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강좌(19)】 ‘열린 마음이냐? 닫힌 마음이냐?."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9
열린 마음이냐? 닫힌 마음이냐?
요새 이 사회에 나타나는 문제, 학생들의 데모 그걸 진압을 하느라고 해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그러는데, 그러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을 그리로 보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누구라고 사람의 이름은 모르지. 요새 우리끼리 말을 해도 평지풍파라고 그럽니다만, 적어도 이 사회에 그저 보통으로 가지고 보면 이것 참 평지풍파입니다. 이러지 않고도 이대로 살아가는 게 잘돼 간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랬고 저랬고 고의로 일부러 무슨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사회 모양이 다 우리 마음에 그 짝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여간 사람들이 참으면서 무슨 큰 불상사, 끔찍한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런다면 또 차차 여러 가지 부족이 있는 문제가 개선이 되어갈 겁니다. 아무래도 사회의 첫째 조건은 화평한 것입니다. 화평하여야 생각도 이렇게 올바르게 할 수가 있고, 또 하고 싶은 일도 완전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생각대로 돼갈 수가 있습니다. 평화적인 기분이 없으면 사람들이 생각을 정상적으로 못해요. 그것만은 우리가 잘 생각해야 돼.
개인의 경우는 잘 알지 않아요? 마음에 무슨 불안한 문제가 있어 가지고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글을 쓸라면 마음이 뭐,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마음이 무슨 이렇게 켕기는 것이 없고, 두려운 것도 없고, 불쾌한 것도 없고, 그럭해야 마음에서 비로소 내가 생각하기에도 야, 이 생각은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럴 수 있는 생각이 나지. 억지로는 안 되지 않아요?
그런데 사회전체도 그렇습니다. 전체도 사회에 평안이 있어야, 사실은 평안이 있으면서도, 그저 참 평안이란 결코 죽은듯한, 그저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내다보는 것 같은 그런 게 아닙니다. 마음은 평안하면서도 거기 무슨 이런, 이 감격이 있어야,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열린다, 개방적이 된다, 사회전체에서 무슨 좋은 의견이 나오려면 사회의 정도가 일단 이렇게 높아지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절대 필요해. 겉으로 아무리 무사한 것 같아도 사람들이 마음을 꽉 닫아놓으면 아무것도 안 돼. 이렇게 우리가, 가령 이런 집에 순수한 의미의 종교집회라 그럴 수 있겠는지 없겠는지 나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모인다든지 종교집회라 그럽시다. 종교집회라도 그 모이는 사람들은 마음이 대다수가 다 마음이 열린 마음으로 왔냐? 닫힌 마음이냐? 그게 다 다르다고. 교회란 본래 종교모임이란, 사실은 우리 마음이 열리기 위해 하는 겁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치 이 사방에, 방안에 문을 활짝 다 열어놓는 모양으로 말이야,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대로 들어오고, 누가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대로 들여다봐도 아무 거침이 없이 그런 사람, 우리 마음이 그러한, 그러지 않고는 종교에서 말하는 소위 은혜가 있을 수가 없어요. 난 벌써 무슨 닫힐 게 닫히면, 그걸 이제 대학에, 한문에 이게 대학에는 벽이라고 그랬지. 좋아하는 것 때문에 무슨 여덟 가진가 아홉 가진가 뭐 그랬지요. 나 지금은 잊어버려 잘 생각이 안나. 그렇지 않아야 된다는 거야. 거기도 말이 나오다가 그랬습니다만, 그러면 안 돼. 그런 게 아무것도 없는 열린 상태,
그런데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요. 그렇게 되기가 어려운건, 우리의 소위 욕심 때문에 그래. 우리 마음이란 항상 의식 리에 무의식 리에, 그 뭘 욕구하고 바라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이제 될수록은 그래. 그런 의미에선 아마 안식일이라고 그러는 안식일, 날이야 뭐 안식일이란다고, 토요일이 아마 안식일이 되고, 주일날은 그런 건 상관이, 아무 날이면 어디 상관이 있어요? 하여간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그날을 안식일이라고 그랬다하는 거는, 마음이 될수록은 열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 있는 마음은 평안하면서도 어느 감격이 있습니다.
