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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도 언어적 규약을 구성하는데는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일치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188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등의 규악이 성립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반응에서 모든 사람이 지닌 자연언어에서 일종의 일치가 필요하다 지시적 정의 자체만 가지고는 어린아이에게 어떤 단어의 의미를 가르치지 못한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언어이전의 단계에서 자신의 감각과 욕구를 표현하련는 어린아이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
2.교육전반이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초점을 맞춘다. 189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생생하게 검토함으로써 논의가 시작되며 오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에게 기도하는 일로부터 목욕하면서 노래부르는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적을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지시하는 대상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3.모든 단어는 기호지만 모든 기호가 단어는 아니다. 190
문자나 몸짓도 기호이다. 모든 이름은 단어지만 단어가 이름은 아니다. 만일 의 와같은 단어외에도 명사를 대신 나타내는 대명사가 있고 시제를 지니는 동사도 있다.
4.기호와 그것을 지시하는 바를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191
어느누구도 돌이라는 대상 자체와 돌을 의미하는 단어를 서로 혼동하지 않을듯하지만 어떤 단어는 단어자체를 지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 사이에 혼동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5.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형식 논리학 분양에 어떤 기여도 하지않았다. 191
단한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진지하게 탐구해 본적이 없었으며 그에 대해 다소 거만하게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뛰어나지만 전반적으로 플라톤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아우쿠스티누스는 잠시동안 스토아학파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그가 주목한 철학분야는 논리학이 아니라 주로 자연철학과 윤리학이었다.
6.인간과 동물이라는 술어가 소크라테스라는 한 개인에 대하여 사용될때 이들은 실체의 범주를 서술한다. 194
소크라테스라는 실재가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인지를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알려준다. 이성적이라는 술어는 종차로서 실체와 우연성에 모두 관련하는듯이 보인다. 즉 이 성적임은 정의의 일부로서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듯하다.
7.,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분명히 일종의 성질인데 성질은 우연성에 속한다. 194
고유성은 특수한 종에 대한 정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종의 특유한 속성이다. 중세에는 모든 사람들이 농담을 이해하는 능력을 인간의 고유성으로 여겨UT고 우연성은 개인의 존재를 편견없이 보았을때 그 개인에게 속할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는 술어이다.
8.어떤 상위의 유개념에 의해서도 종개념에 되지않는 궁극적인 유개념도 있는데 열 개의 범주가 이에속한다. 194
실체의 범주를 기본적인 것으로 여길 경우 이로부터 물체와 정신이라는 두 유개념을 이끌어 낼수 있으며 이들 각각에 물질적과 빗물질적이라는 종차를 더할수 있다. 물체라는 유개념에서 다시 두 개의 유개념 즉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유개념이 도출되며 이들각각에 생명이 있는과 생명이 없는 이라는 종차가 더해진다. 이를 포르피리오스의 나무라고 부른다.
9.보편적인 것들은 정신의 외부에 현존한다. 196
이들은 빗물질적이며 우리가 이론적으로 생각할 경우가 아니면 개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종개념 또는 유개념은 우리가 각 개인으로부터 유사한 인간성을 이끌어 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특수한 개체로부터 추출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라도 보이티웃는 말한다.
10.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6
보이티우스는 스토아학파가 미래의 우연적 사실을 다루면서 잘못을 범했다고 말한다. 내일 해전이 벌어지거나 또는 내일 해전이 벌어지지않을것이다는 참이다 하지만 내일 해전이 벌어질것이다도 아니고 내일 해전이 벌어지지 않을것이다도 아니다는 오늘 반드시 참일 필요는 없다.
11.가언적 삼단논법은 최소한 하나의 가언적 전체를 포함해야만한다. 197
바꾸어 말하면 분자적 명제는 원자적인 정언적 명제들로부터 만일 또는 왜냐하면 드으이 결합사를 통해서 구성되며 가언적 삼단논법은 가언적 전제뿐만 아니라 정언적 전제도 포함한다.
12.가언적 삼단논법은 정언적 삼단논법을 의존한다. 197
가언적 전제는 정언적 전제들로 구성되며 또한 가언적 전제가 참임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언적 삼단논법에 의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보이티우스는 스토아학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하는데 술어와 명제 논리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13.그는 논리와 문법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199
논리는 언어를 다루는 기법이다. 문법과 마찬가지로 논리도 말을 다룬다. 하지만 소리가 아닌 의미를 지니는 말을 다룬다. 만족스러운 논리에 이르려면 명사나 동사와 같은 언어의 문법적 부분에 관한 만족스러운 설명과 더불어 논읠을 시작하여야 한다.
14.아벨라르는 동사가 없이는 의미가 완성될수 없다고 말한다. 200
명사없이도 문장을 완성할수 있지만 동사가 없으면 문장을 완성할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S는 P이다 와같은 형태를 문장의 표준형식으로 선택했고 소크라테스는 술을 마신다 처럼 어떤 문장에는 계시가 없다는 점을 알았지만 이런 문장은 항상 소크라텟느느 술마시는 사람이다 와같은 형태로 다시 쓸수 있다고 주장했다.
15.단어들은 사물을 의미하기도 하며 사고를 표현하기도 한다. 202
단어들은 적절한 사고를 일깨움으로써 사물을 정확하게 의미하는데 이때 적절한 사고는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세계안에 있는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신적인 상을 고찰함으로써 이런 개념들을 얻게 되지만 개념은 상과는 구별되는 무언가이다. 우리는 바로 이런 개념들을 통하여 사물에 관하여 말할수 있게 되며 우리 목에서 나는 소리또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된다.
16.논리학과 관련해서 중요한것은 바로 의미가 후자로 사용된경우이다. 203
우리가 관심을 갖는바는 그 누군가의 정신안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한사건의 상태로부터 어떤 다른 사건의 상태가 뒤따라 일어나느가이기 때문이다. 아벨라르는 사건의 상태로 명시하는 바를 명제의 언명이라고 부른다. 참일수도 거짓이루도 있기 때문에 세계안의 사실은 아니다. 사실이란 관련되는 사건의 상태를 얻을수 있는 경우이다.
17.중세와 근대의 다른 몇몇 논리학자들과는 달리 아벨라르는 서술과 단언을 명확히 구별한다. 204
주어와 술어가 함께 등장하지만 어떤 단언이나 진술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신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하나의 진술이다. 그러나 같은 주어와 술어가 함께 등장하면서도 만일 신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것이다 또는 부디 신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은 어떤 진술도 포함하지 않는다.
18.추론은 함축의 필연성으로 구성된다. 204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전제의 의미에 의해서 규정된다.
하지만 함축의 필연성은 전제와 결론에서 언급되는 것들이 반드시 현존해야 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만일 x가 장미라면 x는 꽃이다 는 이 세계안에 그 어떤 장미가 남아있든 그렇지 않느 간에 계속 참이다. 함축을 우리엑 전해주는것은 바로 명제의 언명인데 언명은 우리의 머리안에있는 생각도 아니며 장미와 같이 세계안에 있는 사물도 아니다.
19.오르가논에 대하여 거의 몰랐던 아벨라르의 저술은 비판의 대상이되었으며 무시되기에 이르렀다. 206
허나 아벨라르 논리학의 몇몇중요한 특징들은 아리스톹텔레스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아벨라르의 뛰어난 통찰중 일부는 출저가 알려지지 않은채 중세후기 논리학에서 다시 등장한 반면 다시 내용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와 무관하게 재발견 되었다.
