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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범한 죄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는 일. ‘참(懺)’은 싼스끄리뜨의 끄샤마(kṣama))의 음역으로 ‘인(忍)’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엄밀히 따지면 실수를 뉘우치는 ‘회(悔)’와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점차로 ‘참’과 ‘회’가 동일시되어서 ‘참회’라는 말이 쓰여 지게 되었다. 참(懺)에 회(悔)자를 보탠 것은 싼스끄리뜨와 한어(梵漢) 두 말을 합쳐서 사용한 것이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회과(悔過)의 뜻으로 사용된다. 불교ㆍ개신교ㆍ가톨릭교 등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쓰인다. 개신교에서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죄악으로 가득찬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교에서는 ‘고해’라고 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를 뜻한다. 각 종교의 참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참’이란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 ksama라 합니다. 음역으로, ‘인(忍)’이라 하는데, 내 잘못을 용서 비는 것을 참(懺)이라 합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요. 여기에 ‘회(悔)’를 붙인 건데, 개신교의 ‘회개’,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해당됩니다. 보통 연말에 참회를 하는데, 하루를 보면 저녁에 주로 참회반조(懺悔返照)합니다. 참(懺)은 과거를 뉘우친다, 회(悔)는 깨침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쳐야 합니다.
근데 제가 보니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닌 변명, 합리화, 침묵, 대항, 먹칠을 합니다. 참회라는 것은 내가 누구에겐가 잘못한 것을 진실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오늘 계문 대조하고 잊어버렸어요. 만약. 그리고 그 다음날에 계문 대조하면 범계(犯戒) 개수가 적어져요. 하루만 지나도 자신이 지은 일을 적다고 생각하는데, 세월이 지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 그렇게 되는 거지요. 자신이 스스로 참회하지 못하면 주변에서 충고, 지적이 오고, 그것마저도 안 들으면 법의 제제를 받게 되고, 그 법망마저 피하면 인과의 진리가 호리도 틀림없이 대가를 줍니다. 자신이 제재를 안 하면 주변이 제제하고, 주변이 제제 안하면 법이 제제하고, 법이 제제 못하면 진리가 제재합니다.
제가 이리 표현하고 싶은데, 안암교당에서 한가하게 살진 않았으나 시비가 “잔잔한 호수 같다.”고 하고 싶습니다. 교도님이 잘 따라주셔서 그런데, 제가 지금은 폭풍 속에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마음공부 해야 합니까. 우리가 신앙의 기초가 없는 가운데 수행을 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초는 내 안의 진실이고, 밖으로는 스승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스승을 통해 스승이 깨치신 진리, 교법, 회상이라는 공동체에 함께하여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그 진실성에 서 벗어나게 되면 그 사람의 수행은 폼 잡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거짓말을 안 하려 해도 습관, 욕심 등에 의해 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수행과 엮어져 점차 진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가에서 가장 빨리 진경에 가는 사람이 바로 진실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학위가 있어도 때가 타면 그 진리의 위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대의] : 과거의 허물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범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동시에 그 허물을 고쳐가며 날로 선업을 지음으로써 그릇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을 개척하여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게 하며 구경에는 마음의 자유를 얻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의 자유를 얻는 법문인바 그 길은 사참과 이참의 두 가지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과를 범하지 않으며 날로 선업을 짓는 것> |
그래서 우리가 먼저 뉘우치고 깨닫는 것, 잘못함을 알아 사참과 이참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교당 옛날에 손자가 게시판에 장난친 것을 조부모가 애가 했으니 괜찮다며 갔습니다, 변상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모르고 지은 잘못들이 몇 배는 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짓는 것보다 모르고 짓는 게 더 무서운 법입니다. 양심이야기를 하지만, 모르는 것만큼 죄가 없습니다. 모르니 본인 생각대로 말하고, 가책 없이 피해를 줍니다. 예를 들어 빨간 불에서 횡단보도를 건넜어요. 근데 알고 하면, 나중에 가책이라도 느끼면서 참회하고, 안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모르고 하면 가책 없이 계속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회(悔)’가 있어야 ‘참(懺)’이 됩니다. 적반하장이 한 둘 입니까? 대종사님은 우리 생일이 있다, 깨달은 날, 수도하려는 새 마음이 난 날, 잘못을 참회한 날이 생일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데, 설거지를 안 해서 그전에 먹었던 것이 붙어 있으면, 되게 그렇죠. 우리가 수행을 한다 하는데, 참회의 꺠끗함, 먼저 그릇을 꺠끗히 해야 수행을 통해 올릴 수 있습니다. 근데 종교가에 들어서도 건방진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군대 가기 전 상주선원에 지냈는데, 어떤 한 사람이 한손에는 염주를,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습니다. 교법이 무유정법(無有正法)이라, 여러 이야기를 교묘하게 갖다 대어 상황을 모면하는 모습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오늘 참회문 이야기를 하면서 다들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면 좋겠습니다. 이 참회로 내가 그동안 한 것들을 생각하면 좋겠다,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그동안 알고, 모르고 했던 것들을요. 모르고 한 일들은 모르니 참회가 안 될 거예요. 교화 현장에 가고 싶어 하는 분의 손 피부에 트러블이 많은걸 보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본인이 어린 시절 개구리 등 많은 생물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참회를 해도 진리는 대가를 주십니다.
