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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배나무 [pear tree]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꽃은 흰색이고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다. 과피는 갈색이거나 녹색을 띤 갈색이고 과육에는 돌세포[石細胞]가 들어 있다. 암술은 2∼5개, 수술은 여러 개이다. 열매는 꽃턱이 발달해서 이루어지며 2∼5실을 기본으로 한다. 종자는 검은빛이다.
열매에는 당분 10∼14%, 과육 100g에 칼륨 140∼170mg, 비타민C 3∼6mg이 들어 있다. 주로 유라시아의 온대지방에 분포한다. 전세계에 20여 종이 있으며 크게 일본배·중국배·서양배의 3품종군으로 나눈다.
① 일본배:일본 중부 이남, 한국 남부와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연안 일대에 분포하는 돌배나무(P. pyrifolia)를 기본종으로 개량한 품종군이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온난한 기후에 적합하며 잎은 크고 달걀 모양이다. 열매는 둥글고 육질은 서양배보다 질이 떨어지지만 과즙이 많고 신선한 맛이며 저장성도 강하다. 현재 한국에서 주로 재배하는 품종이다.
② 중국배:중국의 허베이[河北] 지방과 북동부, 한국 북부 등지에 분포하는 산돌배(P. ussuriansis)를 기본종으로 하여 중국에서 개량한 것이다. 중화리(中華梨)와 중국소리(中國小梨)로 나누는데, 그중에 널리 알려진 야리[鴨梨]와 쓰리[慈梨]는 중화리 계통이다. 여름 생육기간에 비가 적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거나 둥근 모양이고 꽃 피는 시기가 빠르다. 열매는 대체로 크며 녹색이고 약간 떫은맛이 있다.
③ 서양배(P. communis):유럽 중부로부터 터키 일대에서 야생한 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여름에 비가 적은 곳에서 개량한 것이다. 잎은 달걀 모양이거나 긴 타원 모양의 달걀 모양으로 잎자루가 가늘고 길다. 열매는 보통 병 모양의 원뿔형이지만 변이가 많다. 성숙한 것을 따서 다시 후숙하여 먹는다. 돌세포가 적고 향기와 맛이 매우 좋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같은 품종들을 재배하였고, 지방에 따라 금화배·함흥배·안변배·봉산배가 유명하였다. 1906년 서울 근교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세우고 일본배를 도입, 재배하면서 이들 재래배는 점차 사라졌다. 뒤에 일본배 장십랑(長十郞)과 재래배 청실네를 교배하여 단배를 신품종으로 육성하였다.
(두산백과)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학명은 Pyrus serotina var. culta (REHDER NAKAI)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등 여러 가지 배품종들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생산지에 따라서도 금화배·함흥배·봉산배 등이 널리 알려졌으나, 1906년 뚝섬원예모범장[纛島園藝模範場]이 설립된 뒤에 개량품종들이 보급됨에 따라 점차 도태되어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새로 도입된 품종들은 일본배·중국배·서양배 등이다. 일본배는 일본의 중부 이남과 우리 나라의 남부 및 중국의 양자강 연안에 분포되어 있는 돌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일본에서 주로 개량된 품종군으로, 그 분포는 일본과 우리 나라에 국한되어 있다.
서양배는 유럽 중부와 동남부 및 아시아 서부에 분포되어 있는 야생종을 기본종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량된 품종군들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배와 중국배는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에 맞지 않아 장려되지 못하였고, 현재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들은 거의가 일본배이다.
우리 나라의 1987년도 배재배면적은 8,088㏊로 전체과수 재배면적의 7%를 차지하고, 그 생산량은 14만4856t으로 전체 과실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있다. 배의 주산지는 경기도와 경상남도로 전체 생산량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배의 주요 품종은 장십랑(長十郎)과 만삼길(晩三吉)이 70%를 차지하여 단연 우세를 보여왔으나, 이 중 만삼길은 새로운 우량품종의 도입에 따라 앞으로 점점 감소할 추세이다.
또한 금촌추(今村秋)와 신고(新高)가 20%를 차지하고 있고, 기타 품종으로 단배·이십세기·신흥 등이 있으며, 최근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삼수품종(新水·幸水·豐水)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앞으로는 이들 품종의 재배면적이 증가될 추세이다.
