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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 for my family ( 오로지 내가족만을 위해서)
우리 아버지 오서호님은 1899 12.22. (음) 우리 고향마을인 부안촌에서 태어나셔서 83세까지
오로지 자기의 자식들만을 위해서 한평생을 힘들게 농사일만 죽도록 하시다가 82세 동짓달에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그후유증으로 1981. 3.23.(음) 이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안고 전부다 최선을 다하시던 고마운 아버지였습니다
1927년생인 큰누나가 소성국민학교에 다닐때는 뒷동내인 새내에사는 이모님과 우리동내
부안촌에서 함께살던 신세대 인테리인 외숙모님이 정읍장에가서 제일로 비싸고 가장좋은
옷감을 사오라고 종이에 적어주면 돈을 빌려서라도 그옷감을 금방 사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큰누나는 이모님과 외숙모님덕에 당시 소성국민학교 16회 6명의 여학생중
제일로 좋은옷을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하였습니다
1936년생인 큰형이 정읍중학교에 입학하였을때도 쌀3말값을주고 제일좋은 운동화와
가죽 가방을 사다주었다고 했습니다
Feeds to the pool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우리 어머니 이업순님은 1905.6.10. (음) 고창군 부안면 사창의 부잣집인 외갓집에서 아주 귀하게
태어나셨으나 외할아버지의 그릇된 외도로인해 숫한슬픔과 아품과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시면서
이세상의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으셨던 여장부 이셨습니다
어머님도 82세 동짓달에 큰아들네 방앗간 옆에서 대퇴부 골절의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집에서
가까운 정주영 회장님이 정읍소성에 지어주신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퇴원후 기어서만
살으시다가 1987. 7.5. (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도보다 마음속의 그릇이 훨신더크고 대장부같은 분이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 어머니께서 가난하게사는 자기친정 피붇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여러가지
곡식이나 간장과 된장 묵은김치등을 나누어 주시다가 아버지와 때로는 큰소리로 욕설까지도
하면서 싸우시기도 하는걸 여러번이나 보면서 자랐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한테 항상 가장많은 신세를졌던 S아짐네 손주들이나 J댁네 자식들
한테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으나 G이모님네 故D형님 P형님 형제들은
" 자네 어머니 고부이모가 큰바가지에다가 묵은지와 된장을 많이 주셔서 그때 우리가
얼마나 맛있게 잘먹었는지몰라 지금도 돌아가신 자네어머니를 잊을수가 없다네이 "
하셨습니다
큰형님과 동갑인 故G형님은 아침과 점심을 굶어서 배가고파서 죽을지경 이었는데 한번은
우리집 앞에서 물동이를 이고오시는 우리어머니를 만났는데
" G 아 배고프제 이리와 나따라 와라이 "
하여서 우리어머니를 따라갔더니 쌀도 몇알씩 보이는 보리밥을 투가리 (큰옹기그릇) 에넣고
묵은지와 고추장과 들기름으로 비벼서 주시는데 기가막히게 맛이있었 드랍니다
그래서 그후로는 자기논과 가까운 우리논옆에 지나가다가 우리논에 피가보이면 들어가서
피를뽑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 산소에 가다가 자기집 앞에서만난 G형은 나에게
" 내평생에 그렇게 맛있는 비빔밥은 그때 먹어보고는 지금까지는 한번도 못먹어봤다이
지금 너그 (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닭이라도 잡어서 대접할 것인데 맘뿐이여이 "
하셨습니다
우리 큰형님보다는 4살을 더먹었으나 소성국민학교 25회동창인 32년생 M형님은 산소에
가다가 만나면 언제나
" 엄니 아부지 여프서 (옆에서) 텐트쳐놓고 잘라고 왔그만 자네 엄니한티 그배고픈 흉년에
밥이랑 개떡이랑 참많이 얻어먹었어 자네엄니는 참말로 인정많고 존양반 (좋은) 이었어이
자네 아부지 고붓양반과는 하늘과땅 차이었제이 "
그야기를 아주 큰소리로 ( 그형님은 몇년전부터 귀가 안들리셨음) 여러번이나 하셨습니다
제공앞밭과 석장등밭이 바로옆에 있었던 춘수리에 살았던 중학교동창 故유종철네 어머니도
" 춘수리허고 부안촌에서도 집이 (자네) 어머니같이 경우밝고 인정많은 사람은 없을것이여 "
하셨었습니다
왜소하고 못난우리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한일도 없는데 공연히 트집잡아서 큰소리로 악을쓰면서
멱살을잡혀 흔들리면서 두들겨맞고 옷고름을 뜯긴체 집에오면 항상 우리어머니는 아버지에게
" 왜 잘못 한것도없이 뚜들겨맛고와 손모가지 두었다 엇다쓸려고 그냥놔두었어 그놈의 손모가지를
잡아서 물어뜯어 버리든지 돌팍을 (돌) 줏어서 대갱이를 (머리) 쳐대버리든지 할것이제 왜 병신같이
뚜들겨 맞고만 댕겨어 "
하고나서는 감나무옆 울타리의 말뚝을 잡고서는 외할머님의 응원을 받으면서 이웃집인 (5m거리)
다라올양반네 집을향해서
" 이학천아 이썩은놈아 낮바닥좀보게 기어나와바라 우리허고 먼왠수가져서 꺼득허면 애맨사람을
뚜두냐 이썩은놈 개잡놈아 오서호가 너한티 먼잘못을했냐 이역적놈아 왜아무 잘못도없는
사람을 뚜두냐 이잡어 먹을놈아 어서 기어나와서 나도한번 뚜들겨봐라 마골댁은 멋을퍼먹고
저런 개잡놈을 퍼낳는고 옛기 배락이나맞어 (벼락) 디질놈 "
(역적놈은 다라올양반의 전매특허 였습니다 동내 모정에서도 누구랑 사소한일로 입다툼 할때도
이역적놈아 저런 역적놈보소 라고욕설을 수시로 해댓기에 부안촌의 어린애들도 다라올 양반이오면
조고만 소리로 저그 (저기) 역적놈 온다이 역적놈와 하였드랍니다)