1. 요지 참다운 참회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여실히 깨닫고 믿어서 남을 속이고 해하는 것이 곧 나를 속이고 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행해질 것이다. |
저희가 원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페이지 보시면, 참회의 요지는 불생불멸과 인과응보를 믿어야 영원한 참회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참회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내 잘못을 알면 감수가 가능하나, 모르면 억울하다며 원망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처음 갖는 생각은 원망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원망합니다.
2. 방법 ① 사참(事懺) : 외적인 현실 참회를 이름인 바 매일 마음을 대중잡고 반성하며 고쳐 나가는 방법이니, 첫째, 삼세에 신구의 삼업으로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일체 죄업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과보의 두려움을 절실히 깨닫는 길이요. 둘째, 마음을 챙기고 스스로 경계하여 고쳐 나가서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모든 악을 처음부터 짓지 않도록 계문을 잘 지키는 길이다. * 도력으로써 늘 업력을 대치하되 정업(定業)은 난면(難免)이니 빨리 달게 받고 고쳐야 한다. ② 이참(理懺) : 내적인 진리참회를 이름인 바, 성품에 반조해서 삼세의 모든 업장을 녹혀 버리는 방법이니 첫째, 걸림 없는 선정(禪定)에 드는 길이요. 둘째, 염불삼매에 드는 길이요, 셋째, 송주삼매에 드는 길이다. *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으로부터 나는 것인 바, 혜일(慧日)이 솟아올라야 일체 음기(陰氣)가 녹고 사기가 제거되어서 업장이 물러나는 것이다. |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행 중 말을 못하니 속상할 때 나무에 못을 박았습니다. 근데 그런 일들은 보통 내 뜻대로 안 돼서 입니다. 나중에 이 일들을 알고 못을 뺀다 해도 나무에는 못자국이 남습니다. 설거지도 바로 해야 하듯, 참회는 바로 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변명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다른 곳에서 간사를 데리고 있었는데, 본인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큰 교무님이 화가 내시곤 했습니다. 원문 들어갑니다.
음양 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相生)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相克)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
우주의 음양상승원리를 따라갑니다, 유가에서의 음양상승(陰陽相勝), 불가의 인과응보의 원리를 절묘하게 일치시켰습니다. 태극원리도 서로를 밀어주잖아요,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다. 인과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단견이라 합니다. 보통사람은 지금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하는데, 순환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게 돈이라는 은혜가 생깁니다, 이 돈을 어찌 하느냐에 따라 은이 되기도, 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좋기야 하겠지만 인과이치를 안다면, 이는 복을 까먹은 거며, 복을 다시 오도록 해야 합니다. 농사를 지은 후 제일 좋은 열매를 골라 심고 나머지를 먹는 게 아니라, 다 먹는 것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법신불전에 돈을 내고, 대중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해생어은(害生於恩)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누어야 하는데 나누지 않습니다. 7대 3 정도는 해야 합니다. 교당에서 배운 대로 행하면 분명 좋은 일이 생깁니다. 실수도 줄고 생긴 잉여의 잔여금을 다 먹지 말고 그 일부를 내며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 일주일 한번 헌공금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훨씬 좋습니다. 청년회 출신은 잘 하나, 이 이치에 따라 얻은 이익을 조금씩 꾸준히 내는 게 더 중요합니다.
