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2차 홈스 전투로부터 18년이 지난 1299년, 가잔 칸은 6만 명의 몽골군을 이끌고 4만 명의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된 보조 부대를 이끌고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의 국경인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시리아 동부의 도시인 알레포를 점령했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군과 그 동맹군들이 쳐들어왔으니, 맘루크 왕조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
당시 시리아에 있던 맘루크 왕조의 술탄인 알-나시르 무함마드는 알레포 함락의 소식을 듣고는 2~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299년 12월 22일 오전 5시에 와디 알 카즈나다르에 있는 홈스의 북동쪽으로 진군하여 가잔 칸이 이끄는 10만 명의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사건을 가리켜 3차 홈스 전투, 혹은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라고 부른다.
3차 홈스 전투는 몽골군을 향해 맘루크 기병들이 돌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 후에 몽골 중기병들이 맘루크 기병들한테 맞돌격을 하는 동안, 몽골 궁수들이 말 뒤에 서서 맘루크 군대한테 화살을 쏘았다.
전투 초반에 몽골군과 그 동맹군 및 맘루크 군대는 가까이서 백병전을 벌였던 듯하다. 결국 오후에 맘루크 군대의 오른쪽 측면이 몽골군에 의해 뚫렸고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에 의해 대오가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궁지에 몰려 패색이 짙어졌다.
몽골군은 맘루크 군대의 대열을 뚫고 돌파하여 전장을 완전히 장악했고, 나머지 맘루크 군사들을 쫓아냈다.
이 때의 정황을 두고 맘루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맘루크 군인은 200명만 죽었던 반면 몽골군은 5천 명에서 1만 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맘루크 군대의 오른쪽 측면이 무너졌는데 전체 전투에서 고작 죽은 병사가 200명 뿐이라는 부분에서 사실상 거짓으로 보인다. 아울러 몽골군이 전장을 장악하고 맘루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시리아의 도시인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사실에서 맘루크 군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맘루크 군대는 남쪽으로 다마스커스를 향해 달아났다. 그러나 도중에 그들은 1만 2천 명의 마론파(중동의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윤회와 환생을 믿는 이슬람교 이단 종파)의 궁병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물라이 장군이 이끄는 한 무리의 몽골군 별동대는 이집트의 가자 지구에까지 맘루크 군대를 추격하였다.
그와 반대로 가잔 칸이 이끈 몽골군 본대는 계속 남쪽으로 행진하여 다마스쿠스를 약탈하였고 곧바로 철수하였다. 그 이후에 다른 맘루크 군대가 도착하여 다마스쿠스를 되찾았다.
3차 홈즈 전투 이후로 몽골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계속 쳐들어와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도착했다.
그나마 1300년에 들어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국가인 차가타이 칸국이 일칸국을 공격하느라 일칸국이 군대의 대부분을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돌릴 때까지, 소규모의 일칸국 군대가 가자 등지의 팔레스타인 전역을 습격했다.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309~313쪽
첫댓글 예루살렘까지 몽골인들의 군대가 쳐들어왔군요 차가타이 칸국이 일칸국을 공격하느라고 일칸국의 군대가 돌릴 때까지 팔레스타인 전역을 습격했군요
이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가 사실상 일칸국이 맘루크 왕조를 상대로 제대로 싸워서 이긴 전투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