20.단어의 의미가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라는 것이다. 208
만일 단어의 의미를 사전을 통해서 배운다면 우리는 다양한 경우들에 적용할수 있는 개념을 얻게된다. 독립적 명사들은 특히 의미와 관련해서 수많은 의미론상의 속성을 지닐수 있는데 이는 단어가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방식에 의존한다.
21. 중요한 구별중 하나는 단순 지칭과 개별지칭 사이의 구별이다. 209
라틴어보다 영어에서 더쉽게 이루어지는데 그 까닭은 영어의 경우 명사앞에 관사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이 구별에 바로 대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지칭 자체가 다시 몇가지 서로 다른 종류로 즉 구체적 제한적 집핮적 그리고 모호한 지칭으로 나뉜다.
22어떤 단어가 주어의 위치에 등장할 경우뿐만 아니라 술어의 위치에 등장할 경우에도 개별지칭으로 사용될수 이TEk. 210
버피는 개다 라는 문장에서 개라는 단어는 모호한 지칭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제한적 지칭과 마찬가지로 모호한 지치으이 경우에도 어떤개인가? 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23.단어가 일종의 기호로서 지니는 속성에 관하여 언급하는것이다. 210
이점에서도 다시한번 현대의 영어 사용자는 중세 라틴어 사용자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된다. 그이유는 일반적으로 내용적 지칭을 확인하는데는 그 어떤 철학적 기법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때부터 어떤 단어를 평범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단어 자체를 언급하는 것으로 사용할때는 인용부호를 붙여서 “개”는 단음절어이다 와 같이 써야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더욱복잡한 경우들에서는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을 서로 혼동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자주일어난다.
24. 지칭은 명사가 지닌 가장 중요한 의미론적 속성이지만 중세논리학자들이 주목하였던 또다른 요소들이 있었다. 210
그중하나는 총칭이었는데 이는 명사의 범위와 문장을 연결하는 문제였다. 예를들어 공룡들은 꼬리가 길다라는 문장에서 현재처럼 공룡이 노재하지 않는상황에서 이문장이 참인가? 우리는 어떤 문장이 현재세계에 존재하는 내용들에 기초하여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된다는 견해를 택한다면 이 문장은 참일수 없는듯이 보인다.
25. 이문제에 대하여 두 학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211
셔우드의 윌리엄이 속했던 한 학파는 명사의 표준적인 또는 확장하지 않은 총칭이 오직 현재존재하는 대상들에만 한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명사를 가지고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무언가를 지칭하려 한다면 명사의 확장이라고 불리는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
26.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단순사고와 복합사고를 구별하였다. 212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이런 구별은 서로 구별되는 지성의 두 작용을 보여준다고 말하였따. 지성의 작용중 하나는 복합적이지 않은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명제를 결합하거나 분할하는능력이다. 통상 언급되듯이 명제는 단어들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참 또는 거짓을 표현하는 무언가이다.
27.명제의 본성에 대한 위의 여러 설명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212
무엇보다 우리가 서술과단언을 구별한다면 주어와 술어로 구성되는 복합체는 어떤 단언일 필요도 없고 또한 어떤 믿음을 표현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몇몇 중세논리학자들은 모든 명제가 언명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런 구별을 지적하였다.
28. 우리의 정신안에서 저절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이기도 한 어떤 결합이 항상 이루어짐을 알게된다. 212
정신은 하나의 단순 개념을 다른것과 결합하지 않고는 참이거나 거짓인 그어떤 것도 만들어낼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실재와의 관련성까지 고려해보면 정신의 작용은 때로는 결합으로 또 때로는 분할로 불리게된다. 결합은 정신이 개념을 만들어내는 사물들을 결합하거나 이들사이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 개념옆에 다른 개념을 두려할 때 발생한다.
29. 분할은 개념에 대응하는 실재들이 서로 다르며 서로 구별된다는점을 보이기 위하여 한 개념옆에 다른개념을 두려할 때 발생한다. 213
우리는 문장에 대해서도 이와같은 방식으로 말할수 있는데 긍정문은 실재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시하기 때문에 결합으로 불리는 반면 부정문은 실재들이 서로 분리된다는 점을 지시하기 때문에 분할로 불린다.
30. 무언가를 단언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213
바꾸어말하면 명제는 사실상 실재와 대응하거나 대응하지 않는다. 명제에 대응하는 사고가 일종의 믿음이든 아니면 단지 가벼운 추측에 지나지 않든간에 그런 사고에 대해서도 이와같은 내용이 적용된다. 하지만 오직 무언가를 단언하는 발화 행위또는 이에 대응하는 정신적 판단 행위만이 발화자 또는 사고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제의 진리성을 따지도록 만든다.
31.이를 배경으로 삼아 명제는 무엇을 지시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213
여기서 지시하다를 표현하다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 질문에 쉽게 답할수 있는데 우리가 말하거나 쓴 명제는 정신안의 사고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새로운질문이 제기되는데 정신적명제는 무엇을지시한느가? 여기서 지시하다는 표현하다보다 의미하다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32. 세계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지시할수 없는듯하다. 213
왜냐하면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간에 같은것을 지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명제가 거짓이라면 세계안에 그 명제에 대응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만일 어떤 문장이 참이라면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바는 사건의 상태이다.
33. 특히 진리와 시간사이의 관계를 고려할때 중요하게 부각된다. 214
철학자들은 우리가 시제와 관련되는 문장을 통하여 자연언어로 말할수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시제도 포함하지 않는논리적 언어로도 말할수 있는데 논리적 언어로 표현된 문장에는 시간과 무관한 동사에 더하여 명확한 시간적 지시나 시간에 관한 제한 조건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34. 가장 일반적으로는 문장과 마찬가지로 진술도 시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여겨져TEk. 215
문장과 진술모두 진리값이 변할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자주인용되는 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지금 안장있다라는 하나의 동일한 문장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앉아있을때는 참이지만 그가 일어서 버리면 거짓이 된다고 말하였따.
35.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었다. 215
논리학자들은 삼단논법의 규칙을 쉽게 기억하고 적용하기위하여 이를 다소 서툴기는 하지만 운문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각단어는 타당한 삼단논법의 특수한 식을 나타내며 단어에 등장하는 모음들은 그 식을 구성하는 세 명제의 형식을 나타낸다.
36.운문에서 맨처음 등장하는 삼단논법의 네 식은 타당한 논증들 중 가장 명확한 형식으로 여겨졌다. 216
그다음에 등장하는 여러 식들의 이름에는 어떻게 자신을 처음 네식중 하나로 변형할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요소가 포함된다. 여러 식들의 이름에서 맨 앞에 높인 자음은 자신이 처음 네식중 어떤 것으로 전환되는지를 알려준다.
37.우리 지성의 단어 는 우리의 지적작용이 도달한 최종목적지이다. 218
지적 개념이라고 불리는 바는 사고 자체이다. 지적개념은 지성이 사물의 본질을 형성할때처럼 복합적이지 않은 발언을 통해서 표현되는 개념일수도 있고 아니면 지성이 결합과 분할을 할때 처럼 복합적 발언을 통해서 표현되는 개념일 수도 있다.
38.지성의 결합과 분할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218
이런 결합과 분할의 전형적인 예는 긍정 판단과 부정판단의 형성이다. 하지만 다른 유형의 복합적사고도 존재한다. p라고 판단하거나 q가아니라고 판단하는 외에도 나는 p 인지 아닌지 의심하기도하고 그저 q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39.아퀴나스는 이런 서로 다른 가능성들에 기초하여 지적능력의 활동을 분류한다. 219
판단의 본류는 회의이다. 오류이 가능성을 허용하는 참정적인 동의는 의견이다. 자명함에 기초하여 진리라고 확실히 동의하는것은 이해이다. 이성에 기초하여 확실한 동의에 진리성을 부여한것은 지식이다. 그 어떤 강제의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확실히 동의하는것은 믿음 또는 신앙이다. 이들은 모두 결합분할에 속하는 경우이다.