다른 교당의 교도가 저 보란듯이 수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상을 내면 나중에 해가 됩니다. 신심이 떨어지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음양상승을 왜 먼저 말했을까요? 인과 때문입니다. 선행자는 후에 상생과오(相生過誤)를 받는다. 원불교는 성선설, 성악설인가요? 여러분은 이것을 먼저 이해하셔야 합니다.
정(靜) | 무선무악(無善無惡) |
동(動) | 능선능악(能善能惡) |
순자님은 능악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맹자님은 성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부를 강조하신 것 뿐, 불교에서는 무선무악이라 합니다. 거기서 선을 꺼내 쓰라는 것입니다. 이를 개선설이라 합니다. 이를 믿지 않으면 사형제도를 언급하게 됩니다.
성품자리는 무선무악입니다. 하지만 동(動)할 때는 능선능악(能善能惡)입니다. 화나면, 탐진치(貪瞋痴)가 일어나거나 김장할 때 “누가 오고마네.” 복과 죄를 아울러 짓습니다. 선행자는 상생과오, 악행자는 상극의 화를 입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은 것은 악을 짓고, 선을 받고 싶어 합니다.
선(善) | 상생(相生) |
악(惡) | 상극(相克) |
음양상생은, 음과 양의 원리에 따라 순환하며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상생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은 호리(毫釐)도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다. 확실하다. 확실한 것을 믿고 싶을 때는 선행할 때 이고, 이를 외면하고 싶을 때는 악행 할 때입니다. 복은 복대로, 죄는 죄대로. 누구나 공과 가, 선행과 악행이 골고루 있습니다.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커버하려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단점 중 장점, 장점 중 단점이 있는 것이 인과의 이치입니다. 제가 전생에 얼마나 상(相)이 많았는지 키가 작습니다.
더 들어가면 인과는 인중과 과중이라 하며, 또 인과 사이에는 연이 있습니다. 일본에 반가사유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앞 연꽃이 천년 만에 나온 연꽃이라 합니다. 사막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죠? 물 흘러가면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인은 연을 따라 과를 만나고, 그 과속에도 인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겨서는 안 되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그 “사람이 두고 보자.” 하면, 그 마음이 다음 생에도 이어져서 업이 됩니다. 형상 없는 업식(業識)에는 자신의 수행과 원망도 따라갑니다. 왜 다들 성격이 다른가요? 이는 업식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상생이 좋고, 상극이 안 좋다 생각할 수 도 있으나 좀 더 깊이 봐야 합니다. ‘과(過)’와 ‘보(報)’는 같은 소리입니다. 어디에 중심을 두었느냐 차이일 뿐입니다. 처음엔 먼저 믿으셔야 합니다. 저는 초반에는 확실히 안 믿었습니다. 원불교 만나기 전, 아버지께 인과에 대해 확실해 따졌었습니다. 그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말 뿐이라고 말이죠.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 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
참회개과를 영원히 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는 순간순간 육근(六根)을 쓰며 업(業)을 만들어나갑니다. 업에는 좋은것, 나쁜것 다 있습니다. 업을 짓는다 하여 작업이라 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취하고 불의를 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작업취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개과(改過)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개과천선이라 하기도 하죠? 개과하여 선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잘못했다는 소리는 못합니다. 그러니 먼저 기도를 하세요. 저도 죄를 지은 게 많습니다.
저는 학생시절, 매년 100일씩, 8년간 참회를 하곤 했습니다.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는 건 이해가 되나, 상생의 업력을 벗어나라 합니다. 이는 왜죠? 상생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에 착심이 들게 되면 후에 더 문제가 됩니다.
부부간 너무 사랑하면 애착에 걸려, 먼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아까 상생, 상극이 아닌 이를 근간해서 응용하느냐, 착(着)이 없는 마음자리에서 이를 활용하는가, 아니면 이 상대적 세계만 보고 지낼 것이냐. 절대적 세계에 근거한 상대적 세계면 모를까 그 반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생도 벗어나라 하셨습니다.
