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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jager
"... 이러한 혹독한 대숙청의 시기에도 굴복을 거부한 자들이 있었다. 바로 체첸인들이었다. 그들은 관리들에게 복종하거나 아첨하지 않았고,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우습게 봤다. 그것도 한 개인이나 한 부락이 아닌 하나하나가 합쳐진 민족 전체가 그러하였다. 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소비에트조차도 그들을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 알렉산더 솔체니친의 '수용소 군도' 중에서
1980년대에 들어서자, 강대했던 소비에트 연방의 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세계 패권을 양분하기 위해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감내해야만 했던 소비에트는 공산주의 이념의 모순과 맞물려서 경제 수준의 파탄을 맞았고, 1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패배로 끝나면서 군사적 패권조차 흠집이 갔다. 강력한 정부 아래 정치적 자유를 제한받던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정신도 점차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 (perestroika) 과 '개방' (glasnost) 을 추구한다. 특히 파탄지경에 이른 소련의 소비 경제를 복구하고 극심한 생필품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달래 정치적 위기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또한 탈이념화를 추구하여 미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완화하고 군축을 실현하고 내수를 증진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과거 스탈린 식의 강력한 국가적 통제를 지양하고 개인적인 영역과 정치적 자유를 증진시키는 방향을 모색하였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소비에트 연방 곳곳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비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를 일깨우는 결과를 낳았다. 그 동안 100여곳에 달하는 타민족들의 자치와 독립욕구를 강력한 연방의 힘으로 찍어눌러 왔는 데, 고르바초프는 그 무거운 덮개를 가볍게 해준 셈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연방에 도전한 민족들 중의 하나가 2차대전 이후에 군사 병합되었던 발트 3국, 특히 에스토니아였다.
발트 3국은 발틱해 연안에 있는 서방국가와 가까웠기에 서구인들의 왕래가 있었고, 특히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 자연히 시대의 흐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러시아의 '개혁', '개방' 정책 이후 3년 뒤인 1988년, 에스토니아는 서서히 소련 연방을 벗어날 시도를 하였다. 이른바 '노래 혁명' 이었다.
에스토니아의 노래 혁명 (Singing Revolution)
1988년 5월 14일, 타르푸라는 도시에서 열린 인기 가요 축제에서 어떤 가수가 에스토니아의 애국가를 불렀다. 연달아 5곡의 민족주의적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소비에트 연방 치하에서는 엄격히 금지됬던 노래들이었다.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며 소리쳤다. 에스토니아인들은 흥분하였고, 그해 연달아 열린 페스티발과 콘서트를 거쳐 호응이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그해 9월이 되자, 30만이 넘는 시민들이 수도 탈리닌의 음악 페스티발에 모여 애국가를 노래하였다. 이는 에스토니아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숨길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호응하여 에스토니아의 지식인과 정계 인사들도 참여하였고, 최초로 독립에 대한 주장이 터져나왔다.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 1서기인 바이노를 추출하였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공산당 청년 동맹'을 폐지하고 공산당에 의한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던 헌법 6조도 삭제하였다.
에스토니아 인들의 기개는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중에는 에스토니아 타르투의 소비에트 전략 공군 기지 사령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가린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우수한 파일럿이었으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1987년에 영국을 겨냥한 전략 핵폭격기 기지의 사령관이 되었다. 소련 공산당의 신망이 두터웠던 이 유능한 장군은 소련 공군 장성이 된 최초의 체첸인이었다. 바로 조하르 두다예프였다.
아프간 전쟁 폭격기 조종사 시절의 두다예프
러시아 아내와 결혼하여 3명의 자식이 있었던 두다예프는 20년이 넘게 소련 공군에 있었다. 그는 체첸인에 대한 러시아의 뿌리깊은 반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오세티야 인'이라고 속였고, 소련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어느모로 보나 우수했던 이 소련 공군 소장은 에스토니아인들의 저항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는 데, 에스토니아인들이 이를 과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다. 두다예프는 스스로가 체첸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소련 연방은 에스토니아의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의회와 방송국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두다예프에게 내려졌지만, 그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시위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을 위해 이동 급식차까지 대절해주었고, 시위대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를 권하기 까지 하였다. 에스토니아 지역 소련군에서 그의 위치가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소련은 추가적인 무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1990년, 타르투의 소련 공군 부대는 철수하였고 두다예프는 군을 사임하고 체첸으로 떠났다.
한편,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의도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였다.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소련 공산당의 보수 세력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고르바초프가 총애하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모스크바 당 제 1 서기였던 옐친은 좀 더 급격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세력에 의해 밀려났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사회의 강력한 열망에 힘입어 그는 압도적 지지를 통해 1989년 소련 인민 대표회의에 당선되어서 다시 중앙 정계에 올라섰다.
공산당의 강력한 적으로 부상한 그는 1990년 5월,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엘친은 거대한 소련 공산당의 해체를 가속화했으며, 연방 내의 공화국들에 대하여 '원하는 만큼 자치권을 움켜쥐어라'고 공언하며 향후 독립국가 연방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보다 급진적이었던 그의 개혁은 공산당 보수파의 더욱 강한 반발을 샀다.
