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점] 회전 의자
무라이는 어젯밤에도 각혈을 했다고 하면서 도야행을 연기했다.
‘정말 각혈을 했을까?’
게이조는 그것이 무라이가 아사히가와에 눌러앉아 있으려는 구실이 아닌가 해서 불쾌했다.
혼자 삿포로에 간 게이조는 역에서 다카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카기는 병원에 나가고 없었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 쓰지구치.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반겨 게이조도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좀 만나세.”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오는 건 어떻게 된 게 사내들뿐이야. 이왕이면 예쁜 아가씨라도 데리고 오게.”
“그래, 알았네.”
게이조는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다카기는 수화기가 떠나갈 듯이 웃고 나서,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하고 물었다.
“응, 그래.”
전화로는 어린애 때문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무슨 용건이야? …..어쨌든 병원까지 좀 와주게. 일요일인데도 오후에 수술이 있어 바쁘단 말이야.”
수화기를 내려놓고 게이조는 고반칸(五番館) 앞에서 전차를 탔다. 아카시아 가로수가 아름다운 삿포로는 언제 보아도 게이조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학창 시절에 나쓰에와 이 거리를 자주 거닐었었지….’
학생이었던 게이조가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올린 나쓰에와 함께 길을 걸어가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나쓰에를 돌아보았다. 게이조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나쓰에와 함께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으쓱해져 자기 같은 행운아는 다시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나쓰에에게 나는 배신을 당했다.’
다카기의 쾌활한 목소리와 가로수의 푸르름에 생기를 되찾은 게이조의 마음은 다시 어두워졌다. 아름다운 나쓰에를 아내로 삼아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무척 어리석게 여겨졌다.
‘사이시의 자식을 맡아 기르겠다고 하면 다카기는 뭐라고 할까? 지난번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분명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할 테지.’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밀어붙이면 결국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카기는 그런 말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게이조는 나쓰에도 범인과 마찬가지로 용서와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는 게이조에게는 원수 이상의 존재였다. 무라이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무라이는 처음부터 게이조가 사랑하고 믿어온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쓰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지식한 게이조에게 나쓰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의 배신은 무라이나 범인에 대한 증오심보다도 더욱 강렬하고 복잡했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는 원수보다도 미운 존재였다. 그에 비하면 범인이나 무라이는 아직 자기 마음속을 갉아먹을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출장인가?”
문을 힘껏 열어젖히고 들어온 다카기가 응접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둥근 테이블을 에워싸고 회전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인 작은 방이었다.
흰 가운을 걸치고 있으니 다카기도 의사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다카기를 이렇게 평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다카기는 의사가 안 어울려. 옛날 같으면 번수원(幡隨院)의 수문장을 하면 딱 어울릴 텐데.”
“아니, 그래도 지적인 데는 좀 있으니까 보스 스타일의 영화 감독은 어때?”
“아냐, 그 녀석은 곰이 딱이야. 독일어를 잘하는 서커스단의 곰 말이야.”
게이조와 다카기는 이상하게 손발이 잘 맞았다. 다카기라면 무슨 말을 해도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아늑한 정을 느꼈다.
“9월이 되니까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군.”
담배 연기를 내뿜으련서 다카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응, 얼마 안 있으면 10월이야. 이제 곧 눈이 내리겠지.”
“그래, 금년에는 난로를 바꿔야 할 텐데 어떤게 좋을까?”
“글쎄, 그건 자네 어머니가 잘 아실 거 아닌가?”
“우리 어머닌 잘 모르셔. 하긴 자네도 난로 같은 건 잘 모르겠군. 어렸을 때부터 페치카를 끼고 자랐으니 추위란 건 통 모를 테지만 우리 같은 가난뱅이는 그럴 형편이 아니지.”
다카기는 좀처럼 ‘무슨 용건이냐?’고 물어오지 않았다.
게이조는 차라리 아무 말도 꺼내지 말고 그냥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과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것 같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아버지와 딸로서 한 지붕 밑에서 살아야 한다. 게이조는 그런 현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우를 택하느냐 좌를 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일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게이조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무라이는 벌써 도야에 갔나?”
무라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게이조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 적은 없었다.
“실은 오늘 떠날 예정이었는데 각혈을 했다면서 연기한 모양이야.”
“허, 거 안됐군.”
다카기는 생각에 잠기는 듯이 짙은 눈썹을 여덟 팔자로 찌푸렸다.
‘뭐가 안 됐다는 건가? 안 된 건 내 쪽이라구.’
게이조는 나쓰에의 목에 찍혀 있던 반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나쓰에는 미처 몰랐다 해도 무라이는 반점이 생긴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 어째서 무라이는 그것을 나쓰에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것 때문에 생길 우리 부부의 갈등을 보고 싶어서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게이조는 무라이로부터 정면으로 도전을 받은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뭔가 망설이는 듯한 게이조를 보고 다카기는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이렇게 물었다.
“응.”
