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25]王羲之,蘭亭序[왕희지,난정서]상식
蘭亭序 / 王羲之(東晉)
(난정서 / 왕희지(동진)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
(영화9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우)
會稽 山陰之蘭亭 脩稧事也 群賢畢至
(회계 산음지난정 수계사야 군현필지)
少長咸集 (소장함집)
영화 9년 계축년 늦은 봄 초(3월3일) 회계현 산음의 난정에 모여 계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많은 현사들이 참석하고 젊은이들이 다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又有淸流激湍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우유청류격단)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
(영대좌우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수무)
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이곳은 높은산과 험준한 봉우리가 있고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다.
또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정자의 좌우를 비치며 띠처럼 둘러 쌓고 있다.
시냇물을 끌어다 굽이져 흐르는 물줄기를 만들어 술잔을 띄워 놓고
차례로 줄지어 둘러 앉았다.
비록 피리나 거문고가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니라도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니 또한 그윽한 감정을 펴기에 족하다.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고 은혜로운 바람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
(앙관우주지대 부찰품류지성 소이유목)
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
(빙회 족이극시청지오 신가락야 부인지상)
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여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舍萬殊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수취사만수)
靜躁不同 (정조부동)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 보고 만물의 무성함을 굽어 살피면서 눈으로 보고 즐기며 마음 가는대로 생각을 달리며 끝까지 보고 듣는 즐거움이 족하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대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보며 한 평생을 살아감에 어떤이는 회포를 끌어내어 벗들과 한 방에 마주앉아 이야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마음이 가는대로 맡겨 밖의 대자연에 멋대로 놀닐게도 한다. 이같이 사람들이 비록 취향은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조급함도 같지는 않다.
當其欣於所遇 蹔得於己 快然自足 不知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부지)
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
(노지장지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
之矣向之所欣 俛仰之間以爲陳迹 猶不能
(지의향지소흔 면앙지간이위진적 유불능)
不以之興懷 況脩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불이지흥회 항수단수화 종기어진 고인운)
死生亦大矣 (생사역대의)
저마다 자신이 처한 경우가 기쁠 때에는 잠시라도 자기 뜻을 얻어 스스로 만족하여 장차 노년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지낸다.
그러나 흥이 다하면 다시 권태함을 느끼고 마음은 세상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여러 감회가 그에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기쁜일도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드는 사이에 옛일이 되어버리니
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음도 비록 하늘에 달렸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할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고 하였으니
豈不痛哉 每攬昔人與感之由若合一契
(기불통재 매람석인여감지유약합일계)
未嘗不臨文嗟悼 不能喩之於懷 固知
(미상불임문차도 불능유지어회 고지)
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忘作 後人之視
(일사생위허탄 제팽상위망작 후인지시)
今亦由今之視昔悲夫
(금역유금지시석비부)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요. 나는 옛 사람들이 가졌던 감회를 일으킨 까닭을 알게 될 때마다 두개의 부절(符節)을 하나로 맞춘듯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고인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고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이 허탄함을 알았고 팽조같이 장수하거나 요절하는 것이 같다는 말은 헛되이 지어낸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을 볼 때도 또한 지금 우리가 옛 사람을 보는것과 같이 슬퍼하리라.
故列 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고열 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攬者 亦將有感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
於斯文 (어사문)
그런고로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적고
그 지은 바(詩)를 기록하였으니 비록 세대가 달라지고
일상도 다르겠지만 감회가 일어나는 이치는 한가지라
후세에 이글을 읽는 사람도 이글에 대하여 감흥이 있을 것이리라..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 진본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 다시 사라져, 중국서예사상에서 아주 전설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永和九年, 勢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이것은 예전에 모두가 외우던 명문장이다.
작자는 바로 왕희지인데 관직이 우군장군(右軍將軍)에 이르러
세상에서는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부르고 있다.
<난정서>의 유래는 이 글에서 명확히 하고 있다.
동진 목제 영화9년(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손작(孫綽)등 41명이
산음(지금의 절강성 소흥)의 난정에서 '수계' 즉 모여서 각자 시를 짓는 일을 했는데,
왕희지가 그들의 시에 서문을 쓴 원고가 바로 <난정서>이다.
<난정서>는 <난정연집서(蘭亭宴集序)>,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書)>, <계첩(禊貼)>이라고도 한다.
행서(行書)로 쓴 서첩중에서 정품중의 정품으로 불리우며,
중국서법사상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천하제일행서"로 불리운다.
