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방언의 의미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 뿐이고,
일명 [하늘의 언어]라고 하는 “랄랄라 방언”은 성경에 없다.
대부분의 모든 학자들과 심지어 “랄랄라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는 말씀에서 “방언”을 외국어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문제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인데, 고린도전서에서도 역시 외국어로서의 방언만이 있을 뿐이다. (“랄랄라 방언”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이고, 빠르게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혀가 꼬이면서 비발성적인 소리가 그와 같이 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소리는 이방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랄랄라 방언”이라는 것은 성령의 은사도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표현들의 올바른 성경적 이해와 해석
1) 고전 13:1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천사가 사용하는 말(우아하고 유창한 말)을 의미한다(여기에서 “천사의 말”은 [하늘의 언어]로서의 “랄랄라 방언”이 아니다).
2) 고전 14:2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는 것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이고, “그 영으로”는 문맥상 방언을 하는 사람의 영을 가리키며, “비밀을 말함”은 역시 외국어로서의 방언의 내용을 하나님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이다.
(1)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중세 시대에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었는데, 청중들 입장에서는 그 내용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밀”이다.
(2) “랄랄라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처럼, 이상하고 요상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고 비밀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주석하는 존 칼빈은 “‘방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용어법(冗語法)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어를 의미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한 이유는 ‘아무도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방언을 말하는 본인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토마스 슈라이너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3) 5절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교훈하는데,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은사)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4절).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언급하는 것이다(5절 상).
4) 6∼12절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외국어인 방언을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교훈하는 내용이다(다른 사람들이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유익이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언급한다(외국어를 통역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일명 [하늘의 언어]라고 하는 “랄랄라 방언”에서 통역을 한다는 것은... 있지도 않고, 실제적인 통역이 아닌 측면에서... 거짓이고, 가짜이며, 속임수이다.
5) 14∼16절에 나오는 “기도, 찬미, 축복, 감사, 아멘” 등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되는 예배의 요소들이고, 그래서 고전 14장 내용들은 교회 안에서 공적인 예배 시간에 있는 일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1) 14∼15절에서의 “마음”은 지적인 이해와 연결된 인간의 기능을 가리키고(그래서 “지각, 이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4절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와 깨달음의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
(2)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방언과 달리, 바른 지각과 인식을 가지고 이성으로 기도하며 찬미해야 한다(15절). 그래야만 기도와 찬미를 할 때 다른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하면”(16절) 듣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할 수 없고, 결국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17절 하).
6)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사도 바울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나음을 언급하는데(19절),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지각할 수 있는, 지적인 이해가 가능한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양적으로는 훨씬 적은 것이지만, 가치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월등하기 때문이다.
7) 21절의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사 28:11의 인용인데(“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 28:11의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은 앗수르인의 언어를 가리킨다.
(1) 제대로 된 학자들은 사 28:11의 “방언”을 앗수르 언어로 이해하지, 결코 누구도 “랄랄라 방언”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2)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당할 것을 선포했다(11절,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심).
(3) 사 28:11을 인용하고 있는 고전 14:21의 방언도 결국은 외국어 방언일 뿐이다.
8) 22절에서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세메이온, σημεῖόν”, “표, 증거,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복음의 내용을 외국어로 말해주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이해를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결국에는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다).
- 앗수르 사람의 말(방언)을 듣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상징하는 심판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말(외국어 〓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9)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 된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알게 하기 때문에 그들이 깨닫고 더욱 큰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된다.
(1) 이러한 예언의 기능은 24∼25절에서 보다 더 확대된다.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은 책망과 판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측면에서 예언은 미래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님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언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낸다(25절).
(3) 예언은 자신들에게 있는 죄와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결국에는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 데까지 이어진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의 기능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하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전파하게 한다(25절).
10)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면서 통역 없이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역설한다.
- 신약 시대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여러 많은 각 나라의 언어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외국어로서의 방언이라는 은사를 주셔서(그들의 말로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11) 27절의 “차서를 따라”는 “차례대로 한 사람씩”이라는 뜻인데,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외국어 방언을 남발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외국어 방언을 다른 한 사람은 통역(번역)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외국어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무아지경 속에서 하는 “랄랄라 방언”이 아니다.
12) 외국어 방언을 할 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한다(28절).
(1)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어의 내용을 다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2) 오늘날 (실제로는 없는 것이지만, 가정적으로) “랄랄라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거나 해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통역도 없는 상태에서 “랄랄라 방언”을 한다.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하며, 비성경적인 모습인가?
13)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언어]로서 방언은 개들만 못 받고 다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방언을 못 받으면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더 심각하게는 “랄랄라 방언을 못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개만도 못한 사람에 해당하고, 구원받지 못한 것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첫댓글 방언해야만 천국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 있어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