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에서 집을 이용하는 경우는 아주 일반화된 방식이다. 이런 영화들이 워
낙 많다 보니, 하나의 갈래가 생겨났고, 이를 하우스 호러(House Horror)라고
부른다.
그만큼 집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영화들은 넘쳐난다. 멀리는 18세기 영국의
고딕소설에서 그 뿌리를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산 속에 고립된 어떤 고성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이고 무서운 고딕소설의 이야기 수법을 빌렸다는 것이다.
스릴러 전문이었던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도 따지고 보면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물이다. 이런 집에는 절대 열거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 꼭 등장한
다. 짐작하겠지만 그 속에는 공포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도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삼은 호러물이다. 여기에 계모와
전처의 딸 사이의 증오관계라는 우리의 전래 이야기를 섞었다.
장화와 홍련, 즉 영화 속의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이, 시골에 있는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집 주위에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분 나쁠 정도로 검은색을 띄고 있는 집이 덩그러니 홀로 서
있다. 집의 형태도 어떤 균형과는 거리가 멀고, 고성처럼 위로 솟았는가 하면,
또 막사처럼 옆으로 삐죽 나와 있기도 하다. "자, 이 검은색 집에서 무서운 일
이 벌어질 테니 당신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시요"라고 암시하는 전형적인 하우
스 호러의 도입부 형식이다.
이 집에도 절대 열어선 안 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둘째 딸 수연의 옷장
이다. 여기에 계모(염정아)와 큰 딸 수미 사이에 존재하는 증오의 씨앗이 모두
들어 있다.
영화는 이 두 여자의 싸움이다. 계모는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사람인지 유
령인지 모호한 모습으로 나온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복도, 그 복도
저쪽 어둠 속에서 두 자매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유령이 나오듯 쓱 등장하는
것이다.
큰 딸 수미도 사람인지 유령인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녀의 방 벽시계는
정지돼 있고, 또 그녀가 덮고 자는 이불은 지나치게 푸른색이다. 수미는 그 푸
른색처럼 성격이 차고, 매몰차다. 둘째 수연은 바보처럼 계모에게 쩔쩔 매는데,
수미는 당돌하게 반항하고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또 푸른색은 원래
호러의 색깔이다. 푸른 밤을 배경으로 귀신이 출몰하는 수많은 공포물들을 떠올
려보라. 공포는 푸른색에서 나온다. 한편 그녀의 방 옷장은 핏빛에 가까운 붉은
색이다.
계모의 침실은 유럽의 바로크풍이다. 침침한 푸른색의 침대시트와 붉은 벽지,
붉은 이불 등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바로크라는 게 원래 기괴한 취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균형과 조화 보다는 불안
과 파격을 조장하는 미학이다. 계모는 신경질적이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다.
이 두 여자, 곧 계모와 수미가 한판승부를 벌이는 곳은 식당과 복도. 호러영화
의 결말은 마치 서부영화처럼 마지막에 이런 식으로 악마를 징벌해야 끝장난다.
이게 장르의 법칙이다. 당신이 누구 편이냐에 따라 한 사람은 주인공이고 또 한
사람은 악마가 된다. 피의 승부를 암시하듯 식당의 바닥은 붉다 못해 시뻘겋다.
복도가 마치 미로처럼 이리저리 연결돼 있어 공포의 장치로는 아주 효과적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 식당과 복도는 큐브릭의 <샤이닝>(1980)을 기억나게
하는 장소이다. 수미는 계모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기도 하고 맞싸우기도 하다
가, 수연의 방 속에 있는 그 옷장 앞에 도착한다.
수연의 방은 전형적인 10대 소녀의 방으로 밝은 색의 꽃무늬 벽지로 화사하게
장식돼 있다. 침대 이불도 연한 녹색으로 아주 편안해 보인다. 수연이는 자기
방처럼 편안해 보이는 소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천정이 삐딱하게 기
울어져 있어 불안해 보인다는 정도다. 수미는 그 옷장 바로 앞에서 계모에게
맞아 정신을 잃고 만다.
수연의 그 옷장을 열어보는 사람은 계모다. 이 집에서 벌어지는 괴상하고 공포
스러운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 죽음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여기서 옷장 속
의 죽음에 관해 설명할 수도 있으나,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이 영화는 전
부 수미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큰 딸 수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결코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에서 본 모든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는 수미의 환상인가? 영화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했다. 정신병자가
과거를 회상하여 이야기구조를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장치는 표현주의 영
화의 걸작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과 거의 같다.
수연의 옷장은 옅은 녹색 바탕에 노랑, 빨강의 꽃들이 조각돼 있는 평범한 가구
다. 수연의 성격처럼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게 평화롭
게 보이는 가구 속에 공포의 씨앗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글ㆍ한창호
제작 영화사 봄, 마술피리
투자 아이픽처스, 무한영상벤처투자조합
배급 청어람
각본ㆍ감독 김지운
주연 염정아, 임수정, 문근영, 김갑수
미술감독 조근현
촬영감독 이모개
조명감독 오승철
제작년도 2003년
1_ 전남 보성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가옥 세트 외관. 일본식 가옥은 한옥에 비해
패쇄적이고 복잡하며 직선적 차가움을 내포하며 건축적 구조가 노출된다는 점
에서 공간을 복잡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2_ 귀신들린 집임을 상징
적으로 보여주는 파란대문과 시간의 더께와 바로크식 괴기스러움으로 공포를
배가시켜주는 앤틱의자가 잘 조우하는 장면 3_ 집안 곳곳에 놓인 오브제들은
보광동 고가구 전문점을 뒤져 찾아낸 것들. 해당 조각은 영화 속에서 수연의 대
체물로 기능하기도 한다 4_ 계단을 기준으로 1층은 차고 음습한 공적 공간이,
2층은 밝고 따뜻한 아이들의 공간이다
_ 일본식 건축 구조에 서구의 클래식한 인테리어디자인이 혼합된 장면. 미로처
럼 얽힌 짙은 갈색의 복도는 공포를 배가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며 자신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인물의 감정과 의혹을 증폭시킨다 6_ 클래식 선
율이 흐르는 식당은 카페트나 벽지와 어우러지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7_ 수미의 방. 분위기는 공주방인데 벽시계는 정지해 있고, 붙박이장은 새빨갛
다. 벽지는 마치 피가 튄 듯 꽃무늬며 창은 나 있되 커튼이 둔중하다. 무엇보다
도 더블배드 위 이불은 지나치게 파랗다 8_ 수연의 방. 전형적인 10대 소녀의
방으로 밝은 꽃무늬와 맑은 연두빛 침구가 편안해 보인다. 천장에서 벽쪽으로
떨어지는 귀퉁이 난간이 기울어져 있는데, 이유는 일본식 건축의 박공지붕 밑
방이기 때문이다 9_ 절대 열어봐선 안되는 공간인 수연의 옷장. 옅은 녹색 바
탕에 노랑, 빨강 꽃들이 조각돼 있는 평범한 가구에 공포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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