40.단어의 사용에 숙달하는 일과 동일시하는듯이 보인다. 219
이 경우 누군가가 확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안다면 그는 황금의 개념을 지니는 셈이 된다. 하지만 다른곳에서 아퀴나스는 개념을 무언가의 실질또는 본질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오직 황금의 원자번호와 원소주기율표에서의 위치등을 황금의 속성과 연결하여 파악할줄아는 화학자만이 황금의 진정한 개념을 지닐수 있다.
41.아퀴나스는 우리가 내리는 어떤 판단이라도 문장으로 표현될수 있다고 믿었다. 219
하지만 이로부터 우리가 내린 모든판단이 공적으로든 아니면 상상력을 통하여 사적으로든 간에 단어로 표현된다는점은 도출되지 않으며 아퀴나스 자신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모든 사고가 언어로 표현될수 있다 할지라도 그중 지극히 소수만이 언어의 관한 사고였다.
42.모든 개별적 구체적 대상들이 인간 말또는 그밖의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이데아를 분유하기 때문이다. 220
플라톤의 정의 과학적 진리 그리고 지성의 작용에 속하는 다른 몯ㄴ것들은 일상의 구체적 물체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빗물질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주장하였다.
43.아퀴나스는 사물들을 현재 그들이 보이는 모습으로 만드는 형상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220
소크라테스를 인간으로 만드는인간성이라는 형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질료와 떨어져서 현존하는 그 어떤 형상의 존재도 부정한다. 즉 우리의 정신 외부에 인간의 본성 자체또는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인간 본성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피터와 폴같은 각 개인이 지니는 인간 본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44.인간 본성은 각 개인이 지닌 특성으로부터 추상화된 형태로 우리의 정신안에 존재하는데 이는 우리 정신밖에 현존하는 모든 개인들과 보편적으로 관련된다. 231
인간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갖는 인간성의 관념만이 존재한다. 즉 톰과 딕 해리 등 평범한 일반인이 갖는 개념을 존중한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는 부정될수밖에없다.
45.개인의 인간성은 일종의 형상이기 때문에 생각될수 있는 반면 질료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각될수는 없다. 221
이를 현실적으로 생각될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적능력 즉 능동지성이 작용해야만 한다. 이런 작용에 대한 아퀴나스의 설명은 현재로는 이름과 술어의 의미론을 해명하는 수준에서 보편에대한 아퀴나스의 반플라톤적인 설명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정도로 충분하다.
46.아퀴나스는 보편의 한종류인 종과 관련해서 이것이 낳는결과를 상세히 설명한다. 221
개라는 종은 실재로서 현존하지 않으며 설령개들이 하나의 종에 속한다 할지라도 하나의 종에 속한다는 점이 개라는 사실의 일부를 차지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의 종에 속한다는 점이 개가되기위하여 필요한 바의 일부라면 애완견의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피도 또한 하나의 종이 되어야 할것이다.
47.둔스 스코투스는 유비추리이론을 자체로서도 거부하고 종교적 언어에 적용하는것도 거부한다. 223
스코투스는 만일 신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어떻게든 가능하다면 신과 피조물에 동일한 의미로 적용되는 몇며찬어들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모든 신학적논의에서 유비추리만을 사용할 수는 없다. 논의중 일부는 일의적이어야 한다.
48.스코투스는 이런 초월적 용어들은 모두 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223
이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피조물에 적용되든 아니면 피조물과 신 자체에 적용되든간에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 가장 중요한 초월적 용어는 바로 존재이다. 실체든 우연적인 것이든 피조물이든 창조주이든 간에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존재들이다.
49.스코투스가 유비추리와 일의성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논적으로 삼은 인물은 아퀴나스가 아니라 강의앙리이었다. 223
앙리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무분별한 개념에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념이 숨어있는데 하나는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에 적용되며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피조물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반성을 통하여 신과 피조물에 모두 적용되는 유일하고 일의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진다.
50.아퀴나스와 앙리 그리고 스코투스 사이의 차이는 어쩌면 처음 생각한 것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225
이들에게서 가은 의미 같은 개념이라는 개념자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어떤 두단어 에 대하여 서로 구분된 다른 정의를 내린다면 두 단어는 서로 다른의미를 지닌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좋음은 유비추리적인 용어라고 말하면서 아퀴나스는 사전의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는 좋음이 서로 다르게 적용된 모든 사례를 고려할 피요는 없다. 서로 다른 피조물들은 서로 다른 좋음을 형성하는 속성들을 지닌다.
4장
1.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영향아래 신아카데메이아학파의 회의주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246
그가 카시키아쿰에서 처음쓴 철학저술에서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얻을수 있는 가능성을 옹호한다. 우린느 직접적인 현상에 관한 진리도 인식한다. 어떤 회의주의자도 이것이 희게 보이며 이소리가 유쾌하게 들리며 냄새가 쾌적하며 맛이 다려 차게느껴진다. 고 말하는 사람을 반박할수 없다. 이런 주장은 결코 잘못일수 없다.
2.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에 걸쳐 명제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일을 거듭하였다. 246
그가 지식의 확실성이 가능하다는점을 가장 완전하게 옹호한 내요은 삼위일체에관하여 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그는 논증을 진행하기 위하여 감각이 우리는 속일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눈이 노를 굽었다고 볼수도있고 항법사의 눈에 경계표가 명백히 움직이는듯이 보일수도있다.
3.내가살아있다고 말할 때 나는 결코 오류를 범할수 없다. 247
이는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판단이다. 어쩌면 당신은 꿈을 꾸는 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내가 잠들어 있을지라도 나는살아있다. 어쩌면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내가 제정신이 아닐지라도 나는살아있다. 더욱이 만일 내가 살아있다는 점을 안다면 나는내가 살아있다는점을 안다는점도 알며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4.데카르트의 저술을 읽은 사람이라면 두 번째 성찰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247
나는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와 유사한 논증이 아구스티누스 저술 몇군데서 발견된다. 당신은 오류에 빠지지않을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령 내가 오류에 빠질지라도 나는현존한다고 말한다. 현존하지 않는것은 오류에 빠질수도 없다. 따라서 내가 오류에 빠질지라도 나는현존한다.
5.사상적으로 성숙한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데카르트적 확실성외에도 많은 명제가 진리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247
우리는 자신이 감각을 통해서 지각한 바가 진림임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바로 이를 통해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안의 존재들에 대하여 배운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부터 방대한 정보를 얻는다. 예를들어 대양이나 멀리 떨어진 나라 역사상 등장한 영웅의 삶 심지어 우리 자신이 어디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6.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얻을수 없다고 강조한다.248
내눈은 만일 사물들이 어떤 색깔이라면 그것은 내가 알려준바다라고 말한다.
수학에 등장하는 수에도 이와같은 내용이 적용된다. 수는 색도 냄새도 없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맛을보거나 만질수도 없다. 건축가가 설계도에 거미줄보다 더 가는 선을 긋는다 할지라도 기하학자의 선은 건축가의 선과전혀다르다. 그러자 내 머리에는 순수한 수와 기하학적 선이라는관념이 떠올랐다 이런관념은 어디에서 왔는가?
