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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 2월 말에서 3월 초에 개화하는 풍년화는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나무 중 하나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봄이다. 복수초, 설강화, 풍년화…. 눈이 녹기 전부터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에 이어서 본격적인 꽃 잔치가 열릴 참이다. 바깥 정원은 이제 시작이지만 사람들 마음속 정원에는 이미 기화요초가 만개했다. 내면의 정원을 바깥 세상에 구현하고픈 동기가 가장 왕성한 계절이다. 꽃집은 이맘때 제일 붐빈다.
봄은 정원사들에게도 당연히 바쁜 계절이지만, 특별히 봄이라서 더 그런 것은 아니다. 식물원 각 부서마다 차이는 있지만, 꽃의 향연이 저무는 가을 무렵에 각종 전시 준비로 더 바빠진다. 9월 말부터 식물원 방문객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이때를 맞춰 국화 축제가 시작된다. 국화 축제가 마무리되면 12월부터 기차 쇼가 열린다. 전시 온실에 약 2킬로미터 길이 모형 철로가 놓이고, 미니어처 기차 수십 대가 쉴 새 없이 선로를 누빈다. 장난감 기차가 무슨 볼 것이 있나 싶겠지만, 나뭇가지와 밀랍 등 천연 재료로 만든 철로와 교량을 따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해 뉴욕시 역사적인 건물 100여 채가 세워진다. 12월 초부터 방문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성탄절과 연초에 절정을 이룬다. 기차 쇼가 열리는 기간이면 평일에도 주차장에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성탄절과 연말연시의 설렘과 부산함이 잦아들고, 늦겨울이 주는 권태로움에 사람들 마음이 우울해질 즈음, 식물원은 화려한 열대난으로 전시 온실을 채워 방문객을 불러들인다. 2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난 축제(Orchid Show)는 매년 주제와 디자인이 바뀌기 때문에 많은 방문객이 해마다 전시 온실을 찾는다. 올해는 중국계 아티스트인 릴리 퀑(Lily Kwong)이 ‘자연의 유산’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다. 할아버지의 동양화 병풍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산수화 풍경이다. 전시 온실에는 높다란 바위산이 솟았고, 긴 호수가 생겼다. 대만에서 들여온 다수의 동양란이 바위 위 이끼 틈새로 근사하게 자리를 잡았다. 수백 송이 호접란은 우뚝 솟은 바위산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겨우내 꽃을 기다리다 지친 방문객들은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화려한 꽃 잔치에서 봄을 향한 허기를 달랜다.
난 축제: 자연의 유산
소유의 정원
기차 쇼는 전문 업체가 모형 선로와 미니어처 건물 제작 등 대부분의 작업을 담당하지만, 국화 축제와 난 축제처럼 식물이 주인공인 전시 준비는 오롯이 정원사들 몫이다. 국화는 식물원에서 꺾꽂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자체 생산한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다음 해에 필요한 국화들의 증식에 들어간다. 난을 직접 생산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전문 농장에서 구매한다. 멸종위기종이나 희귀종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보존 온실에 보유하고 있다가 극히 일부가 행사 기간에 한해 전시 온실에 식재된다.
국화나 난을 포함해 전시에 사용된 식물들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보존 식물로서 전시를 위해 공개되었던 식물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나머지는 모두 버려진다. 폐기가 결정된 식물들은 자연으로 잘 돌아가게 하는 일이 최선이다. 부착했던 금속과 플라스틱을 일일이 제거하고 멀쩡한 식물을 잘라서 버리는 일은 시간과 에너지도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정원사들 마음도 적지 않게 상하게 한다.
인턴으로 근무했던 수목원에서도 많은 식물이 버려졌다. 뉴욕식물원처럼 대규모 기획 전시는 없지만, 손상되거나 병든 식물들, 노후한 나무들, 지나치게 번져서 뿌리 뽑힌 식물들이 매일 산처럼 쌓였다. 한번은 게이트하우스1)에 딸린 정원을 새로 조성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장미, 애기말발도리, 큰꿩의비름, 수국 등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터줏대감들이 모두 뽑혀나갔다. 퇴비장에 버려진 식물들을 여러 차례 미니밴에 가득 싣고 왔다. 버려질 식물을 구출해 정원을 가꾸는 보람과 기쁨도 컸지만,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을 자리를 정하지 못해 대형 화분에 담긴 식물들은 손이 많이 갔고, 이리저리 옮기는 일도 빈번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죽어나간 것들도 여럿이고, 겨울마다 배고픈 사슴들에게 뜯긴 경우도 허다하다. 인턴 기간 중 상주했던 약 160만 제곱미터(약 50만 평)의 광대한 정원을 두고, 왜 식물을 집에 들이느라 그 고생을 했던 걸까.
