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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극우의 형성: 철학적·경제적·문화적 요인
1. 철학적 기반: 진리의 증발과 분노의 서사
현대 극우 현상이 번성하는 사상적 토양은 ‘진리’의 개념 자체가 붕괴하고, 그 폐허 위에서 분노와 원한의 서사가 자라난 풍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단지 일부 대중의 비합리성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서구 지성사를 관통했던 거대한 철학적 전환이 대중적 차원에서 왜곡되고 변용된 결과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본래 억압적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벼려졌던 해체의 칼날이, 이제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합의된 현실마저 베어버리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산: ‘거대 서사’의 붕괴와 진리의 상대화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 철학은 계몽주의 이래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보편적 진리와 거대 담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포스트모던을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메타서사, 즉 ‘거대 서사’란 인류 전체의 해방이나 진보를 약속하는 계몽주의의 이성 서사, 기독교의 구원 서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서사 등을 의미한다. 리오타르에게 이러한 거대 서사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세계는 이제 국지적이고 파편화된 ‘작은 이야기들(petits récits)’의 경연장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주체나 해방의 주체가 진보를 통해 전체로서 실현된다는 이념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담론들의 원자화, 이질적인 언어 게임들의 공존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거대 서사의 붕괴는 억압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긍정적 측면을 가졌지만, 동시에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유된 가치와 목표의 상실이라는 공허를 낳았다. 이 공허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의 작업이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불가분한 관계, 즉 ‘권력-지식(savoir-pouvoir)’을 파헤쳤다. 그는 지식이란 결코 순수하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특정 시대의 권력 관계가 ‘진리’로 규정한 담론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푸코에게 진리는 “권력의 효과들을 생산하고 진리로 행세하는 담론들의 총체”이며, 광기, 섹슈얼리티, 범죄와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이러한 권력의 작동을 통해 구성된 것이었다.
자크 데리다는 ‘해체(déconstruc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분법적 위계질서(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흑인 등)를 전복하고자 했다. 그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모든 것이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 매개된다는 의미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언이었다.
이들 사상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대중적 차원에서 이들의 논리는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냉소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전문가 집단, 과학적 합의, 제도권 언론 등 기존의 모든 권위를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하나의 서사’로 치부하고 거부할 수 있는 철학적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의 서막이었다.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 상식의 반란: 반지성주의의 매력적인 자기인식
대중은 스스로를 ‘반지성주의자’라는 부정적 명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비평가들이 외부에서 ‘반지성주의’라고 명명하는 현상은, 내부 참여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매우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이름으로 경험된다. 그것은 바로 ‘상식의 반란(The Revolt of Common Sense)’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잡하고 위선적인 엘리트의 현학적 언어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한 상식과 진정성을 수호하는 투사로 인식한다. 이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반지성주의는 도덕적 우월감과 미학적 매력을 동시에 획득한다.
첫째, ‘상식’은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한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통찰했듯,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자 의심”이다. 이 분노의 핵심에는 ‘엘리트의 위선’에 대한 경멸이 자리 잡고 있다. 극우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전문가와 지식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아탑에 앉아 대중의 삶을 재단하는 위선자들이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인들을 ‘특권층’으로 여기며, 그들의 세련됨과 회의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미덕과 신념을 약화시킨다고 비난한다. 이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 내재된 긴장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엘리트의 위선’ 서사 속에서, 평범한 대중의 ‘상식’은 더 이상 무식의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위선에 물들지 않은 ‘진정성(authenticity)’과 도덕적 순수함의 증거가 된다.
둘째, ‘상식’은 미학적 매력을 가진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언어와 행동은 의도적으로 세련됨을 거부하고 거칠고 직설적인 방식을 택한다. 이는 대중에게 ‘꾸밈없는 진솔함’이라는 미학적 쾌감을 선사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은 기성 정치인의 계산된 화법과 달리,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을 주며, 이는 지루한 위선에 대한 해방감을 준다. 이러한 ‘진정성을 가진 터프한 미학’은 ‘스트롱맨’ 리더십에 대한 열망과도 연결된다.
