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1256년 페르시아에 정착하여 자신의 나라인 일칸국을 세웠으며, 1258년에는 현재 이라크를 다스리던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아바스 왕조의 군주이자 예언자 무하마드(이슬람교의 창시자)의 자손인 알 무스타심을 죽였다.
2년 후인 1260년, 훌라구가 보낸 사신이 맘루크 왕조의 수도인 카이로에 도착해 서신을 전달했다. 그 서신에는 몽골군이 천하무적이고 어느 나라도 상대할 수 없으니, 맘루크 왕조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인다는 끔찍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쿠투즈는 몽골 사신들을 죽여 버리고 그 목을 카이로의 대문인 ‘밥 주웨일라’에 높이 매달아, 결코 항복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자고로 몽골인들은 사신을 죽인 나라는 반드시 공격하는데, 쿠투즈의 이런 행동을 알게 된 훌라구는 분노하여 이집트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마침, 멀리 중국에서 남송 왕조와 전쟁을 벌이던 몽골제국의 황제인 몽케칸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단 황제가 죽으면 몽골의 황족들은 서로 모여서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대회인 쿠릴타이를 갖는데, 훌라구도 황족이라 서둘러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동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훌라구는 부하 장군인 키트부카에게 약 1만 정도의 병력만 맡겨 놓고, 원정군 병력의 대부분을 이끌고 몽골 본토로 철수했다.
첩보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쿠투즈는 제아무리 막강한 몽골군이라도 해도 주력 부대가 떠난 이상,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겨 1만 2천 명의 맘루크 부대와 수만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현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부근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1260년 9월 2일, 예루살렘 부근의 작은 마을인 아인잘루트에서 이집트 군대는 몽골 군대를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키트부카는 이집트 군대에게 붙잡혀 처형을 당했고, 몽골군은 궤멸 당했다.
비록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칸국의 몽골인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훌라구는 1265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인 아바카(집권: 1265~1282년)가 일칸국의 두 번째 군주가 되었다. 아바카는 아버지 훌라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럽의 기독교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 자신도 동로마의 공주인 마리아 팔레올로고나와 결혼을 하였다. 또한 중동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인들과도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조지아인들은 이슬람 세력들한테 오랫동안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려는 몽골인들한테 호의적이었다.
그러던 와중인 1277년 4월, 맘루크 왕조의 술탄인 바이바르스는 시리아에서 룸 셀주크(터키에 정착한 셀주크 제국의 후계 국가)로 쳐들어갔다. 이때 룸 셀주크는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바이바르스는 몽골에 가급적 많은 타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룸 셀주크로 쳐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룸 셀주크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을 엘비스탄에서 공격하였고, 이리하여 엘비스탄에서 맘루크 군대와 일칸국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1277년 4월 15일).
엘비스탄 전투 당시, 맘루크 군대와 몽골군은 모두 1만 4천 명 가량이었는데 몽골군에는 적어도 3천 명의 조지아인들과 그 수를 알 수 없는 룸 셀주크인들의 보조 군대도 포함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먼저 몽골군이 공격을 했고, 이에 맘루크 군대의 중무장 기병들도 맞서서 돌격했다. 전투 와중에 맘루크 군대에 포함된 많은 수의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족) 비정규병들이 죽었다. 이때 몽골군은 맘루크 군대의 왼쪽 측면을 노리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술탄의 군기를 든 사람인 산자키야가 죽었다.
그러나 맘루크 군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바이바르스 자신은 왼쪽 측면을 공격하는 몽골의 오른쪽 측면에 반격하기 위해 몇 명의 군대와 함께 서둘러 이동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그의 군대 왼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시리아의 하마에 주둔시킨 군대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맘루크 군대는 수적으로 몽골군보다 많아졌고, 몽골군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불리해진 몽골군들은 후퇴하는 대신 말에서 내려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 하지만 결국 맘루크 군대의 포위망이 몽골군을 조여와 대부분의 몽골군은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소수의 몽골인들만이 달아날 수 있었다.
엘비스탄 전투는 맘루크 왕조의 승리이자 일칸국의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6천 명에서 1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조지아인들과 룸 셀주크인들도 2천 명 가량의 인명 피해를 입었던 것에 반해 맘루크 군대의 피해는 그들보다 적었다.
한편 엘비스탄 전투 무렵,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은 셀주크 군벌인 페르반(Pervane)과 그의 셀주크 군대가 서로를 도와주기를 기다렸지만, 페르반은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두 진영을 상대로 동맹을 맺을 것처럼 굴다가 끝내 어느 편도 돕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비록 승리했지만 바이바르스는 결코 몽골군을 얕보지 않았다. 그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의 중심부)의 중심부에 있는 카이세리(Kayseri)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277년 4월 23일에 입장했다. 이슬람교의 금식일인 라마단(한 달 동안 낮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축제인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의 자리에서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군대 장교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 내 군대의 기병 1만 명이 몽골군 3만 명을 만나면 그들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7천 명의 몽골군을 만났다. 몽골군은 나의 모든 군대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내 군대는 절망했다. 몽골군은 우리 군대의 좌측을 쳐부수었다.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를 이겼을 것이다.”
축제가 끝난 후 바이바르스는 룸을 떠나 곧바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갔고 거기서 병에 걸려 죽었다(1277년 7월 1일). 하지만 바이바르스가 죽었어도 맘루크 왕조와 군대는 여전히 건재했다.
엘비스탄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분노한 아바카는 룸 셀주크 동부의 이슬람교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고,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몽골군한테 학살당했다. 아울러 아바카는 군대를 보내 바이바르스한테 충성을 선언한 카라만 투르크멘족들이 일으킨 반란도 진압해야 했다.
그리고 아바카는 페르반을 붙잡아서 그의 눈을 멀게 했지만, 몽골 귀족들과 귀족 여성들은 페르반을 죽이도록 설득했다.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아르메니아의 헤툼 왕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바카와 고위 몽골 인들이 복수의 뜻으로 페르반을 죽여 그의 살을 먹었다고 한다.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292~301쪽
첫댓글 아인잘루트와 엘비스탄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을 이겼군요
네, 그 이후로도 맘루크 군대가 거의 대부분 몽골군을 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