하면서 큰소리로 욕을해데면 라디오도없고 TV도없던 그시절에는 그렇게 싸우는 구경꺼리가 제일로
신이나고 볼만한 좋은굿거리 였답니다
그렇게 큰소리로 욕을퍼붓을 때에는 대나실댁부부 뱅고지댁 석산댁 간동댁 입석양반 동천댁부부와
정모난댁등 항상 10여명의 구경꾼들이 좋은구경 낫다고 여기 저기서 구경을 하였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두살더먹은 다라올양반 이학천씨는 자기보다 8살이나 덜먹은 우리어머니가
그렇게 악을쓰면서 욕을퍼붓어도 자기가 잘못했고 염치가 없으니 콧배기도 안보였다고 했습니다
한울타리 안에서 아랫집은 시아버지네 집이고 웃집은 큰며느리인 풍천댁네 집이었는데 그렇게
싸우고난 뒤에는 어머니인 마골댁이나 며느리인 풍천댁이나 3번째부인인 다라올댁은 언제나
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한테 미안해 하면서 어쩔줄을 모르곤 했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다라올 양반과는 앙숙이면서도 새우젖이나 황송어리젖등을 사왔을때는 우리
외할머니보다 세살덜먹은 다라올양반 어머니인 마꼴댁 잡수시라고 다라올댁을 불러서 울타리 너머로
항상 전달해 드렸드랍니다
마꼴댁 다라올댁 풍천댁과는 아무탈없이 다정한 이웃으로 잘지내는데 왜다라올 양반은 왜소하고
힘없는 우리 아버지를 젊었을때부터 그렇게 두들겨 팻는가 모르겠습니다
다라올양반의 막내동생인 강주굴양반은 싸움소식을 듣고난 후에는 절친하게 지내는 우리 어머니에게
" 고부 성수는 참말로 싸나이 그호랭이같은 우리다라올성을 또닥달혀 버렸담서이 내가 몇번이나
우아랫집인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를 맷번이나 힛어도 그놈의 성질은 왜그렁가 몰라이 내가 참미안
허요이 " 하셨으며 광주굴댁 이모는
" 고붓성이 참말로 싸난고붓성 이여이 그렇게 무서운 역적놈 다라올 시숙을 달싹도 못허게 다루는것
보면은 참말로 장사여이 "
하였드랍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 가을인데 학교에서 오다가보니 동내로 건너오는 다리옆에서 다라올양반이
저고리의 옷고름과 안경을 손에쥐고 땅바닥에앉아 계셨습니다
" 안녕하세요 "
하면서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였더니 살짝미소 지으면서 고개만 두어번 끄덕였습니다
다른때 같으면 머리도 만져주고 퍽반가워 하셨는데 그날은 분위기가좀 썰렁한것 같았습니다
동내모정 근처에오니 중살아재와 머우실 아재랑 여러사람들이
" 다라올 영감이 젊어서는 고붓임금을 괭이가 (고양이) 쥐잡듯이 딸삭도 못하게 뚜들어 잡었는데
인제는 늙어버리고 술에골아서 고붓임금한테 딸싹도 못허대이
고붓임금이 잡어흔등게 폭폭 꼬구라지고 (넘어지고) 바지를 잡아당긴게 옷이쭉 따져버리고 시커먼
방맹이가 안나오등가 다라올 영감이 잠뱅이를 (팬티) 안입어서 아조좋은 구경을 힛써이 (했어이)
해권이와 동천양반이 안뜯어 말렸으면 다라올영감은 아조 디지게 혼낫을 것이여이 "
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다라올양반과 싸움을 하였다고해서 기분이 아주 나뻤지만 그래도 싸운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있는데 다라올댁이 하얀 핫바지를들고 아주 바쁜 걸음으로 동내앞 다리로가고
걸어가시고 계셨습니다
(고붓임금은 흉년이나 보릿고개에도 우리 아버지는 부자인 외할머니덕에 거의 쌀밥에 조기나 갈치토막을
손에들고 밥을먹는게 S아짐이나 JM댁의 입을통해서 소문이나니 동내사람들이 임금님 이라고 하였음)
대단히 정의로운 우리 어머니는 자기보다 부자이고 잘사는 사람들한테도 절대로 기가죽지 안았던
아주 당당한 자랑스러운 어머니 였습니다
큰어머니는 큰아버지와 한동갑 이면서도 큰아버지를 골병들게 뚜들겨팬 원수같은 다라올 양반을
고삿에서 (동내길) 맞나면 보기도 징그러워서 얼른숨어 버렸드랍니다
그러나 당차고 용감한 우리 어머니는 고개를 뻣뻣이들고 다라올양반의 쌍판대기를 (얼굴)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지나다녔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옛적부터 동내에서 유일하게 다라올 양반과는 상주를 (적대시) 하면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어머니는 가난한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아파서 누워있을때는 어제나 녹두죽도 잘쑤워서
갖다주었고 가난한 집에서 애기를 낳았을때는 미역도 갖다주는것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동내에서 우리 어머니가 유일한 친구이고 말벗인 큰어머니는 그럴때마다
" 자네는 참말로 복받것네이 나는 그리못혀이 자네는 자네집 양반허고 그렇게 싸움서도 넘덜한티
그렇게 퍼주는 것을보면 자네는 참말로 조앙님 (자기들이 믿는 신령님) 이네이 딸을낳고 미역이
없어서 미역국도 못먹는 뙷집에 자네가 미역을 갖다주어서 고붓댁 덕으로 미역국 먹는다고 서쪽
시암 (샘) 에서 모두들 자네 이야기를 허드라고 허데이 "
그런걸보면 참으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어머니 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부자였던 외할머니 덕으로 부자는 아니었어도 흉년이나 보릿고개 때에도
끼니때마다 거의 쌀밥과 조기이든 갈치이든 왼손에는 항상 비린것을들고 (생선) 밥을먹으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친척이든 동내 누구든 남을 비방하고 흉을보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좋은말로
" 궂은 소리는 날개가 달린것이여 그소리가 새끼쳐서 곧자네한티 오네이 그렁게 (그러니) 그런소리는
허들말소이 (하지말소이) 입덥고 (입닷고) 모르는것이 약이여이 그것이 경오네이 (정의로움 도리)
누구든지 그경오를 지켜야 사람이네이 알것제 "
하셨습니다
나보다 한살더먹은 M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을때도 철없는 아들만 둘이있기에 간호해줄 사람이