다. 공백의 지배자: 음모론과 ‘대안적 사실’이라는 새로운 서사
진리가 해체되고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상식의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진 거대한 공백 속으로, 음모론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통찰했듯,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힘은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는 것”에 있다. 마찬가지로 음모론은 모든 사건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악의 세력(예: 딥 스테이트, 글로벌리스트)에 의해 조종된다는 완벽하게 닫힌 세계관을 제공한다. 이 서사 안에서 ‘적’은 명확해지고, ‘나’는 핍박받는 진실의 수호자가 되며, 분노는 정의로운 저항으로 정당화된다.
2. 경제적 기반: 버림받은 사람들의 분노
극우의 분노가 서사를 통해 점화된다면, 그 연료는 경제적 박탈감에서 공급된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곳에서 증오의 정치는 손쉽게 자라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과 현대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 역사적 사례: 분노가 지배한 공화국, 나치와 대공황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외부의 힘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파괴되는 경험을 두 번이나 겪었다. 유시민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생생하게 묘사했듯, 이는 단순한 경제 위기를 넘어선 사회적, 심리적 대학살이었다.
첫 번째 충격은 1923년의 초인플레이션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전쟁 배상금 압박에 시달리던 정부가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마르크화의 가치는 말 그대로 증발했다. 유시민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월급을 자루에 담아 받으면 즉시 시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몇 시간만 지나도 돈의 가치가 떨어져 물건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모은 저축으로 노후를 보내려던 중산층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두 번째 충격은 더욱 파괴적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의 실업자 수는 600만 명을 넘어섰고, 노동자 3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극도의 혼란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력했다. 바로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은 구원자처럼 등장했다. 그들은 복잡한 경제 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대신, 대중의 분노를 배출할 명확한 희생양, 즉 유대인과 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지목했다. 경제적 절망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을 낳고, 그 환멸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강력한 독재자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나. 현대 사례: 신자유주의의 역습과 ‘이중 운동’
오늘날 우리는 1930년대와는 다른,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유사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그 중심에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자유주의』에서 통찰했듯,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는 “경제 엘리트 계급의 권력을 복원하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였다. 즉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낳은 가장 직접적인 결과가 바로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이다. 기업들은 인건비가 저렴한 곳으로 공장을 이전했고, 남겨진 공업 지대(미국의 ‘러스트 벨트’ 등)는 쇠락했다. 안정적인 중산층 일자리가 사라진 자리는 불안정한 저임금 서비스직이나 플랫폼 자본주의가 창출한 ‘긱 이코노미(gig economy)’로 채워졌다. 이러한 상황을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의 ‘이중 운동(Double Movement)’ 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 시장이 사회의 기반을 파괴하려 할 때,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시장의 확장에 저항하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19세기의 문명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이념을 세우고 실현하려는 시도 그 자체였다.”
1930년대의 파시즘이 19세기 자유방임 시장에 대한 가장 끔찍한 형태의 ‘이중 운동’이었다면, 21세기의 극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거대한 시장 팽창에 대한 새로운 ‘이중 운동’의 반동적 징후로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세계화의 패자(looser)들은 폴라니가 묘사한 것처럼,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시장의 힘에 맞서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3. 대항문화와 전통의 균열: ‘문화 전쟁’의 서막
경제적 불안감은 그 자체만으로는 극우화로 직결되지 않는다. 경제적 불만이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문화적 위기감과 결합하여 ‘우리의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위협받고 있다’는 총체적인 공포로 발전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바로 이 역할을 한 것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폭발한 급진적인 사회 운동, 즉 ‘대항 문화(Counter-culture)’의 물결이었다. 이 운동들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암묵적인 합의, 즉 백인 남성 중심의 기독교적 가부장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이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세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실존적 위기감을 안겨주며 ‘문화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가. 인종 질서의 전복: 흑인 인권 운동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의 통과는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백인 우위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특히 남부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인종 통합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우월성이 붕괴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나. 권위와 애국에 대한 반란: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
베트남 전쟁은 정부의 권위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러한 반전 운동의 흐름은 기성세대의 물질주의와 위선에 저항하는 히피(Hippie) 문화와 결합했다. 이들의 자유로운 성(性), 마약 사용, 공동체적 생활 방식은, 근면, 순결, 가족 중심주의를 미덕으로 여겨온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미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가장 가시적인 증거로 비쳤다.
