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름 333333333333
제 목 함락되는 대청의 수도 ---- 2차 아편전쟁 ( 애로우호 전쟁)
크기변환_PKG18.jpg
제2차 아편 전쟁
1856년 영국 침략자들은 중국을 향해 새로운 무장공격을 발동하였다. 이듬해 그것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중국 침략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남경조약(南京條約)> 등 불평등 조약보다도 더욱 많은 식민특권을 약탈하려는데 있으며 그 실질은 제1차 아편전쟁의 계속과 확대이기 때문에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영 아편전쟁 이후의 10여 년 사이에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자본주의 경제는 진일보된 발전을 가져왔으므로 외국으로의 침략을 확장하여 새로운 시장과 원료산지를 찾는 것이 절박하게 요구되었다. 원래 중국과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 만으로는 이미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청정부가 태평군(太平軍)의 공격을 호되게 받아 낭패하여 있고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차례 청정부와 교섭하여 <남경조약(南京條約)>, <황포조약(黃埔條約)>과 <망하조약(望厦條約)>에 대하여 전면 수정을 요구함으로서 더욱 많은 식민지 특권을 수탈하려 했다. 그들은 외교적 위협이 실패하자 무력으로 대처하려고 결정하였다.
이해 10월 영국에서는 <아라(亞羅)선사건>을 구실로 새로운 중국 침략 전쟁을 도발했다.
23일 영국 해군 상장(上將) 서마미각리(西馬糜各厘)는 군함 3척, 보트 10여 척, 해군 육전대 약 2000여명을 인솔하고 호문(虎門) 입구를 향하여 진군함으로서 제2차 아편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당시 ”이무(夷務-왜적의 침입에 관한 사무)“를 책임지고 계획하고 실시하는 청정부의 흠차(欽差) 대신이고 양광(兩廣)의 총독인 엽명침(葉名琛)은 뜻밖에도 이에 무관심하며 영국군은 허장성세에 불과하여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해가 지면 저절로 돌아갈 것이다“고 여겼다. 또한 수비군들에게 명을 내려: ”적 군함이 항구로 들어와도 대포로 반격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리하여 영국 함대는 그 어떤 저항도 당하지 않고 순조롭게 호문(虎門) 요새를 지나, 주강내하(珠江內河)로 돌입하여 광주(廣州)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광동(廣東)의 인민과 일부 애국 장병들은 침략자의 각종 폭행을 목격하고 비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켜 여러 가지 형식으로 적들을 타격하였다.
12월, 광주시(廣州市)의 군중들은 의분을 가득 안고 성 교외에 있는 13개 외국인 은행과 상점, 음식점들을 불살라 버렸고 침략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전부 배 위로 도망갔다.
이듬해 1월 광동(廣東) 수사(水師) 30여 척의 배들을 소집하고 다른 방향에서 주강(珠江)에 정박해 있는 영국 군함 3척을 포위 공격했다.
22일 영국군은 하는 수 없이 호문(虎門) 입구 밖으로 철퇴하고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청정부는 ”싸움을 멈추는 것이 긴요하다“는 방침을 받아들였다. 함풍제(咸豊帝)는 엽명침(葉名琛)의 ”수륙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는 거짓 보고를 접하고는 곧 명을 내려 그에게 침략자와 의화(議和)하고 ”전쟁의 발단을 없애“라고 했다.
중국 침략 전쟁을 확대하기 위하여 영국의 파맥존(巴麥尊) 내각은 3월에 군비를 늘이는 것과 원동군(遠東軍)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강제 통과시켰다.
4월, 본토와 모리구사(毛里求斯), 싱가폴, 인도 등지에서 2900여명의 병사를 소집하고 아희백납모(阿希伯納姆)를 해군 사령으로 하고 원정군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동시에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의 나라와 조회(照會)하고 그들과 연합하여 출병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도 일년반 전 광서(廣西)에서 발생한 ”마신보(馬神甫)사건“을 구실로 전쟁에 가입했다.
12월, 영국, 프랑스는 5600여명이나 되는 중국 침략 연합군을 끌어 모아 홍콩, 마카오 지역에 집결했다. 28일 연합군 32척 함정의 100여 개 대포는 동시에 광주성(廣州城)을 사격했다. 다음날 광주(廣州)를 점령했다.
30일 광동(廣東)의 순무(巡撫) 백귀(柏貴)와 광주(廣州) 장군 목극덕(穆克德)은 투항했다.
