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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국호가 "한 글자"인 이유는?
중국의 국명은 거의 대부분 한 글자이다.(전한, 후한, 서진 등의 명칭은 모두 그 전 왕조와 구분을 위한 것이지 실상은 모두 한 글자였다)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고대 이상 국가인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서 파악해야 한다
중국 봉건제도를 완성한 주나라(특히 이상적인 정전제 확립한)는, 중앙의 왕이 지방의 혈연 관계인 제후들에게 땅을 분봉 하였다. 그때, 그 땅이름은 각기 1글자로 정하여 부르기 쉽게 짓게된다. 예로 진, 송, 연, 제, 한, 송, 월, 오 등이 바로 그 명칭이다.
즉, 처음부터 국가이름이, 한 글자였던 것이 아니라, 주나라가 지방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면서 한 글자의 명칭으로 불렀던 것다.
2. 춘추전국 시대부터 시작된, 각 나라의 "국호 제정법"
그러나, 주나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제후들은, 주나라가 지역별로 할당한 이름을 그대로 국호로 계숭하여 사용하게 된다. 즉, 이에 해당하는 국가각, 진나라, 송나라, 연나라, 제나라, 한나라 등이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국가들도 특별한 의미로 국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이 웅거한 지역의 명칭을 따라, 노나라, 촉나라 등으로 이름을 지게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명을 따서 국호를 정한 것이 아니라, 그 지명에 걸맞은 작위를 받거나, 왕의 칭호를 받았을 때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들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그 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시황제도 진나라 그리고, 당왕었던 이연이 당나라를 칭하는 것)
한국의 경우와 같이, 덕업을 알리고 국가를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지은 신라나, 마을이나 고을에서 파생되었다는 뜻의 구려라는 명칭(고구려) 등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는 처음에 십제였다가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백제로 호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고구려, 고조선에 대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국호를 정하였다.
3. 진시황 이 후의 국호 제정법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처음부터 진국이라는 전국시대 소국의 지방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나라도 유방은 촉한의 영주였다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한이라고 명칭을 이어서 사용한다. 물론 진과 한의 국호는 지역의 영토에서 웅기했다는 대표성 뿐만 아니라, 진왕과 한왕이라는 왕의 칭호를 가진 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같은 국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특히 차이나는 진에서 유래되었고, 400년을 이어간 한나라가 중국 고대 사회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에, 중국의 글자를 한자, 중국의 민족을 한족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주대 이후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단 한 글자로 국호를 정하는 것을 하나의 국호제정 법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4. 신나라의 왕망은 이름의 작명도 오직 한글자만 사용하게 한다
중국에서는 상위의 진리는 모두 한 글자이며, 하위는 두글자를 쓴다라고 한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중국의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이름도 모두 외자인 경우가 많다.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세운 왕망은, 문명인인 중국인이 2음절의 이름을 짓는 것은 오랑캐와 같은 수치라 하여, 모든 중국인들에게 한 글자로만 이름을 작명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5. 그러나 무너지게 되는 중국의 자존심
그러나, 이러한 한글자의 국호 원칙은, 중국 송나라에 이르면서 깨지게 된다.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은 유약한 왕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송나라는 이민족 국가인 몽골, 여진, 거란 등이 한글자의 중국식 명칭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송대 이전까지는 보통 2글자를 쓰던, 북방민족들도 송대 이후부터는 요, 금, 원 등의 한 글자 명칭을 쓰면서, 자신들도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음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지역 명칭과 자신이 그 지역의 왕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1글자로 국호를 짓던 풍습은, 이민족 국가인 몽골의 “원나라”가 중국 전역을 지배하면서바뀌게 된다.
원나라는 이민족으로서 몽골인이었다. 즉, 몽골은 굳이 중국의 지명이나, 중국의 왕 칭호에서 유래하여 자신들의 국호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몽골의 원나라는 “역경”에 있는 “대재건원”이라는 용어에서 ‘원“을 빌려서 자신들의 국호인 ”원“이라고 작명하게 된다.
즉, 이는 몽골 제국이 한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국호는 지명이나 가문이 가졌던 왕의 호칭이 아니라 “좋은 문장의 좋은 문구”에서 유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6. 지역명 이나, 가문이 가진 왕의 호칭에서, 국호를 짓던 관습이 무너지다
원대 이후 명, 청 등의 나라들은(명나라는 한족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이름이 아니라 좋은 문장에서 국호를 차용하게 된다. “맑다, 깨끗하다”라는 뜻의 “청”을 국호를 쓰게 되는 것이 그 예이다. 명나라의 경우는, 이민족인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중국 전통 국가인 “송”을 재건하겠다는 뜻에서 강남에서 일어났지만, 그 국호는 “밝을 명”을 사용하게 된다.
중국의 국호는 이러한 “한 글자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7. 쑨원에 의해, 서구식 근대적 국호를 사용하다.
이 한 글자 원칙은, 서구적인 근대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통적 전제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을 택한 쑨원에 의해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사라지게 된다. “중화민국”이란, 중국 전통의 국호 제정법이 아닌, 서구식 국호를 사용한 것 이다.
ps) 중국의 소수민족의 결혼풍습
1. 무자정서(無字情書)
운남의 경파족(景頗族)은, 남녀간에 연애를 할 때, 자주 식물잎으로 "사랑편지"를 대신한다. 이 사랑편지에는 글자가 없기는 하지만, 의미는 아주 명확하다. "포사(蒲榭)"라는 잎은 "네가 어디에 숨더라도 나는 너를 찾아내겠다"는 의미가 있고, "석근합(石根哈)"이라는 잎은 "나는 진심으로 너에게 청혼하니 제발 나를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의미가 있고, "목극(木克)"이라는 잎은 "우리 둘이 영원히 서로 사랑하고 절대 변심하지 말 것을 맹세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막나(莫那)"라는 잎은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상대방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의미이다.