배재배의 적지로는 연평균기온이 11∼16℃로서 4, 5월 평균기온이 20℃, 발육기인 8, 9월에는 평균기온이 22℃가 적온이다. 강우량은 1,200㎜ 정도가 적당하며, 특히 7월 상순∼9월의 과실발육기에는 강우량이 많을수록 우량과실을 생산할 수 있다.
토질은 비옥하고 배수가 잘 되고 표토가 깊은 양토 또는 사질양토가 좋다. 우리 나라는 전국에 걸쳐 재배가 가능하나, 특히 중부 이남이 적지이다.
번식은 아접(芽椄)이나 절접(切椄)을 이용하며, 일본배의 대목(臺木:접목하는 나무)으로는 재배품종의 실생(實生:씨를 심어서 자란 식물)이나 돌배나무의 실생을 이용한다. 배나무는 조기결실성이 강하여 재식 후 3, 4년 후면 경제적 수확이 시작되어, 그뒤 30∼40년간은 경제적 재배가 가능하다.
개원시 주의하여야 할 점은 20%의 수분수(受粉樹:꽃가루받이를 한 나무)를 혼식하여야 된다는 점이다. 재식 거리는 품종 및 재배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5∼9×5∼9m 정도이다. 최근에 배나무의 조기 결실성을 이용하여 조기에 밀식한 뒤 수관 확대에 따라 간벌해나가는 계획밀식재배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전정은 자름전정[斷切剪定]을 주로 해서 복잡한 곁가지를 줄이며, 수형은 배상형(盃狀形)이나 장간개심형(長幹開心形)으로 한다. 배는 당분과 수분함량이 많아 그 시원한 과즙 때문에 주로 생과로 많이 이용되며, 이 밖에도 통조림·넥타·잼 등도 만들 수 있고, 식초·사탕조림·약용 등으로도 이용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팥배나무
물앵두나무·벌배나무·산매자나무·운향나무·물방치나무라고도 한다. 높이 15m 내외이고 작은가지에 피목이 뚜렷하며 수피는 회색빛을 띤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에서 타원형이며 잎자루가 있고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겹톱니가 있다. 잎 표면은 녹색, 뒷면은 연한 녹색이다.
꽃은 5월에 피고 흰색이며 6∼10개의 꽃이 산방꽃차례에 달린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20개 내외이며, 암술대는 2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타원형이며 반점이 뚜렷하고 9∼10월에 홍색으로 익는다.
잎과 열매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쓰인다. 열매는 빈혈과 허약체질을 치료하는 데 쓰이며 일본에서는 나무껍질을 염료로도 쓴다. 열매가 붉은 팥알같이 생겼다고 팥배나무라고 한다. 한국·일본·중국에 분포한다.
잎의 뒷면 잎맥에 달린 털이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털팥배(var. hirtella)라고 하며, 잎에 얕게 패어진 모양이 생긴 것을 벌배(var. lobulata), 열매의 길이가 12∼14mm, 지름이 6∼7mm인 것을 긴팥배(var. lasiocarpa), 잎이 길고 열매도 긴 것을 왕잎팥배(var. macrophylla), 잎이 긴 타원형인 것을 긴잎팥배(var. oblongifolia)라고 한다.
(두산백과)
벌배나무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 10∼15m이다. 나무껍질은 검붉은 갈색이고 작은 가지에는 피목(皮目)이 뚜렷하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거나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의 타원꼴이다. 길이 5∼10cm, 나비 3.5∼7cm로서 끝은 급하게 뾰족해지고 밑은 둥근 모양이며 팥배나무에 비하여 얕게 갈라진다. 가장자리에 겹톱니가 있고 턱잎은 바소 모양으로서 작고 잘 떨어진다. 잎자루는 길이 1∼2cm이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가지 끝에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꽃차례는 꽃이 드문드문 달리고 부드러운 털이 난다. 꽃받침은 5갈래로 갈라지고 갈래조각은 삼각의 달걀 모양으로서 안쪽에 부드러운 털이 난다. 꽃잎은 둥근 모양으로서 5장이다. 수술은 약 20개, 암술대는 2개이다.
