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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의 전설 신동파씨와 10분 인터뷰 |
“필리핀은 제2의 고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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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의 전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60~70년대를 호령했던 신동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십중팔구 농구에 관심이 없거나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신동파는 ‘원조 슈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60~70년대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아시아 농구역사에 남기며 한국농구의 위상을 드높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에까지 이름을 알린 신동파는 필리핀의 농구 영웅인 아벨리노 ‘쌈보이’ 림(Avelino “Samboy” Lim) 선수가 자신의 농구인생을 이끌어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필리핀 농구 세계에서 ‘신’이라고 부를 정도의 전설로 남아있다.
지난 8월21일(목) 본지 기자는 UPTOWN21 모델 하우스 오픈식에서 그를 어렵사리 만나볼 수 있었다.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환갑이 훌쩍 넘는 나이에도 당당한 풍채와 여유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맺은 필리핀과의 인연..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약 10분간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연을 살짝~ 들어보았다.
“60년대 필리핀 농구는 그야 말로 아시아에서 최강이었습니다”고 서두를 꺼낸 그는 처음 그가 필리핀과 인연을 맺게 된 곳은 다름아닌 방콕이었다고 말한다.
“1969년 방콕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입니다. 우리나라와 필리핀간의 결승전이 펼쳐졌는데 95:85로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했죠”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나서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할 시기였던 반면 필리핀은 선진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아시아선수권대회가 개최된 무렵 우리나라는 라디오 중계가 됐으나 필리핀은 방송국에서 직접 나와 생중계가 펼쳤다.
“그리고 그 시합에서 저는 개인 득점 50점을 했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이지만 당시 3점슛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그의 득점은 가히 전설로 남아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농구 전설이었지 필리핀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리핀 전 국민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시합에서 느닷없이 이상한 한국 선수가 50득점의 신화를 기록하자 그를 ‘농구의 신’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과 인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행운’ 또는 ‘성공’의 의미로 ‘신동파’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으니…
그의 필리핀행은 이때부터였다.
“제가 기업은행팀 소속이라.. 기업은행팀 전체가 매년 필리핀에서 친선 경기를 치루게 됐고 그때마다 리잘 메모리얼 경기장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매워터졌습니다”
한국과 필리핀간의 친선 경기는 1974년까지 계속 이어갔다. 그런 가운데 그는 1970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또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대회에 발을 내디뎠던 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8경기 평균 32.6득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해 한국농구 슈터의 계보를 이뤘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99%의 정확도 높은 슛이다. 자유투와 외곽 점프 슛을 연습삼아 세어가면서 100개씩을 던져 단 1개씩 실패하고 모두 성공시켰다는 이야기는 필리핀 농구 선수들의 귀에 속속히 박혔다.
“왜 한국선수들은 슛이 정확한가?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필리핀 사람들은 농구를 처음 배울 때 드리볼을 기초로 배운다면 한국인은 슛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운다고요..”
선수생활 은퇴한 지 34년이나 지난 지금도 필리핀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며 그를 찾는다. 그만큼 50득점에 대한 충격과 정확도 높은 슛은 여전히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필리핀을 방문하면 가끔 PBA(Philippine Basketball Association)에 연락해 농구시합을 관전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협회측에서는 로열석으로 자리를 마련해주죠. 그리고 아나운서가 시합 중간에 ‘아시아의 전설, 신동파가 지금 이 시합을 보고 있다’고 안내방송을 합니다. 저는 어쩔수 없이 잠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줍니다”
올해에도 그는 필리핀을 자주 찾았다. 지난 3월 마닐라에서 ‘코치 클리닉’ 강습을 했다. 초·고·대학생들이 지방에서 배타고 또는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건너와 합숙하면서 3일간 서너시간씩 강습에 응했다. 7월에는 세부에서 열린 ‘아시아대학 농구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아시아의 최강이었던 (필리핀)팀이 지금은 5~6위로 떨어져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교민사회에서도 그는 작고 큰 행사에 참석해 한국인으로서 자리를 빛냈다.
“내년이면 한비 수교 60주년이 된다면서요. 한비 수교 50주년이 생각나네요. 그때에도 공연, 바자회, 6.25 참전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었는데 저는 마카티시 글로리에타에 열린 사진전 앞에서 사인회를 가졌었습니다”
너무나도 필리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아 후에 필리핀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이 없느냐고 질문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필리핀에 살지 않아도 필리핀을 좋아하고 계속 올겁니다. 지금 제 나이가 65세인데.. 저는 기자들이 이런 질문을 종종 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필리핀은 제2의 고향이다. 언젠가는 필리핀에 살 수도 있겠죠.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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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분이 필리핀에 있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