다. 가부장 질서의 붕괴: 여성해방운동과 낙태 논쟁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1963)를 통해 제기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2세대 페미니즘 (여성해방운동)은 ‘가정’이라는 전통 사회의 마지막 보루를 직접 공격했다. 이러한 흐름이 보수주의자, 특히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총결집을 이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바로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었다. 이 판결로 여성의 임신중절(낙태)이 합법화되자, 이는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단순한 법적 판단을 넘어, 신성한 생명에 대한 살인이자, 전통적인 성도덕과 가족 구조를 파괴하는 ‘사탄의 법’으로 인식되었다.
라. ‘비정상’의 도전: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환경 운동
1969년 ‘스톤월 항쟁’은 현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출발점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겨온 보수 기독교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와 함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으로 촉발된 환경 운동 역시 성경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온 근본주의 세계관과 충돌했다.
이처럼 1960-70년대의 사회 운동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기존의 질서, 즉 백인(White), 이성애자(Straight), 남성(Male), 기독교인(Christian)이 중심이 되는 미국의 정체성을 모든 방향에서 공격했다. 이는 해당 질서 속에서 안정감을 누려왔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실존적인 공포감을 안겨주었고, 이 공포와 분노야말로 이후 ‘문화 전쟁’과 극우 정치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4. 문화적 기반: 흔들리는 남성성과 마초이즘의 귀환
극우 정치의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지점이 바로 ‘남성성의 위기’ 문제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까지, 미국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명확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자, 안정된 직장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든든한 가장(breadwinner)이었으며,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러한 ‘전통적 남성성’의 기반이 여러 방향에서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제적 박탈감은 종종 젠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표출되며, 특히 ‘전통적 남성성’의 위기와 깊이 연관된다. 현대 극우 현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남성성, 즉 마초이즘의 문화적 뿌리는 20세기 초 파시즘의 미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가. 베트남 전쟁의 상처 그리고 페미니즘의 도전
베트남 전쟁 이후, 많은 헐리우드 영화는 군인의 ‘잔혹함’ 혹은 군인의 ‘비열함’ 등을 여과 없이 그려냈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영웅적 군인’이라는 남성상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차 대전과 달리,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전 운동 속에서 참전 군인들은 영웅으로 환대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냉대와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이는 국가에 대한 남성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에 깊은 회의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제2물결 페미니즘의 등장은 남성 중심적 사회 질서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임을 폭로하고, 가정 내 성 역할 분담, 직장 내 성차별, 성폭력 문제 등을 공론화했다. 이는 많은 남성들에게 자신들이 누려온 기득권과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나. ‘배신당한 남성’과 마초 문화로의 퇴행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는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에서, 이 시기 남성들이 느낀 감정을 ‘배신감’이라는 키워드로 탁월하게 포착했다. 남성들은 국가와 기업, 그리고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그들이 믿어왔던 남성성의 약속, 즉 열심히 일하면 성공하고 가족을 지킬 수 있고 존경받는다는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겪는 문제의 핵심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남성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장식적이고 상업적인 문화이다. 남성들은 진정한 역할 대신 역할의 이미지만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깊은 불안감과 박탈감, 그리고 무력감은 섬세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을 과시적으로 찬양하는 ‘마초 문화’로의 퇴행을 낳았다. 람보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문화적 욕구를 반영한다. 이들은 홀로 시스템에 맞서 싸우고,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적을 섬멸하며,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폭력으로 해결한다. 이러한 마초적 판타지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남성들에게 강력한 대리 만족을 제공했다.