그 업력에는 3가지가 있는데, 애착(愛着)의 인연, 원착(怨着)의 인연, 욕심에 의한 업력이 있습니다. 이를 벗어나야 합니다. 죄복을 자유로 한다, 이에 대해 제목만 언급하겠습니다. 육근응용 모두 작업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3가지 업(業)이라, 신(信), 구(口), 의(意) 삼업은 원불교는 심신작용이라 하며 6가지 길, 육도로 진급강급으로 인과를 설명합니다. 이 업에는 여러 가지에 따라 천업(天業), 정업(定業), 성질에 따라 선업이냐 악업이냐, 공업이냐 동업이냐, 또 그 업 형상에 따라 업적이냐 업식(業識)이냐. 희사를 많이 하시면 업적이 되어 복이 됩니다. 근데 성격, 지혜가 되는건 업식입니다. 그게 힘을 타면 업력이라고 하고, 그것을 받으면 업보라고 합니다.
-2부-
참회문이라는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수행으로 나아가자, 깊은 신앙과 아울러져 나아가자는 것이 참회문입니다. 앞에 원리적으로 음양상승, 인과의 이치가 있더라, 어떤 것을 짓느냐에 따라 받습니다. 그것도 호리(毫釐)도 틀림없이 받습니다. 짓는 대로 받는다. 원해도 지어야 받지요. 원하면서 하는 것은 다른 걸 하니 받는 것도 다르지요. 이게 호리도 틀림없는 음양, 인과의 원리이다. 진실로 참회개과하는 사람은 죄복을 자유화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보통 범부들은 짓는 것은 달리하고 끝이 안 좋습니다. 설사 좋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근거하지 않으면 착(着)이 되어 다시 업력의 세계,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참 마음자리,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 마음은 대종사님께서 선악업보가 본래 끊어졌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과이치에 따라 선을 지은 대로 보가 있고 악을 지은대로 보가 있더라, 그래서 철저히 틀림없는 차별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에서 철저히 인과의 이치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과거의 것을 어찌해야 하며 현재는 어찌 해야 하는가가 정해지게 됩니다. 제가 아픈 사람에게 참회해라 합니다. 왜 아프겠어요? 이유가 있으니 아프겠지요. 그것이 바로 확실히 음양상승의 도를 믿는 자의 수용 자세라는 것입니다. 업(業)은 일명 카르마라 합니다.
업(業) : 1) 짓는 일. 지은 일. 2) 심신작용. 3) 행위. 4) 무명에 의한 행위.(업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다.) ① 천업(天業) ②정업(定業) |
업은 우리 원불교 용어로 하자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으로 한 것, 실행한 것, 조작된 것을 말합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상태. 하늘이 움직이면 천업, 대자연이 움직이는 업, 동물들이 움직이는 업도 있습니다.
계문에 대해 신에 대해 주고, 막판에 탐진치에 대해 주는데, 탐진치는 의를 바탕으로 짓게 되죠. 안이비설신의, 이 일체가 마음이 들어 만들어져 유심조(唯心造)이고 업을 짓게 되며, 이는 천업(天業), 정업(定業)으로 나뉠 수 있어요.
천업(天業)은 우주가 자전, 공전하며 생기는 것, 조수왕래, 춘하추동, 성주괴공, 생로병사, 육도윤회 진강급, 죄와 복, 상대심을 갖고 지었으나 업이 되지 않은 것들 다 천업으로 돌아갑니다. 겨울이 되면 옷을 입고 보일러를 때야 하죠. 근데 그러지 못하면 어렵겠죠. 겨울이 옴에 방비하는 것은 천업을 자유화 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자연조건, 자연적 고통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천업의 자유화입니다.
근데 문제는 정업(定業)입니다. 정업은 업이 정해진 것입니다. 정업에는 무형의 업력이 있습니다. 업력이죠. 진강급, 흥망성쇠, 선악, 부귀빈천, 결혼, 직업, 명지장단이 알고 보면 무형의 업력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이 있는데, 업장(業障)이라는 것입니다. 장애물, 담장인데, 이를 헐어버리거나 넘어서거나 해야 하는데 너무 높으면 아주 버거워 지는 것이죠. 첫째 장애가 뭐냐, 탐진치의 장애입니다. 두 번째가 착심입니다. 생을 마감할 때 영가는 먼저 착심을 따라가게 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숙세(宿世)의 업입니다. 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격도 숙세의 업입니다.