열매는 타원 모양의 이과(梨果)로서 지름 약 1cm이고 점이 있다. 10월에 노랑빛을 띤 붉은빛으로 익는다. 종자를 채취하여 한데에 2년 동안 묻어 두었다가 뿌려서 번식한다. 한국(전라남도·충청남도·경기도·함경북도)·일본에 분포한다.
(두산백과)
털팥배나무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 10∼15m이다. 나무껍질은 검붉은 갈색을 띠고 작은 가지에 피목(皮目)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꼴 달걀 모양으로서 길이 5∼11cm, 나비 3.5∼7cm이다. 끝은 급하게 뾰족해지고 밑은 둥글며 가장자리에는 불규칙한 겹톱니가 있다. 뒷면 맥 위에 털이 나며 팥배나무와 달리 끝까지 남는다. 잎자루는 길이 1∼2cm로서 털이 나다가 없어진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지름 약 1cm로서 가지 끝에 6∼10개씩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꽃받침은 5갈래로 갈라지고 꽃잎은 5장이다. 수술은 약 20개, 암술대는 2개이고 털이 없다. 열매는 타원 모양의 이과(梨果)로서 지름 약 1cm이고 점이 있으며 9∼10월에 노랑빛을 띤 붉은빛으로 익는다.
직접 종자를 뿌려 번식한다. 열매를 식용하며 관상수로 심는다. 민간에서 나무를 해열·토사 등에 약재로 쓴다. 한국·일본·중국·우수리강·사할린섬 등지에 분포한다.
(두산백과)
백운배나무
산기슭에서 자란다. 높이 약 4m, 지름 약 20cm이다. 가지가 퍼지고 2∼3년 묵은 가지는 검은 갈색이며 새가지에 갈색 털이 난다. 겨울눈은 달걀 모양이고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 원형이거나 달걀 모양 타원형이며 길이 4∼8cm이다. 잎맥 위에 누운 털이 나고 잎자루에 갈색 털이 나며 뾰족한 톱니가 있다.
꽃은 4∼5월에 피고 지름 3cm 정도이다. 작은꽃자루는 꽃받침과 더불어 갈색 털이 빽빽이 나며 지름 1.5∼2cm이다. 꽃잎은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고 끝이 둥글다. 열매는 거의 둥글고 지름 3∼4cm로 10월에 익으며 향기가 있고 맛이 좋다.
(두산백과)
남해배나무
잎은 달걀 모양이다. 4~5월에 흰 꽃이 가지 끝에서 산방 꽃차례로 핀다. 열매는 둥근 이과(梨果)로 여름에 익는다. 경상남도 남해의 특산종이다.
(두산백과)
돌배나무
산에서 자란다. 높이 5∼20m이고 나무껍질은 회흑자색이다. 잎은 달걀모양 긴 타원형 ·달걀모양·넓은 달걀모양이고 끝은 뾰족하며 밑은 둥글거나 심장밑 모양이다. 잎 길이는 7∼12cm이고 뒷면은 회록색이며 털이 없고 가장자리에 침 같은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길이 3∼7cm이다. 꽃은 4∼5월에 백색으로 피고 작은 가지 끝에 산방꽃차례[揀房花序]를 이루며 지름 3cm 정도이다.