1991년 8월 18일, 공산당 강경파들은 마침내 실력 행사를 하였다. 전차를 동원하여 연방 최고 의회 의사당을 점거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당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크림 반도에 있었고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엘친은 과감히 의사당 주변의 전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리고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공산당 수구세력을 향해 저항할 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의사당에 진입한 전차 주변으로 수천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쿠데타 전차 위의 옐친
대규모 숙청을 위해 수십만 개의 수갑을 준비하고 형무소를 비워놨던 쿠데타 세력들은 전혀 예상밖의 사태를 만났다. 특수부대를 통해 의사당을 점거하고 의원들을 억류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군중들이 몰려있는 상황에서 무력을 행사하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주동 세력들은 하나하나 손을 떼고 모스크바를 도주하였다. 쿠데타는 불과 60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옐친의 사자후에 의해 모여든 비무장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간혹가다가 쿠데타군에 대항하기 위해 AK를 들고 나온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수류탄을 소지하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수류탄을 든 사람 중에는 모스크바 농과 대학을 중퇴하고 컴퓨터 세일즈를 하던, 체게바라를 좋아하는 26세의 젊은 체첸인도 있었다. 샤밀 바사예프였다.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 이 중에 샤밀 바사예프도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부른 민족주의 물결을 코카서스 지방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8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체첸 - 잉구쉬 국민 전선' (CHINFSP)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곳곳에 설립되었던 개혁 지지 단체 중의 하나였고, 체첸 지역의 개혁과 개방을 위한 상대적으로 온건한 주장을 하였다. 즉 구데르메스에 건립 예정이던 대규모 생화학 단지 재검토, 종교의 자유 보장과 체첸 잉구쉬어에 대한 제한 폐지, 대규모 강제 이주에 대한 소련의 사과와 배상 그리고 '체첸과 잉구쉬가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는 식의 잘못된 역사 서술의 교정 등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체첸 지역의 공산당 지부에서도 호응을 얻었으며, 그들의 노력은 1989년, 체첸 공산당 제 1 서기로 도쿠 자브가에프가 임명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자브가에프는 1957년 체첸 - 잉구쉬 자치 공화국 출범 이래 최초로 임명된 지역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다. 32년 만에 처음으로 체첸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됬다는 것은 그만큼 소련 공산당의 통제력에 한계가 가까웠으며, 체첸인들의 자치 요구를 막을 힘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쿠 자브가에프
그러나 1990년 11월, 민족주의 세력과 강경파들은 국민전선을 탈퇴하고 새로운 단체를 구성한다. 바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였던 젤림한 얀다르비예프가 주축이 되어 만든 '전국 체첸 국민 회의' (OKChN)였다. 이들은 체첸 - 잉구쉬 공화국의 주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발표하고, 그해 5월에 그로즈니에 돌아온 조하르 두다예프를 회의 의장으로 추대했으며, 동시에 '국토 수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자브가에프가 주축이 된 국민 전선과 노선을 달리했는 데, 우선 체첸 지역에 아직 존재했던 공산당 지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체첸이 소련 연방의 자치 공화국 수준에 머무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 독립국가 연합의 타 공화국 처럼 러시아와 결별된 동등한 독립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선의 차이가 선명하고 특히 자기를 주축으로 한 공산당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브가예프와 두다예프의 다툼은 필연적이었다. 자브가예프는 체첸과 잉구쉬의 모든 반대당의 활동을 금지하였고, 얀다르비예프를 체포하였다. 국민 회의의 주요 간부들은 외국에서 활동해야 했으며, 특히 두다예프가 인기있었던 발트 3국에 머물러야 했다.
훗날 체첸 2대 대통령이 되는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1991년의 소련 공산당의 쿠데타 기도는 두다예프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자브가예프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옐친의 승리가 확실해진 시점이 되서야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지지를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스런 침묵'은 쿠데타 첫날부터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했던 두다예프에게 역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특히 쿠데타 실패 이후로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 소련 공산당 기구는 더 이상 자브가예프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러시아의 실권을 쥐게 되었던 옐친은 두다예프를 자브가예프보다 선호하였고, 지역 경찰력과 군사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손을 묶어놨다.
마침내 1991년 9월 6일, 조하르 두다예프가 지휘하는 '국토 수비대'는 그로즈니의 소비에트 지역 의사당을 습격하였고, 그로즈니 공산당 지부의 책임자였던 러시아인 바틸리 쿠츠센코를 3층에서 떨어뜨려서 죽였다. 이미 8월 22일에 지역 방송국을 점령했던 두다예프의 병력들은 9월 15일에 마지막 지역 공산당 회의를 열게 하여 자브가예프의 해임과 지역 공산당 의회의 해산을 표결하도록 하였다. 당시 의사당에 없어서 화를 면했던 자브가예프는 체첸을 떠나야 했다.
사실상 체첸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한 조하르 두다예프
사태는 러시아의 예상을 뛰어넘어 전개되었다. 두다예프의 국토 수비대는 지역 자치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체첸의 거의 전역을 확보하였다. 자브가예프의 고향이자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던 북부 지역의 일부만이 두다예프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옐친은 이러한 쿠데타에 항의하며 두다예프를 비난하였지만, 오히려 그의 인기를 올려줄 뿐이었다.