세 번째가 업보(業報)입니다. 부처님도 면하기 어렵죠. 대종사님이 한번은 방청소를 하셨어요. 구타원님 아들분이 이런 청소는 우리 같은 중생에게 달라고 하자, 대종사님이 나도 복을 지어야 받는다 하셨습니다. 인과가 틀림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내가 지은 죄업은 면하지 못한다, 이 이치를 알기에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깨친 분들은 검소하십니다. 쓸 자리에서는 쓰고 평소에는 안 쓰십니다. 대종사님이 외출 시 문을 잠가서 이를 제자가 서운해 하자, 중생은 견물생심이다. 내가 너희들 죄 짓는 것을 방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업보입니다. 업은 인이고, 보는 과입니다. 업장에 가려서, 업력의 힘과 업장이 맞돌아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도 살해당할 뻔 하셨고, 대종사님이 아프신 것도 있고, 여러분은 모르고 죄를 지어 아픈 거고, 대종사는 중생 구제하다가 죄보를 쌓게 되어 아프신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는 이를 모릅니다.
옛날 신심(信心)이 장하신 재무부장님이 있으신데, 총부 돈은 크게 불리고 본인은 돈이 없습니다. 본인이 출가시킨 제자들에게 줄 돈도 없어서 아직도 서운해 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서운함이 업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본인이 아파도 오직 중생제도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 중생제도를 못한다면 인과의 이치를 모르니만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정업은 상대자에게 권한이 있어서 성자들도 받게 됩니다.
인과품 9장. 한 사람이 여쭙기를 [사람이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수도하오면 정업이라도 가히 면할 수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이미 정한 업은 졸연히 면하기가 어려우나 점진적으로 면해 가는 길이 없지 아니하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능히 육도 사생의 변화되는 이치를 알아서 악한 업은 짓지 아니하고, 날로 선업을 지은즉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고 선도는 점점 가까워질 것이며, 혹 악한 인연이 있어서 나에게 향하여 옛 빚을 갚는다 하여도 나는 도심으로 상대하여 다시 보복할 생각을 아니한즉 그 업이 자연 쉬어질 것이며, 악과를 받을 때에도 마음 가운데 항상 죄업이 돈공한 자성을 반조하면서 옛 빚을 청산하는 생각으로 모든 업연을 풀어 간다면 그러한 심경에는 천만 죄고가 화로에 눈 녹듯 할 것이니, 이것은 다 마음으로 그 정업을 소멸시키는 길이요, 또는 수도를 잘한즉 육도 세계에 항상 향상의 길을 밟게 되나니, 어떠한 악연을 만날지라도 나는 높고 그는 낮으므로 그 받는 것이 적을 것이며, 덕을 공중에 쌓은즉 어느 곳에 당하든지 항상 공중의 옹호를 받는 지라, 그 악연이 감히 틈을 타서 무난히 침범하지 못할지니, 이는 위력으로써 그 정업을 경하게 하는 것이니라.] |
5페이지 인과품을 보면 정업(定業)을 면하는 법이 마음, 위력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마음속에서 이를 소멸시키는 힘이 있고, 위력으로써, 모기와 사람처럼 상대와 나의 상대적 진강급에 따라 다르게 받게 됩니다. 천업을 돌파하는 것은 내 능력, 지혜로 하므로 돌파 가능합니다.
생사편 3장 학인이 사뢰기를 ["정업(定業)을 면치 못한다" 하신 말씀과 "천업(天業)을 돌파한다" 하신 말씀에 대하여 일러 주소서.] 말씀하시기를 [정업을 면치 못한다 함은, 이미 정해진 업에 대하여는 죄복을 주는 권능이 상대방에 있기 때문에 한 번 결정된 업은 면할 도리가 없이 받게 된다는 말씀이요, 천업을 돌파한다 함은, 그렇게 주어지는 업이라도 받는 이는 곧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의 자유를 얻은 이는 그 죄복에 마음이 구애되지 아니하고 항상 그 마음이 편안하므로 곧 그 업을 자유로 함이니 이것이 천업을 돌파함이니라.] |
죄복을 자유화 한다. 수양, 연구, 취사력을 얻어도 정업은 면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이라 해도 지은 것, 혹은 “좋은 일을 하려 했다.”해도 업(業)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사람은 업을 지은 것만도 못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깨친 것을 임의자재(任意自在)하도록 훈련해서 힘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정업조차도 죄성이 돈공(頓空)한 마음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길, 위력을 통해 업를 가벼이 하는 것. 아무리 타인이 피해를 줬어도 내가 이에 화나서 나가면 성장에 방해됩니다. 아무리 화나도 성장에 방해되는 선택은 해서는 안 됩니다.