없어서 군불도 제데로 못때고 아픈사람이 추워서 고생한다고 우리집으로 데려다가 밥도먹이고
죽도쑤어서 먹이시면서 고안해 (보살펴) 주셨드랍니다
장작을 보물처럼 아끼시던 우리 아버지도 고붓성부 고붓성부 하면서 고마워하는 M네 어머니가
안쓰럽고 짠하다고 그렇게 아끼시던 장작을 따뜻하게 많이도 때주셨 드랍니다
우리집에서 두달넘게 겨울을 지내셨던 M네 어머니는 이듬해봄에 하늘나라로 가셨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동내 부안촌은물론 춘수리 새내 등계물등 인근 동내에서 여자로는 제일로 뚱뚱한
헤비급 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일생동안 허리띠가 한뼘씩 줄어든때가 두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서른살에 낳아서 금이야 옥이야했던 그렇게 잘생기고 영리했던 해만이가 네살때에 그놈의
홍진으로 (홍역) 죽어버렸을때 한달동안을 울면서 숫가락을 안잡았을때 허리가 한뼘이 줄었드랍니다
두번째는 우리 아버지 형제간 4형제중에서 처음으로 정읍중학교에 입학했던 우리 큰형이 중학교 2학년때
6.25가 나면서 불량학생이 되어서 정읍중학교에서 소성 오해방하면 알아주는 싸움꾼이 되었을때 였드랍니다
그당시 덕천면 소재지 에사는 부잣집 쌍둥이 형제가 장가간 사람몇과 3-4살 더먹은 사람을 빼고는 2학년을
전부다 휘어잡았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고나서 우리큰형이 그쌍둥이둘이 시비하는 바람에 학교뒷산 아래에서
20여명이 구경하는 곳에서 작은쌍둥이와 싸우다가 나중에는 둘이다 달려들었으나 작은쌍둥이의 눈탱이를
해이딩 으로받어 버리고 큰쌍둥이의 손을비틀어서 이겨버렸 드랍니다
그때부터 유명해져서 읍내의 중학생 건달들과 담배도 가방속에 숨겨갖고 다니면서 피우고 전쟁통이라
학교가 휴교일때는 우리동내 두붓집인 D형네 사랑방에가서 어른들과함께 맞담배질도 하면서 화투도
하였답니다
한번은 눈이많이 왔을때인데 어머니를 따라서 D형네 두붓집에 갔는데 우리어머니가 무조건 사랑방문을
잡아당기는데 안에서 문을잠가 놨기에 문이 안열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강주굴 이모에게
" 어이 우리 해방이 여그 왔는가 안왔는가 "
" 해방이가 여그안온지 며칠이나 되얐어 왜집에 없간디 "
하였습니다
내가 뒤안으로 돌아가서보니 큰형은 하얀줄이 그어진 멋진 운동화를신고 뒷집인 충남이형네 울타리를
넘어서 그집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한테 그이야기를하면 나중에 큰형한테 디지게 뚜들겨 맛을것 같아서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큰형과 작은형이 광에서 책보에다가 쌀을몇되씩 퍼갈때에도 아뭇소리를 안하였기에 형들은 나를믿었습니다
그덕에 몇일마다 한번씩오는 엿장사가 왔을때는 형들한테 가끔엿도 한번씩 잘얻어 먹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강주굴 이모네 집에가면 문구멍으로 사랑방에서 화투노름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가
몇명인가 구경하고 큰형의 멋진 운동화가 봉창문앞에 올려져 있는가를 꼭살펴 보았답니다
그후로도 어머니가 강주굴 이모네집에 가는성 싶으면 언제든지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어쩌다가 재수있을때는 순두부를 두부틀에 넣기전에가면 강주굴이모가 따뜻한 순두부도 한사발씩 떠주시기에
그맛있는 순두부를 얻어먹을수 있을까하고 였습니다
형을찾으러 강주굴 이모네 집에가면 어머니는 언제나 외상으로 두부를한모 사갖고와서 두부절반을 잘라서넣고
배추김치를넣고 두붓국을 끓여서 줄때는 얼큰하고 기가막히게 맛이 있었습니다
나의 국그릇 속에들어있는 두부 서너조각을 얼른맛있게 먹고나면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두부조각을 수저로
건져서 두번씩 어쩔때는 세번씩 내국그릇에 넣어주셨습니다
장에가면 수루미랑 (오징어) 과자와사탕과 엿도 잘사다 주시는 언제나 고마운 우리 아버지 였습니다
어머니는 김을 구웠을때도 아버지 밥그릇 옆에는두장 내밥그릇 옆에는 한장을놓아 주었습니다
나는 맛있는 김한장을 얼른 먹고나면 아버지는 언제나 자기김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찢으셔서 절반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철따구니 없는나는 그것을 당연히 받아먹는걸로 생각하고 얼른 받아서먹곤 하였습니다
그때는 철이없는때라 작은누나와 어머니는 김을 못먹는 걸로만 알았습니다
몇년전에 여름에 작은 누나와 서대전역 2층대합실에서 만나서 기차를타고 화순으로 이사간 작은형님한테
가면서 이런저런옛날 이야기를 하던중 그때의 김이야기가 나왔는데 누나는 그때는 누집이든지 여자들은
모두가 그렇게 김을안먹고 사는줄로만 알았드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옛말에 환갑을 지내야철이 든다더니 10여년전부터 지리산이나 덕유산등 남쪽산에 야영을 갔다올때는 언제나
고향마을 부안촌 부모님 산소옆에 텐트를 치고나서는 조촐 하지만 제일로 비싸고 좋은것으로 구매한 북어 오징어
햇반 과자 사탕 빵 과일 술과 음료수 등을 젯상에 올려놓고 절을할때는 언제나 부모님에대한 그리움과 잘못했던
불효에 목이메이고 눈물이 핑돈답니다
어느해 겨울에 눈위에서 3번째 절을하고 일어나면서 목이 콱메여서
" 어 머 니 아 버 지 "
하면서 해가질 무렵이라 아무도없는 산속에서 소리를 내어서 펑펑 울어버렸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지 우리부모님 산소에 절울할때는 어제나 3배를하고 있답니다 남의나라 멀리 내팔에서
삼국시대 때부터 전파되어온 불교의 부처님께도 3배를 하는데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우리 부모님께도
3배를해 드리고 싶어서 였답니다)
그렇게 울어버렸던 이유는
초등학교 3학년때 벼가 땅맛을알고 막자라던 때인데 우리동내 호영이 태연이 후돈이 故상복이랑
초등학교동창 5명이 춘수리로 돌아서 오는데 우리집 밥그릇인 춘수리앞 7마지기 논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둠벙의 양쪽에 서서 두레끈을잡고 둠벙에서 두레로 물을퍼서 물을 논으로 올리고 계셨습니다