7.플라톤은 우리의 기하학지식의 근원이 전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점을 보이려 하였다. 248
기하학을 배우는듯이 보이는일은 사실은 우리가 이전에 항상 알고 있었던 기억을 잠시 망각하였다가 다시 떠올리는일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설명에 매력을 느꼈다.
8.사상적으로 성숙한 시기의 저술에서 그는 영혼이 육체의 형성에 앞서 미리존재한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249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만에 하나 플라톤이 말하는 전생과 같은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기하학을 배우는 일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생에 우리는 우리모두가 기하학자였다고 상상할수 없기 때문이다.
9.육체의 일부인 눈이 물질적인 빛을 통하여 주변의 사물들을 파악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249
우린느 지적정신의 본성이 이미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종류의 빗물질질적인 빛을 통하여 자연의 질서에 따라 그 아래 놓이는 지성적인 실재들을 파악한다고 믿어야한다.
10.지성적인 실재라고 부른바를 아욱스티누스는 다른곳에서 빗물질적이고 영원한근거라고 부른다. 249
이는 변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보다 우위에 놓인다. 하지만 이는 어떤 기준으로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를 물질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채택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1.어떤 땅의 넓이를 잴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적용하는등의 방식으로 지성적인 실재를 기준으로 채택한다. 249
이런 기준으로 적용하는경우가 산수나 기하학뿐만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지적기준도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카르타고에서 특별한 격자 장식을 한 아치형 문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문이 미적 쾌락을 준다는 자신의 판단은 이 성적 정신의 눈을 통해서 지각한 여원한 진리의 형상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12.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적인 실재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250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보인바에 영원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가 아니라 이에 접근하는 인간본성에 관해서였다. 플라티노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 사상가들에 이끌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가 신의 정신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3.이데아는 창조주의 정신말고는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는 여겨질수 없다. 250
창조가 지성을 지닌 존재의 활동이라면 창조는 영원히 근거에 따라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데아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면서 신이 자신 외부의 그 무엇에라도 눈을 돌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데아는 마찬가지로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의 정신안에 존재한다. 이데아는 원형에 해당하는 형상이며 사물들의 불변하는 본질로서 창조된것이 아니라 신의지성안에 영우너불변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14.인간의 관념을 얻는 방법은 상기나 추상화가 아니라 신의조명이다. 250
신이 지적인 빛을 비춤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눈이아니라 더할 나위없는 탁월성을 지닌 지성을 통하여 신의 시각이 궁극적 지복의 근거임을 파악한다.
15.조명에 관하여 말할경우에는 자연스러운 은유에 한가지 특별한 특성이 더해진다. 251
조명은 우리가 색을 볼때 빛이 우리 시각의 매개물 이 되는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때도 어떤 매개물이 존재한다는점을 암시한다. 또한 조명은 해를 비롯한 그보다 작은 발광체들이 우리가 보는 빛의 근원이 되듯이 이 매개물에도 어떤 근원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어둠에 의해서 감추어지기도하는 시각의 대상이 존재하나는 점도 암시한다.
16.조명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살을 붙여 온유에 포함된 대상을 일관된 쳬계로 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252
가장명백한 요소는 물론 신이 지적인 조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며 이는 해가 우리가 볼수 있는 모든 빛의 근원임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신의 조명이 어떻게 우리 인간이 플라톤적인원형에 대응되는 관념을 소유하는지를 설명하는듯이 보인다.
17.이데아는 빛에의해서 밝혀져야 하는 그늘진 실재가 아니라 존재하는것중 가장환하게 빛나는 실재로 여겨진다. 252
설령 이데아와 같은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더라도 왜 이데아에 접근하는데 그 어떤 매개물이 필요한가? 왜 후에 데카르트가 마하였듯이 신이 우리의 정신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정신 안에 이데아의 복제품도 창조하였다고 말하면 안되는가?
18.빛은 대상을 비춤으로써 우리가 그 대상을 보는데 도움을 준다. 252
반면 우리눈을 직접 비추는 빛은 방해가 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이 표현에 따르면 신의 조명은 지적인 시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이성의 눈을 비춘다. 이런 은유가 상징하듯이 지적인 탐구는 차의전조등을 거꾸로 돌려 앞 유리를 비추게 하면서 밤에 차를 운전하는것과같은 전혀 희망이 없는 일로 보인다.
19.조명에 사용되는 언어또한 신앙과 이성사이의 구별 후에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무척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 구별에 혼란을 일으킨다. 252
우리가 본성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지않고 현세에서 신에관하여 알수있는 바와 계시와 초자연적인 은총에 응답하여 신에 관하여 오직믿을수있느 바를 구별하는것은 한의 관행이 되었다. 조명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창조와 구별된느 무언가로 의도되었음을 명백하다.
20.그는 신앙을 동의하면서 생각하는것이라고 정의하였다. 253
신앙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중 하나가 되었지만 두가지점엥서 부적합한듯하다. 첫째 우리는 종교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그 어떤것에 대한 믿음을 마음속에 떠올릴때마다 동의하면서 생각한다. 둘째 아우구스티눗느 자신도 자주지적하듯이 우리는 어떤것에 대하여 전혀생각하지않으면서도 어떤순간에라도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닐수 있으며 이런것들은 많이일어난다.
21이성과 지성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인간정신은 뿌리깊은 악이 낳은 어두운 결과로 약해진다. 255
인간정신은 불변하는 빛을 품고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여 향유하기는 어려울정도로 약하며 이런축복을 누리려면 매일 치료를 받아 새로워져야한다. 인간 정신은 신앙을 통해서 정화되어야한다.
22아우구스티누스의 뒤를 이어 중세 전성기에 등장한 철학자들의 인식론에서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55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보나벤투라도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플라톤의 철학을 선호하였다. 허나 그는 플라톤의 뒤를 이은 가장 윙대한 철학자인 카케로와 플로티노스조차도 유감스럽게 인간 행복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서는 잘못생각했다고 믿었다. 신앙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나 신비나 사후에 인간을 기다리는 초자연적인 운명에 대해여 배울수 없다.
23.신앙이라는 은총에 의해서 계몽된 기독교 철학자만이 철학의 논증을 제대로 사용하여 진리를 구하는 지성의 폭을 넓힐수 있다. 255
보나벤투라자신도 신의 현존에 대한 다양한 증명을 제시함으로써 이런일을 행한다. 그는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존재를 함축하며 의존적인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를 함축하고 변화하는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함축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그러면서 마치 플라톤처럼 이런 증명들이 본성상 인간 정신안에 심어져 있는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더욱 완전하게 익식하는 자극체가 되리라고 해석한다.
24.신이 현존함을 명확하게 인식하는데는 우리 정신안에 이미들어있는 바를 성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을 보인다. 256
모든사람들이 지닌 행복하려는 욕구를 성창해 보면 이 욕구는 최고선을 소유하지 않고는 만족될수 없다는점이 드러나는데 이 최고선이 바로 신이다.
25.신의관념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256
보나벤투라가 보기엔 우리의 관념들 일반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우리의 정신이 처음에는 텅빈 백지와 같으며 일반적인 지적원리들조차도 오직 감각 경험을 한 이우에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허나 독특하게 신의 관념만은 본유적인데 그 까닭은 정신자체가 신의 모사 신의 특성을 희미하게나마 볼수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26.변화하고 소멸할수 있는 감각경험의 대상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본성상 회의와 오류에 빠지기 쉽다. 256
확고한 확실성을 얻기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 진리가 바로신이다. 신의 정신안에 있는 영원한 근거로서의 이데아를 현세에서 눈으로 볼수는 없지만 이데아는 우리의 사고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영향을 및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덧없는 현상 배후에 놓인 확고한 본성을 파악하게 만드는 신의 조명이다.
