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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린절 용천사 원문보기 글쓴이: 미소^^*
(이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보다 더 자기의 본 생명을 바로 깨달을 것인가. 우리 마음은 지금 사람이 되어서 사람의 정도로 오염汚染이 되어서 사람의 껍질을 쓰고 있으나 우리 마음의 불성은 조금도 때묻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사袈娑를 또한 연화복 蓮華服이라, 연꽃 연, 꽃 화, 연화복이라고도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진리는 마치 연꽃 모양으로 진흙탕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진흙에나 흐린 물에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의 불성, 마음도 역시 사람이 되나 구름이 되나 또는 지옥을 가나 축생이 되나 우리 불성의 차원은 조금도 물들지 않습니다.
마치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높게 일어나고 낮게 일어나서 거품이 되고 또는 파도가 되지만 물기운은 조금도 변치 않듯, 우리 사람도 역시 그런 불성 기운 氣運이 인간이 되든 무엇이 되든 간에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잘 안 보입니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性品은 조금도 변동이 없이 여여 如如한 불성 그대로 찬란한 성품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미처 자기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성자의 흠축이 없는, 조금도 흠이 없는 교훈 따라서 바로 보면 바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불성佛性뿐이구나, 그와 같이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습니다만 , 이런 공부가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이 되고자해서 , 빨리 하나가 되고자 해서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인식적 認識的으로 모두가 다 불성佛性뿐이다, 이와 같이 느끼는 것이 선행적先行的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옛날 미련한 때는 애써 닦아가지고 나중에 겨우 알을알음으로 얻지만 지금은 총명한 때라서 그럴 때가 아닙니다. 또는 지금은 다들 너무나 바쁘게 돌아갑니다.
외도外道도 많고, 잡설도 많고, 여러 가지 주의, 사상이 많아서 우리는 바쁘고 너무나 복잡하여 바른 견해 正見을 못 가지면 사실은 단 한 걸음도 바로 못 갑니다.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우선 신문만 보십시오. 신문이 두 장만 나오더라도 복잡한데 지금은 신문이 석 장, 넉 장이 나옵니다. 그것을 그냥 좀 보려고 할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런 것, 저런 것, 하여튼 복잡한 때라 우리 마음이 바른 정견이 딱 정립되지 않으면 바로 못 갑니다. 바른 아버지도 못되고, 바른 어머니도 못되고, 바른 아들도 못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함부로 한다,
또는 우리 부모님들이 부모 구실을 못한다. 이와 같이 말씀을 많이 합니다만 모두가 다 바른 정견이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우리 수행자修行者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든지 간에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된 이런 시대에는 과연 모든 근원이 무엇인가,
물질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모르면 방황하여 헤매게 됩니다. '인간이 있고, 원자가 있고, 무엇이 있고 간에 근원적인 순수에너지, 이것은 바로 불성佛性이다' 하는 바른 견해가 앞서야 합니다.
불성은 앞서 말씀과 같이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마음으로 표현 하면 불심佛心입니다. 불심, 불성, 부처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두는 사실은 불성뿐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뿐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 이러면 불법佛法을 이해 못 하는 분들은 도저히 감이 안 잡힙니다.
분명히 물질적인 내가 있는 것이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여러 가지 원소가 있고 하거니 어떻게 마음뿐일 것인가, 불법을 너무 깊이 못 믿으면 '일체유심조' 라 하는, '모두가 마음이다'란 말을 못 믿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조금도 흠축 없이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불심뿐입니다. 불심뿐인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모두가 다 불심뿐이라고 확실히 믿으면 우리가 권력勸力에 탐을 내겠습니까?
불교를 믿는 분도 여러 가지 과오를 많이 짓고 쇠고랑을 찹니다. 그런 것은 사실은 겉만 믿습니다. 겉의 형상을 믿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불교를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특히 나이를 많이 잡순 보살님들, 잘 보십시오, 현상을 믿는, 자기 몸뚱이, 내 남편 몸뚱이, 내 아내 몸뚱이 또는 많은 돈, 좋은 집, 이러한 현상을 믿는 분은 참다운 불교인이 못됩니다.
형상, 이것은 결국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무상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는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염라 대왕이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만
공부를 못한 사람에게는 염라대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육도 경계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를 못 벗어나면 염라대왕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염라대왕한테 끌려갔단 말입니다. 끌려온 중생한테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그대가 생전에 내가 보낸 세 분의 천사天使를 보았는가?"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서 죄의 심판을 받는 영가 중생이 못 봤다고 대답을 한단 말입니다.
"내가 보낸 천사는 老가, 병病가, 사死가니라. 늙음이라 하는 천사, 늙은 사람들이나 자기의 늙음 그것이고, 또 한 천사는 자기가 아프기도 하고 남이 아픈 것을 보는 그런 병이라는 천사, 또 한 천사는 죽어서 가는 주검 이라는 천사, 노, 병, 사 이것이 내가 보낸 세 분의 천사이니라."
이와 같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 늙고 병들고 , 죽는 것은 천지우주의 정칙正則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보통 다 이런 천사를 못 봅니다.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저 같은 사람도 환갑還甲, 진갑을 넘었습니다만 젊은 때가 어제와 같습니다. 젊어서 파룻파릇 중이 됐을 때가 어제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황혼 길입니다. 또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 니까? 몸이 건강하여 자기는 아프지 않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안 죽습니까?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은 이것 보고서 집착執着을 별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늙어가서 죽거니 소중한 것이 무엇 인가. 과연 내 몸뚱이가 소중한 것인가, 또 재산이 소중한가,
권력이 그렇게들 소중한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소중한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선재대장부 善哉大丈夫 능요세무상 能了世無常이라! 착하도다, 대장부여. 능히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음이라.