" 여 리 아 홉 수 무 거 리 " (19 - 20 이란뜻)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였습니다
너무나 힘이드니 수 물 아 홉 서 룬 거 리 를 노래를 하듯이 세면서 300번이나 400번을 힘들게 퍼올리고는
10분정도 쉬면서 담배도 한대피우고 소변도 본후에는 다시 두레끈을잡고 물을퍼올렸 드랍니다
그리고 산소에서는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제일로 좋아하시든 목이메인 이별가의 호남선과 슬픈 진혼곡
트럼팻 소리도 항상 틀어준 답니다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시기 37년전인 1862년 미국의 남북전쟁때 북군의 대위였던 엘리콤이란 중대장이
어느날밤 숲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를듣고 위생병을 데리고가서 부상당한 적군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적군병사는 치료후에 바로숨을 거두드랍니다
엘리콤대위는 후레쉬로 죽은 남군을 비춰보니 음악을 전공하던 자기의 아들이었 드랍니다
그아들 남군병사는 북군대위인 아버지의 승락도없이 남군으로 입대하여 북군과 전투를하다가 큰부상을
당하여 전사하였던것 이었습니다
엘리콤 대위는 죽은 아들의 주머니 에서나온 악보를보고 단한사람의 군악병을 지원받아서 트럼팻으로 그곡을
연주해 주면서 슬픈 장례를 치루어 주었드랍니다
애닯고 숙연한 그진혼곡이 오늘날 전세계의 병영에서 울려퍼지는 잔잔하고 슬프고 우렁찬 기상나팔 소리겸
취침 나팔소리 라고합니다
우리부모님 산소인 부안촌 꽁방 산속에서 울려퍼지는 그잔잔 하면서도 숙연하고 웅장한 트럼팻 소리는
언제나슬픈 우리 어머니의 애닯은 노래인것 같아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답니다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여름방학이 끝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오는 날이었는데 집에오니 아버지와 연창이형은
두암낭갓에서 (두암 이씨들선산) 황토흙을 져나르고 아랫집 영칠이형은 퍽큼직한 흙벽돌틀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내는 영칠이형은 자기 아버지인 석산양반을 닮아서 여러가지 재주가 많았습니다
우리집 외양간이나 돼지막을 고칠때에도 언제나 아버지께서는 감나무 밑에가셔서 아랫집에대고 큰소리로
" 영칠아 영칠아 "
하고 불러댓 습니다
" 왜 그려어 또 멋헐라고 라오 "
하면서 우리집에오면 솜씨좋은 영칠이형은 우리아버지의 마음에들게 무엇이든지 잘고쳐 주었습니다
그날은 우리집 헛청의 뒷벽이 무너져서 하마터면 우리 아버지께서 압사해서 돌아가실뻔 했다고 하였습니다
여름내네 큰비가 올때마다 뒤산에서 내려오는 많은량의 도랑물이 우리헛청의 뒷벽아래가 푹파이게 흙이쓸려
내려가 버렸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지게바작으로 뒷산에서 돌을줏어다가 뒷벽아래를 튼튼하게 보강할려고 오전내내 산에가셔서
돌을 여러지게 짊어지고와서 일을하셨답니다
점심을먹고 또산으로 돌을줏으러 가셨는데 어머니가 들으니 헛청에서 벼락천둥치는 소리가 나면서 누런
흙먼지가 앞이 안보이게 솟아오르 드랍니다
헛청의 두툼한 뒷벽이 (두깨가 약50cm정도) 전부가 도랑으로 무너져내려 버렸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아버지가 그흙속에 깔려서 죽어버린줄 알았드랍니다
" 아이고 어째야 쓰까이 이노릇을 어째야 헌데야 큰일났네이 큰일났어 "
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영칠이형과 동천양반과 입석양반이
" 지게도없고 사람이 깔린흔적이 없응게 (없으니) 고붓양반은 안죽었으니까 걱정마쇼이 "
하드랍니다
만일 그밑에서 우리 아버지가 돌을고이는 일을했드라면 참으로 큰일날뻔 했드랍니다
한참있으니 우리 아버지는 제게바작에다 돌맹이를 한짐을 짊어지고 오시드랍니다
우리집 뒤에는 아주큰 뽕나무가 6그루가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때부터 그뽕나무에서 뽕잎을따서 누애를 키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집 뽕나무는 거름을 안해주었는데도 뽕잎이 아주넓고 좋았으며 오두게도 (오디) 아주크게
열리고 맛도 아주 달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쯤 이었는데 그때는 우리또래의 모두가 판자를 발모양으로 오려서 구멍을
뚫어서 게다를 (나무 슬리퍼) 만들어서 신고다니는게 유행이었습니다
우리 동내에서 게다를 폼나게 제일로 잘만드는 사람은 영칠이형과 후수형 두사람 이었습니다
그두형들은 사진에서본 일본놈들의 게다처럼 아주멋있고 튼튼하게 게다를잘도 만들었습니다
그런 게다는 발도시원 했지만 개구리를 한번밟으면 개구리는 두토막이 나버릴 정도였습니다
나는 헛청에서 게다를 만드느라고 톱질을 하고있데 뒷집 동천댁이 큰소리로
" 아이고 아이고 큰일났네 고붓댁 죽네이 고부댁 죽어 "
하였습니다
톱을놓고 얼른부억을 거쳐서 뒤안에 갔더니 누에를 먹일려고 뽕을따던 어머니가 뽕나무에서
떨어져서 부엌쪽의 큰돌옆에 기절해서 누어계셨습니다
" 어머니 어머니 눈떠봐 눈좀떠봐 어머니 어머니 "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보듬어안고 흔들었더니 근10분쯤 후에야 깨어나셨습니다
" 어머니 괜찮헌가 아픈디없어 참말로 괜찮허지 "
하면서 어머니를 부축해서 마루로오니 동천댁과 대성형수님 금해형수님 오셔서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대성형수님이 사발에다가 물을한그릇 떠다주시니 물을 한그릇을 다잡수셨습니다
" 어머니 인자 뽕나무 올라가지 말소이 높은디는 내가올라가서 뽕잎을 다따올께이 "
하였더니 어머니께서는
" 그리라이 우리 막둥이가 인자효자 되얐네이 효자 되었어 뽕도 따온다고 허고이 뽕은 내가딸랑게
놔두고 강아지는 소깔이나 (소먹일풀) 많이 뜯어다 굶기지말고 배부르게 잘맥이소이 "
