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종대왕 기념관
<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6 >
2026.7.23(목) 아내의 서울 강남 청담동 우리들병원 진료를 겸하여 서울 명소 탐방 및 명산 트레킹을 계획한다.
오전 5시 10분경 동해(자택)를 출발하여 09:30 우리들병원에 도착한다.
진료후 첫번째 일정으로 천장산(140m) 하늘길 산행을 위하여 세종대왕 기념관내 주차후 약 1시간 동안(11:30~12:30) 탐방시간을 갖는다.
세종대왕기념관(世宗大王紀念館)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한 기념관으로
조선 세종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지어졌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68년 10월 9일에 기공하여 1970년 11월 준공, 1973년 10월 9일 개관하였다.
세종대왕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 강당, 연구실, 자료준비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옥외 전시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조선 시대의 과학에 관련된 자료(금속활자 판자기, 측우기, 천문도 등)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각종 국악 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세종대왕의 어진과 김학수가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의 치덕을 살펴 볼 수 있다
옥외에는 세종대왕 신도비(보물 1805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와
2012년 덕수궁에서 옮겨온 세종대왕 동상과 구영릉석물(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호),수표(보물 838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 영릉 신도비(世宗 英陵 神道碑)
영릉은 1450년 6월 태종의 헌릉 서쪽 기슭에 조성되었다.
영릉신도비는 공조판서 정인지와 중추원부사 김조가 왕명을 받들어 각각 비문과 비음기를 짓고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1452년(문종 2) 2월 능상 아래에 건립하여 3월 비각이 완성되었다.
1469년(예종 1) 3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고 7월에는 구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을 땅에 묻었다.
1973년 3월 이화여대 박물관팀이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비신(비의 몸체)과 이수(비석의 머리에 새긴 두 마리 용 모양)를 발굴하였으나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는 끝내 찾지 못하였고 이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세울 때 자연석을 비신 받침돌로 삼았다.
1999년 2월 귀부를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
비신과 이수의 높이가 4.5m로 매우 높고 앞뒤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마모되어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의 위치
동경 127도 03분, 북위 37도 35분,표고 헤발 30M
야외 전통혼례를 올리는 청례대중궁
세종 성왕 기념탑
세종 성왕의 마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10월에 세운 세종성왕기념탑이다.
한글 'ㅎ' 조형물
물시개(누각)
이 물시계는 물통(파수호)에 물을 담아 물 받는 통(수수호)에 물이 드는 대로 '자'가 떠올라서 자의 눈금을 가지고 시간을 알도록 한 것이다.
물시계의 역사는 이미 신라 성덕왕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0년(1438)에는 더 정밀한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물시계는 중종 31년(15836)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1/2로 줄여서 만든 것이라 한다.
주시경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국어학자이자 교육자이다.
우리 민족이 자주권을 지키려면 우리말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는 신식 학교인 배재 학당에 입학해 공부하는 중에도 우리글을 연구했다.
당시 배재 학당 교사로 있던 서재필의 신임을 받아 한글로 된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기도 했다.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는 《국어사전》을 편찬했다.
일제의 무단 통치로 국내에서 민족 운동이 힘들어지자 주시경은 중국 망명을 준비하던 중인 1914년에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시경 스승 묘비
1959년 한글 학회가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된 주시경의 묘를 경기도 양주로 옮기면서
최현배가 짓고 정인승이 쓴 한글 묘비를 건립했는데 1981년 12월 12일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질 때
묘비와 석물은 그대로 두었다가 2008년 7월에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이곳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와 다시 세운 것이다.
구영릉 석물(舊英陵 石物)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물로 총 13기이다.
석물들은 능을 여주로 옮길 때 운반이 어려워 땅에 묻었는데 1973∼1974년에 다시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해 놓았다.
현재 석양상과 석마상이 2기씩 남아 있고, 망주석은 1기의 일부만 남아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갖추어져 있으며 장명등은 개석이 없어진 상태이다.
신도비는 이수와 비신 만 발굴되었고 혼유석은 동쪽 부분이 절단된 상태이다.
고석은 1기, 난간주석은 모두 7기가 남아 있다.
1980년 6월 11일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무석인, 문석인과 석양
문석인과 석양 그 뒤로 축석을 받쳐주는 동자석주 2개가 있다.
장명등은 윗부분이 없어졌고 혼유석과 혼유석을 받치는 4개의 고석은 1개만 있다.
무석인과 석마
보물 제838호로 지정된 수표 표석
서울 청계천 수표(淸溪川 水標)
조선 후기에 하천수위를 측정하던 기구로 높이 3m. 너비 20㎝. 화강석으로 된
부정육면방추형의 돌기둥인데 위에는 연꽃무늬의 머릿돌이 놓여 있고 밑은 모가 난 초석으로 땅 속에 박혀 있다.
돌기둥에는 양면에 주척 1척마다 눈금을 1척에서 10척까지 새겼고
3척, 6척, 9척 되는 곳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 평수, 대수 등을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는 것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수위를 나타내어 개천의 범람을 예고하는 데 쓰인 것이다.
이 수표는 원래 수표동 수표교 옆에 설치되었던 것이며,
세종대 마전교는 바로 이 수표교 자리에 있었던 다리였는데 수표가 세워지면서 수표교라 불리었다.
이 수표는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에 수표교와 함께 옮겨져 있다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있던 것을 세종대왕 탄신 615년 을 맞이하여 2012년 7월 17일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세종대왕박물관 1층 로비 벽면에 훈민정음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세종대왕(世宗大王)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준수방 본궁에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에 충녕대군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혼천의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하였다.
또 여러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국가의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창제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 영응대군 사저인 동별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