대장부大丈夫라 하는 것은 기운이 세다고 해서 대장부가 아닙니다. 대장부라 하는 것은 무상無常을 느껴야만 , 일체만법 一切萬法을 느껴야만 , 일체만법이 허망무상 虛妄無常한 것을 느껴야 대장부 입니다.
비록 어떤 지위에 있더라도 무상을 못 느끼면 대장부가 아닌 것이고 그 사람은 인간적인 참다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을 참답게 느끼면 그때는 저절로 마음도 비워지고 남한테 궂은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탐욕貪慾도 못 부리는 것입니다.
우선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우리 범부들은 독심에 가려져 있습니다. 어두운 탐욕심에 가리고, 또 분노하는 진심 嗔心에 가리고, 어리석은 치심 痴心에 가린 그런 삼독심 三毒心에 가려져 있습니다.
범부凡夫인 한에는 독한 독심毒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억울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범부凡夫를 벗어나 성자聖者가 못되는 일 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성자가 못 되는 것인가.
제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독심에 가려져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한 일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급선무急先務는 우리의 원수인 삼독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 의식을 밤마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러는 병이 낫는 보살님 들을 보시고 여기 오셔서 불교 의식을 하려고 또 기도를 하시려고 많이 오십니다만 제게 병을 낫게 하는 기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고 몸은 그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은 사실은 텅 빈 공취 空聚라, 빌 공, 모을 취, '공취'를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공취입니다. 공空 기운이 모여 있습니다. 물질이 아닌 마음기운, 물질이 아닌 에너지기운이 모여서 진동하는 현상을 몸뚱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업장業障에 알맞게 몸을 받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 정도로 우리의 업장이 무거우면 그때는 사람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 인연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맙니다.
황야荒野에 집을 지으면 지을 때는 없었던 집이 생기는 것이지만, 뜯어버리면 텅 비어 원래 그대로의 상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몸도 역시 지수화풍, 사대四大을 비롯한 각 원소를 업장 따라서 끌어 모아 만들어집니다.
죽으면 어디에 무엇이 남습니까?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에 우리는 집착 합니다. 자기 손이 소중해서 손을 가꾸고 반지를 끼고 별 짓 다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반지도 자기 손가락도 아끼는 자기 몸매도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비록 삼독심에 가려져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는 오직 모두가 불성뿐이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 다음에는 우리 행위行爲가 달라져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맑은 것이고, 또는 그 반대로 우리 몸이 청정淸淨 하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청정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행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계행을, 계율戒律을 안 지키면, 계율이 없으면 살생殺生도 하고, 또는 훔 치기도 하고, 또는 삿된 음란 淫亂한 짓을 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상대 유한적 相對有限的인 것에 끌려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다 보면 그때는 우리 마음은 안정安定이 되지 않습니다.
안정이 안 되면 우리 마음의 근본번뇌 根本煩惱를 녹이지 못합니다.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탐욕심 貪慾心이나 분노 忿怒하는, 성내는 마음이나 이런 마음을 못 녹입니다.
못 녹이면 그때는 이제 우리 불성佛性을 못 봅니다. 본래는 부처이건만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와 바른 법으로 우리 행위를 다루어야 합니다. 말을 급하게 하면 그에 따라서 우리 마음도 그냥 파동波動을 일으킵니다.
파동을 일으킨 마음으로 해서는 우리 번뇌가 더욱 치성 (熾盛: 불길처럼 높아짐)하여 근본불성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명경지수 明鏡止水라. 본래 여러분들 마음은 명경지수와 같습니다.
밝을 명, 거울 경, 그칠 지, 물 수, 여러분 마음은 원래 밝은 거울과 같이 티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지금 명경지수와 같이 맑지 못 합니다. 조금 기분이 나쁘면 그냥 순식간에 악惡을 뻗칩니다.
이런 파동波動치는 마음에서는 우리 번뇌가 녹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근본성품인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의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려면 먼저 앞서 말씀과 같이 바른 견해가 딱 앞장서야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파동은 그칠 수 없습 니다. 내가 없고 남이 없고, 좋은 것이 없고 궂은 것이 없고, 천지우주가 내내야 다 불성뿐이라고 자주 느끼고 자기 마음을 달래고 하는 데서 우리 마음의 파동이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업장을 녹이고 우리 마음의 파동을 자게 하는 이러한 수행 법, 이것이 참선이고, 염불이고, 주문呪文인 것입니다. 지금 여느 분들이 꼭 자기 하는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 티베트 사람들은 '옴마니반메훔'만 합니다. 그러나 '옴마니반메훔'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도邪道다'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고승들이나 티베트 불교는 다 사도입니까? 또 염불만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염불이 가장 수승한 것이고 딴 것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이런 논법論法은 지금 같은 시대에는 통용될 수 없습니다.
원효대사 元曉大師나 대각국사 大覺國師나 또는 보조국사 普照國師나 정통적正統的인 그런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그러기에 회통불교 會通佛敎를 하셨습니다. 천지우주 天地宇宙가 오직 불성뿐인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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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옮겨가요 _()()()_
영하의 맹추위가 계속 되고 있네요 좋은 하루되삼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