시원한 것도 없고 감격도 없다
난 늘 그럽니다만, 비교적 좋은 실례를 든다면, 여기 나이 많은 분들은 그전에 3·1운동 때 지내봐서, 3·1운동 날 같은 그런 날은, 그건 전국적, 전 국민적으로 마음이 열리는 거야. 누가 열라고 해 그런 거 아니에요. 누가 그러기 때문에 그건 어드런가 하니, 그때에는 누가 어렵다면 아주 곧 어려운 말 하지 않아도 곧장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각하지. 가령 군중이 이렇게 많으면 길가에 물을 떠내다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먹여준다든지, 점심 같은 걸 해서, 무슨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누가 시키는 것 아니라도 한다든지, 또 무슨 피로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반가이 안방이고 뭐 밥 방이고 할 것 없이 들어와서 쉬고 가라고 그런다든지, 사회적으로 그런 어느 때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마 해방됐을 때에 또 한 번 그래봤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시기가 별로 없습니다. 이제 그런 걸로 한다면 6·25전쟁은 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6·25전쟁 이후 4·19, 그래 4·19학생들의 그게 있은 다음에 또 한 번 아주, 그 정도 반응까지 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비교적 사회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상태, 내걸 아낄 것도 달라면 뭐든지 줄 수 있는, 공공한 일을 위해서는 누구라도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그전에 도로 혹 감정이 있어서도, 그런 걸 나쁘게 보지 않고 좋은 뜻으로 사랑을 배우고 그럴 수 있다는,
그런데 이건 뭐 딴 얘기 됩니다만, 이 사회가 한 치 이렇게 높아지는 거, 일단 높아지는 것이 있으려면, 또 무슨 국민적으로 큰일을 해내려면, 그런 기분 없이, 그런 사회 분위기 없이는 난 안된다고 봅니다. 그럴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한 몸을 아껴하지 않아. 아껴하지 않는 건 왜 그러나 그러면, 자기는 자기 목숨이 자기 목숨이 아닌 줄 알아요. 의식하는지 무의식인지 모르지만, 의식 리에 무의식 리에 자기는 결코 혼자의 사람이 아니고, 자기목숨은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는 것, 이때까지 오기도 자기 힘으로, 받은 것도 어디서 받은 거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할 인류과학도 그렇고, 과거를 보거나 미래를 보거나 쉽게 말하면, 이기적인 그런 걸 적어도 한 때 이겨요. 그런 감격 속에 들어가면 그런데, 개인으로 우리가 그걸 많이 경험하지요. 많이 그런 때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따금, 이따금 늘 경험하지 않아요?
이렇게 사회 전체적으로 지금같이 이렇게 자꾸 갈수록 답답한 이것은, 5·16 사건 이후 가속도적으로 갈수록 자꾸 답답한 겁니다. 뭔지 막혔어. 시원한 것도 없고, 감격하는 것도 없고, 그래가지고는 무슨 보람 있는 일이 국민적으로 될 리가 없어요. 날마다, 날마다 하는, 그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주, 먹고 입고 자고 그건 여전히 하겠지만, 어디 사람이 그것만이에요? 역시 뭐 사람의 살림에 올라가는 것은, 속에서 되는 거 속뿐인데.