안이비설신의는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를 강하게 표현하여 원죄설이라 합니다. 이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 보면 스님이 개구리에 발에 돌을 묶어서 나가지 못하게 하죠. 그게 내가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죄가 많으면 그 업력이 나를 묶게 됩니다.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한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와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나니라. |
제가 아주 좋아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회라 하면 자학을 합니다. 학생시절, 계문체크를 하면서 자학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항상 되는 것이 있죠? 나태, 신용 등. 저는 탐진치는 항상 체크되어 일기시간이 괴롭더라고요. 하지만, 마음원리를 모르면 자학하게 됩니다. 탐진치는 살아있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진리의 있어지는 소 자리입니다. 경계 따라 있어지는 게 이치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안 나게만 하려고 했어요. “나는 것”과 “내는 것”은 다르죠. 대종사님은 그래서 심신작용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심신작용처리를 문제 삼은 겁니다. 중생과 부처는 심신작용은 똑같으나, 심신작용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심신작용처리건을 적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행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지행을 대조할 것이며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걸 알고 대종사님께 고마워했습니다. 함께 공부인이다. 그렇게 표현시킨것이다. 참회는 자학이 아니라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입니다. 근데 우리는 “매번 과거의 것만 생각하는 참회만 생각하더라.”입니다. 과거에 지은 것을 수용하기 위한 참회입니다. 달게 받고, 좋은 선연의 씨앗을 심는, 숙명적 인과에서 창의적 인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화 밀양 봤죠? 자식을 살인한 자를 찾아갔으나 그는 “자기 스스로 용서됐다.”고 합니다. 자기 참회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해 직접 참회를 해야 합니다. 복록을 많이 지으면 외부에서 1차 차단을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숙업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신업이라는 것은 새로 지은 업으로, 죄업을 주로 말합니다. 이를 다시 짓지 아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워지고 악도는 멀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업에 대해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감수(甘受)해야 합니다. 입맛 달게 받아야 합니다.
천도품 7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행할 바 도가 많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하면 생과 사의 도(道)에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살 때에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할 것이요,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악도를 면하기 어렵나니라.] |
7페이지 보시면 생과 사의 도가 있다, 이 두 가지를 잘 모르면 살아서는 가치를 알기 어렵고 죽어서는 악도를 면하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육도 중 위의 2개는 선도, 아래 4개를 악도라 합니다. 이곳은 중생의 세계입니다. 죽을 때도 알지 못하면 악도로 가게 됩니다. 하나는 착, 하나는 업, 하나는 생사를 자유로이 하는 근기가 있습니다. 이중 택하는 것 또한 인과에 의해 선택됩니다.
생사편 4장 말씀하시기를 [욕심과 착심이 많을수록 그 영식(靈識)이 높이 솟지 못하고 악도에 떨어지게 되나니, 마치 탁하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 앉는 것 같고, 욕심과 착심이 없을수록 그 정신이 높이 솟아서 선도에 수생하게 되나니, 마치 맑고 가벼운 것이 높이 오르는 것 같나니라.] |
장례식장 가면 영(靈)이 보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영이 착심(着心)을 쫒고, 업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근데 착심에 묶이면 뜨지 못합니다. 죽을 때 마음 편히 죽은 사람을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착심이 적습니다. 그래서 잘 산 사람은 착심이 적은 사람이 잘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이 빨리 뜨고, 더 높이 떠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그리고 중음의 기간이 짧아서 전생의 지혜와 업력을 빨리 회복해 들어갑니다.
천도품 18장을 보면 염라국과 명부사자 이야기가 있죠. 염라국이 명부사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착심과 인연들이 그것이다. 천도품 20장에 좋은 묘터 가야겠다. 그런데 사람이 묘터에 갈 일이 뭐 있겠어. 축생보를 받겠죠. 법위편 40자을 보면 선행 후에 집착하면 악도에 떨어지는 것도 법의 형상입니다. 육도에는 심상육도(心相六度)가 있고 이게 몸을 받으면 현생육도가 됩니다.
