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1-8절)
이 비유는 한 도시의 재판관이 과부의 억울한 일을 풀어준 이야기인데,
재판관이 '왜' 그 과부를 도와주게 되었는지가 메시지의 핵심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는데, 이 지역에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계속하여 요구했는데, 이 재판관이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이 과부가 요청을 멈추지 않으니, 그것이 번거롭고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는 이야기이다.(누가복음 18장 1-8절)
이 비유의 시작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이 비유의 바로 앞(누가복음 17장)의 내용은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와 같은 가르침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와 같은 가르침들이 나온다.
17장의 마지막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라 모이느니라"이다.
"갑작스런 파멸과 멸망을 경고하고, 죽음과 부패라는 섬뜩한 광경을 묘사"한다고 설명한다.
예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시고 갑자기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하야 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베푸신 비유가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시대가 아무리 암울해보여도, 온 세계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향해 신속히 달려가는 것처럼 보여도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전하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노아의 때'(눅17:26)이나 '롯의 때'(눅17:28)때와 같이 "악한 시대를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신약시대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종교법정은 7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였고, 이 재판관들은 구약 율법과 구전에 정통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억압적이었고 불의하였고, 어떤 면에서는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었다.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음모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루어졌음을 상기했다. 산헤드린 밑에 또 다른 종교형태의 종교 법정이 있었는데, 이는 2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작은 산헤드린'으로 알려진 기관이다.
이들 역시도 예루살렘의 그곳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의 교리와 사두개인들의 권력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재판관들도 자기 스스로를 바리새인들처럼 의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 법정들과는 별도로 로마 제국 관할의 지역 행정관과 도시 재판관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에 봉사하는 자들이었고, 대부분 이방인이고 불신자들이었다.
이 재판관들은 성전의 수입으로부터 많은 봉급을 받아,
유대인들은 이 재판관들을 세리를 경멸하듯 경멸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공식 직함은 '지역 판사'였으나 지역 사회 유대인들은 이들을 '강도 판사'로 불렀다고 한다.
예수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은 로마인이 임명한 재판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가 스스로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소속의 재판장이면 그가 아무리 속으로 부패하고 불의하여도 겉으로 이같은 표현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재판장을 '불의한 재판장'으로 부르셨다.
한편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력하고 비천하고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17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지막 때와 같은 혼란스러운 때에, 남편 없이 빈궁한 과부는, 남자 중심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더더욱 힘든 현실을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문화에서 법정의 일은 남자들의 소관이었기에, 힘없는 과부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 과부에게 한 가지 희망이 되었던 것은, 구약 성서의 원리였을 것이다.
모세 율법은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귿르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라고 명시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도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론하라"고 말한 바 있다. 유대 사화에서 과부는 고아와 같이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에 과부는 지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판장에게 나아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과부의 요청은 몇 번에 그치고 말 요청이 아니었던 듯하다. 재판장이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늘'은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eis-telos)인데, '끝까지' '끊임없이'를 뜻한다. 재판장이 과부의 끊임없는 요청에 시달렸던 듯 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부를 돕지 않았던 재판장이 과부를 도와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 마음을 먹은 결정적 계기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그 과부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 즉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재판장이 과부를 돕는 연유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재판장의 그 결심은 과부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를 마치시며 예수께서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아서라도' 타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간구하면 그 기도를 과연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즉 세상 가운데 신자는 절망과 고통과 같은 힘듦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신자가 기도하여도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허다하다. 그러나 신자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입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이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이 정의를 속히 시행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관심하고 냉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구원받"게 하시려는 그 분의 뜻에 따라, '시간'이 신자들이 기대하는 시간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기도"하라는 권고가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예수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신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마지막 비유의 해설을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불의한 재판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