그래 아까 하던 말 너무 옆으로 들어갔습니다만, 그러나 저러나 그렇더라도 그렇게 답답한 살림인줄 압니다만, 그렇더라도 일부러, 일부러 어느 한 곳에서 무슨 문제를 만들어내지만 않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평안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고, 평안한 가운데 살아가노라면 이제 차차차차 돼가. 어느 날 이제 그런 감격도 올 수도 있고, 또 이때까지 있던 것을 고쳐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야기(夜氣)를 가졌다
맹자의 말을 빌어하면 그런 걸 야기라고 그래. 밤 야(夜)자 하고 기운 기(氣)자야. 야기(夜氣)라고 해. 우산이라 하는 산이 있는데, 그 나무 수목이 우거져서 그렇게 좋은 산이지만, 그걸 가서 다 찍어먹으면 보기가 싫어. 아주 뭐 물로 씻은 듯이 그렇게 돼. 허나 그래도 원체 나무니까 둬두면 돋아나. 돋아나는데 그걸 또 소 놔먹이고, 말 놔먹이고 또 나무꾼이 가서 찍고 그러면 어찌 자라날 수 있겠냐? 그러니까 자라는 기운은 밤 동안에 자라. 그래서 야기라 그래. 낮에 다 사람이 짓밟아 먹었어도 적어도 하룻밤 자고나면 새싹이 돋아나와. 그래 야기라 그러는데, 그건 뭘 가르치고 하는 말이냐 그러면, 사람의 마음상태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우산에 나무 같아서, 본래가 아주 나무숲이 무성하고 푸른빛이 창창해 좋았어. 인간성 제대로 있을 때, 그런데 그걸 다 찍어먹었어. 그럼 이 세상에 소위 살림한다고 하는데 인간성을 다 찍혀버렸어. 그랬어도 인간이니까 자연이, 본래 그 제 속에 둬두기만 하면 자라나는 그 힘이 있어. 사람은 다 야기를 가졌다, 그런데 그 야기조차도 힘을 못 쓰게, 그걸 소 놔먹이고 말 놔먹이고 짓밟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냐? 그러니까 제발 그것마저 그렇게 하진 말아라.
그래 난 늘 이따금 외는 말입니다만, 벌써 수십 년이 됐나? 십년도 전에, 십년 넘었어. 우리나라 산에 나무 없다고 그래서 영국에서 유명한 조림 전문가를 데려다가 보이지 않았어요. 나이 그때 뭐 80이 넘었다나, 굉장히 나이도 많은 분인데 와서 우리나라 방방곡곡 돌아보고, 우리나라 어떻게 하면 이 산림을 다시 회복을 시킬 수 있겠나? 조언을 하라니까 마지막에 가면서 하는 말이, 한 마디 남긴 게 유명한 말이에요. 렛뎀리브 언터치 (Let them live untouch) “제발 가서 건드리지 말라” 그래라. 나무 심을 것 없어. 건드리지만 않으면, 몇 해만 있으면 나무 저절로 클 터인데, 여러 가지 소리할 것 있냐? 네가 자꾸 집어먹으니까 그렇지, 렛뎀리브 언터치, 건드리지 말라고, 다치지 말라고. 그밖에 좋은 말은 없지만, 그건 참 옳은 말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도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엔 더구나 그래요. 렛뎀리브 언터치,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 그래. 우리 속담 말에 장작불하고 의붓자식하고는 건드리지 말라고. 장작불 가만 둬두어야 붙지. 어서 빨리 붙으라고 자꾸 이렇게 하면 안 돼. 의붓자식 일러주느냐고 잔소리 하고 하고 하면 안 돼, 제발 그만두라고. 가만두면 그것도 사람이니까 인간성이 여기 있어서 말이야, 가만 두면 고거 제가 살아날 수 있지만, 건드리면 그만 그게 우산에 나무 짓밟는 것 같아서, 고것이 인간성이 말살 당한다는.