버려지는 식물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식물에 대한 연민보다는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값비싼 식물이나 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식물들은 잘려나간 줄기라도 가져와서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소유의 욕망은 역사가 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다른 소설 《모든 것의 이름으로》에서 한 식물학자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려낸다. 20여 년간의 고증을 거쳐 쓰인 이 대하소설은 19세기 영국 왕립 식물원 큐 가든(Kew Garden)에서 벌어진 일련의 식물 도난 사건에서 출발한다. 희귀 식물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시대, 제국들은 식물학자와 선교사를 태운 선박들을 바다 건너 미지의 땅, 특히 남미로 보냈다. 거기서 발견한 약용식물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주인공 엘마도 그렇게 부를 축적한 집안의 딸이었다. 아마존 밀림이나 안데스의 고산지대를 탐험하고 돌아온 귀족들이 왕실에 건네는 희귀 식물 한 점은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 제국의 통치자들을 감동시켰다. 왕실에 속한 식물원들은 희귀 식물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식물원들은 이렇게 토대를 다져왔다.
소유의 동기가 이렇듯 오늘날까지 정원을 가꾸고자 하는 강력한 에너지인 점은 분명하다. 이 욕구의 원천을 설명하는 강력한 개념 중 하나가 오늘날 제도 경제학의 근간인 희소성 원리다. 《슬로처치》 저자들이 윌터 브루그만 글을 인용해 지적했듯이 “희소성의 원리를 신봉했던 결과로 인류에게 남은 것은 고통과 두려움, 탐욕과 잔인함이다. 아이들과 여성들이 학대당하고, 군비 경쟁이 발생하고, 우리 자신이 아닌 누구도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2)
온갖 식물들로 아파트 베란다를 채운 도시의 정원 생활자라면 한 번쯤 마당의 정원을 꿈꿨을 것이다. 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땅에 얽힌 문제를 생각하면 월터 브루그만의 지적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지금 정원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는데, 이 흐름이 땅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어떻게 합쳐질지 궁금하다. 정원이 부상하면서 땅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간격과 갈등이 더 커질지 모를 일이다. 정원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땅이 없는 현실 때문에 박탈감과 절망감이 더해지진 않을까. 여기 희망적인 이야기가 있다.
플랜팅 필즈 수목원 소유주가 자녀를 위해 지은 플레이 하우스(Play House)의 정원은 전형적인 코티지 가든 스타일이다.
공유의 정원
영국에는 내셔널 가든 스킴(National Garden Scheme, NGS)이라는 비영리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개인 주택의 정원을 개방하여 얻은 입장료 수익금으로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한다. 크고 작은 개인 정원이 이 기관에 등록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늘 열려있고, 일 년에 단 하루 개방하는 곳도 있다. 또는 소유주와 일정을 조율한 후 약속한 날에 방문할 수도 있다. 홈페이지 검색 시스템을 통해 가까운 정원의 위치와 개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입장료 수입과 쿠키와 차 등을 판매한 수익금을 통해 기금이 마련된다.
이 단체 역사는 18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전 하원의원이며 사업가이자 독지가였던 윌리엄 라스본(William Rathbone)은 아내의 간병을 위해 메리 로빈슨이라는 전문 간호사를 집에 상주하도록 했는데, 아내가 사망한 후에도 메리를 계속 고용해서 지역의 가난한 이웃들도 숙련된 간호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과 힘을 합해 지역 간호(district nursing) 체계의 기반을 닦았고, 이후 빅토리아 여왕이 QNI(Queen’s Nursing Institute)를 설립하여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QNI를 통해 전문 간호사 육성과 더불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민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되고, 1927년 QNI의 자문 회의에서 안정적인 기금 마련을 위한 방안으로 내셔널 가든 스킴 설립을 결의했다.
코티지 가든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주택 정원은 4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개인 또는 가족만의 은밀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발전해왔는데, 내셔널 가든 스킴을 통해 비로소 빗장을 열고 외부인을 손님으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현재 약 3,600여 곳의 주택 정원이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영국 주택 정원의 세밀한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입장료 수입으로 2021년 모금된 금액은 약 380만 파운드(약 59억 원)이고, 추가로 차와 쿠키 등을 판매해 기부된 금액은 15만 파운드(약 2억 4천만 원)였다. 팬데믹으로 인한 여러 제약에도, 이전 대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이 기금들은 빈민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의료 구호 활동을 수행하는 기관이나 간호사 교육기관 등으로 보내진다.