27.이와같이 보나벤투라는 이전 철학자들의 오랜전통에 따라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한다. 257
이와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아퀴나스는 이런 접근방식을 거부했고 아퀴나스도 지성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빛의 은유를 사용한다. 능동지성은 빛을 제공하는데 이 빛은 잠재적으로 생각할수 있는 세계안의 개별적 대상들을 현실적으로 생각할수있는 정신안의 대상들로 바꾼다. 허나 아퀴나스는 능동지성이각 개인이 지닌본성적 능력일뿐 이븐시나나 이븐루슈드의 전통에서처럼 정신밖에서 작용하는 초자연적 실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28.아퀴나스는 능동지성ㅇ이 인간영혼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점을 무척 강조하여 말한다. 257
인간의 지성보다 우월한지성 신의 지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허나 인간이 사고하는데 필요한것은 이 우월한 지성에서 유래한 인간의 능력이며 요한이 말하듯이 신은 이세상에 와서 모든사람을 비추지만 오직 인간의 영혼에 특징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보편적 원인으로 그렇게 하뿐이다.
29. 아퀴나스가 경홈론자가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58
그는 감각경험이 그 자체만으로 지적사고에 충분하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감각경험외에도 능동지성의 작용이 필요하지만 만일그가 경험론자가 아니라면 또한 조명주의자도 아니다. 능동지성도 그 자체만으로는 지적인식에 이르기에 불충분하다. 우리가 물질적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우리안에 있는 지적인 빛 외에도 외부의 사물로부터 도출된 생각할수있는 종들이 필요하다.
30.현세에서 인간지성은 물질적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258
감각이 없다면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것이다. 능동지성이 없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생각할수 없을 것이다.감각적 환상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 반면 종이 없는 감각적 환상은 정신에 깃든 어둠이다.
31.아퀴나스에게 능동지성은 인간본성의 일부이다. 258
각개인안에는 인식의 우너리가 능동지성이라는 빛이 존재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를 통하여 모든 학문의 확실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인식한다. 라고 말한다.
32.아퀴나스는 가르침에서 능동지성의 역할을 의술에서 우리몸의 본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비유한다. 259
의사의 치료는 인간의 본성을 모방하여 되찾게 하는것이다. 의사는 체온조절 원활한 소화 유독물질의 배출을 통하여 환자를 치료한다. 학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면서 교사는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위하여 지성이라는 자연의 빛을 사용하도록 돕는다.
33.능동지성의 작용은 소화기관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이지 않다. 259
이들 둘은 똑같이 창조주인 신이 만들어냈다. 만일 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만든다면 세계전체가 초자연적이 되며 자연과 초자연사이의 구별은 그 기준을 잃게될것이다.
34.능동지성의 창조주로부터 신은 다른것들을 창조할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떤 특별한 통찰력을 능동지성에 불어넣지 않았는가? 259
아퀴나스는 모든 피조물이 지닌 신과의 유사성과 진리를 인식할 능력때문에지성만이 지니는 신과의 특별한 유사성을 구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사변적 추론과 실천적 추론의 몇몇 제일원리들 이다.
35.우리의 정신이 신의 모사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이런원리들이 우리 정신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259
이런 진리들은 우리가 타고난것도 아니며 경험이나 귀납으로 얻는것도 아니다. 우리가 타고난 바는 경험이 이런 진리들의 예를 제공할 때 이들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36.능동지성은 본질상 개념형성의 능력이며 감각적 환상들에 작용한다. 259
능동지성은 잠재적으로 생각 가능한 감각 경험의 자료들을 현실적으로 생각가능한 종으로 전환한다. 개념 형성에는 무모순이 원리와 같은 원리들이 적용된다. 이런의미에서 능동지성은 이런원리를 인식한다고 말할수 있다.
37.신의 지성에 속하는 창조되지 않은 빛을 반영하고 반사하는것은 능동지성 자체이다. 260
능동 지성이 감각경험으로부터 개념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우너리들을 사용할 때 더 이상 신의 조명은 필요하지 않으며 바로 이점이 아퀴나스가 강조하려는 바이다.
38.아퀴나스는 인간의 정신을 비추는 부수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의 조명이 있다고 굳건히 믿었다. 260
이는 이를 지닐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은총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빛에 해당하는 능동지성과 깊게 구별된다. 우리지성의 어떤빛이라도 기본적 진리의 결과인 한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
39.신학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신의 말씀에 근거한 무언가를 믿는것이다. 261
신앙은 철학을 통해서 성공적인 증명을 제시할수있는 신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종류에 속하는데 독실한 신자는 만흔것을 신의 말씀으로 여긴다. 허나 신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신의 말씀으로 여길수는 없다. 이런의미에서 신이 현존한다는 믿음은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 신앙이 전제하는 바이다.
40.도움받지 않은이성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하다. 261
이표현은 자연신학은 결론을 이끌어 내면서 오직 경험과 반성에서 도출된 전제들에만 의존하므로 종교적 문헌이나 특별한 계시로부터 도출된 어떤 전제에도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의미할수도 있다. 다른 의미에서 이표현은 자연신학자가 신의 은총이 없이도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41.신의 현존이나 영혼의 불멸성 등도 실제로는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261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이들을 확립하는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기대할수 있는것 이상의 지성과 여유 그리고 정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신학의 체계를 설명하면서 아퀴나스는 배운 사람들의 믿음과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구별한다.
42.그들은 그저 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262
이런 믿음은 이성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신앙은 아니다. 즉 신이 아니라 인간에 기초하여 권위를 지니는 믿음이다. 하지만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오직 학식을 갖춘 소수의 구성원만이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 전체가 이 증명을 받아들인다고 아무런 문제없이 가정할수 있다.
43.어떤 정리는 하나 이상의 체계에서 증명되기도 한다. 263
천문학자도 물리학자도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보일수 있다. 학문은 형식적 대상이 서로 다룬경우에 달라진다. 즉 천문학자와 기하학자는 같은 물리적 대상을 예를 들면 해를 서로 다른 두가지 형식적 서술에 따라 천체로 보는가 아니면 구형의 입체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고 말할수 있다.
44.학문이론은 일반적 인식론으로는 명백히 부적절하다. 263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올바르게 안다고 말할수 있는 많은 것들은 그 어떤 연역체계의 명제도 아니다. 이런 논점은 단지 번역상의 문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단어를 번역하는데는 서로 다른 맥락에 따라 적절한 번역어를 선택하는 주의 깊은 노력이 필요하다.
45.근대 초이후로 인식론은 회의주의에 대응하는 한가지 형식으로 자주여겨져왔다. 266
즉 인식론은 우리가 감각ㄱ이 제시하는 증거에 의존하고 외부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다른사람의 정신도 존재한다고 믿는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했다. 허나 아퀴나스는 이런 방식의 인식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감각이 일반적으로 신뢰할만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며 인간및 초인간적인 정신이 존재한다는점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본성과 수에 관한 주장을 편다.
46.현대적 의미에서 인식론으로 불릴수 있는 둔스소투스이 저술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냇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267
이는 놀라운주장일지도 모른다. 아퀴나스는 현세에서 지성의 적절한 대상이 물질적 대상들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던 반면 스코투스는 지성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것 무한하든 유한하든간에 존재의 전 범위를 포괄하여 대상으로 삼을 만큼 강력하다고 믿었다.