사회학자 래원 코넬이 말한 ‘헤게모니적 남성성’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기존의 지배적 남성성 모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가장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측면을 강화함으로써 지배력을 회복하려는 반동적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마초적 감수성은 정치 영역에서 복잡한 협상이나 타협을 ‘나약함’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에 대한 대중적 열망으로 쉽게 이어진다.
5. 파시즘과의 융합
반지성주의, ‘우리와 적’이라는 이분법, 남성성의 위기와 마초 문화, 그리고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라는 각각의 흐름들이 하나의 용광로처럼 결합할 때, 파시즘적 사상이 싹틀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다. 파시즘은 명확하고 일관된 교리 체계라고 하기보다는, 특정 조건 하에서 대중의 감정을 동원하는 강력한 정치적 동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 ‘동원 열정’으로서의 파시즘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의 해부』에서 파시즘을 철학적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동원 열정(mobilizing passions)’을 활용하는 정치적 행태로 정의했다. 그가 제시한 파시즘의 동원 열정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동원 열정은 이성적 논증보다는 상징, 신화, 의례를 통해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앞서 살펴본 반지성주의는 이러한 비합리적 호소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고, 마초 문화는 힘을 숭배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하게 만들며, 매카시즘적 세계관은 희생양을 설정하고 공동체를 정화해야 한다는 강박을 제공한다.
나. 움베르토 에코의 ‘영원한 파시즘(Ur-Fascism)’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 역시 파시즘을 단일한 체계가 아닌, 여러 특징들이 모자이크처럼 결합된 ‘영원한 파시즘(Ur-Fascism)’으로 개념화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파시즘의 14가지 문화적 코드를 제시했는데, 이는 극우적 세계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파시즘의 교리에서, 삶은 투쟁을 위해 사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적과 야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나쁘다. 왜냐하면 삶은 영원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다. 파시즘의 미학: ‘행동하는 남성’에 대한 동경
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부르주아적 가치와 의회 민주주의의 나약함에 환멸을 느낀 유럽 사회에 새로운 남성성의 모델이 등장했다. 그 원형을 제공한 인물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1922년 그의 ‘로마 진군’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거대한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움베르토 에코가 ‘영원한 파시즘’의 특징 중 하나로 “행동을 위한 행동”을 꼽았듯, 파시즘은 지식인들의 사유와 비판을 ‘나약한 지식인의 유희’로 치부하고, 폭력마저도 남성적 힘의 증거로 미화했다.
라. 현대적 발현: 위협받는 남성성과 스트롱맨에 대한 열망
20세기 후반, 이러한 마초적 남성성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탈산업화로 인한 제조업의 붕괴는 전통적으로 ‘가장의 역할(breadwinner)’을 수행해 온 남성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다. 수전 팔루디는 저서 『스티프트』에서, 20세기 후반 미국 남성들이 경제 구조의 변화와 페미니즘의 도전 속에서 깊은 배신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위협받는 남성성’은 반페미니즘과 남성 권리 운동, 그리고 공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남성성을 찬양하는 마초이즘의 부상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반작용을 일으킨다. R. W. 코넬이 개념화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위기 앞에서, 일부 남성들은 도널드 트럼프나 블라디미르 푸틴과 같은 ‘스트롱맨’ 리더에게서 대리 만족을 느끼며 ‘행동하는 남성’에 대한 향수를 투영한다.
결론적으로, 파시즘적 사상은 하나의 완성된 철학이 아니라,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앞서 살펴본 반지성주의, 마초 문화, 적대적 세계관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이다. 이는 이성적 대화와 민주적 절차를 거부하고, 오직 ‘우리’의 생존과 승리를 위해 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폭력적인 논리로 귀결된다.
4부: 한국에서의 극우 기독교의 형성
1. 한국의 특수성: 삼중 융합의 이데올로기
앞서 분석한 전 지구적 극우화의 흐름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문화적 맥락과 결합하며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고 강력한 형태의 극우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이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중첩된 ‘삼중 융합’의 과정으로 심층 분석할 수 있다.