꽃받침조각은 끝이 길게 뾰족하고 꽃잎은 달걀모양 원형이며 수술은 약 20개 암술대는 4∼5개이다. 열매는 이과(梨果)이며, 지름 3cm로 둥글고 다갈색이며 10월에 익는데 꽃받침은 떨어진다. 늦가을에 열매를 채취하여 먹으며, 나무는 기구재(器具材) ·기계재로 쓰인다. 배나무 접목의 대목(臺木)으로 쓰인다. 한국(전남·경남·충북·강원)·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두산백과)
배술
배술은 나주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로 만든 술로서 배에는 자당, 과당, 사과산이 들어있다.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고 있는 배나무는 높이가 6~-7m쯤 자라는데, 잎은 뾰족하게 빛나며 잔 톱니가 있는 난형이다. 열매는 조금 시나 맛이 달고 수분이 많으며, 색깔은 엷은 황갈색, 엷은 노란색, 엷은 녹색 등이 있다. 민간에서 기침약으로 주로 쓰이는 배에는 고기 요리의 자극을 완화하고 소화를 돕는 효소가 있어, 예부터 고기 요리를 많이 먹는 나라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갈(消渴)에는 배즙을 꿀에 달여 병에 넣어 두고 수시로 뜨거운 물이나 냉수에 타서 마시면 좋다. 어린아이가 배가 차서 아플 때에는 배나무 잎을 한 뭉치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좋다. 또한 먹고 체했을 때에도 배나무 잎을 달여 그 즙을 먹으면 좋다. 초기 감기에는 배즙과 생강즙을 끓여 흑설탕을 타서 마시면 아주 좋다.
잘 익은 배를 사용하되, 벌레 먹은 것, 흠집 난 것 등은 골라 내고 깨끗이 씻어 닦아 둔다. 배를 4등분하여 씨와 함께 용기에 넣고 그 양만큼 소주를 붓는다. 배에는 수분이 많으므로 소주는 더 추가해도 좋다. 밀봉하여 시원한 곳에 보관했다가 1개월 정도 지나면 배 건더기는 건져낸다. 약 3개월 정도 지나면 마시는 것이 좋다. 배술의 신맛을 싫어하는 경우에는 껍질째 4등분한 것과 껍질과 씨를 빼내고 4등분한 것을 각각 같은 양으로 넣은 다음, 그 양의 3배의 소주를 부으면 감미와 산미가 적당히 조화되어 맛있는 약술이 된다. 맛이 달콤하고 새콤하며 독특한 향기가 있으므로 그대로 마셔도 좋고 기호에 따라 꿀이나 설탕을 넣어 마셔도 좋다. 배술을 담글 때는 무엇보다도 잘 익은 배를 고르는 것이 중요한데, 익지 않은 배로 술을 담그면 맛과 향을 제대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배는 자체 당분이 많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가 좋다.
(두산백과)
보양 스님과 배나무 [寶壤梨木]
승려 보양(寶壤)의 전기에는 그의 고향과 성씨가 실려 있지 않다. 청도군(淸道郡)의 문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묘(서기 943)[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지 26년이다.] 정월 모일에 청도군 계리심사(界里審使) 순영(順英)과 대내말(大乃末) 수문(水文) 등이 작성한 공문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의 경계표는 남쪽은 아니점(阿尼岾)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다.[라고 하였다.] 절의 간부 승려 중에서 주된 사람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고 선원의 주인은 현회장로(玄會長老)이며, 선원의 일은 현량상좌(玄兩上座)가 담당하고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이다.”[위의 공문은 청도군의 토지대장에 의한 것이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오(서기 946)의 운문산선원의 장생표탑에 관한 공문에는, 장승은 열한 개로 아니점ㆍ가서현ㆍ묘현(畝峴)ㆍ서북매현(西北買峴)[면지촌(面知村)이라고도 한다.]ㆍ북저족문(北猪足門) 등에 있다고 하였다.
또 경인년(서기 1230)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5도 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이 처음 창건된 연월과 그 실제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李僐)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하였다.
釋寶壤傳 不載鄕井氏族 謹按淸道郡司籍載 天福八年癸卯[大祖卽位 第二十六年也]正月日 淸道郡界里審使順英 大乃末水文等 柱貼公文 雲門山禪院長生 南阿尼岾 東嘉西峴[云云] 同藪三綱典主人寶壤和尙 院主玄會長老 典座玄兩上座 直歲信元禪師[右公文 淸道郡 都田帳傳准]
又開運三年丙午 雲門山禪院長生標塔公文一道 長生十一 阿尼岾嘉西峴畝峴西北買峴[一作面知村]北猪足門等
又庚寅年 晉陽府貼 五道按察使 各道禪敎寺院 始創年月形止 審檢成籍時 差使員東京掌書記李僐 審檢記載
정륭(正隆) 6년 신사(서기 1161)[금(金)나라의 연호이다. 우리 고려 의종(毅宗)이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다.]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의하면, 청도군 전 부호장(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楨)의 집에는 옛 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상호장(上戶長)을 지낸 김양신(金亮辛), 호장(戶長)을 지낸 민육(旻育), 호장동정(戶長同正) 윤응전(尹應前), 기인(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실려 있다. 이때 태수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70세 이상이었으며 용성은 나이가 60세 이상이었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은 이후부터는 쓰지 않는다.]