47. 각각의 개체는 인간지성이 현세에서 설령죄를 지어 능력이 무뎌졌다할지라도 파악할수있는 무언가이다. 267
만일 글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귀납을 통하여 보편에 대한 지식을 얻을수 없을것이며 또한 인간 개인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할수도 없을것이다. 하지만 개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48.두개체가 감각적 속성상 서로 전혀 다르지 않다면 서로 다른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며 서로 다른 두 개체라 할지라도 지성은 이들을 서로 구별할수 없을것이다. 267
개체에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드러나는 이런 모호함은 보편에 대한 지식에로 그대로 옮겨져 이마저도 흐리게 함에 틀림없다. 개체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는 개체로부터 추상화를 통하여 보편을 이끌어낼수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지성은 자신이 추상화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추상활르 진행하고 만다.
49.아퀴나스는 지성의 대상 자체가 진정으로 현존한다고 생각하였다. 268
그런 대상은 일종의 보편으로서 오직 그런 대상의 현존만이 정확하게 우리의 정신안에 존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코투스는 개체에대한 지성적인 인식도 성립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각적 인식을 모범으로 삼아 지성적인 인식을 생각한다.
50. 스코투스는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구별하였다. 268
우리는 지성안에 두종류의 인식 또는 지적 작용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중 하나는 모든 현존으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지성안에 존재하는 작용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사물이 현존을 드러내는 한에서만 그것에 관하여 성립할수 있는 작용이다.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사이의 구별은감ㄱ각과 지성 사이의 구별과 같지 않다. 스코투스가 현세에서 지성적 지식이 추상화에 의존한다고 굳게 믿어TEk 할지라도 추상적이라는 단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지성적인 직관적 지식과 감각적인 직관적 지식이 모두 성립할수 있다.
51. 스코투스는 더 나아가 완전한 직관적 지식과 불완전한 직관적 지식을 구별한다. 269
완전한 직관적 지식은 현재 현존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이며 불완전한 직관적 지식은 과거나 미래에 현존했거나 현존할 대상에 관한 지식이다. 추상적 지식은 어떤 대상의 본질에 관한 지식인데 여기서 그 대상이 현존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채 남아있다.
52.직관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오컴은 파악과 판단을 구별한다. 270
우리는 모든 종류의 단순 명사와 명제들을 파악한다. 허나 우리는 오직 복합적 사고에 대해서만 동의하며 우리는 어떤 복합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참이라고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생각할수 있다. 다른한편으로 우리는 판단의 내용을 파악하지 않고는 판단을 내릴수 없다. 지식은 파악과 판단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파악과 판단은 모두 현재 생각중인 복합적 사고에 포함된 단순 명사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
53.직관적 지식은 우리가 어떤것이 현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바로 인식할수 있는지 그런 종류의 지식이다. 270
만일 그것이 현존한다고 곧바로 판단하며 그것이 현존함을 분명히 깨닫는다. 그렇지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식이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여 받해받기 때문인 듯하다. 객관적 현존은 현존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속성과도 관련된다. 직관적 지식은 우연적 진리에 대한 그 어떤 인식에서도 필수적이다. 직관적 지식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우연적 진리도 인식할수 없다.
54.오컴이 직관적 지식을 통하여 의미한 바가 감각적 인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울듯하다. 271
우연적 진리들이 오직 직관적 지식에 의해서만 인식될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경험론을 즉 모든 사실적인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주장을 명시한 것으로 여길수 있다. 허나 오컴은 순수하게 지성적인 형태의 직관적인 직관적 지식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감각만으로는 지성의 판단을 불러일으킬수 없다고 말한다.
55.인식은 명확한 인식이 아니라고 오컴이 말한다. 271
신은 실제로는 어떤 사물이 없는데 마치 그 사물이 있는것처럼 우리에게 명확하게 나타나는 그런종류의 인식을 우리안에 불러 일으킬수는 없다. 허나 이는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인식은 우리가 동의하는 명제가 언급하는 그대로 대상들이 실제로 그렇게 존재함을 함축한다. 대 부분의 학자들은 우리가 오직 참인것만을 인식할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오컴은 우리가 참을 인식할수도 거짓을 인식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듯하다.
5장
1.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에는 시간의 본성에 관한 유명한 논의가 등장한다. 293
논의의 핵심주제는 어떤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던진질문은 신은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는 무엇을하였는가? 였고 아우구스티눗는 답하기 어려운문제에 지나친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준비하였다고 대답했지만 곧 이대답을 철회한다.
2.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273
만일 신이 처음에는 한가하게 있다가 그후에 창졸르 시작하였다면 이는 결코 변할수 없는 존재가 변화하였단 말이므로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가 전개한 대답은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시간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다는것이다.
3.신이 그 무엇이라도 창조하기이전에 수없이 많은 시대가 흘렀다는말은 단지 어리석은것일뿐이다. 273
신이 시대의 창조자이므로 창조이전에는 어떤 시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시간자체를 창조하셨으므로 당신이 시간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어떤 시간도 흐를 수 없습니다. 왜사람들은 그때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시간이 없었을때에는 그때란 있을수 없다.
4.왜 세계가 더 빨리 창조되지 않았느냐고 물어서도 안된다. 273
세계창조이전에는 더 빨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에 대하여 그가 세계창조이전에도 존재했따고 말하는것조차도 잘못일지모른다. 신에게는 연속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5.시간을 피조물로 다루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유사한 구체적 실재로 여겼다고 생각하기 쉽다. 274
하지만 그의주장이 전개되면 그가 시간을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음이 드러난다. 만일 어느누구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 그 에게 설명하려 한다면 잘모르며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루엊니다. 하지만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진정한 시간은 오직 현재 뿐이다.
6.우리는 길고 짧은 시간에 관하여 말한다. 274
10일 전은 짧은 시간이고 100년후는 긴 시간이다. 하지만 과거도 미래도 현존하지 않ㅇ는데 어떻게 이들이 길고짧을수있는가? 과거의 어떤시기가 길었다고 말하는 경우 현재로서 길게이어졌다는말이다. 100년은 긴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100년이 현재일수있는가? 한세기 사이의 그 어떤 한해도 대해서도 몇 년은 과거가 되며 몇 년은 미래가된다.
7. 어쩌면 우리는 한 세기의 마지막 해에 있을지도 모른다. 274
그래도 그해조차 현재일수는 없다. 그해의 몇 달은 과거이며 몇 달은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논증이 날과 시간에 대해서도 적용될수 있다. 한시간 자체도 계속달아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진정 현재라고 부를수 있는 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원자인데 한순간도 과거에서 미래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질수 없는 현재라는 무언가는 지속되지 않는다.
8.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제기한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답하면서 시간은 오직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275
그의 과거 소년 시절은 현재 그의 기억안에 존재하며 내일의 해돋이는 현재 그의 예측안에 존재한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현재 이 순간에 우리의 기억안에서 과거를 본다. 미래또한 존재하지않는다. 존재하는 바는 단지 현재 우리의 예상뿐이다.
9.어떤경우든 측정이 불가능하다. 275
문제를 뒤로 미룬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현재의 기억이 과거의 사건을 측정하는데 사용될수 있는가라고 물을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과거의 길고 지루해TEjs 사건을 잠시만 기억할수도 있고 순간적이지만 충격적이었던 사건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10.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자체에서도 그가 자신의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였음이 드러난다. 276
우리의 기억과 예상은 과거와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기억하거나 예상하는 바는 이런 표식과는 다른 무언가이며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방법은 시간에 관한 주관적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든 매듭을 푸는 것이다.