가. 제1의 층위: 내면화된 ‘적’과 신성화된 위계 - 반공주의와 유교적 질서
한국 극우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일종의 ‘시민 종교(civil religion)’이자, 집단적 트라우마가 내면화된 결과물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은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후 독재정권은 민주화 요구, 노동 운동 등 모든 비판 세력을 ‘용공(容) 행위’로 낙인찍는 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강력한 반공주의는 한국 사회에 깊이 내재된 유교적 위계질서와 결합하며 더욱 공고해졌다. ‘윗사람’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유교적 윤리는,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변용되었고, 교회 내에서는 목사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시하며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나. 제2의 층위: 희생당한 청춘과 빼앗긴 기회 - 군대 경험과 ‘박탈당한 남성성’
전 국민적 징병제라는 매우 특수한 경험은 극우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정서적 자양분이 된다. 군대 경험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적대의식을 내면화시키는 동시에, 여성과 사회에 대한 깊은 박탈감과 자괴감을 유발한다. “내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동안, 여성들은 나의 기회를 선점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은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폭발한다.
이러한 분노의 서사 속에서 페미니즘은 최악의 ‘적’으로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이들의 희생을 인정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남성 전체를 ‘가부장제의 기득권자’, ‘여성을 억압하는 가해자’로 규정하고,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이기적인 이데올로기로 인식된다. 권김현영이 엮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서 분석하듯, IMF 이후 심화된 생존 경쟁 속에서 남성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이러한 경제적 무력감은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적인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다. 제3의 층위: ‘행동주의 신앙’의 수입 - 미국 근본주의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 극우 기독교를 완성시킨 마지막 퍼즐은 미국으로부터 직수입된 기독교 근본주의(Christian Fundamentalism), 특히 그 정치적 행동주의였다. 2000년대 초반, 진보 정부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 세력은 미국의 New Right 운동을 모델로 한 ‘한국판 뉴라이트’ 운동을 일으켰다.
2. 한국 극우 기독교의 형성: 미국 모델과 한국적 특수성의 융합
이러한 미국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자원들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이식되었고,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결합하여 현재의 극우 기독교 현상을 낳았다. 이 과정은 2000년대 초반 ‘한국판 뉴라이트 운동’의 등장과 그 이후의 변천 과정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관찰된다.
가. 한국 뉴라이트 운동의 형성: 위기의식과 새로운 연합
2000년대 초,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 정부의 집권은 한국 보수 진영에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과거사 청산, 대북 햇볕정책, 권위주의 청산 등 진보적 의제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자, 기존의 보수 세력은 ‘수구’, ‘친일’, ‘반통일세력’으로 비판받으며 이념적, 정치적 수세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전향한 소위 ‘주사파 출신’ 지식인 그룹(안병직, 이영훈 등)과, 기존의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해 온 지식인 그룹(자유기업원 등), 그리고 여기에 보수적 기독교 세력이 결합한 형태였다. 특히 뉴라이트 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김진홍 목사였다. 그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상임의장을 맡아, 교회를 중심으로 뉴라이트 이념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미국의 뉴라이트가 제리 폴웰의 ‘도덕적 다수’와 같은 기독교 조직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했던 전략을 정확히 모방한 것이었다.
나. 뉴라이트의 핵심 주장과 논리
한국 뉴라이트는 미국의 뉴라이트주의가 내세웠던 세 가지 축, 즉 자유시장경제, 강력한 반공주의, 그리고 전통적 가치(역사)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여 제시했다.
뉴라이트가 가장 공들인 전선은 ‘역사 전쟁’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19년 임시정부가 아닌,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로 보아야 한다는 ‘건국절’ 주장을 펼쳤다. 이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하는 진보 진영의 역사관에 맞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반공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대중화했다.
