에 의해 문학작품을 빚기도 한다.
<물안개 피던 길가에/ 하얀 물싸리 피어나고/ 진달래 꽃잎 마다 이슬지는데/ 목 놓아 우는 새> (꽃상여 길, 부분)에 자신의 哀傷을 얹어 투영한다. 이와 함께 <내 몸 털어 꽃가루 분분할 때/ 속절없이 부는 바람 야속도 하다/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부분) 안주하지 못하는 심상을 토로한다. 이런 바탕에서 볼 때, 그는 끓어 넘치는 애상을 달래고 풀어내는 방안으로 자주 길을 떠나는 것 같다.
가을인가 병이 날 것 같은 시인도 없는 마당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누굴 따라 갔나 마루엔 빈 술상.
― 시인의 향기, 부분
그는 <초저녁달이 떠 있는 집/ 사립문>을 열어놓고 어디론가 떠난다.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산 그림자 내린/ 서늘한 채소밭 아래/ 물든 봉선화 툭툭>지고 있다. 이 작품의 표면적 의미만으로 추정하면, 그는 가을이 오기 전에 길을 나섰다가 가을이 되어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돌아와 보니, 오래 전에 먹던 술상이 아직도 <빈 술상>으로 그를 맞는다. 이런 서정적 상황을 맞아 그는 초저녁달을 불러 다시금 술을 마시며 쓸쓸한 정취에 젖어 있을 것 같다. 이런 시상의 전개는 절대고독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는 <나 가는 날까지/ 저 잎새처럼 살다 갔으면/ 물든 단풍잎처럼 고왔으면// 나 가고 없는 날/ 내 자리에 내린 단풍/ 지금처럼만 하였으면// 빈 산에 홀로/ 외로울 것> (나 가고 없는 날, 전문) 같아서 아름답게 지고 싶다고 비탄한다. 그리하여 그는 <머물 수 없는/ 별자리가 부럽다>고 노래하기에 이른다.
3 잘 나가던 건설회사 경영을 접고 낙향하여 농사를 짓는 일은 아무나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논과 밭을 경작하며 사슴을 기르고, 다시 시간을 내어 문학 창작의 밭을 경작하는 그에게 외로움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외로움에 젖어 있는 듯하다. 心琴을 나눌 지기를 자주 만날 수 없기 때문일 터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물들에 자신의 서정을 의탁한다.
<시방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 기력만 다하면 가야 할/ 늙은 고욤나무가/ 묵정밭에 쓸쓸하게 서있다. (늙은 고욤나무, 부분)고 노래하여, 고욤나무에 자신의 정서를 이입시키기도 한다. 이 역시 늙은 고욤나무가 쓸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쓸쓸하기 때문에 빚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쓸쓸함에 침잠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낸다. 이를 통하여 그의 작품 전편에 녹아 있는 애상적인 정서를 극복한다.
풀잎을 치우다 손을 베었다 길쭉한 잎이 날이 선 칼이었다
풀 속에 손을 넣어본다 작은 새알이 만져지고 품다 만 어미 새 온기가 남아 금방이라도 콕하고 나올 것만 같다
풀 대궁 서너 뼘 위에 작은 새 둥지 숨소리 들린다 베인 손이 아려온다 어미 새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 작은 새 둥지
억새풀 사이에 있는 새의 둥지를 만난 시인은 그 속이 궁금 했던가 보다. 풀잎을 치우고 안을 들여다보려다가 억새에 손을 벤다. 피가 나고 쓰라리지만, 둥지 속의 새 알, 그 온기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절감한다. 시인의 상상은 새의 알에서 숨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감하게 작용한다. 그는 <베인 손이 아려온다>면서도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여 <어미 새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고 서술한다. 그의 문학적 지향은 사물과 서정이 하나가 되는 物我一體의 시심을 보이면서, 농사를 짓는 시인답게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다. 때로는 잔잔한 서정으로 삶의 喜怒哀樂을 투영하여 폭넓은 감동을 생성한다. <종일 사닥다리에 올라/ 벌레처럼 생긴 오디를 따 술을 담더니/ 질펀하게 앉아/ 보라색 물이 든 손으로/ 자주감자를 까는 아내를 본다.> (자줏빛 사랑, 부분)에서 ‘오디’와 ‘자주감자’ 그리고 ‘아내’로 연계된 그만의 독자적 사랑을 진지하게 노래한다. 그리하여 <반지르르 애호박이 볕에 그을려/ 손국수 끓인 저녁상에/ 올려도 좋을 성싶다.> (해찰하는 여름, 부분)고 安分知足의 삶을 노래한다.
최재경 시인은 <꽃 핀 자리에 별빛 내려/ 가슴 어디쯤으로/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을 아름다운 사랑을 찾기 위하여 <길 위에 서 있>다고 노래한다. 이처럼 꽃과 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심을 유지하며, 앞으로 더 순수하고 멋진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나아갈 것 같다.
이런 믿음 때문에 오늘도 그가 그립다. 사슴의 눈을 닮은 그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립다.
/ 리헌석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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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