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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타고도 세월은 잘도 흘러갑니다. 하기야 사람이 아프면 아팠지 세월이 아프겠습니까? 갈 줄만 알지 돌아설 줄도 머물 줄도 모르는 시간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야 그냥 타고 갈 것인가 밀려갈 것인가 결정하면 그만입니다.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한 달이 너무 쉽게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가오는 설날을 기대하지만 역시 그다지 밝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합니다. 돌아다니지도 못하니 어디서 달력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달력 없다고 세월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있거나 말거나 나는야 간다 하고 있습니다.
별난 대통령 취임식을 했습니다. 미국답습니다. 기록을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코로나19 방역에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러진 역사적 취임식이었습니다. 나이 많아 대통령 하기 정말 힘들다 싶습니다. 우리야 뭔가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데 다소 부드러워질까 더 어려워질까 아직도 계산이 끝나지 않았겠지요. 아마 당분간은 자기 집 관리단속에 여념이 없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돌아온다는 여운이 묘하게 남아있습니다. 하기야 나도 그 나이까지 해본다는 심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골치 아픈 그 자리 그렇게도 버티고 싶은가 모르겠습니다. 으르렁대봐야 몇 년이나 더? 가죽도 못 남기고 갈 인생일 텐데 말입니다.
한 주 지나면 달이 바뀝니다. 아무튼 추위보다는 따뜻한 봄이 낫습니다. 아직 다 가지는 않았겠지만 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잘 버텨야지요. 건강하게 행복하게 또 한 주를 기대합니다. ^&^
2021년 1월 23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1-17주일설교(나사렛 이단의 진화)
성경 사도행전 24 : 5 - 9 2021년 1월 17일
설교 : 나사렛 이단의 진화 김종우 목사
온갖 유명 제품에는 대부분 짝퉁 곧 가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가짜가 얼마나 정교한지 진짜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비자들이 진짜의 비싼 값을 주고 가짜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를 만들어낸 업주들은 그런 가짜의 횡포에 손해를 봅니다. 정작 팔려야 할 정품은 나가지 않고 가짜가 팔리니 매상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짜 퇴치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는 소비자들대로 손해 보기는 마찬가지지요. 누가 가짜를 제 값 주고 사겠습니까? 모르니까 산 것이지요. 짝퉁 때문에 생산자나 소비자가 모두 손해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힘을 합하여 가짜를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짜가 나오는 것은 공개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만들어집니다. 전문가조차도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반 소비자들은 구분한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냥 멀거니 당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지요. 어떻게든 알아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배우고 노력하고 그래서 가짜에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가짜는 신앙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시간이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사망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일백년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시간이 달린 문제란 것입니다. 결코 소홀해서도 안 되고 소홀할 수도 없는 문제이지요. 혹 평생 따라온 길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면 얼마나 기막힐 일이겠습니까? 그 한은 영원한 시간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스갯말로 지옥에는 ‘껄 신자’가 많답니다. 그 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 걸, 그 때 친구의 말을 귀 담아 들을 걸, 세상에서 예수를 믿을 걸 등등. 천국에서는 후회가 없는 줄 믿습니다. 후회는 지옥에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이 단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기에 고통이 그치지 않는 것이지요. 육체의 고통 못지않게 마음의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된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그곳은 결코 갈만한 곳이 아닙니다.
가짜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진리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딛 1 :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은 말씀이시니 그 말씀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 말씀하십니다.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벧전 1 :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때문에 그 말씀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 8 :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편에 곧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에 진리처럼 보이는 비진리 곧 거짓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변치 못하면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자칫 거짓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진리를 좇아가는 줄 알고 평생 따라갔는데 그 결국이 사망이라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별해야 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누차 경고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24 : 10 - 11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분명히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고 성도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실제로 마지막 때에 “만국이 미혹되었다”고 말씀합니다.(계 18 : 23) 그러한 현실이 우리 앞에 닥쳐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예언하셨으니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그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만국이 미혹되었다 하니 우리인들 예외는 아니겠지요.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이제 잠시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로 가보겠습니다. 눅 3 : 1 - 2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이 먼저 길 예비사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도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온 것이지요. 눅 3 : 3 - 6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오실 그리스도이신가 생각했습니다.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16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아멘!