하니족(哈尼族)의 남녀는 연애할 때, 남자가 한다발의 생화(生花)를 여자에게 보내는데, 여자는 다시 한다발의 생화를 남자에게 보낸다. 만일 받은 꽃이 홀수이면 여자측이 동의한다는 것이고, 받은 꽃이 짝수이면, 남자측을 거절한다는 의미이다.
2. 착벽담혼(鑿壁談婚)
귀주 여파(荔波)의 흑고요족(黑褲瑤族)의 사람들은 여자가 16,7살이 되면, 부모는 그녀를 단독으로 대문곁의 "담혼방(談婚房)"으로 옮겨 거주하게 한다. '담혼방'은 바깥벽과의 사이에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어 놓는데, 이것을 '담혼동(談婚洞)'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마음에 들면, 남자는 한밤중에 여자를 깨워서 두 사람은 '담혼동'을 통해서 벽을 사이에 두고 연애를 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측도 마음에 들면, 계속 논의해서 혼인을 진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얘기를 그만두게 된다.
3. 혼전실습(婚前實習)
대만의 아미족(阿美族) 남녀는 일정기간 연애를 하고 나면, 여자측이 남자의 집으로 가서 한동안 일을 해주게 되는데, 이를 "미달별(米達別)"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결혼 전의 한 난관이라는 의미이다. 이 풍습은 여성의 가정에서의 지위에서 비롯되었다. 관례에 따르면, 아미족 사람들은 가정경제생활과 집안 일을 모두 주부가 책임지는데, 결혼전에 여자가 남자네 집으로 가서 '실습'을 하는 것은 애정을 공고히 할 뿐아니라, 여자가 집안살림을 제대로 꾸려갈 수 있을지를 시험하고 단련시키는 의미가 있다.
'실습'기간동안 여자는 남자집에서 함께 먹고 함께 일하지만, 잠은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잔다. 실습기간은 남자집에서 결정하는데, 2,3개월에서 1년까지 서로 다르다.
만일 실습기간동안, 남자집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고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아주 적고, 대부분은 순조롭게 관문을 넘겨서 결혼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4. 남자출가(男子出嫁)
광서의 서림(西林), 전림(田林) 일대의 산지에서는, 지금까지도 옛날식의 '데릴사위'풍습이 전해져 온다. 남자가 여자네집으로 장가드는 것이다. 자손은 모두 모친의 성을 따른다.
아들, 딸이 모두 있는 집안에서도 아들은 장가보내고, 딸이 사위를 맞이하게 된다.
데릴사위풍속은 남자측에서는 혼인에 필요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모두 여자측에서 준비하게 된다. 결혼하는 날 밤에 여자측의 성씨를 사위에게 주어 사위는 성을 바꾸게 된다. 사위와 여자집(아내가 되는)의 같은 남자오빠나 동생은 형제간으로 칭한다. '매부' '제부'와 같은 칭호는 금기시된다.
5. 주가영친(酒歌迎親)
호남성 성보묘족(城步苗族) 자치현과 광서 용승(龍勝)지방에서는 묘족청년이 결혼할 때, 쌍방에서 반드시 가수를 한명씩 초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집에서 주가(酒歌)를 부른다.
주가는 고정된 곡조와 가사가 있으며 모두 360행이며, 15000자이고 9개 부분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하루밤낮을 부르게 된다. 첫부분은 "난문가(攔門歌)"로서 남녀측의 가수가 산채문앞에서 서로 겸손과 감사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둘째부분은 "십절(十切)"로서 쌍방이 10곡을 서로 부르는데, 각 산채와 족속의 풍속을 반영한다. 셋째부분은 "마야진지(麽爺陣地)"로서 묘족의 기원과 이주과정을 서술하는 노래이다. 네째부분은 "결친로(結親路)"로서 묘족의 혼인의 기원과 범위를 설명하는 것이다. 다섯째부분은 "삼대근기(三代根基)"로서 쌍방의 조상3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여섯째부분은 "봉친(鳳親)"으로 혼인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일곱째 부분은 "과정(過定)"으로 쌍방의 가수는 어른의 말투로 신랑,신부에게 훈계하는 내용이다. 여덟째부분은 "사주가(謝主家)"로서 남자측 가수가 남자측을 대신하여 여자측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아홉째부분은 "용선가(龍船歌)"로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매 곡을 노래할 때마가 사람들은 뒷쪽을 따라불러서, 아주 요란하다. 주가를 다 부르고 나면 영친하는 사람들이 신부를 맞이해서 웃으면서 돌아가게 된다.
6. 담리변색(談離變色)
동북지방의 다오얼(達斡爾)족은 남자가 결혼할 때, 반드시 태양이 떠오를 때 신부를 맞이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가정이 떠오르는 해처럼 영원히 행복하고 아름답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다오얼족은 이혼을 아주 불길한 일로 여겨서 이혼의 '이'자만 꺼내도 안색이 변한다. 속담중에도 "이혼장을 쓴 곳은 3년간 풀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만일 남자측이 이혼을 고집하게 되면, 반드시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 의식은 여자집에서 주최하는데, 남편은 땅위에 엎드리고, 처는 남편의 목을 지나간다. 그 후에 남자집의 부뚜막과 굴뚝에 백포(白布)를 덮는다. 그 의미는 남편이 이미 죽었으므로 정식이혼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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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 ~~ 남자 출가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