하셨습니다
2m정도의 급경사인 뽕나무아래는 흙였기에 다행이었고 뽕잎을 따면서 동천댁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두게를 몇개따서 동천댁한테 던져주다가 중심을잃고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7살때 두승산에 가다가 뒷동내인 독골에서 어머니한테 붙잡혀서 디지게 뚜들겨맞고 고부 두승산에
올라가갔던 이야기 입니다
1953.7.27일 6.25.전쟁이 휴전되었기에 전방에서는 우리국군과 유에군이 북괴군과 중공군으로 편성된
적군들과 전투가 한창치열 했던때의 이야기 입니다
1953년 음력으로 4,8.석가탄일 부처님 생일날인데 어머니가 머리에다가 기름도 바르고 나들이 옷을입고
도시락 보퉁이를들고 나갈체비를 하기에 언제나처럼 나는 따라갈려고 나섯더니
" 너는 높은산이라 못올라강게 (못올라가니) 오늘은 따라오지 말어이 두승산은 겁나게멀어 갔다옴서
빵떡이랑 사탕이랑 사다줄께 집에서 놀아이 "
하시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대문을 나가셨습니다
대문앞 감나무 밑에서보니 여러사람들이 산쪽으로 올라가기에 호기심에서 나도따라서 갔습니다
뒷넘어 우리밭위의 바우배기에서 (아주 큰바위가 두개가 있는곳 그큰바위 두개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모여서 가기로 한것같았습니다
나는 어머니한테 들키면 못따라 가니까 좀멀리서 숨어있었습니다
몇사람이 더오고나서 창원이랑 진달래꽃을 꺽으러 다니던 독골가는길로 한줄로 걸어서 갔습니다
구부러진 산속의 커부길에서 세어보니 14명인것도같고 15명인것도 같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다섯번째로 가면서 여러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큰소리로 웃기도하고 아주 즐거운
나들이길 이었습니다
나는 제일뒤에서 따라가다가 독골동내 한복판 (가운데) 에서 어머니가 안보이기에 어머니를 찾느라고
두리번 거리다가 무슨일로 내뒤에서오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니는 대나무 도시락을 땅에 내려놓더니 내옷고름이 안덜어지게 내저고리 양쪽을 움켜쥐더니
" 이오살놈의 새끼가 따라오지 말라고 힛어도 (했어도) 여그까지 멀라고 (뭣할려고) 기어왔어 응 "
하면서 등판때기를 (등쪽을) 손바닥으로 4-5 번이나 아주 아프게 때렸습니다
숨도못쉬게 아팟어도 죄가 있어서 울지도 못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일철이형이 말려주는덕에 더는 안맞았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 이써근놈의 (썩은놈) 새끼야 말도안듣놈 새끼야 이것이나 들고와 "
하면서 묵직한 대바구니 도시락 보따리를 맞기셨습니다
솜이든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있었기에 혼자서 걸어가기도 땀도나고 힘이드는데 무거운 대나무
도시락 보퉁이는 나에게는 무지하게 벅찼습니다
조금가다가 어머니한테 넘길려고 (줄려고) 했는데 우리 웃집에사는 일철이형이
" 어머니가 오지마라고 힛는데 (했는데) 말안듣다가 뚜드러 맞었제 이리도라 (줘라) 내가 갖고갈께 "
하면서 그묵직한 대나무 도시락 보따리를 빼앗듯이 가지고 갔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날라갈것 같았습니다
서당촌앞을 지나서 만수동에 가더니 모두들 산밑계곡 도랑의 큰돌팍에 (큰돌) 앉아서 쉬었습니다
누군가 산속에는 샘이없다고 만수동에서 물을많이 먹고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 아까 독골에서 물한사발을 먹었어도 한그릇 더먹고 가야것네이 "
하면서 어머니가 우물로 가시기에 나도따라가서 물을 배부르게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독골에서 어머니한테 잡혀서 뚜들겨 맞은것이 물때문에 잡힌것 이었습니다
만수동에서 부터는 산길로 올라가는데 무지하게 더워서 땀도 많이나고 양말을 안신었기에 발이
무척이나 미끄러웠 습니다
조고만 바위에 올라가서 바위에 발바닥을 문지르고나서 고무신을 신으니 아주 개운하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발바닥땀을 바위에 문지르기를 10번도 더하면서 산에올라 갔습니다
우리 어머니랑 모두들 넓은 도토리나무 잎을꺽어서 뜨거운 햇볕을 가리고 산에올라 갔습니다
산중턱 그늘에서 쉬면서 우리 어머니는 일철이 형에게
" 일철아 밥보재기 들고오니라고 힘들제 밥먹을때 너랑항꼬 먹자이 (함께먹자) "
하시면서 미안해 했습니다
(나보다 7살더먹은 그마음씨좋은 일철이형은 20살때 우리 동내에만 감염자가 여러명이 있었는데
장티프스에 걸려서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서울로 돈벌러갔던 L씨가 장티프스에걸려 아파서
집으로오는 병낫으러 오는바람에 나랑동갑인 소꼽친구 옥순이 한살덜먹은 진외갓집동생 재명이등
동내사람 여럿이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착하고 좋은사람을 먼저데려 가는가 싶었습니다)
나는 더워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무지하게 고생해서 두승산 꼭대기에있는 절에올라 갔는데 (유선사) 절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설쇠고나서 호기형과 호일이형을 따라서 정읍장에 가본것같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네모반듯한 긴돌로된 우물옆에서 도시락 보따리를 나에게 주면서
" 불공디리고 (드리고) 올랑게 꼭 여그가 있어야 헌다이 다른디로가서 못찾으면 대양리다리밑 동냥아치덜같이
동냥아치가됭게 (거지가 되니) 어디로 가지말고 꼭 여그가 있어이 "
하시고는 다른 사람들과함게 절법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늘에 앉아서 쉬니까 땀은 안나서 좋은데 이제는 배가고파서 죽을지경 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언제 오시는가 법당쪽을 눈이빠지게 쳐다보았으나 다른사람들만 나오고 우리 어머니는 안나오셨습니다