과연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의 길 예비사자였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구약의 약속의 목자이신 메시야 예수님이 그를 이어 백성 가운데 등장하시지요. 세례 요한도 처음 성령이 함께 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마 1 : 21) 당신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려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백성은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육적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서 일단 제외됩니다. 요 1 : 11 - 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면 신약은 영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들이 인정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용납이 되었을까요?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던 유대인들 특히 그 백성의 영적 지도자라 하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마 9 : 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한 마디로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요 7 :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자기들 보기에는 글도 모르는 무식한 자였습니다. 툭 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범법자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여 격노케 하였습니다. 요 5 :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럼에도 예수님은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며 이런저런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잖아도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고 삽니다. 그나마 종교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만도 천만다행인데 이제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서 백성을 영적으로 혼란에 빠뜨리니 행여 이러다가 나라를 온전히 잃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했습니다. 요 11 : 47 - 48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러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는 마땅히 죽어 없어져야 할 인물이란 것이지요.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 또한 대놓고 질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장에 소위 7화가 나옵니다. 결론은 이겁니다.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러한 독설을 듣고 그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요. 마 26 : 3 - 4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그랬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를 이 땅에서 없애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지요. 사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소원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깨달았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의 소원대로 죽었으나 그 뒤에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전하신 복음이 예수님이 육신으로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놀랍게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고수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더욱 안절부절 하며 이 예수교를 퇴치하려 총 매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네 편에서 충성하던 사울이라 하는 자가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교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름까지 바울이라 바꾸었습니다. 더구나 그 쪽의 수가 자꾸 늘어만 갔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지요. 이 변심한 바울이라는 작자부터 잡아 없애야겠다, 결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기는 하지만 로마인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들은 바울을 어떻게든 죽이려 고소합니다. 행 24 :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여기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나사렛 이단’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태가 일어났습니까?
유대교는 모세 율법을 받은 후 1,500년을 이어왔습니다. 그 전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막 7 :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율법을 잘 지키려니 세부적으로 나뉘어져 장로들의 유전이 되었지요. 그것이 그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8 - 9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그 말씀의 진실은 둘째 치고 이런 말을 들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배운 것도 없는 시퍼렇게 젊은 녀석이 저 잘났다고 떠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 둘 자꾸 그쪽에 가서 붙으니 속이 상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없애야지요. 현실적으로도 자기네에게 들어와야 할 헌금이 그쪽의 후원금으로 빠져나가니 속이 뒤집힐 일 아닙니까? 어서 속히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단입니까? 유대교 사회 속에서 새로 탄생한 예수교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단이었습니까? 누가 이단이죠?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 소위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지극히 적은 수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12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날마다 그 수가 더하여 갔습니다. 그러니 유대교에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러다가 나사렛 이단이 세상을 뒤집어엎겠다, 경계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은 무조건 잡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핍박 중에도 예수교는 날로 부흥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행 11 :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할! 하나님 구원의 소식, 복음을 받은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행 2 : 46 - 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전통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이지요.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당시 예수님의 이 선언을 유대교 백성이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요? 우리야 다 지나온 이야기이니까 이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선언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어떻게 예수 네가 길이냐? 어떻게 너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네가 뭐냐? 나사렛 목수의 아들, 너도 목수인 주제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알아듣기나 하지. 이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야? 그런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뭣 때문에 따라다니고 있는 거야? 이거 다 미친 사람들 아냐? 이 무식한 백성 같으니라고! 그렇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요.
전통의 굴레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랜 세월 젖어온 관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습관 하나 바꾸는데도 얼마나 힘들어합니까? 하물며 종교적 사회적 전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칫 그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대교에서 예수교로 바꾸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거기에 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기꺼이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그러므로 진리의 편에 서는 자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성도는 그것을 확신하기에 자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마 16 :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우선 ‘자기를 부인하고’ 즉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경계하신 말씀 가운데 이 말씀을 기억합니까? 때를 분변하라는 말씀입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간단히 말해서 ‘때를 알라’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하고 사는 이 때를 분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전에도 말했듯이 때를 따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시는 법이 다르다 그 말씀입니다. 다시 간단히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법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노아에게 주신 법은 ‘방주를 지어서 방주에 타야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 백성에게 주신 법은 잘 아는 ‘율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자 율법의 시대를 막 내리고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 지켜야 할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대로 당시 하나님 백성이라 자칭하던 유대인들이 그 법을 잘 지켰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이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잘 아는 요한복음 초두의 말씀은 사실 그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평가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요 1 : 11 - 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고 예언하신 목자라고 도무지 믿지를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 13 : 54 - 55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겨우 목수의 아들이 이 무슨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를 소개하니까 뭐라 합니까? 요 1 :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 그 깡촌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하여 가진 유대인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행 24 : 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한 마디로 ‘나사렛 이단’이란 말입니다. 사실 일반 백성보다는 주로 백성의 지도자급 목자들의 생각이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 결국 그들이 백성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반대입니다. 자기네가 그 누구보다 철저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던 지도자들, 백성의 목자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자를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때도 똑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담, 노아, 모세 그리고 예수님 초림 때 등등 모두 다릅니다. 그렇다면 주님 다시 오시는 시대에는 그대로일까요, 달라질까요? 어언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냥 초림 때 다녀가신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그렇게 간단하다면 천국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24 : 40 - 41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예로 들면 둘 중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확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 나사렛 이단이 지금은 기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피의 역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2천년 기독교 전통에 잠겨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암송할 정도였다 해도 진리는 없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도 없으면서 성도들을 붙잡고 있으려 하는 것이 이단의 소행입니다.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그가 이단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 엠 우먼>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여자야. 나는 여자인데요. 나는 여자랍니다. 만약 우리말로 번역하여 제목을 붙인다면 어떻게 지어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어감이나 느낌이 원제만 같지 못할 듯합니다. 그래서 원제 그대로 발음해서 붙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발음하기 따라서 느낌과 감정, 호소력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이기에 당한 억울함과 분노가 서려있습니다. 당연히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모이게 되고 힘을 형성합니다. 불공평에 대항합니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인식과 관습 전통을 무너뜨리기에는 벅찹니다. 수년 내에 이루어질 일이 아님을 압니다.