신라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로써 작갑사(鵲岬寺)와 그 이하의 중소 사원 중에서, 후삼국이 싸우는 사이에 대작갑사(大鵲岬寺)ㆍ소작갑사(小鵲岬寺)ㆍ소보갑사(所寶岬寺)ㆍ천문갑사(天門岬寺)ㆍ가서갑사(嘉西岬寺) 등 다섯 갑사가 모두 붕괴되어 없어졌다. 그래서 다섯 갑사의 기둥만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正隆六年辛巳[大金年號 本朝毅宗卽位十六年也]九月 郡中古籍裨補記 准淸道郡前副戶長禦侮副尉李則楨戶 在古人消息及諺傳記載 致仕上戶長金亮辛 致仕戶長旻育 戶長同正尹應前 其人珍奇等 與時上戶長用成等言語 時太守李思老 戶長亮辛年八十九 餘輩皆七十已上 用成年六十已上[云云次不准]
羅代已來 當郡寺院 鵲岬已下中小寺院 三韓亂亡間 大鵲岬小鵲岬所寶岬天門岬嘉西岬等五岬 皆亡壞 五岬柱合在大鵲岬
이 절의 시조인 지식(知識)[위의 글에서는 보양(寶壤)이라고 하였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간에 이르렀을 때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우게 하고,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하였다. 아울러 아들 이목(璃目)에게 조사를 모시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용왕이 부탁하여 말하였다.
“지금 후삼국이 어지러워 불법에 귀의한 왕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머문다면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수년 이내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서로 작별한 뒤 돌아왔다.
이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어떤 노승이 자신을 원광(圓光)이라 하고는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조사에게 주고는 사라졌다.[살펴보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개원 연간에 돌아왔다. 가서갑에 머물다가 황륭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태 초까지 연수를 계산하면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피 탄식하다가 보양이 와서 다시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이렇게 말해준 것이다.] 그래서 보양법사는 없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탑이 있었다. 하지만 내려와서 찾아보면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서해 용이 ‘작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 이것을 모아 높이 쌓아올려 탑을 완성하였는데, 남는 벽돌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이 이전 시대의 절터였음을 알았다. 절을 다 창건하고 머무르면서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祖師知識[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念經 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三國擾動 未有歸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歸本國 鵲岬創寺而居 可以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 出定三國矣 言訖相別而來還
及至玆洞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櫃而出 授之而沒[按圓光以陳末入中國 開皇間東還 住嘉西岬 而沒於皇隆 計至淸泰之初 無慮三百年矣 今悲嘆諸岬皆廢 而喜見壤來而將興 故告之爾] 於是壤師 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藍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얼마 후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보양법사가 여기서 절을 창건하고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다섯 갑의 밭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바쳤다. 청태(淸泰) 4년 정유(서기 937)에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음덕을 받들게 하였다.
이목(璃目)은 항상 절 옆의 작은 연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남몰래 도왔다. 어느 해에 갑자기 가물어서 밭의 채소가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보양이 이목에게 비를 내리게 하자 한 고을이 충분할 정도의 비가 내렸다. 그러나 천제는 이목이 자신의 직분을 어겼다며 죽이려고 하였다.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알렸고, 법사는 이목을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어달라고 청하였다. 법사가 뜰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곧 벼락을 친 후에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시들고 부러졌지만 용이 어루만지자 곧 다시 살아났다.[법사가 주문을 외워서 살렸다고도 한다.] 그 나무는 최근에 땅에 쓰러졌는데, 어느 사람이 빗장 방망이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에 두었다. 그 방망이 자루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未幾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 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
璃目常在寺側小潭 陰騭法化 忽一年亢旱 田蔬焦槁 壤勅璃目行雨 一境告足 天帝將誅不職 璃目告急於師 師藏於床下 俄有天使到庭 請出璃目 師指庭前梨木 乃震之而上天 梨木萎摧 龍撫之卽蘇[一云師呪之而生] 其木近年倒地 有人作楗椎 安置善法堂及食堂 其椎柄有銘
처음에 법사는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먼저 추화군(推火郡)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며 뽀족하게 서 있는데, 지금 세간에서는 그것을 미워하여 견성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묻자, 법사가 말하였다.