게이조는 아직도 망설여졌다.
“아기를 데려 오라고 나쓰에 씨가 성화를 해대지?”
다카기가 이죽거렸다. 게이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쓰에 씨는 의외로 고집이 센 데가 있더군. 옛날에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 새하얀 둥근 떡 같은 뺨을 가진 순진한 여학생이었는데. 무척 얌전해 보였지. 처음에는 이런 여자도 입을 열 때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지.”
다카기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말씨가 부드러운 여자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니아니, 부드러운 말씨나 성품으로 말하자면 다른 여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나쓰에 씨는 상냥해.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말하자면 바탕이 상냥하기 때문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다카기가 나쓰에를 치켜세우는 것이 게이조는 못마땅했다.
‘나쓰에가 무라이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면 다카기는 어떤 얼굴을 할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라니, 자넨 마치 나쓰에 씨가 상냥하지 않다는 말투가 아닌가?”
다카기는 불만인 듯이 말했다.
“아니, 상냥해.”
“누구에게나 상냥하지, 특히 무라이에게는 말이야.”
다카기에게는 대체로 사람을 지나치게 좋게 평가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리는 것이다.
“나쓰에 씨도 함께 아기를 보러 가면 좋을 텐데. 그냥 우리 둘이만 보러 갈까?”
일부러 삿포로까지 온 게이조를 보고 오늘은 다카기도 아기를 입양하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기는 볼 필요 없어.”
“볼 필요가 없다니?”
하고 다카기는 순간 이상한 눈으로 게이조를 바라보았으나 곧,
“나한테 맡기겠단 말이지? 최고로 예쁜 애가 있어.”
하고 말하며 기쁜 듯이 눈을 반짝였다.
“아니, 지난번에 말한 그 사이시의 자식이면 좋겠어.”
용기를 내어 말해 버리고 나자 게이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뇌리엔 보랏빛 키스 자국이 다시금 선명히 나타났다.
“사이시의 자식? 그 범인의 자식 말이지? 자네 아직도 그런 잠꼬대를 하고 있나? 그렇다면 난 손 떼겠네.”
다카기는 회전 의자를 빙 돌려 옆으로 외면했다.
“어때서 그래?”
게이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때서고 뭐고 없어!”
다카기는 다시 의자를 게이조 쪽으로 돌리자 양쪽 다리를 테이블 위에 얹고 팔짱을 끼었다.
게이조는 쏘아보는 듯한 다카기의 시선을 담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대관절 그 애를 맡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아무리 살인자의 자식이라곤 하지만 그 애한테는 아무 죄도 없어. 그 애도 살아갈 권리를 당당히 갖고 있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내가 맡아서 기르겠다는 거야.”
게이조는 미소를 지었다.
“도무지 나로서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자네처럼 대학 시절부터 만인이 인정하는 수재는 아니지만 심지 하나만은 갖고 있지. 살인범의 자식이든 귀족의 자식이든 일단 맡은 이상 그 애의 목숨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 세상에 누가 자기 딸을 죽인 놈의 자식을 맡아 키우려고 하겠나? 난 자네가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태산 같네.”
“그야 그럴 테지. 이런 생각을 하는 바보는 아마 세상에 다시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바보가 지금 세상에 한 사람쯤 있어도 무방하지 않나?”
게이조는 정말 자신이 그 바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나쓰에를 괴롭히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맡으려는 것이 아닌 듯이 생각되었다.
“에잇, 골치 아픈 녀석!”
다카기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어느 정도 감탄하는 눈으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가 보기에는 골치 아픈 녀석일 걸세. 쓰가와 선생 같은 인격자도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으니까 나 같은 사람한테는 턱도 없는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일전에 말한 대로 한평생 범인을 미워하면서 살아가든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일생의 과제로 삼고 살아가든지 지금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네. 그런데 미워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야. 난 그 애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
다카기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심정은 자기 딸이 죽임을 당한 비참한 일을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거야.”
“너의 원수는 어쩌고저쩌고…..그러고 보니 자네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지? 혹시 자넨 아멘파인가?”
“아니, 신자는 아니야.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창 시절에 2년쯤 교회문을 드나든 적이 있어. 그 무렵의 뭐가 약간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도 말인가? 정말 아이가 없네. 그래, 자네란 인간은 본래 배꼽 아래는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는 사랑이 어떻고 영원이 어떻고 하며 떠들어댔었지. 배꼽 아래가 있었다는 증거로 자식을 둘씩이나 만든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원수를 사랑하겠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야.”
다카기는 웃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고 나서 게이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큰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얹었던 발을 마룻바닥으로 도로 내리며 말했다.
“좋아! 알겠어! 아니, 잘은 모르겠지만 쓰지구치 게이조라는 인간을 믿고 알았다고 말해 두지.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나쓰에 씨도 물론 알고 있는 거지?”