나 어제께 우리 손자 놈이 하나 집안 와서, 군인으로 있는 곳에 중대장으로 가서, 거기 가서 편지했다고 해. 편지하지 말고 제발 인간성을 잃어먹지 말고 오너라. 무슨 일을 해도 모르겠는데 제발 인간성을 잃어, 군대 가서 제일 걱정되는 건 인간성을 잃어먹는 거예요. 그리고 장교라는 사람들은 목적이 뭐냐 그러면, 군인들에 될수록은 저것들에 인간성을 말살시켜야 된다, 그래 왜 그러나? 그건 뭐라고 사람답게 얘기하면 이유 없다, 이 자식아! 그러고 그렇게 해서 인간성이 없어져야, 그다음에 부려먹기가 좋아. 그저 이렇게 해라 하면 이렇게 하고, 나라군인인데도 말이야, 우리 집에 가서 이것 좀 해라, 저 집에 보내서 불도 때라 그래, 이삿짐도 나르라 그래. 저번에도 그랬는데 부산에 어딘지 상당히 뭐 사단장이나 되는가 그럽디다. 그런데 제대도 안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자기 집에 보내서 자기 집 세간살이를 시키고 있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그럽디다.
제발 좀 건드리지 말고 둬둬라
그런데 그런 짓을 하려면 어드런가 하니 인간성이 있어 가지곤 안 돼. 그런데 그걸 잃어버려선 안 돼. 잃어버리는데 사람이 사람인지라, 남한테 무슨 건드림을 당하면, 그걸 그냥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이런 시대엔 그게 걱정이에요. 그러나 알지 못하는 동안에 서로 이렇게 전쟁기분이라, 혁명기분이라, 사회 부정부패라, 이러한 기분 속에 살면, 사람들의 속에 있는 근본 인간사 혹은 이제 맹자의 말대로 야기가 날마다, 날마다 짓밟혀. 이렇게, 이렇게 소가 오고 말이 오고 또 돋아날만하면 또 와 짓밟고, 돋아날만하면 또 낫이 와서 싹 따가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아무리 사람이지만 될 수 있냐? 제발 좀 가만 둬야지. 그래 난 그전에 글을 쓰는데도 그런 말 한일 있습니다만, 제발 국민을 좀 그만 두라고. 건드리지 말고, 건드리기를 무슨 예비군 나오너라, 뭐 주민등록 해라, 뭣이 해라 뭣이 해라, 이거 다 건드린 겁니다. 그래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인간성은 차차차차 적어져. 이제 걱정인거야. 평화롭게 제발 좀 둬둬 달라고, 둬둬 달라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사회모양을 보면 틀려먹은 것 많아.
틀려먹은 것 많지만, 그래서 뭐 정정하게 된 사업이 어디 있겠소? 다 그러겠지만, 그래도 사회에 무슨 그 무슨 사건, 소위 사건이라는 것 없이 사람들이 조용하게 이렇게 살아가게만 되면, 이제 그 본심이 발동을 해요. 그렇게 해서 돼요. 그러게 그 증거를 크게 증거를 들면 뭔고 하니, 소련이 혁명을 하고 사람을 얼마나 죽였소. 그렇지만 이 몇 해 차차 차차 가면서 전쟁이 없어지니까 소련사람도 차차 인간성이 회복이 되니까, 이젠 종교도 필요하다고 그러고, 어떤 때는 심지어는 부흥전도사 보내달라고 그래서 소련에 가서 부흥전도 실컷 미국사람들이 가서 하지 않았어요?
그것만이요? 나쁜 면도 있기는 있지만, 하여간 이 소위 사회 살림에 생애, 생애 맛이라고, 그래 신문에도 발표 된 것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만, 옛날과 아주 달라지지 않았어요? 중공은 저렇게 지금 갓이 목메어놓은 강아지같이 앙앙하고 날뛰지만, 저것도 이제 몇 해가 지내가서 정변이 차차 없어지면 괜찮아요. 그래도 중국 사람이 크게 보면 오천년 육천년 이래 세계에서 어디 내놔도 부끄럼이 없을 만큼 문화를 만들어놓은 그 국민인데, 그게 뭐 그렇게 그저 모택동 신앙대로 다 그렇게 되고 말겠소? 고렇게만 보고 걱정을 하면 그게 너무 당연해.