“무릇 개란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키지 그 뒤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으로 쳐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따랐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는 법사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주변 고을의 세금 50석을 주어 향불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태조와 보양법사의 두 성인의 초상화를 모시고 이름도 봉성사(奉聖寺)라 하였다. 후에 법사는 작갑사로 옮겨 크게 절을 창건하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리지 않았고, 단지 민간에 이러한 말이 있다.
“석굴사(石崛寺)의 비허사(備虛師)[비허(毗虛)라고도 한다.]와 형제가 되어 봉성ㆍ석굴ㆍ운문 등 세 절이 이어진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법사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였다. 견성의 사실을 비허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된 것이다. 또 『해동고승전』을 지은 사람이 이에 따라 글을 다듬고 보양의 전기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후인들이 의심하거나 잘못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무망(誣妄,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남을 속임)한 일인가?
初師入唐廻 先止于推火之奉聖寺 適太祖東征 至淸道境 山賊嘯聚于犬城[有山岑臨水峭立 今俗惡其名 改云犬城] 驕傲不格 太祖至于山下 問師以易制之術 師答曰 夫犬之爲物 司夜而不司晝 守前而忘其後 宜以晝擊其北 太祖從之 果敗降 太祖嘉乃神謀 歲給近縣租五十碩 以供香火 是以寺安二聖眞容 因名奉聖寺 後遷至鵲岬 而大創終焉
師之行狀 古傳不載 諺云 與石崛備虛師[一作毗虛]爲昆弟 奉聖石崛雲門三寺 連峰櫛比 交相往還爾
後人改作新羅異傳 濫記鵲塔璃目之事于圓光傳中 系犬城事於毗虛傳 旣謬矣 又作海東僧傳者 從而潤文 使寶壤無傳 而疑誤後人 誣妄幾何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배나무 배조주 딸
배나무 배조주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계모가 들어 왔다. 계모는 전처의 딸에게 매일 방아를 찧게 했다. 딸이 방아를 찧으면 흰 쥐가 흰 구슬을 물어다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계모가 자신이 방아를 찧자 쥐가 개똥을 물어다 주었다. 계모는 뜨거운 물을 부어 쥐를 죽여 껍질을 벗겨서 의붓딸의 이불 속에 넣어두고 낙태를 했다는 소문을 냈다. 그러자 화가 난 아버지가 딸을 내쫓았다. 딸은 억울하다며 자신의 팔을 끊어 처마에 매달아두고 집을 나갔다. 그러자 비둘기가 나타나 팔을 물어갔다. 딸은 길을 가다가 어떤 부자집 마당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다. 개가 이것을 보고 짖자 주인이 아들들에게 나가보라고 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으나, 셋째 아들은 나무에 있는 처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방에 감추었다. 그리고 밥을 나누어 먹고 세숫물도 나누어 썼다. 그런데 종이 이것을 눈치채고 어머니에게 말하자, 아들은 처녀와 혼인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흘 안에 도포를 만들면 허락하겠다고 하자, 처녀가 도포를 훌륭하게 만들어 냈다. 혼인한 후 남편은 3년 동안 활공부를 하러 떠나고, 그 동안 아내는 잘 생긴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을 가지고 가던 하인은 도중에 딸의 의붓어머니를 만났다. 편지를 본 계모가 편지를 바꿔서 내쫓아 버리라고 썼다. 시어머니는 할 수 없이 며느리를 내쫓아 버렸다. 아이를 업고 길을 가던 중 꿈에 친어머니가 나타나 물에 손을 씻으라고 한다. 그렇게 하자 손이 다시 붙었다. 그리고 얼마를 가니 큰 기와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살면서 백일잔치를 열었더니 계모와 아버지가 왔다. 계모의 방에는 거미와 뱀 등을 집어넣고, 아버지는 잘 모셨다.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아내가 없는 것을 보고 붓장수로 꾸며 찾아 다녔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만나 잘 살았다.