11.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은 곧바로 기독교의 창조설을 해명하려는 관심으로 이어진다. 276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세계가 오직 영원히 창조되는 중이라는 의미에서만 출발점을 지닌다고 생각함으로써 세계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약간의 공감을 표시하기도 하며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일어난 그 어떤일도 신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가 출발점을 지니지 않으므로 인과적으로 독립적인 경우를 충분히 생각할수 있다.
12.만일 발이 영원히 먼지속에 묻혀있다면 발자국은 항상 먼지 아래 있을것이다. 276
하지만 설령 발과 발자국사이에 어떤것이 먼저냐는 시간상의 우선성이 존재하지 안흔ㄴ다 하더라도 그것이 발 때문에 생긴 발자국이라는 점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13. 아우구스티누스이 견해에 따를 경우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체로 옳다. 277
그가 의미하는 바가 단지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을때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것이라면 그의 생각은 옳다. 그이유는 시간과 창조는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시간이 존재하였다는 생각은 세계가 끝나는곳 넘어에도 공간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이런저런 수많은 시대가 흐른다음에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의 날짜를 헤아릴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서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날짜를 세어야하며 영원의 최초순간부터 아래로 내려와 그날짜를 셀수는 없다. 성서는 실제로 세계가 창조된지 채 6천년이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14.아우구스티누스가 활동할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세계가 출발점을 지닐수 없다는 결론을 낳는 유명한 논증들이 여러 있었다. 277
아우구스티누슨ㄴ 이들중 일부를 알고있었으며 이를 반박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에 대하여 결정적인 공격을 가한 최초의 인물을 필로포노스 였다.필로포노스의 저술은 오직 그의 논적이었던 심폴리키우스의 주석들 여기저기에 인용된 형태로 전해지지만 중요한 내용이 거의 남아있어 그의 주장을 무리없이 재구성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15.그가 모든 것이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존재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278
창조란 무로부터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이말이 통나무를 재룔로 삼아 배를 만드는것과 같은 방식으로 비존재를 재룔로 삼아 여러 피조물들을 창조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말은 단지 창조의 재료가 되는 무언가가 전혀없음을 의미한다.필로포노스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창조설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유한한 수이상의 시간적 시기를 가로질러 존재할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생각과도 조화를 이룰수 없다고 말한다.
16.필로포노스는 본성에 적합한 운동과 본성에 위배되는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을 비판한다. 279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은 우리가 던지거나 바사한 무레츠이 운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돌의 본성에 적합한운동은 아래쪽을 향한 운동인데 내가 돌을 던진후에 나의손은 더 이상 돌이 위쪽으로 향한 본성에 위배되는 운동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17.물체를 던진사람이 물체에 가한 빗물질적이고 동적인 힘 때문인데 후에 물리학자들은 이를 운동력이라는 전문용어로 부르게된다. 279
이런 운동력 이론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운동하는 물체가 계속 운동하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어떤 운동의 원인도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간에 필요하지 않다는 놀라운 원리르 제시할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따.
18.필로포노스는 자신의 운동력 이론을 우주전체에 적용하였다. 279
천제는 영혼을 지니기때문이 아니라 신이 천체를 창조할때 적절한 운동력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행한다. 운동력 이론은 관성이 발견됨으로써 모습을 감추지만 이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일어난 커다란 진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필롶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발견되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기묘한 혼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필로포노스 이후 몇세기 동안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280
이슬람 철학과 라틴철학에서 모두 자연에 대한 탐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특히 자연학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기본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그로스테스느나 알레브투스같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특수한 과학적 주제에 대한 상세한 탐구로 확장하기도 하였지만 14세기까지 전반적인 개념의 틀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안에 머물렀다.
20.이븐시나는 운동이 수동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280
그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변화는 천상의 지성적 존재가 일으킨작용인데 이 존재는 말하자면 아직 무엇으로든 규정되지않는 자연 세계의 질료들에 형상을 부여하는 형상과 질료를 결합한다. 이븐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라는 용어가 포함하는 다양한 유형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21.운동은 장소의 변화인 공간상의 운동 크기의 변화인 성장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질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280
그 어떤경우의 운동도 결국에는 같은 종류의 범주에 위치나 분량 또는 성질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천상의 짓어적 존재가 일으킨 작용이 낳는 수동적 결과와 무관하게 자연의 물체에서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어떤 내부적행위자의 작용이다.
22.운동이란 행위자의 작용인동시에 그 영향을 받는 쪽에서 보면 수동이다. 282
정원사가 흙을 뒤엎는 경우 흙을 뒤엎는 일은 하나의 동일한 시간에 정원사의 작용이면서 흙에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이 된다. 그는 운동이 몇몇범주들에 걸쳐 있는 유비추리적인 용어라는 이븐루슈드의 생각에 동의한다.
23.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간과 운동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282
시간은 운동의 측적이며 시간은 운동의 지속성으로부터 자신의 지속성을 이끌어낸다. 운동과 시간에 출발점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13세기 기독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신의 현존가능성과도 연결되는 첨예한 논쟁의 주제였다. 알킨디와 사변신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고 필롶노스의 논증을 활용하여 몇몇신학자들은 자연세계가 출발점을 지닌다는점을 증명할수 있으며 따라서 이 세계를 현존하게 만든 초자연적인 행위자 즉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24.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양쪽의 주장을 요약한다. 282
첫 번째항목에서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음을 지지하는 열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세계에 출발점이 있음을 지지하는 여덟가지논증을 제시한다. 그는 이들 각각에 대하여 반대편에서 제기하는 반박을 소개한후 세계는 분명히 출발점을 지니지만 이는 증명되거나 학문적으로 인식될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순전히 신앙에 속하는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25.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283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로 생성될수 없을것이다. 따라서 만일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면 그 이전에 존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하지만 존재할 가능성을 지닌바는 질료로서 이는 존재하게 될 잠재성과 존재하지 않을 잠재성을 모두지닌다. 따라서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질료가 존재해야한다.
26.질료는 형상이 없이는 존재할수 없다. 283
하지만 세계의 질료에 형상을 더한것이 바로 이 세계이다. 따라서 세계는 존재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어야만 한다. 허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27.아퀴나스는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그것의 가능성은 질료를 이루는 수동적인 가능성이 아니라고 답한다. 283
존재 이전에 성립한느 가능성은 두 요소이다.
즉 세계가 존재할 논리적 가능성과 전능한 신의 능동적인 힘으로 구성된다.
28.아퀴나스가 제시하는 존증중 하나는 이미 오랜역사는 지닌것이다. 284
만일 세계가 항상 계속 존재해왔따면 오늘 이전에 무수히 많은 날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어떤것도 가로지르는 일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코 오늘에 도달하지 못했을것이다. 가로지르는일은 반드시 한 지점에서 시작되어 다른지점에서 끝난다.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이른날을 출발점으로 잡든간에 가로지르기는 오늘 이전에 오직 유한항수의날들이 지나갔음을 의미할 뿐이다.