호주에서 활동하다 크게 될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옵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낯선 땅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믿고 찾아간 회사에서는 당시의 풍조에 밀려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먼 곳에 가서 어쩌라고? 값싼 호텔에 머무르며 하는 데까지 알아보지만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번화한 뉴욕의 거리에 갈 길이 막막합니다. 친구 ‘릴리안’이 혹 낙심하고 있을 ‘헬렌’을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줍니다. 그 파티에서 매니저 일을 하는 ‘제프’를 만납니다. 서로 이야기가 통합니다. 합력해서 일을 한번 만들자고 제언합니다. 스타를 만들어줄게. 믿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더 이상 나갈 길이 없습니다. 막다른 길에서의 도전입니다.
제프를 따라 LA로 옮깁니다. 둘이 결혼도 합니다. 헬렌의 재능을 믿지만 문제는 그 세계의 인식과 문화입니다. 실력과 재능이 있다 한들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자이기에. 장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기 가수는 모두 남성입니다. 남성위주의 사회였고 남성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는 문화였습니다. 음반 취입을 청해도 들어주는 곳이 없습니다. 오디션이라도 한번 해봐달라고 청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자이기에. 제프를 졸라 한 유명 레코드사에 끈질기게 매달랍니다. 다른 전화를 받지 못하도록 계속 전화벨을 울리게 하는 겁니다. 소위 상대방이 귀찮아서 허락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음반 취입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음반이 나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대중이 반응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조금은 알려졌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낙심천만한 상태지만 헬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그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당시 시류도 차츰 여성의 지위 확보를 위해 사회적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성들이 규합하여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거리에 나선 것입니다. 헬렌은 본인이 현장에서 그 불합리함과 불공평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픔을 이겨내는 가사를 만들고 노래를 부릅니다. 개인이 당하는 억울함이고 분노이기도 합니다. 크지 않은 규모의 클럽에서 그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듣고 보니 자기네 이야기지요.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강합니다. 굽어진다 해도 꺾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속아 살아왔습니다. 이제 지혜롭습니다. 지혜는 고난의 산물. 가사는 매우 간결하고 리듬은 반복됩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듣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따라하게 됩니다. 더구나 가사 내용은 바로 자신을 이야기하고 숨어있던 감정이 폭발하여 올라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섭니다. 소리쳐 따라 부릅니다. 노래는 금방 여기서 저기로 옮겨집니다. 폭발적 인기몰이가 형성됩니다. 노래가 쉽고 가사는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더구나 사회적 분위기까지 덩달아 춤을 춥니다. 여성운동가들이 앞장서 자기네 운동에 주제가처럼 부릅니다. 드디어 스타가 됩니다.
대중음악 비평가인 릴리안을 조심하라고 제프가 주의를 준 적이 있습니다. 자기와 절실한 친구인데 자기를 깎아내릴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을 장담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글이 실립니다. 찾아가서 따지고 말다툼을 하고는 헤어집니다. 불행히도 그 밤에 지병인 천식이 심해져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사망합니다. 소식을 들은 헬렌이 마음 아파 어쩔 줄을 모릅니다.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가장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었던 그 낯선 땅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라도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매니저인 남편 제프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정이 꽉 차 있는데 어디를 간다고? 그것은 개인 사정일 뿐이지요.