경의편 52장 [육도 사생으로 건설되는 이 세계는 우리의 마음의 차별심으로 부터 생겨서 나열된 세계니라. 천도란 모든 경계와 고락을 초월하여 그에 끌리지 아니하며 고 가운데서도 낙을 발견하여 수용하는 세계요, 인도란 능히 선도 할만하고 악도 할만하여 고도 있고 낙도 있으며, 향상과 타락의 기로에 있어 잘하면 얼마든지 좋게 되고 자칫 잘못하면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세계요, 축생계란 예의 염치를 잃어버린 세계요, 수라란 일생 살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망히 살기 때문에 무기공에 떨어진 세계요, 아귀란 복은 짓지 아니하고 복을 바라며, 명예나 재물이나 무엇이나 저만 소유하고자 허덕이는 세계요, 지옥이란 항상 진심을 내어 속이 끓어올라 그 마음이 어두우며 제 주견만 고집하여 의논 상대가 없는 세계니라. 이와 같이 육도 세계가 우리의 마음으로 건설되는 이치를 알아서 능히 천도를 수용하며 더 나아가서는 천도도 초월하여야 육도 세계를 자유 자재하나니라.] |
경의편 53장을 볼면 중생은 정욕이 반절이나 됩니다. 제불조사는 마음의 상태를 놓고 보면 딸들은 아빠 인연으로, 아들은 엄마 인연으로 옵니다. 제불조사(諸佛祖師)들은 정욕(情慾)이 거의 없습니다. 탐진치 기운이 녹은것입니다. 그래서 기운이 중요합니다.
인과품 26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이 철없이 많은 죄업을 짓는 가운데 특히 무서운 죄업 다섯 가지가 있나니, 그 하나는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대중의 앞에 나서서 여러 사람의 정신을 그릇 인도함이요, 둘은 여러 사람에게 인과를 믿지 아니하게 하여 선한 업 짓는 것을 방해함이요, 셋은 바르고 어진이를 헐고 시기함이요, 넷은 삿된 무리와 당을 짓고 삿된 무리에게 힘을 도와 줌이요, 다섯은 대도 정법의 신앙을 방해하며 정법 회상의 발전을 저해함이라, 이 다섯 가지 죄업 짓기를 쉬지 아니하는 사람은 삼악도를 벗어날 날이 없으리라.] |
그리고 중생이 짓는 죄업 중에, 인도품 26장에서, 대중을 잘못 인도하고 인과를 못믿게 한 죄, 시기질투로 타인을 밀어버리는 죄, 삿된 모임으로 패거리 문화를 만든 죄, 정법회상 발전을 저해한 죄는 삼악도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업이 크다 하셨습니다.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 빚이 많은 사람, 주기 좋아하는 사람은 빚이 적습니다.
보통 범부가 생각하는 것의 반대라 생각하면 됩니다. 돈 많고, 잘생긴 게, 존경받는 게, 아니라 존경심이 우러나와야 존경받는 것입니다. 선배라고 존경하는 게 아닙니다. 일단 고개는 숙일 뿐이죠. “현실과 다른 게 너무 많더라.”입니다. 병자에게 너무 집착심을 갖게 해도 악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도재, 기념재 때 선도, 악도이야기가 반드시 나옵니다.
한울안 한이치에 일원의 진리 102절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법은 정견(正見), 정정(正定), 정행(正行)을 하는 것이며, 자력이 서지 못할 때에는 철저한 신성을 가져야 한다." |
한울안한이치 정산종사님 말씀을 보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법은 정견, 정정, 정행인데 이는 결국 삼학수행입니다. 아직 자력이 없는 사람은 철저한 신성(信性)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되 [전심 작악(前心作惡)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후심 기선(後心起善)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나니라] 하시었나니, |
구름은 무엇입니까, 무명(無明)의 업입니다. 해는 본래 우리의 공원정(空圓正), 원래 성품자리입니다. 후심기선(後心起善)은, 이를 마음으로 새롭게 고쳐나간다는 것입니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여있는 탐진치기운만 벗기면 그 기운이 다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 죄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이여! 어찌 이 문에 들지 아니하리요. |
■ 무명(無明) : 1) 밝지 못한 마음. 2) 어두운 마음 ↔ 반야 3) 성품이 바로 발현되지 못하고 무엇(감정, 습관, 욕심, 선입관념, 친소, 상식, 지식, 아집 등)에 가려서 발현되는 작용. 4) 자체의 상에 가려서 나오는 마음. 예) 태양이 구름에 가리면 그 광명이 제대로 비치지 못하고 전구에 색을 칠하면 그 빛이 순색(純色)으로 비치지 못하는 것 같이 우리의 마음도 무엇엔가 가려서 발현되는 작용은 제대로 비치지 못하기 때문에 밝고 바르게 작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에 의한 그 행이 죄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마음은 여러 가지인데, 여기서 마음은 분별성, 주착심의 마음입니다. 죄는 분별, 주착심의 마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삼독심의 마음, 부정적 마음을 말합니다. 업(業)은 본래 무명인지라, 이는 십이인연을 말합니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이 명(明)으로 시작하냐 무명(無明)으로 시작하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일어납니다.
