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원동태허
무흠무여
-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송
본래는 얻음도 잃음도 없으니,
억지로 얻음으로 쉽게 잃게 되는 것.
본래는 걸릴 것이 없는 자유였으나,
스스로 남기려 하니 항상 모자라다.
강설
태허라는 의미는 주로 크게 비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비어 있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는 의미의
뜻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너무나 걸림이 없음으로 이를 원융이라
표현한다. 둥글고 화하며 밝다는 의미인데,
걸림이 없으니 부딪치지 않아서 화하고, 어둡지 않아 뚜렷이
잘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더하고 뺄 것이 없고,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깨달은 마음 상태에서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마음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며 시비 분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달밤에 체조하듯, 도깨비에 홀려 밤새 허우적대듯, 꿈속이
마치 현실인 양 생사고락하며, 홀로 울고불고 땀을 흘리는 경우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수만 년의 역사를 이어온 인간의 삶이라지만, 무엇을 얻고 무엇이
남았으며, 생사고락에서 벗어난 이가 과연 몇이나 된단 말인가.
그러니 본래 걸릴 것도 없었고 남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었으니 다만,
나홀로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 나고 죽는 모양의 인과를 스스로 만들어
짓고 스스로 사라지게 했다. 인과의 허상에서 이고 지고 고락 분별로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허상의 인과를 거듭하며 시비 분별하는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이러한 허상의 마음을 깨치고 보면 원동태허 무흠무여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에 있어서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계속적으로 악순환하며 고락 인과를
만들어 낸다. 즉, 온갖 일들과 갖은 대상들을 대할 때마다 인과에 의한 고락의 감정으로
마음을 복잡하게 하니, 결국 고락 분별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 이렇게 되어야지'하는 분별심 때문에, 만약 마음먹은 대로 이렇게
되지 않으면 화가 나면서 마음이 불편하게 된다. 이럴 때는 ' 이렇게 되어야지'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그러나 설사 ' 이렇게 되어야지'하는 바람을
가진다 하더라도, 만약 뜻대로 이렇게 되지 않았을 때는, 얼른 인과의 과보라 생각하여 화를
내거나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얻고 때로는 잃게 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무엇을 얻었을 때 즐거운 마음의 인과로 인하여
괴로운 마음의 과보가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때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깊이 살펴 깨달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화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되었을 때 흡족하고 기쁜 마음을 가졌던 때의
과보라는 것을 얼른 깨달아서 화내거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무흠무여 즉, 본래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남음이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얻으려 한 과보로 인해 당연히 잃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억지로 남기려 하는 과보로 인해 당연히 모자라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득실이나 흠여에 마음이 끄달려 스스로 인과의 업을 지어서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면 반드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의 힘으로 이를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신심경 강독, 진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