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조 특별전을 다녀와서
김재범(사회학 박사, 국제포교사, 카멜 삼보사)
“고려 왕조: 한국의 계몽시대(Goryeo Dynasty: Korea's Age of Enlightenment, 918-1392).” 지난 10월 18일 개막하여 내년 2004년 1월 11일 까지 계속될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고려왕조 유물 특별전시회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왕조: 한국의 계몽시대’라는 전시회의 제목을 보고, ‘웬 계몽시대?’하는 생각을 하면서 1층 고려 유물 특별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곧바로 숨을 죽이며 걸음을 멈추어 서야만 했다. 입구 맞은 편 벽 전면 전체를 가득 메운 엄청난 크기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시선을 압도하며 마치 온 몸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일부 균열이 가고, 채색 물감이 벗겨진 부분이 있었지만 화려하면서도 위풍당당하며, 자비로움이 넘치는 자태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바로 이것이 언론에 보도된 수월관음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높이 1651/8인치, 너비 1001/8인치 크기의 이 수월관음도는 벽면을 가득 메운 그 크기 뿐만 아니라 화려하면서도 지나치게 두드러지지 않은 색상, 위엄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자상한 얼굴,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체, 흘러내리는 듯 하는 옷자락의 아름다운 곡선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탱화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흘러 넘쳤다.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전시회의 압권이었으며, 국보 중에 국보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이 수월관음도는 일본의 카가미 신사가 소장하고 있다. 어떤 경로로 이 수월관음도가 일본의 한 신사로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수월관음도는 원래 1310년 숙비가 충선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가있는 동안 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5명의 화공들에게 그리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인 이 수월관음도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소장이 아니라서 최고의 국보급 작품이면서도 국보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다. 고려 숙비와 이 수월관음도를 그린 화공들도 하늘 나라에서도 안타까워 할 것 같다.
수월관음도 앞에서 한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가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수월관음도 외에 몇 가지 다른 모습의 관세음 보살도, 비로자나 삼존도, 지장보살, 문수보살 탱화와 만오천불도, 사천왕도, 나한도, 변상도 등 20여점의 탱화와 금동여래좌상, 긍동아미타불좌상 등 불상, 금강경과 묘법연화경 목판과 경전, 범종 등 불교 관련 유물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청자양각화조문 매병, 청자음각연화문 장경병, 청자음각 연화문 네귀 항아리, 청자화병 잔탁 등 고려청자의 은은한 빛깔과 날렵한 모습들, 어느 하나 눈길을 끄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번 ‘고려 왕조 특별전시회’에는 국보 제214호 ‘흥왕사명 청동은입사 운룡문 향완’, 국보 제 1025호 ‘청자 복숭아 모양연적’ 등 국보와 보물 7점을 포함하여 총 113점의 고려 예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들로, 한국 국립 박물관과 일본 나라 박물관, 독일 등 6개국 35개 박물관과 사찰,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대여 받은 것들이다.
이번 전시회의 개최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한국관 큐레이터 백금자 박사는 5여년에 걸쳐 각국의 박물관과 사찰, 개인 소장가들을 접촉하고, 설득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 국제교류재단과 코렛재단, 삼성, UA 항공의 지원으로 열린 이번 전시회는 백 박사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들을 옮기면서 야기될 수 있는 훼손을 막기 위한 노력도 엄청났다고 한다. 수월관음도는 이전 중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벽걸이 형태로 된 탱화를 접거나 말지 않고 전면 크기 그대로 포장을 하여 옮겼다고 한다.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이전 전시와 함께 전시품에 대한 사진과 각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320페이지에 달하는 전시도록을 출판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책자를 통해 작품을 더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마침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 새로 개관한 아시안 박물관에서 첫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그 동안 중국과 일본 등에 가려졌던 한국의 전통문화가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는 고려특별전과 함께 과천 국립 미술관과 공동으로 “한국 현대화가 8인전”도 동시에 열고 있어, 한국의 전통과 현대 문화와 동시에 감상할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그리고, 2층과 3층에는 중국과 일본, 티벳, 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어 아시아 지역의 전통 유물들을 비교 감상할 수도 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찬찬히 전시장을 둘러보고 난 뒤, 왜 고려 시대를 한국의 계몽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하는 의문이 나름대로 풀리는 듯했다. 한국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어원이 된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고려’가 우연히 그 시기에 ‘코리아’로 세계에 알려진 사실만으로 고려 시대를 한국의 계몽시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종훈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가 지역 한인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표현한대로 ‘고려시대는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500년간 이어지면서 통일신라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소화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예술로 발전시켰고, 세계에 선보였던 시기’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고려시대는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싹틔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역사서가 발간되고, 몽고의 침입을 받으면서 나라와 민족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주조했던 ‘고려대장경’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고려청자, 각종 불상과 불교회화, 금속공예품, 나전칠기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풍성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가 바로 고려시대이다. 이렇게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은 우리를 자각하고 세계 속에 독자적인 우리 문화와 역사를 바로 세웠기에 ‘고려’시대는 한국의 계몽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의 영어, “Enlightenment”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가 이민 100주년을 맞은 미주 한국 동포들이 우리 문화에 다시 눈뜨고 우리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길게는 천년, 짧게는 600여년의 세월을 지나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자리에 모인 고려 유물들을 둘러보면서, 과거의 유물로서 그 외형만 미국인들에게 보여 줄 것이 아니라, 당시 불상을 조성하고 탱화를 그리고, 불경을 간행하며, 모든 이들이 평화와 안락을 누리는 불국토를 염원했던 깊은 신심과 고려청자의 아름답고도 섬세한 빛깔과 선을 빚어낸 우리 조상들의 예술혼도 이 땅에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전시회장을 다녀와서도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머리속에 남아 떠나지 않는 수월관음도를 연상하며, 언제 어디서나 누구의 말이라도 다 들어주시는 보살인 수월보살님께 전쟁과 테러, 원한과 증오, 온갖 두려움과 괴로움, 무지와 탐욕이 사라지고 이 땅이 하루 빨리 지혜와 자비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어서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해 본다.
200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