1858년 1월 엽명침(葉名琛)이 연합군에게 잡혀 인도 가이각답(加爾各答)으로 압송되었다(이듬해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미국, 러시아의 종용 하에 청정부를 핍박하여 신 조약 체결을 목적으로 차례로 3번이나 북침했다.
이해 4월 20일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4개국의 공사(公使)들은 백하구(白河口) 밖에서 회합했다.
24일 그들은 각각 청정부에 각서를 보내어 전권을 대표하는 대신을 파견하여 북경(北京) 또는 천진(天津)에서 담판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와 프랑스의 공사(公使)는 6일 내에 답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했고; 미국과 러시아는 ”조정(調停)“의 기호를 내걸고 청정부를 하루빨리 회담할 것을 권고했다. 때를 같이하여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함대는 계속 대고구(大沽口)로 이동하여 각종 공격 준비를 진행했다. 대고구(大沽口)는 천진(天津)의 문호로서 입구에서 30리 떨어진 곳에는 란강사(攔江沙)가 있어 이것을 ”구외지험(口外之險)“이라 칭했다. 해구(海口) 남북 양 기슭에는 4개 포대가 세워졌고 700여명이 지키고 있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대고구(大沽口) 앞에 이른지 5일이 되는 날에야 담정양(譚廷襄)과 직이(直隶) 제독 장전원(張殿元) 및 포정사(布政使) 전흔화(錢炘和) 등은 그제야 8000명 군사를 인솔하고 신기영(神機營) 대포를 휴대하고 급히 달려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5월 19일 영국, 프랑스는 담판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그 연합군은 ”사래니(斯萊尼)“호, ”복수자“호 등 16척의 함정과 20여 척의 삼판선으로 해군과 육전대 약2000여명을 싣고 란강사(攔江沙)의 안으로 쳐들어 왔다.
20일, 두개 부대의 포정이 대고구(大沽口) 안으로 들어와 동시에 양쪽 기슭의 포대를 폭격했다. 마침 포대의 병사들이 적들과 혈전을 벌리고 있는 때에 담정양(譚廷襄), 전흔화(錢炘和) 등은 대고촌(大沽村)에서 가마를 타고 도망을 가 포대는 홀로 분투하게 되었고 사춘원(沙春元), 진의(陳毅) 등은 총에 맞아 희생되었고 각 포대는 잇따라 함락되었다.
26일, 연합군의 군함은 천진(天津) 성 아래까지 이르렀고 아울러 북경(北京)을 위협했다.
6월 청정부는 핍박에 못 이겨 대학사(大學士) 계량(桂良) 등을 천진(天津)에 파견하여 강화하도록 하며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제의한 요구를 전부 승낙하고 26일, 27일에 각각 4개국과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했다.
1859년 6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들은 청정부와 조약문본을 교환한다는 구실로 연합군의 함대를 인솔하여 두 번째 북침을 했다.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한 후 청정부는 조약에 대하여 다소 수정할 것을 제의하고 또한 공사들이 북경(北京)에 주거하는 것과 장강을 개방하는 조례를 취소하려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정부는 오히려 중국에서 사취한 각종 특권에 대하여 “조약중 상무(商務)와 관련된 항목이 불만스럽다”고 하면서 조약서를 교환하는 시기를 이용하여 다시금 전쟁을 도발하여 청정부로부터 더욱 많은 권익을 사취하려고 모략했었다.
17일 침화 영군 해군 사령 하포(賀布)는 연합군의 함대를 인솔하여 대고구(大沽口) 밖에까지 진입했다. 이때 대고구(大沽口)의 방어는 과이심(科爾沁) 친왕(親王) 승격림심(僧格林沁)의 인솔하에 어느 정도 강화되었고 포대는 6개로 늘였고 60개의 여러 가지 신형 대포를 안치하고 4000여명이 군사가 주둔해 있었다; 또한 천진(天津)과 30여 리 떨어진 쌍항(雙港)에도 13개 포대를 신축하였고 81개의 대포를 안치하였으며 게다가 신하(新河), 신성(新城) 및 북당(北塘) 등지에 6000여명이 군사를 주둔시켰다. 25일 연합군의 포대 군함 13척이 해구(海口)로 몰려 들어와 장애물을 제거하고 양쪽 기슭의 포대를 향하여 폭격했다. 수비군 사영춘(史榮椿)과 용여원(龍汝元)이 남북 양쪽 기슭의 포대를 지휘하여 화력을 집중하여 연합군의 기함인 “물떼새”호의 함장 등 여러 명을 죽이고 하포(賀布)도 중상을 입었다. 오후까지 싸움은 지속되었는데 참전한 연합군의 거의 모든 함정들을 격상하였다. 미국 원동 함대 사령 달저나(達底拿)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참패한 정경을 목격하자 “조정인(調停人)”이라는 가면을 버리고 즉시 “탁의왕(托依旺)”호를 보내어 집결 지역에서 전쟁 구역으로 쳐들어 왔으며 또한 미국 수병을 상륙하게 하여 영국 포함에 참가하여 싸우도록 명령했다.