“대한민국은 결코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긍정적인 사건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일제 강점기가 수탈과 억압의 시대만은 아니었으며, 근대적인 제도와 자본주의가 이식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기하여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이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성공이 ‘반공’과 ‘시장경제’라는 틀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뉴라이트는 전통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현대적으로 업데이트했다.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은 북한 정권 자체보다는, 남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소위 ‘종북(從北) 세력’이었다. 이들은 진보 진영의 대북 포용정책,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 등을 모두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 행위로 규정하고 악마화했다. 이는 냉전 시대의 반공 논리를 국내 정치의 반대파를 공격하는 무기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신반공주의’는 북한과 유사한 공산체제의 중국에 대해서도 악마화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뉴라이트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복지 확대 정책이 ‘포퓰리즘’이며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국민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또한, 대기업 중심의 성장과 규제 완화만이 대한민국의 살길이라고 주장하며, 노동조합을 기득권 집단으로 비판하고 비정규직 확대를 옹호했다.
다. 뉴라이트에서 극우 기독교로의 전환
뉴라이트 운동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일정 부분 기여했지만,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들의 역사관은 ‘친일’, ‘독재 미화’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고, 시장만능주의는 양극화 심화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샀다.
그러나 뉴라이트 운동이 남긴 유산은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바로 보수 기독교 세력에게 극단적인 정치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이념적 명분과 논리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뉴라이트 운동이 쇠퇴한 이후, 그 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세력은 더욱더 극단화, 과격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등장한 소위 ‘태극기 부대’의 중심에는 뉴라이트의 논리로 무장한 목회자와 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뉴라이트의 ‘건국절’ 논리를 받아들여 이승만과 박정희를 ‘건국과 부국의 위대한 지도자’로 신격화하고, ‘종북’ 논리를 극단화하여 모든 반대파를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여기에 ‘동성애’와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추가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영적 전쟁’으로 포장했다. 이처럼 뉴라이트 운동이 제공한 정치적, 역사적 서사가 기독교 근본주의의 배타적 신앙 체계와 결합하면서, 타협을 거부하고 오직 ‘적’의 섬멸만을 외치는 오늘날의 ‘극우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들은 ‘교과서포럼’을 결성하여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었다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의 핵심 인물들은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를 벤치마킹하고, 특히 기독교계를 통해 미국 기독교 우파와 연결되었다. 제리 폴웰 시니어가 설립한 리버티 대학교는 그 핵심 통로였다. 故 김창엽 목사는 37년간 리버티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약 2,000명 이상의 한국인 제자를 길러냈고, 김장환 목사 등은 ‘도덕적 다수’의 창립자 제리 폴웰 목사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정치적 행동주의 모델을 한국 보수 교계에 전파했다.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한 김진홍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은 미국의 ‘문화 전쟁’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여, 전교조, 동성애, 이슬람 등을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3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을 ‘애국 신앙’으로 포장했다. 이처럼 미국에서 수입된 근본주의의 전투적 행동주의는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에 조직적 기반과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를 통해 한국의 극우 기독교는 강력한 정치적 동원력을 갖춘 이데올로기 집단으로 완성되었다.
3. 미디어와 기술의 역할: 분노의 가속 페달
현대의 극우화 현상은 디지털 미디어와 플랫폼 기술이라는 가속 페달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기술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를 넘어, 분노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극단적 사상을 내면화시키는 환경 그 자체가 되고 있다.
가. 알고리즘의 토끼굴과 정서적 양극화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추천 알고리즘은 사용자를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이념의 ‘토끼굴(rabbit hole)’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소셜 미디어(SNS)는 본질적으로 ‘분노’와 같은 강한 감정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더 많은 ‘좋아요’와 공유를 얻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전체의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를 심화시킨다.
나. 전쟁 게임: 마초-밀리터리즘의 가상 훈련소
특히 젊은 세대의 극우화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온라인 전쟁 게임의 역할이다.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극도로 경쟁적인 게임들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특정 세계관과 정체성을 내면화시키는 강력한 문화적 장치로 작동한다.