대산 거래편 5장 대산 종사, ‘십이인연’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삼세 모든 생령의 윤회하는 현상을 살펴보면 직업도 천종 만종이요 사는 것도 천차만별이나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집착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해탈의 세계니라. 집착의 세계는 탐·진·치의 지배 하에서 밝은 정신을 어둡게 하고 순일하고 온전한 정신을 흩어버리며 내일은 어찌 될지언정 오늘만 좋게 하려는 죄 짓는 재미로 사는 세계요, 해탈의 세계는 계·정·혜의 지배 하에서 정신을 차려 흩어진 정신을 모으고 어두워진 정신을 밝히며 오늘은 괴로우나 내일을 위해서 복 짓는 재미로 사는 세계니라. 탐·진·치 삼독심으로 일생을 허덕이다가 죽게 된 사람은 죽는 찰나에 어두운 무명 하나가 빠져나와서[無明], 갈 길을 모르고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行], 다시 새 몸을 받게 될 때는 무명인지라 사람은 우마육축(牛馬六畜)으로 보이고 우마육축은 화려한 사람으로 보여[識], 마침내 음욕을 타고 아무렇게나 수태되느니라. 또 그 태어난 대로 태중에서 얼마를 지내면 정신과 육신이 나타나고[名色], 또 얼마 뒤에는 육근이 제대로 갖추어지며[六入], 다시 얼마가 지난 뒤에는 태중에서 나와 이 천지 대기를 접촉하게 되고[觸], 접촉한 뒤에는 한서와 기근을 받아들이게 되고[受], 한서와 기근을 받아들인 뒤에는 차차 증애심이 나게 되고[愛], 증애심이 일어난 뒤에는 취사하려는 마음이 생기고[取], 취사하려는 마음이 생긴 뒤에는 좋은 것은 쌓아두려는 욕심이 생겨서[有], 일생 동안 그 욕심의 지배 아래서 살다가[生] 늙고 죽고 또 낳게 되어[老死], 그 무명의 업식 하나가 무량세계 무량겁을 십이인연을 따라 굴러다니게 되느니라. 그러나 계·정·혜가 주장하는 불보살 세계에서는 일생 동안 마음을 챙기고 살므로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사는 것은 낮과 같고 죽는 것은 밤과 같아서 밤이 설사 어둡다 하더라도 전등이나 불을 가지면 낮과 같지는 못하나 무엇에 걸리고 고랑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이 밝은 마음덩어리 하나가 홀로 드러나 몸을 받게 될 때는 음욕으로 들지 아니하고 빈집을 잡아 들어가듯 부모에게 의탁하여 영식이 입태되고 또 순서를 따라서 세상에 나타나 법 있게 살다가 법 있게 죽으면 또 법 있게 나게 되느니라. 이처럼 밝은 영식 하나가 무량세계 무량겁을 자유자재하게 십이인연을 굴리고 다니게 될 것이니, 이러한 불보살 세계의 재미는 어떠하며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는 중생 세계의 고해는 어떠할 것인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십이인연을 설하셨나니 과거 현재 미래에 자주력을 얻지 못한 일체 동포는 다음 법문으로 해탈의 길을 얻기 바라노라. 마음을 깨치면 십이인연을 굴리고 마음이 어두우면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느니라 [心悟轉十二因緣 心迷十二因緣轉].」 |
여기서의 업은 악업입니다. 근데 자성(自性)의 혜광(慧光)이 밝아지면 무명도 본래 없어 저절로 없어집니다. 마지막 문구를 보면 대종사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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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벌 타이핑하신 서현교우님 감사합니다.
은혜롭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서현, 밀운교우님 고생많으셨습니다! 화이팅!!
댓글 감사합니다. 부장님
감사합니다 밀운교우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