1991년 10월 27일, 체첸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두다예프를 초대 체첸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잉구세티아는 체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들은 강제 이주와 귀향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비옥한 영토인 프리고로든 지방이 이웃 오세티야로 넘어갔는 데, 이를 돌려받기 위해서는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해 4월에 소비에트는 '경계선이 위헌적인 힘으로 변경되기 이전으로 복원'할 것을 명시하는 내용의 헌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잉구세티야는 일단 이 약속을 믿고 러시아에 남기로 결의하고, 두다예프는 이를 받아들였다.
초대 체첸 대통령이 된 조하르 두다예프는 1991년 11월 2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The Chechen Republic of Ichkeria) 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코란에 손을 얹고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체첸의 독립과 자유를 침해하는 적들을 대항하여 죽음으로써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이 긴급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여야 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2달 전인 이 시점에서 체첸의 독립은 다른 민족들의 겉잡을 수 없는 독립 선언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미 연방의 상황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가능한한 충격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독립국가연합 체제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하여 11월 8일, 옐친은 체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틀 뒤에 600명의 내무부 소속 타격 부대를 그로즈니로 급파하였다. 현재 체첸 수도에는 불과 250명의 오합지졸 뿐이라는 자브가예프의 말에 따라 사태를 쉽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내무부 병력이 그로즈니 동쪽의 한칼라 공항에 도착한 순간, 두다예프의 '국토 수비대'는 공항을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러시아 부대는 감히 공항을 나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동시에 11월 9일, 일단의 체첸인들이 러시아 미네랄린보디에서 터키 앙카라로 향하던 여객기 Tu- 154를 납치하였다. 그들은 승객 178명을 인질로 잡고 체첸의 계엄령을 풀 것을 러시아에게 요구하였다. 비행기를 납치했던 체첸인 중의 한명이 샤밀 바사예프였다. 인질극은 5시간 만에 평화롭게 끝났고, 승객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됬으며 납치범들도 터키 정부의 호의 아래 체첸으로 돌아갔다. 터키의 관리들은 공공연히 "바사예프가 한 것은 테러가 아니라 저항이었다."고 말하며 이 사건을 옹호하였다.
샤밀 바사예프
옐친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현재 두다예프가 철저하게 준비를 한 상황에서 군을 동원한다는 것은 엄청난 유혈을 각오해야 했다. 또한 아직 소련 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고, 최고 공산당 회의는 11월 11일 비상 계엄령을 해지하였다. 두다예프의 선언에 강경히 대응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옐친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합의가 이뤄졌고 한칼라 공항의 내무부 부대는 '국토 수비대'의 호위 속에서 체첸 밖으로 인도되었다.
마침내 두다예프의 독립선언은 최초의 저항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체첸인들은 환호하였으며, 러시아에 보기좋게 한방 먹인 그들의 초대 대통령에게 열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길고도 처참한 전쟁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Dzhokhar_Dudayev
http://en.wikipedia.org/wiki/Estonian_nationalism
http://en.wikipedia.org/wiki/Doku_Zavgayev
http://en.wikipedia.org/wiki/Boris_Yeltsin
http://en.wikipedia.org/wiki/Soviet_coup_attempt_of_1991
http://www.youngho.org/chechen/history/ch_history_menu.htm
http://www.amina.com/article/warstart.html
http://www.militaryphotos.net/forums/showthread.php?t=138436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첫댓글 취업이라는 변명하에 굳이 이글을 다시 재발굴한 이유는.. 평화시위중 제일 성공적이라고 꼽는 '노래혁명'을 보면.. 우리네 평화시위를 되돌아보기때문입니다.
아직 진행여부를 두고 봐야하지만.. 우리네 현실에서는 저런 용기있는 인물은 진즉에 죽었거나, 억울하게 매장당했습니다. 야당이라는 분들은 대가리 굴리면서 87년, 90년 병신굿을 추려고 합니다. 정말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아니 정권쟁취라면.....
칼빵을 맞던 뚜디 맞던 앞에서 인간방패라도 해야 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야'당답게 '야'합이니 시빌'야' 짓거리할 거 같으니 정말 제 개인적 심정은 '야'이 시발'야'입니다.
평화시위 좋습니다. 발트3국처럼 되면 좋겠습니다만. 카네이션 혁명은 고사하고 국방부는
일본과 날치기 조약같은 말이 민구인지 빙구인지 하는 개소리하는 마당에.. 계속 평화시위를
해야하는가에 의문이 듭니다. 다음주 체력검정 이후로는 면접준비가 있긴 하나 참여를 해보려고
합니다. 참여도 안하면서 이런 쉰소리만 하는것도 참 설득력이 없는거죠.
오늘 뉴스에 김종필이 한 말이 나오더군요. 박그네는 5천만이 물러나라고 시위를 해도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이 가장 사실과 근접한 것 같습니다.
평화시위도 그게 먹히는 사람한테나 통하는 겁니다.
평화적인 3.1운동 때 일제는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절대 생각안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