결론: 한국 극우 기독교의 형성: 세 가지 역사적 지층의 융합
앞서 살펴본 미국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자원들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이식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미국의 모델은 한국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던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지층과 결합하고 공명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하고 전투적인 형태의 극우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그 과정을 세 개의 역사적 지층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으로 분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국의 극우 기독교 현상은 유교적 권위주의라는 깊은 문화적 토양 위에, 개발독재 시대의 마초적 성공주의가 쌓이고, 그 위에 미국에서 수입된 근본주의와 신보수주의 정치 전략이 덮이면서 형성된 복합적인 역사적 산물이다. 이 세 가지 지층의 결합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협하는 페미니즘, 성 소수자, 정치적 반대파 등을 단순한 반대자가 아닌, 가정과 국가와 신앙을 파괴하려는 ‘절대악’으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타협과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되며, 오직 ‘척결’과 ‘전쟁’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극우에로의 기울어짐’ 현상에 대해 한국의 신학은 진지하게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참고문헌]
한국어
영문
논찬 자료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극우화: 유래와 흐름을 중심으로
김만준 (덕수교회 위임목사)
이치만 교수의 「보수의 유래와 극우 기독교의 형성과정」은 보수주의 사상의 기원에서부터 미국의 보수주의 흐름과 뉴라이트 운동, 그리고 한국 극우 기독교의 형성에 이르는 복합적인 과정을 탐구한다. 이 교수는 보수주의를 단순히 정치적 시각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보수주의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총체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미국의 보수주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개인의 자유와 자치를 핵심으로 하는 독립 혁명의 정신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인간의 자유에 신적 권위가 부여되면서 저항권 사상이 나타나게 된다. 초기 미국의 보수주의는 자유라는 혁명적 전통을 보수적으로 수호하는 가운데 고전적 자유주의와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보수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냉전을 경험하며 미국 사회에 확산된 반지성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종교적 토양과 결합하면서 ‘뉴라이트’라는 새로운 형태의 보수주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교수는 초기 미국 보수주의가 지닌 ‘덕성 있는 자유에 대한 보수’와 같은 긍정적 측면을 넘어, 특정 상황에서 반지성주의 및 기독교 근본주의 사상과 결합된 보수주의가 어떻게 매카시즘과 같은 정치적 광기, 나아가 파시즘적 사상이 동원된 극우적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이어서 이 교수는 미국의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자원들이 한국에 이식되었으며, 한국 고유의 역사적 경험과 결합하여 현재의 극우 기독교 현상을 낳았음을 설명한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뉴라이트가 내세웠던 ‘자유 시장 경제, 강력한 반공주의, 역사 전쟁(건국절, 식민지 근대화론 등)’이라는 세 가지 축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했다. 이 운동은 대중적 지지 확보에는 실패하고 많은 대중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이 남긴 중요한 유산으로 보수 기독교 세력에게 극단적인 정치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정치적 명분과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뉴라이트 이론으로 무장한 보수 기독교 세력은 점차 극우적 성격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로부터 타협을 거부하고 적의 섬멸만을 외치는 오늘날의 ‘극우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음을 논한다.
이 교수의 글은 한국 극우 기독교의 형성을 미국의 보수주의 모델에서 출발하되, 한국 사회의 고유한 정치·역사적 맥락과 융합되어 발전해온 과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보수주의’ 개념의 분석을 넘어, 하나의 이론이 특정 사회적 필요와 맞물려 어떻게 재해석되고 새로운 동력을 얻으며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이 뉴라이트 운동의 주요 동력이 되고, 교회라는 강력한 조직이 대규모 인력과 재정적 자원을 동원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이는 결국 한국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과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는 의미 있는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 이후, 더 깊은 논의를 위해 제안을 드리자면, 이 교수의 글은 제목대로 극우 기독교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잘 규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오늘의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이들을 어떻게 교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안에 극우화된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심각할 정도로 반기독교적인 행태를 보인다. 이들은 경직되고 배타적인 근본주의적 신앙해석으로 다양성을 거부하고 획일화를 추구하고 있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극단적인 배타주의적 사고와 폭력적인 행동 양식을 보인다.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거짓 선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교화할 수 있을지? 토론을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