배가너무나 고파서 보자기를 풀어서 대나무 도시락을 열어보니 쌀은 어쩌다 한개씩 보이고 보리와밀이 썩인밥이
대나무 도시락에 가득했습니다
내밥그릇같은 중발에는 (작은그릇) 묵은김치와 빨간 장아치가 들어있고 줄포 외숙모가 갖다준 예쁜고뿌 (사기컵)
속에는 고추장이 근절반쯤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젓가락은없고 누런유기 숫가락만 두개가 있었습니다
빨간 장아치를 손에들고 밥을떠서 먹었더니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막내 작은아버지를 따라서갔던 항골사돈의 환갑잔치에 간것이나 큰집에가서 해일이형을 만나면 쌀이
절반이든밥에 맛있는 젖갈로 소복한밥을 얻어먹은것은 여기에 댈바가 ( 비교할바) 아니었습니다
그때 우리집은 항상 보리밥만 먹던때 였습니다
장아치는 말할것도없고 김치도 맛있고 고추장도 무지하게 맛이있었습니다
그많은밥을 1/4은 먹은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근2시간이나 지나니 우리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 우리 강아지 배고프것네이 어서 밥먹자이 "
" 하도 배고파서 내가먼져 먹었네이 나는 아조 (아주) 배부르그만 "
" 그려 잘힛다 내강아지가 참영리 하그만이 얼렁 밥갖고온 일철이가 어디있는가 찾어서 델고와라이 "
내가 절주위를 두바뀌나 돌면서 다둘러 봤어도 일철이형은 없었습니다
그밥은 어머니와 우리동내 정모난댁과 신성아짐과 춘수리사람 두명등 5명이 싸릿대로 젓가락을 만들어서
밥을손에 받쳐들고 맛있게들 먹었습니다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재수한다고 집에서 놀았을때 이야기 입니다
중학교 교과서를 위주로 공부를 한다고 하였으나 영어는 그런데로 하겠는데 수학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 공부는 저녁에 살살허고 내가반찬을 맛나게 만들어서 갖고갈것인게 사방공사에 며칠간 가보자이 수꿀사돈이
십장을 허는데 늬가가면 너까지도 밀가리를 한포대씩 준다고헝게 하루에 밀가리가 3포대면 어디냐 "
그당시에는 정부시책으로 산림녹화 라고해서 빨갛게 헐벗은 야산에다가 오리나무와 아카시아나무 묘목을
심는데 장정은 하루에 120%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같은 노인들은 80%를 쳐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가기만하면 하루에 120%를 받을수 있다니 날마다 밀가루를 3포대씩 버는것 이었습니다
그때 일하러온 사람들에게 점수를 판정해주는 십장이 큰형수님네 친척인 수꿀사는 N모씨 였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날마다 360%를 받았기에 밀가루를 3포대씩 벌었습니다
우리집 으로서는 아주 수지맞는 사방공사 였습니다
별로 힘든일도 아니고 조고만 괭이나 호미로 땅을파고 그날그날 나누어주는 묘목을 심기만하면 되는일 입니다
장정들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같은분들이 나무를 더착실하게 잘심었습니다
우리는 산속의 평평한곳에서 셋이서 소풍온것같이 맛있게 밥을먹고 나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담배를
한대씩 피우고 나서는 바로나무를 심었는데 다른사람들은 아무데나 누워서 한소곰씩 잠을들 잤습니다
어느날은 우리가받은 묘목을 다심고 집으로 올려는데 아버지가 소변을보고 오시면서 묘목 두다발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 이런 나쁜놈들이 있을까이 비싼나무를 한구덩이에다 쳐박어 놨어이 우리가 심어놓고 갈랑게 너먼져 가그라이 "
하셨으나 나혼자서 먼져올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근한시간정도 땅을파고 그묘목 두다발을 정성껏 심어주고 왔습니다
오면서 어머니는 등계물사람들 자리인게 등계물사람들 짓거리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춘수리사람들
자리라고 하시면서 춘수리 누구네 일꾼과 누구누구 두놈의 새끼중 한놈은 군대도 갔다왔으나 고것들은
둘다 날넘은놈의 새끼들 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제가 18일간 사방공사를 나가서 밀가루를 56포대를 벌었습니다
논이나 밭일을 할일이 없을때 연창이형이 두번을 나왔기에 밀가루가 56포가 되었습니다
(연창이형은 사창이 고향인데 우리집에와서 5년째함께 살고있는 먼친척형 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방공사에 다니시면서는 두분의 주특기인 싸움도 안하시고 오손도손 이야기도
잘하시면서 날마다 밀가루를 3포대씩 버는것을 아주 오지다고 (수지맞는다)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 어이 이사방공사를 일년네 힛으면 (했으면) 좋것네이 그러면 곧부자 되것그만이 "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 암 그러제이 그런디 누가 일년네내 밀가리를 준당가 (주것는가) "
그렇게 수지맞고 좋은 사방공사가 어느날 완전히 시마이가 (끝나는것) 되어버렸습니다
밀가루 52포대는 신시장에서 고물상을하던 큰형이 팔아서 돈으로 챙기고 두포대는 국수집에 맞겨서
국수를 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집과 큰형네 고물상에는 수제비도 끓여먹고 비올때 전도붙여 먹는다고 밀가루를 한포대씩 갖었습니다
밀가루 2포대로 국수를빼니 큰사과 상자로 3상자반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큰형네 고물상에 한상자 반을주고 흥덕양반 구루마에 국수두상자를 집으로갖고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좋으신지 만면에 웃음을 띠시면서 큰집은 내가갈랑게
" 늬가 자정거로 용리두개 등거물한개 오동촌 작은집 고모네집에 한개씩 그리고 새내에 두개를 갔다주고