해설
배나무 배조주 딸은 "손없는 색시"설화유형의 한 각편이다. "손없는 색시"의 상위유형은 계모설화로, 계모의 모함으로 손이 잘린 처녀가 집을 쫓겨난 후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손이 재생하여 행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는 전세계적으로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설화의 분석을 위해 심리학적, 사회사적, 신화적 분석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심리학적인 접근의 연구에서는 여성의 성의식의 성장을 통과제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손의 절단과 재생은 여성 성의식의 억압과 새로운 인식획득으로 보았다.
사회사적 측면의 연구에서는, 이 설화가 추방과 복귀, 이별과 재결합, 결핍과 충족 등이 반전되는 구조의 변주이며, 여성 정체성의 확립, 부모로부터의 온전한 분리와 부부로서의 온전한 통합에의 지향을 보여주는 입사식의 통과제의로 보았다. 또 계모와 전처소생간의 갈등과 대립의 원인은 남성중심의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있으며, 여주인공이 보여주는 고난과 시련극복은 이런 가부장적 사회와 권위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신화적 측면의 연구에서는, 계모와 전처 딸의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초경의 시기를 맞은 처녀의 입사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신화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으며, 피묻은 쥐의 모습, 손의 절단, 과일이 풍성하게 달린 나무, 햇빛을 피해 숨는 은둔 행위 등이 그 징표라고 했다.
또 여주인공의 손이 절단되는 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 단절과 육체와 정신의 분리라는 의미가 있고, 결혼과 손의 재생 과정을 거쳐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는 가족탐색 관점에서의 연구도 있다.
이 설화는 독일민담에도 "손없는 처녀"라는 제목으로 존재하며, "천일야화"등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 등에도 폭넓게 존재한다. 또 우리나라에는 동일한 이야기가 여러 편의 고소설로 존재한다.
※ 참고문헌 : 김혜정, ""손없는 색시" 설화의 유형 체계", 경기대학교 석사논문, 2001.
장면별 이야기
장면 1
옛날에 배나무라는 마을에 배조주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딸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일찍 죽어서 계모가 들어 왔다.
그런데 의붓어머니가 딸에게 매일 아침 방아를 찧게 했다. 딸이 방아를 찧으면서 '이허도 방애, 이허도 방애' 하는 노래를 하면 흰 쥐가 한 마리 나와서 흰 구슬을 물어다 주었다. 날마다 그러자 의붓딸이 그 얘기를 계모에게 했다. 계모는 다음날 딸에게 늦잠을 자라고 하고 자신이 방아를 찧으면서 '이허도 방애, 이어도 방애' 하니까, 흰 쥐가 개똥을 물어다 주었다. 화가 난 계모는 뜨거운 물을 쥐에게 끼얹어 쥐를 죽여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의붓딸 잠자리에 쥐를 넣어두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딸을 깨웠다.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붓어머니가 이불을 개어 주겠다고 나섰다. 딸이 만류해도 막무가내로 이불을 개다가, 이불에서 핏덩이가 나오자 딸이 애를 가졌다고 소문을 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딸을 쫓아냈다. 딸은 자신의 옷가지를 검은 암소에 싣고 집을 나가며, 억울해서 죽고 말겠다며 자신의 팔을 끊어 처마에 달아 매 두었다. 그러자 흰 비둘기와 흑비둘기가 날아와 "배나무 배조주 딸 불쌍하다" 하더니 팔을 물어갔다.