다카기가 사이시의 자식을 맡아 기르기로 한 것은 나쓰에도 알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게이조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제법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으며 사이시의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쓰에에 대한 자기의 심정은 다카기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려는 목적은 나쓰에를 괴롭히기 위함이야 하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쓰에의 목에 남아 있던 보랏빛 반점이 또다시 뚜렷이 눈앞에 나타났다.
“잠자코 있는 걸 보니 나쓰에 씨에겐 비밀인 모양이지?”
다카기가 이렇게 묻자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밀이야.”
“그럼 나쓰에 씨는 가엾게도 범인의 자식인 줄도 모르고 그 아이를 기른다 이 말인가?”
이렇게 말하고 다카기는 의자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렸다.
“응, 그 사람은 아직 신경을 자극 받으면 안 되니까.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아마 기절할 걸세.”
“당연하지. 기절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거야. 누가 자네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겠나? 나쓰에 씨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원하는거지? 그럴 거야.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기르고 싶을 테니까.”
“그야 그럴 테지. 하지만 이왕 남의 자식을 기를 바에는 이 기회에 사이시의 자식을 맡아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루리코의 죽음이 큰 의미를 갖게 되니까. 나쓰에도 바보는 아니야. 언젠가 내 의도를 알게 되면 결국은 기뻐해 줄 거라고 믿네.”
“흥, 그렇게 되나?”
다카기는 짐짓 비꼬고 나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게이조는 지금까지 자신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남들로부터도 아주 정직하다는 평을 받아 왔다ㅏ. 그런 자신이 설마 이렇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게이조는 생각지도 못했다.
‘의외로 나 같은 소심한 인간은 작은 거짓말은 못해도 큰 거짓말은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쓰지구치!”
다카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자네는 부부 사이에 이런 큰 비밀을 만들면서까지 범인의 자식을 맡겠다는 건가?”
“그럴지도. 몰라. 나로서는 그 아이를 맡아 기르는 것이 일생의 과제니까. 비밀이라곤 하지만 언제까지나 덮어두지는 않을 거야. 적당한 기회를 봐서 이야기하면 나쓰에도 이해할 테지.”
거짓말이었다. 절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자네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나 있는 건가? 나쓰에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애를 무작정 사랑할 거야. 그래도 괜찮나?”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결심한 거야. 우리 부부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게이조의 자신 있는 듯한 말에 다카기는 히죽 웃고 나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응, 알았어. 자네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난 이제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겠네.”
“납득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어. 그러나 나와 자네는 기본적인 생각이 달라. 자네는 어리석은 면이 많으면서도 진실한 놈이었어. 사실 난 납득이 가지 않아. 하지만 납득이 가든 말든 자네를 믿겠네. 믿는다는 건 납득한다는 것하곤 달라.”
믿겠다고 말하자 게이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쓰지구치, 이렇게 된 이상 비밀은 절대로 지키는 것이 현명해. 나쓰에 씨한테는 말하지 말게. 범인의 자식도 살 권리가 있으니까 범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출생의 비밀을 반드시 지켜 줘야 해.”
“그래, 지켜 줘야지.”
“나쓰에 씨한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돼.”
“그래.”
“도오루가 큰 후에도 말해서는 안 돼.”
“물론이야.”
“사이시의 자식에게도 말하지 말게.”
“그야 여부가 있나.”
“나한테는?”
“자네한테? 자넨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아니, 난 몰라. 오늘로 난 잊어버렸어. 그러니 나한테도 말하지 말게. 그리고 자네 자신한테도 말해서는 안 돼. 범인의 자식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말게. 데려온 자식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해. 자네들의 자식이야, 알겠지?”
“알겠어.”
“자넨 사나이야. 절대로 이 비밀은 지켜야 해.”
“너무 못 박지 말게. 미덥지 못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야. 난 뒤끝이 깨끗한 인간이지만 끈질길 때는 누구 못지않게 끈질겨. 비밀은 지키는 거지?”
“알았어. 그만 좀 해둬.”
게이조는 다카기가 지나치게 못을 박자 어쩐지 금세 비밀이 탄로날 것 같아 약간 불안해졌다.
“다카기, 자네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무라이에게도 말하지 않겠지?”
“그 녀석한테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겠나?”
무라이의 입을 통해 비밀이 샐 것 같은 불안이 문득 게이조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다카기는 의자를 한 바퀴 빙 돌리고 나서 일어나 게이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방안을 왔다갔다하더니 이윽고 멈춰 서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 가지 더 당부하겠네. 아이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자라지 못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넨 그 아이를 정말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해 줘. 비밀을 지킬 것과 사랑할 것, 이 두 가지를 약속할 수 있겠나?”
“알았어. 약속하지.”
단호한 게이조의 말에 그제야 다카기는 마음이 놓이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유아원에 있는 아이는 달라는 사람이 많네. 그때마다 나는 불안해. 하지만 이번처럼 불안한 적은 없었어. 적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니까 말이야.”
마지막 말은 농담처럼 던지고 다카기는 씽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