역사를 크게 보면 걱정이 없어. 그런데 조건은 제발 건드리지만 말고 그만 둬둬 달라. 그러면 중국국민이 반드시 사람 노릇할 거요. 일본 국민은 건드리지 말고 둬둬 달라, 한국사람 조차도 결점이 많지만 건드리지 말고 좀 가만 못살게 굴지 마라라.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될수록은 저 사람을 못살게 굴어야만 쾌감을 느껴는 모양이야. 못살게 군다는 거 뭐냐면 권력욕이에요. 자기말로 이리 오너라, 좀 저리오너라 하면 저리오고, 그렇게 하는걸 보고 마음에 야 좋다, 내 맘대로 된다, 아마 거기 쾌감이 있는, 그런 점이 이제 우리와는 참 아주 다릇습니다만, 작게도 보시오. 사람 중에 그런 타입에 사람이 있어요. 상당히 재주도 있고 마음도 좋건만 사람이 많이 모였어도, 여기 나서서 부산을 떨어서 뭐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그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뭐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사람으로도 별로 아니건만, 나서기만 하면 누가 시켰는지 이럭합시다, 저럭합시다, 그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소위 정치 활동한다는 건 대개 그런 사람이 나와요. 내가 너무 정치하는 사람 나쁘게 얘기하느냐고 그러는 거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려면 그런 줄 좀 알아야지. 그러게 마음자리도 그렇고 이 두뇌로 생겨먹으려면 그렇고, 그래도 반드시 제 일류라는 사람이 다른 땐 모르겠습니다만, 요샌 더구나도 그런 사람이 정계에 나타나려고 그러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을 존중할 리가 있어요? 세상이 점점 다른 사람은, 버스만 타 봐도 알지 않아요? 난 그래 속으로는 욕을 하는 때 많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놈의 세상이냐? 버스 타려면 옛날 같으면 머리가 이만큼 되고 했다 그러면, 그래도 이렇게 탈라 그러면, 먼저 앞섰던 사람이라도 더러 양보해서 타기를 기다리겠는데, 계집애들도 그거요, 사내자식도 그거요. 발등을 밟고서 저가 올라가지 원 이런 놈의 세상, 골이, 화딱지 나서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유, 말을 해 뭘 하게 그러지만, 참 거기가 슬픈 일이요.
‘나는 누가 뭐래도 학생편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그 점이, 이 어찌 사람의 사람, 이렇게 사람 사람끼리 양보하는 생각이 없어 어떻게 하냐? 더러 올라가면 그다음에 좌석 양보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도 않고 뻔히 다 어려운데, 나이 어리고 나이 많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그런 사람도 많고, 사회현상이 그렇게 됐어. 그런데 뭐냐 그러면 주책임이 그 사람보다는 이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데 참 우리끼리 아는 말입니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어느 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일부러 조성을 시키려고 그래. 왜 그런가 하니,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에게 될수록은 잔득이, 아유 이거 야단났지, 이거 뭐 죽게 됐다고, 당장 이북에서 공산당이 오늘밤으로 오는 것처럼, 당장 이제 무슨 결단이 나서 죽으려는 것처럼, 이렇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놓아야, 사람들의 마음이 정상을 떠나서 정상적으로 판단을 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겁에 취해서 자기 인권과 자기 양식의 판단을 내버리고, 남이 하자는 대로 이리하고 저리하고 그러 게 돼요.