장면 2
딸은 길을 가다가 부잣집이 있어서 대문 앞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더니 개가 보고 짖었다. 어머니가 큰아들에게 나가서 보고 오라고 하자, 큰아들이 나갔다오더니
"누리장나무 잎은 번들번들, 모시풀 잎은 햇들햇들 담구멍은 바롱바롱,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개가 또 짖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둘째 아들에게 나가 보라고 일렀다. 둘째 아들도 나갔다가 아무 것도 없다며 형과 똑같은 말을 했다. 셋째 아들이 나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싸다가 나무를 올려다보니 처녀가 앉아 있었다. 아들이 귀신이면 물러가고 생인이면 내려오라고 하자 딸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아들은 딸을 자신의 방 병풍 뒤에 감춰두고 어머니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종은 밥을 가져가면 다른 때와는 달리 남기는 일이 없고, 수건이나 세숫물도 더 많이 더러워져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불러서 묻자 아들이
"새 옷이 좋습니까 묵은 옷이 좋습니까?"
라고 물어서 어머니는
"새 옷이 깨끗하지만 묵은 옷이 편해서 더 좋다"
"그러면 식은 밥이 좋습니까? 더운밥이 좋습니까?"
"더운밥이 좋지만 여름에는 식은 밥이 더 좋다."
그러자 아들은 처녀의 일을 다 말하고 처녀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처녀를 데려오라고 해서 인물을 보니 천하일색이었다. 이제는 시험을 해 보아야겠다고 문제를 내었다. 어머니는 처녀에게 사흘 안에 도포를 만들어 내면 며느리를 삼겠다고 했다. 아들은 한 손으로 사흘 안에 도포를 어떻게 만드느냐며 걱정을 했으나, 처녀는 걱정 말라며 사흘 안에 훌륭한 솜씨의 도포를 만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장면 3
얼마 후 며느리는 아기를 가졌는데, 아들은 삼년 동안 활 공부를 하러 떠났다. 며느리가 잘 생긴 아들을 낳았으므로 어머니는 아들에게 알리는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보냈다. 하인은 가다가 목이 말라 물을 얻어먹으려고 물가에 갔더니 배조주 딸 의붓어머니가 그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계모가 하인에게 말하길,
"어디 가는 길이십니까?"
"우리 집 주인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서 서방님께 편지 전하러 갑니다."
"그 편지 좀 보여 주십시오."
의붓어머니가 편지를 보더니, 자기 의붓딸임을 알았다. 의붓어머니가 가져온 편지를 찢더니,
"며느리를 곧 내쫓아 버리십시오."
라고 다시 써서 하인을 주었다. 하인이 그 편지를 주인에게 갖다 주자 주인은 손자가 아까웠지만 내쫓아 버렸다.
장면 4
배조주 딸은 아기를 업고 길을 가다가 지쳐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 친어머니가 나타나
"이 길로 쭉 가면 못이 있으니 한 못에서 손을 씻고, 한 못에는 발을 씻고, 또 한 못에는 아기를 느슨하게 업고 얼굴을 씻으면 아기가 물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아이고 내 아기야!'하면서 아기를 안으면 끊어진 팔이 돋아난다."
라고 알려 주었다. 배조주 딸이 그대로 하자 팔이 다시 돋아났다. 기뻐하며 길을 가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가 나타나 "조금만 더 가면 기와집이 있을 것이다."하고 사라졌다. 배조주 딸이 일어나 보니 자신은 기와집 안에서 자고 있었고, 하인들도 많았다.
이제 그 집에서 살며 아버지를 찾겠다고 석 달 열흘 큰 잔치를 했다. 석 달 열흘째 되는 날 아버지와 계모가 오자 하인을 시켜, 아무 것도 주지 말고 따로 방으로 모시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상을 잘 차려드리고, 계모가 있는 방에는 뱀 쥐 거미 등 지저분한 동물들을 잡아다가 넣어 버렸다.
장면 5
한편 배조주 딸 남편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없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해 보고서 누가 모함을 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내를 찾으려고 형들과 함께 붓장수 행세를 하면서 마을마다 돌아 다녔다. 아내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들이 놀고 있어서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아보고, 부모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라고 밝히자 아이는 아버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내는 아들이 아버지가 왔다고 해서 밖을 보니 남편이 와 있었다. 그 후 배조주 딸과 남편은 그 집에서 옛 이야기를 하며 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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