정원의 나라 영국다운 풍경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한 동네, 사람들이 꽃이 담긴 상자들을 트럭에서 부지런히 내린다. 길을 따라 만들어진 화단이 금세 새로 심겨진 꽃들로 가득하다. 이날은 마을 꽃길을 만드는 날이다. 어느 주택 마당에서는 넓게 번진 달맞이꽃을 솎아내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어느 집 마당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다. 형편이 어려운 커플을 위해 마을 주민이 손을 보탰고, 마당이 가장 넓은 집은 야외 예식장으로 제공되었다.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이 집 마당에서는 꽃 심기가 한창이다. 신랑 신부가 함께 서는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식장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마당 결혼식은 그대로 마을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에서 정원 축제가 열리는 날에는 집집마다 대문이 열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음대로 마당을 드나들며 정원을 둘러보기도 하고 집주인과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서울 성북구 정릉마을에서 봄마다 벌어지는 이 풍경은 정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주택 정원을 개방하는 흐름은 아주 신선한 변화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변화는 우리나라에서도 공공정원(public garden) 개념이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찍이 영국에서는 왕실 소유 정원을 개방하면서 공공정원 개념을 정립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식물원과 수목원 등 대중에 개방된 장소를 공공정원이라고 불러왔다. 용어 변화와 더불어 식물원이나 수목원의 딱딱한 이미지도 바뀌고 있다. 식물을 공부해야 할 것 같고 산림의 경제적 효용에 설득당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벗고, 여가와 놀이, 쉼과 회복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고무적이다. ‘희소성 원리’가 낳은 경쟁적이고 파괴적인 세태에 기진해진 사람들이 목마른 사슴처럼 정원을 찾는 모습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당치도 않은 얘기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유할 수 없거나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진실한 관계가 그렇고,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자연도 그렇다. 마당 딸린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사는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팍팍하더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자연주의 정원은 공유의 의미를 한층 확대한다. 일찍이 독일의 조경가 리하르트 한젠은 정원을 식물의 서식처로 볼 것을 제안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식물이 뿌리내린 토양, 흙 속 미생물들, 정원을 드나드는 온갖 풀벌레와 들짐승들, 햇빛, 공기, 바람 등 정원을 둘러싼 환경들도 정원의 일부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당치도 않은 얘기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유할 수 없거나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진실한 관계가 그렇고,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자연도 그렇다. 이른 여름날 아침 풀밭에 반짝이는 이슬이나, 따스한 가을 햇빛이 통과한 말간 빛의 가을 나무 잎사귀가 그렇다. 정원의 즐거움은 남들에게 없는 식물, 내 취향에 꼭 맞는 꽃들을 소유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공유 공간인 정원에서 벌어지는 관계를 누리는 데서 온다. 마당 딸린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사는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팍팍하더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향유의 정원
비극적으로 단명했던 태초의 정원으로 돌아가보자. 최초의 인류는 거기서 태어났고, 결혼했고, 거기서 (신학적인 의미로 한정하더라도) 죽었다. 위로 신과의 완전한 관계를 경험했고, 옆으로 첫 인간관계를 맺었고, 아래로 생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을 했다. 그들이 에덴에서 추방되기 전까지 경험했던 일들을 그려보면, 이 시대에 정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즉 정원을 누리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에덴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상하는 데 소요되는 에너지만큼, 첫 인류의 삶의 터전이었던 동산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면, 내 집 마당이 아니더라도 우리 곁에 한층 가까워진 정원을 향유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에덴에서 첫 인류가 누렸을 법한 것들을 더듬어본다. 그 상실한 낙원을 회복하는 연습이 정원에서 가능할지 생각해본다. 정원은 공간을 누리는 법을 훈련하는 곳이다. 땅을 누리는 길은 내 소유의 땅에 담을 두르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고, 문을 열고 대지의 축복을 사람과 또 자연과 공유하는 데 있다. 정원은 풍요를 누리는 길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구는 희소한 자원을 독점해서 충족될 수 없고, 잉여를 덜어낼 때 생기는 풍요를 통해 해결된다. 정원은 손상된 관계를 복원하는 법을 알려준다. 정원을 나만의 은밀한 도피처로 만들고 싶었다 하더라도, 정원을 일구면서 이곳이 고립이 아닌 더불어 사는 현장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정원은 소외된 자아를 되찾게 하고, 문명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유린당한 자연과도 화해하게 한다. 에덴이 교회의 원형이라면, 그래서 그 동산에 교회의 본질이 녹아있다면, 이런 유익을 정원에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소유와 과시의 수단이었던 정원이 자연주의로 전향하면서 겪는 많은 시행착오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그 몸부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 주
1) 과거 영국식 저택의 진입로 입구에 지어진 주택.
2) 크리스토퍼 스미스, 존 패티슨, 《슬로처치》(새물결플러스), 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