29.우리는 보편 개념을 통하여 세계에 관하여 추론하는데 보편들은 궤적인 시간이나 공간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이들은 출발점이나 종착점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신에 관한 추론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284
이성은 우리에게 신에 관한 필연적 진리를 가르쳐 줄지 모른다. 하지만 신의 절대적 자유에서 생겨난 헤아릴수 없는 섭리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30. 네원소와 뜨거움과 차가움 같은 이들의 물리적 속성만으로는 지상의 매우 다양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284
우리는 능동적인원리가 작용한다고 하며 이원리가 작용하는가 그렇지않은가가 지상의 물체들이 생성 소멸되는변화를일으킨다. 그런데 천체가 이런원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지상에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천체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31.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모호한 경구를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285
그는 정액은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이 능동적인 힘은 거품을 매개로 전달되는데 거품은 자신만의 특별한 열기를 지닌다. 하지만 이 열기는 남성의 영혼이 아니라 천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이 생성되는 맨처음 단계에서는 인간과 천체의 힘이 동시에 함께 작용한다.
32.천체가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285
뜨거운 해는 내가 외투를 벗도록 만든다. 허나 결코 천체가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여 점성술의 예언이 가능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순전히 육체적인 능력이라면 별들이 이들에 직접작용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정신적인 능력이므로 얼마든지 운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33.점성술사가 전쟁의 결과를 성공적으로 예언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퀴나스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는데 실패하고 그 대신 육체의 정념들에 굴복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285
점성술사는 통계적으로 믿을만한 예측을 할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의 운명을 예언할수는 없다. 현명한 사람은 별들을 뛰어넘으리라는 점에서 점성술사 자신도 동의하리라고 말한다.
34.중세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적으로 무한한 수라는 개념은 성립될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286
그는 질료가 무한히 분할될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질료가 무한히 많은수의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니라 질료를 얼마나 잘게 분할하였더라고 항상 다시 분할할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런 무한은 오직 잠재적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35.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은 단지 현실적 무한이 어떤 한 시점에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만 반대하였다. 286
그는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믿었는데 이는 곧 무한히 많은수의 시간 단위가 이미 지나갔음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중세철학자들은 그의 원리를 연속체의 분할 가능성에 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계의 지속성에까지도 적용하였다.
36.무한한 것에는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다. 286
무언가가 더해지면 원래의 것은 커지기 마련인데 무한보다 더 큰것은 없기 때문에 이점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만일 세계의 출발점이 없다면 세계는 무한히 지속되어 왔을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지속에 그 무엇도 더 할수 없다.
37.이것이 거짓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287
과거해가 회전하였던 모든경우들에 매일 다시 한번의 회전이 더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세계가 과거의 측면에서는 무한하지만 지금얻게되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현실적 유한이며 우리가 더욱 큰 무언가를 발견할수 있는 경우는 오직 현재의 유한한 측면과 관련해서라고 말하려할지 모른다.
38.우리는 과거의 측면에서도 더욱 큰것을 발견하게 됨을 얼마든지 보일수 있다. 287
만일 세계가 영원하다면 해가 지금까지 무한히 많이 회전해왔으며 덩구이 해가 한번 회전할때마다 달은 열두번씩이나 회전해 왔음은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이다. 따라서 달은 해보다 더욱 자주 회전해 왔다. 해가 이미 무한ㅇ히 많은수의 회전을 해왔으므로 바로 무한한 것의 측면에서도 무한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할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39.만일 설령 동시적이 아닐지라도 현실적 무한히 존재한다면 해와달은 세는것과 같은 방식으로 무한을 셀수 있어야 한다. 287
하지만 만일 셀수 있는 무한이 존재한다면 무한들의 크기도 서로 달라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대단히 일으킴에 틀림없다. 세계가 시간상의 어떤때에 창조되었음을 증명하려는 학자들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다는 믿음은 현실적 무한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40.중세철학자들은 이런 충격에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287
어떤 철학자들은 크기가 같다거나 더 크다 등이 무한한 수에 적용될수 있다는 생각자체를 아예부정하였다. 다른 철학자들은 크기가 같은 문한과 같지 않은 무한이 존재할수 있다는 점은 받아들였지만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공리가 무한한 수에 적용된다는 점은 부정하였다.
41.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하였던 무한히 분할 가능한 연속체는 크기가 다른 무한이라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287
연속체의 부분들은 오직 잠재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데 잠재적 실제들은 현실적 실재와 같은 방식으로 셀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몇몇 철학자들은 연속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원자들로 구성되는데 이원자들의 수는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42.아리스토텔레스는 연속체가 크기가 없는 점들로 구성될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288
점은 부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구별해주는 경계를 지닐수 없다. 따라서 두점은 하나의 점이 되지 않고는 서로 접힐수 없다. 하지만 핸리는 두점이 서로 접할수 있으며 사실상 전체대 전체로서 접할수 있으며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합쳐질수 있다고 주장한다.
43. 이이론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을 보일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88
정사각형을 하나 그린 다음 한변에 있는 각각의 원자들에서 맞은편 변에 있는 각각의 원자들에게 평행선을 긋는다. 그다음 이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그으면 대각선 위에서 각변에 있는 원자와 정확하게 같은수의 원자가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는 각변의 길이가 대각선의 길이와 같을수 없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44.이보다 훨신 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핸리에 반대한다. 288
실체의 수를 줄이려는 자신의 전반적인 이론의 일부로 그는 점들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신조차도 점들이 다른 모든 실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들 수 없다. 따라서 핸리의 주장처럼 점들로 선이 구성되는것이 전혀 아니며 점은 단지 선안의 극한또는 한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45.점은 실체와 성질 그리고 다른 분량들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288
만일그렇다면 점은 선과 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것은 거짓이다. 선은 점들로 구성되지 않고 만일 점이 선의 한부분이 아니라면 더욱 명백히 선은 점의부분이 아니리ㅐ문에 이둘은 결코 어느쪽이 다른쪽의 부분도 되지않는 서로 완젅히 구별되는 두가지 것이다.
46.오컴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에 동의하면서 점이 분할가능한 무엇과도 진정으로 구별되는 분할불가능한실재가 아니라는사실을 보이는데 사용한다. 289
만일 점이 분할불가능한원자와 같은것이라면 무한히 많은수의 점들이 실제로 존재할것이다. 어떤한조각나무에서도 우리는 수많은선을 발견하는데 이들각각은 결국 점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점이 실재한다면 무한히 많은수의 실재들이 실제로 존재하게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모든철학에도 위배된다.
47.킬빙턴은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 난제중 하나에서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289
소크라테스가 거리 A를 가로지를때 우리가 그가 가로지르는 과정중일때는 어느때든 그가 A를 가로지른다고 말해야하는가 아니면 그가 가로지르는 과정을 완전히 마친후에 그렇게 말해야하는가 어떻게 말하든 문제가 발생한다. 운동은 무한히 분할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A를 오직 한번만 가로지른다.
48.소크라테스는 거리 A를 가로지를 것이다. 290
이는 소크라테스가 거리 A를 가로지르는 과정중에 있을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런 방식을 택하면 이 논리적 난문은 참이 된다. 더욱이 마지막결론도 정당화된다.왜냐하면 무한히 자주 소크라테스는 거리 A를 가로지르는 과정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9.다른방식으로 해석될수있다. 소크라테스는 거리 A를 가로지를것이다.290
이는 거리 A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완전히 가로질러질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런방식으로 말하면 C 이전에 스코라테스는 아직 거리 A를 가로지른 것이아니다.
50.열기의 정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를 유일한 측정기준으로 삼으면서 열기도라고 부른다. 291
그에 따르면 열기와 냉기는 서로 다른 두 성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성질로 여겨져야 한다. 열기도의 한쪽 끝에는 가장 뜨거운 열기가 반대쪽 끝에는 가장 차가운 냉기가 놓인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온도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셈이 되는데 이는 이후 자연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기초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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