오그라이 용산은 내일이나 서너개 갖다주고이 "
하셨습니다
사과상자속에 헌옷을 두툼하게깔고 국수를 5뭉치를싣고 등거물 외숙모한테 먼저갔습니다
줄포 외숙모님 께서는 국수가 어디서 낫다냐 하시면서
" 나도 국수를 좋아하지만 너그 외삼촌이 더좋아 하것다 어머니한티 잘먹는다고 하그라이 "
하시면서 좋아 하셨습니다
오동촌에 갔더니 작은집이나 웃집인 고모네 집이나 모두들 논에가셨는지 아무도 안계셔서 두집다
마루에 놔두고 잘잡수시라고 간단히 몇자를써서 그종이를 국수밑에 놓고왔습니다
새내에 갔더니 이모님께서는 아주반가워 하시면서
" 더운디 멀라고 여그까지 갖고왔냐 이놈 두뭉치면 올여름에 국시는 안사도 되것다이 너여그 쪼게만
앉아있어라이 너그 아부지가 가지너물을 제일로 좋아헝게 뒷밭에가서 가지를 얼렁 따올께이 "
하셨습니다
이모님은 올해는 가지가 잘되었다고 하시면서 애호박 몇개와 큰바구니에 가지를 가득하게 따오셨습니다
집에왔더니 어머니께서는 아주 좋아하시면서
" 가지너물 좋아하는 우리식구들 살판낫네이 (신이나겠네) "
하셨습니다
자전거에 국수 두뭉치를 잘싣고 등거물 재너머 띠밭머리 정읍연전 변전소를 거쳐서 용리에 고모네집에
갔더니 언제나처럼 고모님과 안사돈 어른이 아주 반가워 하셨습니다
바로올려고 했더니 자고가라고 못가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할일도 없지만 볼일이 있어서 가야한다고 하였더니 새내이모가 하시듯 텃밭에서 가지 오이
솔(정구지) 열무를 한소쿠리를 갖고오셨습니다
각각 보자기로 싸가지고 자전거에실린 사과박스에 넣으니거의 한박스가 되었는데 참기름 한병과
참께와 녹두를 또 싸주셨습니다
용리에 갔던코스로 다시집에오니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
" 국시쪼께 (국수조금) 주었다고 멋을 (무엇을) 이렇게 많이 보냈는가 모르것네이 용리는 아조(아주)
큰손해가 나버렸네이 안그래도 참지름이 (참기름) 달롱달롱 (거으없음) 하는데 아조 잘되얐그만 "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직해가 있으니 용산도 얼른다녀 오겠다고 하였더니 그러라고 하시면서 국수3뭉치와
쌀두어되와 찹쌀조금과 고춧가루 한됫박을 갖다주라고 갖고오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보물처럼 간수하시는 비료포대종이 세장으로 찹살과쌀 고춧가루를 각각 싸가지고
보자기로싸서 국수 3뭉치와함께 자전거뒤의 사과박스에넣고 고무줄로 잘고정을 시켰습니다
아버지게서는 나에게
" 쌀허고찹쌀 꼬치까리싼 (고춧가루) 비료포대 종이를 비어도라고히서 (비워달라고해서) 잃어버리지말고
꼭갖고 오니라이 그리야 다른디다 또씅게 (또 쓰니까) "
하셨습니다 (그비료 포대종이는 아버지께서 비료포대를 가위로 잘잘라서 물로잘씻은후 햇볕에말린것
이었는데 두툼하고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였답니다 그때는 비닐봉지나 쇼핑백봉지가 없었답니다)
성내사거리를 거쳐서 산속길로 용산에 갔더니 내가 오는것을보고 작은누나와 매형과 안사돈님이 밭에서
오셨습니다
작은 누나는 국수를 보더니
" 우리식구들은 싯다국수를 (세사람다) 참좋아 하는디 수지맞 었네이 올여름에 국수는 안사와도 되것네이 "
하면서 매형과함께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의 당부데로 잊어먹까봐서 비료포대 종이를 비워달라고해서 사과박스에 잘넣었습니다
매형은 올봄부터 몇그루에서 복숭아가 몇개씩 열렸는데 소성학교와 성내학교에서 인분을퍼다가
거름을 많이 해주었더니 복숭아가 퍽크고 아주달다고 하시면서 내년부터는 팔것도 (판매) 20-30 박스는
나올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보리밥과 삶은호박 잎으로 저녁밥을 맛있게먹고 오는데 부지런한 작은누나는 언제 챙겼는지 사과상자에
마디호박과 오이 참외 가지를 거의가득 담아 놨습니다
집에오니 어머니는
" 사방공사덕에 밀가리가 (밀가루) 풍년들어서 가지도 여그저그서 겁나게생겨 버렷네이 놔두면 썩은게
쪼개서 말려놔야 되것다이 그리야 암지나 (아무때나) 반찬맹글아 먹제이 "
하셨습니다
(얼마전에 매형께서 첫물이라고 복숭아를 열몇개를 갖고오셨는데 참으로크고 기막히게맛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 이렇게 맛있는 복송은 (복숭아) 평생처음 먹어보내이 "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때 이야기 입니다
우리 작답논에서 항골냇갈을 따라서 올라가면 등계물다리 중간뚝아래에 기영이형님네 둠벙이 있는데
뚝을 따라서 소풀을 뜯기다보면 기영형님네 둠벙에 큰가물치가 3마리도 보였다가 4마리도 보였다
하였습니다
좀큰 대나무를 잘라서 잘다듬고 끝에다가 낚시줄을 단단히 묶어서 조고만 새끼 개구리를 꿰어서
가물치가 떠다니는곳 앞에서 낚싯대를 들었다 놨다하면 재수있을때는 가물치가 얼른개구리를 무는데
거의가 여시가 (여우) 되어서 저걸물면 죽는다고 눈치체고 쳐다보면서도 모른체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저녁에 집에가면 어머니나 아버지는 내가 소를잘 뜯겻는지 (풀을잘 먹였는지) 한곳에다가 말둑을박고
놔두었는지를 귀신같이 잘도알았답니다
풀이좋은 뚝에서 잘뜯기고 집에가면 어머니는
" 오늘은 배가통통 한것봉게 잘띠꼇다이 "
하셨습니다
가물치를 잡지도 못하고 낚시질만 하다가 소풀도 잘못뜯기고 집에가면 소배가 훌쭉하기에 땡땡이 깐것이
금방 들통이 난답니다
그런때는 어머니는 언제나 똑같은 소리로
" 이놈의 새끼야 늬가소는 책임맞은놈 아니냐 소가잘먹어야 쇠야치도 (송아지) 큰놈을낳제 그리야 쇠야치를
비싸게 팔아서 너중학교도가고 고등학교도 갈것아니냐 이놈새끼야 "
하셨습니다
내가 소를잘못 뜯기는것 같을때는 아버지께서는 여름에도 1주일에 두번정도는 콩껍질과 고구마순과 쌀겨를
많이넣고 소에게는 보약같은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소가 소죽을 맛있게 먹는걸 보면은 소를제데로 안뜯기고 춘수리 큰둠벙에가서 수영을하고 잡지도 못하는
기영이 형님네 둠벙에서 가물치 낚시나 한것이 어머니와 소에게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어느날은 어머니가 그랬는지 아버지가 그랬는지 낚싯대를 어디다가 감추어 버렸는지 부질러서 불을때