이날 오후 5시, 하포(賀布)는 또 명을 내려 륵몽(勒蒙) 상교(上校)에게 연합군의 육전대 천여 명을 인솔하고 돛배와 삼판선 20여 척을 나누어 타고 미 함정 “탁의왕(托依旺)”호와 연합군의 포함 2척을 이끌고 해구(海口)의 남쪽 기슭으로 강행 상륙함으로서 남쪽 기슭의 3개 포대를 먼저 함락하려고 기도했다. 한 주야를 싸웠지만 참패하고 다시 남으로 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대고구(大沽口)의 싸움에서 청군(淸軍)은 영국군의 함정 4척을 침몰시켰고 6척을 부수고 570여 명을 살상함으로서 침략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연합군의 참패 소식이 런던, 파리로 전해졌고 영국,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 대하여 “대규모적인 보복”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860년 봄, 육군 중장(中將) 격란특(格蘭特)과 해군 중장(中將) 맹탁반(孟托班)이 2만5천의 연합군을 인솔하여 206척의 함선을 나누어 타고 세번째 북침을 했다.
4월 주산(舟山)을 점령하고 5월에 영국군이 대련만(大連灣)을 점령했다.
6월 프랑스군이 연태(烟台)를 점령하고 발해만(渤海灣)을 봉쇄하였다. 이때, 청정부는 태평천국 혁명운동의 진압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영국 프랑스 침략자들에 대하여 제대로 방어를 강화하지 못했다.
8월초, 격란특(格蘭特)과 맹탁반(孟托班)이 연합군의 31척의 함정과 5000여명의 육군 부대를 인솔하고 빈틈을 타서 북당구(北塘口)로 상륙하고 계속해서 북당진(北塘鎭), 신하(新河), 당고(塘沽)를 점령했다.
21일 모든 야전포와 함포의 화력을 집중하여 대고(大沽)의 북쪽 기슭의 포대를 맹열히 포격했다. 직이(直隶) 제독, 북쪽 기슭 포대의 총지휘인 락선(樂善)이 수비군을 감독인솔하여 적들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 저항을 하다가 불행히 전사하였고 수비군의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승격림심(僧格林沁)은 북쪽 기슭 포대가 함락된 것을 보고 남쪽 기슭의 수비군을 이끌고 천진(天津)으로 철퇴해 갔고 곧 이어 통주(通州-북경시통현(北京市通縣))로 철퇴했다.
24일 연합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천진(天津)을 점령했다. 몇 차례에 걸친 담판이 결렬된 후 또 잇따라 장가만(張家灣), 팔리교(八里橋) 등지를 함락했고 북경(北京)으로 다가갔다.
10월 5일 적의 선두부대가 성북의 안정문(安定門), 덕승문(德勝門)으로 바짝 접근했다. 그후 황사(黃寺), 흑사(黑寺)를 지나 서북으로 향했고 원명원(圓明園)을 점령했으며 진귀한 문물과 금은 보석들을 마구 약탈하고 불을 질러 전당과 부근의 민가를 태워버렸다. 청정부는 침략자들의 무력 위협 하에 제국주의와 <천진조약(天津條約)> 문본을 교환하고 또한 <북경조약(北京條約)>도 체결했다.
11월, 연합군은 차례로 북경(北京)에서 철퇴해갔고 제2차 아편전쟁이 결속되었다.
그림 6-3-2
이번 아편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고 제1차 아편전쟁이 중국사회에 대해 조성된 결과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청정부는 영국, 프랑스의 군사적 협박과 정치적 사취 하에 권력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함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으로 양보하여 침략자들이 제의한 각종 무리의 요구를 죄다 만족시켰다. 이로서 중국사회의 반식민지의 정도를 더욱 심화시켰고 중국인민에게 더욱 심각한 고난을 안겼다.
IP Address : 24.148.83.203
2007-01-24 16:20:18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