그러니까 그런 걸 노려서 지금은 아주 과학적으로 하고 있는 시대라고, 이거 중 가운데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하여간 한 마디로 해서 이 몇 해 동안에 이 부정부패도 많고 그렇다 합니다만 우리의 판단은 어때? 이대로만 둔다면 세상이 조금씩 나아갈 거예요. 깡패도 아무래도 점점 줄어갈 거고, 부정부패도 차차 줄어갈 거지 뭐. 더 늘지는 않을 겁니다. 왜 먹을 만치 먹었으면, 목이 여기까지 찬 다음에 더 먹으라면 더 먹겠어요? 그러니까 천만 원이고 백만 원이고 어서 먹고 싶은 대로 먹게 둬둬. 그러면 다 해먹은 담엔 그다음에 먹으려도 먹을 필요가 없어진 다음엔, 그다음에는 아무래도 아무리 먹어도 먹는 놈이 버는 국민한테는 못 견딥니다. 그러니까 부정부패가 많이 있어도 이 이상 더 이럭하지만 않으면 일없이 돼가겠는데, 또 그래도 차차차차 세상이 이렇게 가라앉게 되면, 그다음 속에 있는 말도하게 되고 그러니까, 신문도 그다음엔 저 할 소리를 하고, 그다음엔 사회비평이 무서워서도 안 하게 되고,
미국 같은 사회에 가보면 요새는 모르겠습니다. 뭐 요새 가 봐도 그 점 마찬가지일거에요. 큰 도둑은 있어. 남의 나라를 가서 도둑, 월남 같은데 가서 전쟁이라 하는 의미로 그런 도둑질은 할법했는지 몰라도, 조그만 식한 남의 집 방안 뚫고 들어가서 도둑질 하는 것은 별로 없어요. 별로 없어요. 이제 흑인들 거리에 가면 더러 있답디다만, 그건 문밖에 뭘 놔두거나 그래도 누가 가져갈까 왜? 가져간댔자 어디 가 팔아먹을 데가 없대요. 사회가 그만큼 됐어. 그렇게 됐고 또 한 번 도둑질 했다, 한 걸 안 다음엔 그 근처에서 살수가 없답니다. 그만큼 됐기 때문에 적어도 이제 그러니까, 이거 그 법이 무서운 게 아니라 참 인간성이 무서워. 사람의 사는 사회에서 그럴 수 있지. 그랬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돼야 옳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평온하게 살면 우리도 그렇게 갈 거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평지풍파 없는 문제를 이대로 가면 될 건데, 이걸 문제를 일부러 만들어가지고 지금 이제 삼선 개헌을 한다, 이렇게 이거 아직까지 그런 문제없어요. 그러잖아요? 그럼 괜히 학생들이 잘 모르고, 나는 누가 뭐라든지 그 점은 학생편입니다. 학생들이 다 잘한다는 건 아닙니다마는, 크게 대체로 생각해보시오. 국회에서 답변하는데 정일권 씨라는 양반도 전학생의 6%내지 8% 밖에 데모에 참가 안했다, 그러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가 그게 나라 생각하는 사람이요? 학생 생각, 젊은이 생각, 어떻게 6%나 8%라고 그러겠어요?
또 설혹 가두에 나서 바라기를 전국에, 그럼 학생이 그저 수십만 백만이고 다 나서기를 바라는 건가? 나 같아서는 학생이라는 건 보고서, 학생이 더러 개인별로 보면 이것 저것 나쁜 점도 있긴 있다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실리에 관계 안 된 사람들이고, 모든 걸 비교적 정의감만 예민한 이 시절인데, 그 시절에 젊은이들이 그런다 한다면 내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있어. “야, 나 제발 세 번이고 두 번이고 그런 생각 없다, 절대 아니 한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제발 공부 잘해다오.” 그럴 것 같은데 무슨 알 수가 없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지 참 어떻게 된 일인 지? 그러니까 그런 걸 위해서 우리가 가만있을 수가 없어. 나 이제 저기 신촌서 떠나오면서도 앉아 내내 생각은 그거에요.