버렸는지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조고만 대나무 토막에다가 낚싯줄을 감아갖고 추머니에넣고 소를데리러 작답뚝으로 갔습니다
소도 여름이라 더운게 물을먹여야 했습니다
작답으로 소를데리러 간김에 기영이형님네 둠벙에가서 개구리 뒷다리를 꿰어서 낚시2개를 둠벙의 바닥으로
가라안쳐두고 막대기를 줏어서 잘묶어 놨습니다
손을씻고 올려는데 낚시줄을 묶어둔 논옆의 막대기가 흔들 거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빨리 물었는가 궁금해서 낚싯줄을 천천히 잡아당기니 원세상에 거짓말좀 보테서 팔뚝만큼이나
굵은 뱀장어가 나살리라고 꿈틀데면서 올라왔습니다
뚝으로 올라와서 길바닥에다가 사정없이 두번을 후려쳤더니 기절을 했는지 골병이 들었는지 아주 얌전했습니다
그래서 쑥대를 꺽어서 아가미에 궤가지고 소를끌고 집에오니 어머니가 함지박에타논 겨물을 손으로 휘저어서
먹이고 감나무 그늘에 소를메어놓고 장어를 작두로 잘라서 돼지를 주었더니 아주맛있게 잘도먹었습니다
마꼴이나 항골에서 내려오는 냇가물에 손으로 웅덩이를 조금파고 소에게 물을먹여도 되지만 소를 잘키우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어제든지 집으로 데려다가 함지박에 물을붓고 쌀겨를 많이넣고 꼭손으로 휘휘 젓어서
소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정성들여서 소를키우니 다른집 소보다 우리집소는 언제나 번들번들하고 살이쪘던것 같았습니다
다른때 같으면 두시간정도 낮잠을 자든가 놀다가 어머니가 소를끌고가서 풀듣어 먹으라고 풀밭에다가 메라고
할때까지 집에서 놀았는데 기영이형님네 둠벙에 넣어둔 낚시2개가 궁금하여서 소를끌고 작답으로 갔습니다
소를 말둑에 메어놓고 둠벙에 갔더니 낚시2개에 조금전같은 장어가 올라왔습니다
또 뚝에 올라와서 장어를 맨땅에 후려쳐서 기절을 시키켜서 집에서 갖고간 끈으로 아가미를 꿰어서 냇가물소의
버들가지에 묶어놓고 개구리를 한마리 잡아갖고 둠벙으로 갔습니다
개구리 뒷다리 두개를 낚시에 찔러서 가라안혀놓고 막대기를 박아놨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꿈쩍도 꿈적을 안했습니다
어머니와 작은누나가 밀가루에 삭카리와 소다를 버물러서 빵떡을 찔려고 하는것을 보고나왔기에 갑자기 빵떡
생각이 나기에 장어를들고 집에으로 왔습니다
집에와서 작두로 장어를 3토막씩으로 잘라서 돼지우리로 가는데 모정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집으로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외양간의 큰바가지에담긴 장어를본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 아야 너그것이 장어아니냐 그것을 어디로 갖고가냐 "
" 돼야지 줄라고 "
" 야임마 그아까운것을 돼야지주어 이놈의 새끼야 장어가 조구나 (조기) 갈치보다 헐씬 양분이 많은것이여 "
" 아까 이것보다 더큰놈을 작두로 다섯토막으로 잘라서 돼야지를 주니까 아주 허천나게 (맛있게) 잘먹드만 "
" 아이놈의 새끼야 이아까운 장어를 돼야지한테 주었어 옛기 미친놈새끼 이렇게 큰놈을 어디서 잡었냐 "
" 작답위에 기영이성네 둠벙 "
" 거그 둠벙에 이렇큰 장어가 살어야 "
" 응 개구리 뒷다리꿰서 낚시2개를 둠벙에 담가놓고왔어 "
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동안이나 흘겨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돼지고기를 구워먹듯이 두엄자리 옆에다가 장어를 구워먹을 채비를 하셨습니다
부억에서 고추장과 마늘한통이랑 소금도 갖다놓으시고 양쪽 돌위에 석쇠를 엊어놓고는 칼로배도따고
잘자른 장어를 올려놓고 굽는데 맛있는 냄새가 돼지고기 못지안게 진동(냄새가 많이남) 하였습니다
기름은 돼지고기보다 훨신더 나오기에 불이계속 튀면서 활활 타올랐습니다
아버지는 고추장을 발라서 장어한토막을 입에넣으 시더니 아주맛있게 잡수시면서 고추장을 발라서구운
한토막을 주시기에 나는 안먹는다고 하면서 도망했습니다
나는 달착지근한 빵떡을 먹으면서 장작판을 깔고앉아서 두엄자리에서 아버지가 장어를 구워서 맛있게
잡수시는것을 구경 하였습니다
장어를 다잡수신 아버지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나에게
" 살살 나가서 소좀 잘뜯기고 기영이네 둠벙에도 가서 또물었는가 보고오그라이 그러고 장어를 땅에다
쳐대서 죽여버리면 맛이들한 (맛이없음) 것인게 죽이지말고 이왕이면 산체로 갖고와라이 "
" 안죽이고 어떻게 갖고온당가 빠게스나 주전자를 갖고가야 것네이 '
" 암 그럼사 아조 (아주) 좋제이 "
기영이 형님네 둠벙에가니 한마리만 물엇고 뚝쪽것은 개구리 뒷다리가 퉁퉁 불은체 그데로 였습니다
아버지가 패대기를치지 말라고 하셨기에 끈으로 아가미를 꿰어서 작답논옆 냇가물속에다 잘묶어놓고
소를 뜯겼습니다
해가 떨어진후 기영이 형님네 둠벙에갔더니 논쪽것은 물었는데 뚝쪽것은 그데로 였습니다
소를끌고 장어두마리를 갖고집에가니 아버지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장어를 빠게스에넣고 항아리에서 물을한바가지 넣으니 죽은줄 알았던 장어들은 살판낫다고 이리저리
흔들어 댔습니다
" 장어는 힘이장사여 빠게스 밖으로 튀어나가니까 체반으로 잘덮어 놔라이 나는얼른 등거물가서
늬외삼촌을 델고올란다 살었으때 배따서 가는소곰을 쪼깨뿌리고 구워야 맛나거든 "
하시면서 옆동내인 등계물로 줄포 외삼촌을 데리러 가셨습니다
어머니와 작은누나랑 저녁밥을 먹고있는데 아버지와 줄포 외삼촌이 오셨습니다
" 막둥아 너어디서 장어를 잡엇냐 장어를 잡기는 보통일이 아닌디 막둥이덕에 오늘 저녁에 목구멍에낀
때를뱃기게 생겻네이 "
어머니 께서는 장어를 구우려는 아버지와 외삼촌에게
" 밥부터먹고 천챙이 (천천히) 구어먹어 " 하니
외삼촌은 우리 어머니에게
" 밥은 날마다 먹지만 장어는 먹기가 쉽간디 장어한마리면 밥맷 (몇) 그릇보나 훨썩 (훨씬) 낫네이 "
칼을들고 도마에에서 장어배를 가르시던 아버지가 외삼촌에게
" 껍닥을( 껍질) 배낄까 배끼지말가 "
" 먼껍닥을 배껴 껍닥에가 영양분이 다들어있는 것인디 껍닥을 뱃기면 못써요 "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