엉뚱한 투자로 날리고 마약까지 손댄 남편과 사이가 틀어집니다. 저택을 정리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납니다. 다시는 노래하지 않으리라. 두 아이들만이라도 잘 커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큰 딸이 여성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의 주제가를 꼭 한번 부탁합니다. 단호히 거부하지만 딸은 옛날 릴리안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헬렌은 수십 만, 어쩌면 백만도 넘는 군중이 운집한 무대에 섭니다. 그리고 그 때의 감정을 가져와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의 주제곡을. 군중의 떼창이 따라옵니다. 영화 ‘아이 엠 우먼’(I Am Woman)을 보았습니다. 어두운 현실을 밝게 이겨내는 희망찬 이야기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아들 ‘폴’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추억하며 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목사인 ‘맥클레인’이 설교 중 한 말입니다. 교훈적인 설교지요. 물론 자신의 마음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이제는 머리도 하얘진 모습으로 어쩌면 교회 강단을 떠날 때도 된 듯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지만 일찍 떠난 아들에 대한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도 빨리 희어졌겠지요. 이제 자신의 인생의 짐도 남은 큰아들 가족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만큼이나 좋아하던 낚시도 자식과 손자들에게 넘어가리라 생각합니다.
두 아들 ‘노먼’과 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따라 강에서 낚시를 하며 자랐습니다. 흔히 그러하듯 비록 한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형제는 매우 다릅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 목사님은 엄하고 조금은 무뚝뚝하지만 차갑지는 않습니다. 단지 따뜻하게 표현은 잘 못합니다. 두 아들의 어머니는 매우 조용하고 따뜻한 여인입니다. 맏인 노먼은 비교적 순종적이고 사색적이며 조용합니다. 반면 작은 아들 폴은 매우 자유롭고 그래서 좀 반항적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고집도 셉니다. 어려서부터 엄한 아버지와 대등하게 버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자식들을 강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마음은 좀 상하였는지 몰라도 인정하고 넘어갑니다. 자연히 형제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를 상할 정도는 아니지요.
커서 노먼은 도시로 대학을 갑니다. 6년의 공백이 생기지요. 20 전후의 6년은 큰 변화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노먼은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저기 대학 출강할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 사이 동생 폴은 그 지방에서 신문기자가 되어 있습니다. 고향의 산천은 변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사람이 변할 뿐입니다. 아버지는 시간을 내 다 큰 아이들과 여전히 낚시를 즐깁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자식들이 예전의 자기보다 낚시를 더 즐기며 잘 하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폴은 그 지역에서 자유분방하기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파출소 신세도 가끔 지는 모양입니다.
노먼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대학에서 강의 요청도 들어옵니다. 그렇게 일상의 생활이 평화롭게 이어집니다. 시골의 자그마한 마을, 아담한 교회, 평화로운 가정, 집 가까이 계곡의 크지 않은 강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낚싯줄을 드리우며 송어를 잡습니다. 서로 대어를 잡으려 경쟁도 합니다. 자연히 낚시 기술도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폴은 그 점에서도 독특하지요. 노먼은 그저 아버지를 따라할 뿐이지만 폴은 자기 나름의 기술을 개발하여 실력을 키우고 뽐냅니다. 부럽기도 하지만 둘의 가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도 형제의 우의는 돈독합니다.
집에 있는 동안 동생을 따라다니며 알게 됩니다. 술과 도박에 빠진 것입니다. 빚도 꽤 짊어진 모양입니다. 그러나 형의 도움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자기 일이라는 거지요. 그야 다 큰 사람이니 자존심도 있습니다. 걱정이 되어도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폴의 그런 생활을 알고 계실까요? 알고도 눈을 감고 계신 걸까요? 목회자로써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고집쟁이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스스로 철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기도 전에 사고를 당합니다. 보안관의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받은 소식은 아픔 정도가 아닌 극도의 고통입니다. 온 가족이 슬픔에 싸입니다.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말썽을 피워도 자식인 것을.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묵묵히 흐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감싸 안고서 자기 길을 가는 것입니다. 끝은 어디일까요?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그냥 자기 길을 가는 것이지요. 흐르는 강물 위에 오늘을 띄웁니다. 나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추억을. 그렇게 한 세대는 가고 또 다음 세대가 이어옵니다. 노먼도 어느덧 가정을 세우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됩니다. 그리고 그 강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낚시를 합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수하겠지요. 강물은 변함없이 그 길을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며 낚시를 할 것입니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강물 위에 보일 듯 말 듯 낚싯줄이 드리워집니다. 그 자체가 예술입니다. 아버지 맥클레인의 완숙한 솜씨와 노먼의 버금가는 실력, 그리고 폴의 새로운 기법의 그림이 강물 위의 공간을 순간적으로 멈춥니다.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다고 하던가요? 자연이 주는 풍경과 더불어 사람이 만드는 낚시 기술이 한데 어울려 시공을 넘는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보았습니다. 1992년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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