하나님은 우리 속에 계신다
예수님이 오늘날 오셨다면, 계시다면 학생들의 데모 사건, 이런 걸 한 말씀하시겠나? 안하시겠나? 뭐라고 그걸 비판을 하시겠나? 안하시겠나? 난 그 생각만 자꾸 나, 왜 그런 말씀 안하나? 이건 우리 오늘 공부하는 데가 그런 뎁니다. 그래 문제 있습니다. 예수님 그때 사회문제를 별로. 직접 이게 건드려 비판을, 그런 것 없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지금 와서 그런 말씀 안할까? 그런 생각도 있고 그렇지만, 이제 시간 있으면 우리가 차차 얘길 합시다.
저는 제 마음대로 한다면, 오늘날 계신다면 입 안 닫고 계셔. 반드시 무슨 말씀하신다고. 거기에 대해서 뭐 어느 편이 뭐라 하든지 반드시 거기 대해 말씀하시지 모른척하고, 요새 우리 교회 목사님들, 신부님들처럼, 뭐 또 우리 이 세상에 지식인들처럼, 모른척하고 들었어도 못들은 척, 애들이 그런다나보다 그리고 신사가 그런다나보다 그러고만 있을 수가 아마 없을 겁니다. 난 안 그랬어요. 그런데 그저 이 시간에 있으면 얘기, 시대가 달라요. 다른 점이 있어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더구나 이렇게 모인 경우에는 우리 마음을 묶어서 그런 점에 누구라고 뭐 어느 학생이라고, 어느 경찰서장이라고, 어느 누구라고 몰라. 알 수 없어요. 누가 다 있어서 이런 문제를 이렇게 만들어내나? 하여간 만들어내서 이렇게 되는 것만은 사실, 저절로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누가 그런지 제발 그 마음에는, 우리 마음에 우리 이렇게 세상이 제발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야기(夜氣), 밤기운으로 인간 속에 있는 이걸 기르길, 자라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우리 마음을 묶어서 거기를 이렇게 보냈으면, 마침 나타나 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 마음을 그리 보내자 그 말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씀하느냐하니 보통말로하면 “우리 기도합시다.” 그러고 “하나님, 요새 데모학생들…” 이렇게 기도할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기도가 이젠 맥이 없어졌어. 하나마나 풀이풀이 그렇게, 그렇게 말을 하기 때문에, 의례히 예배당에 가면 그렇게 하는 걸로 그러니까, 그래도 그 재래식의 오던 말로하면 그게 ‘기도합시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해. 안하고 내가 지금 이제 발표를 그렇게 합니다.
왜 그러나 그러면 기도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어쩐지 우리말 들어주는 하나님은 저기 어디 밖에 계셔. 하늘 위에 계신지 어디 계신지, 어찌나? 우리 저기 밖에 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거기도 계신 줄 모르지만, 하느님 여기 있다, 우리 속에 있다, 하나님 우리 속에 계신다, 지금은 그 점을 강조하자 그 말입니다. 생명이 자꾸, 생명이라는 건 자꾸 자라가는 건데, 자라나는 것에 표적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다고, 식물은 자라면 어떤가 하니, 자란 것이 키가 높아져요. 조금 어제보다 오늘 키가 높아져요. 키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그 나오는 잎사귀가 차차 모양이 달라져요. 떡잎이 나오다, 그다음에 잎이 나오다, 그다음 무슨 꽃봉오리 나오다, 이렇게 차차 거기 그 자라고 안자란 거 표적이 있지 않아요? 동물은 자란 거 표적이 무엇에 있다고 그래야 되나? 몸뚱어리도 커지지만 그러나, (*녹음은 이곳에서 끝난다. 그 다음 녹음 앞부분에서 계속)
그러면 이제금 키도 크고, 크기도 하고, 기능도 자라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그것만이 아니야. 그것도 자랄 표적에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우리 속이, 이 속이 뭔지 속이란 모르겠지만, 속이 차차 속이 들어간다고 할까? 속이 뭐 달강한다고 할까? 어찌됐던 속이란 말이야. 그것이 사람의 사람 된, 소위 또 사람의 이 생명의 자란 소위가 거기에 있어요. (녹음19, 3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