<<난정서>>의 행방에 관하여 비교적 전통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자신의 가장 마음에 드는작품으로 보았고,
집안의 가보로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었다.
그의 7대손인 수나라때의 왕법극(王法極)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왕법극은 불교에 흥미를 느껴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고,
불가에 귀의하여 중이 된 후 법호를 "지영(智永)"이라고 했다.
나중에 절강성 오흥현 경내에 있는 영흔사(永欣寺)에서 승려로 30년을 지냈다.
지영이 원적한 후 진품은 제자인 변재(辨才)에게 전해진다.
당나라초기에 명가의 묵보(글씨)를 무척 좋아하던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 종요(鍾繇)등의 글씨를 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엄청난 돈을 걸고 <<난정서>>의 진본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고,
나중에 진적이 회계의 변재화상의 수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세민은 변재를 불러서 만나고, 진본 <<난정서>>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변재는 짐짓 멍청한 것처럼 행세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세민이 어렵게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주군의 심리를 잘 아는 상서 방현령이 아이디어를 냈고,
감찰어사 소익을 보내어 <<난정서>>를 훔치게 한다.
소익은 이세민으로부터 왕희지의 서첩 진본 몇 개를 들고 가난한 서생인 것처럼
가장하고 영흔사로 간다. 일부러 변재와 가까워진다.
하루는, 소익이 변재와 서법에 대하여 얘기하였는데,
몇 건의 왕희지의 서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변재화사에게 감정을 해봐 달라고 한다. 변재는 자기를 속이려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에게 그 서법들은 확실히 왕씨의 진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무의식중에 그가 <<난정서>>의 진본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소익은 못믿겠다고 말하고, <<난정서>>의 진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한다. 변재는 자기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가 <<난정서>>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천정의 서까래에서 <<난정서>>진본을 꺼내서 소익에게 감상할 수 있도록해준다.
소익은 고의로 이것은 가짜라고 하여 변재를 미혹시킨다.
이렇게 서로 교류하면서 소익은 <<난정서>>를 비장하고 있는 서까래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한다. 하루는 변재가 절에 없을 때,
<<난정서>>를 훔쳐서 장안으로 간다. 그리고 진품을 이세민에게 바친다.
변재는 <<난정서>>가 도둑맞은 것을 알고는 화가나서 크게 병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적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이 아주 널리 알려진 "당태종이 계교를 써서 <난정서>를 얻은 이야기"이다.
당나라 정관(당태종 이세민의 연호)이후,
<<난정서>>의 여러 당나라 임모본이 있고, 송, 원, 명, 청, 및 당대에까지도
여러 시기에 걸쳐 도굴되었다는 소문을 불러온 적이 있다.
한가지 말해야 할 것은 현대에 이르러,
<<난정서>>의 진본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진위에대한 의문까지 불러오고 있다.
곽말약의 <<왕사묘지의 출토로 본 난정의 진위>>라는 글은 1960년대에,
<<난정서>>의 작가가 도대체 누구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곽말약은 왕희지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화상이
선조의 이름을 빌린 위작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당시의 최고권력자 모택동까지 가담한다
**원문 번역글**
영화(永和) 9년 계축(癸丑) 늦은 봄 초에
회계산(會稽山) 북쪽 난정(蘭亭) 에 모였는데,
계제사(禊祭祀)를 지내기 위해서이다.
많은 현사(賢士)들과 젊은이 늙은이들이 다 모였구나.
이 곳은 높은 산과 가파른 고개가 있고,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도다.
또 맑은 물과 격동치는 여울이 좌우를 죽 비추고 있구나.
굽이치는 물을 끌고 와 잔을 흘려 보낼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차례대로 둘러앉으니,
비록 거문고와 피리는 없지만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니,
그윽한 마음 활짝 펴기에 충분하구나.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으니 봄바람은 따스하고 부드럽구나.
우주의 넓음을 우러러 살피고 만물의 풍성함을 굽어살피며,
눈을 돌려 회포를 달리니, 보고 듣는 즐거움이 충분하여
진실로 즐길 만 하구나.
사람이 태어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한 세상을 서로 더불어 살아감에,
혹 어떤 이는 마음에 품은 생각을 서로 만나 한 방에서 기쁘게 이야기하고,
혹 어떤 이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멋대로 몸밖으로 내뱉는구나.
이와 같이 사람들은 생각이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하고 급함이 비록 같지 않으나,
저마다 자신이 처한 경우가 기쁘게 느껴지는 때에는
잠시나마 자기 뜻을 얻어 유쾌하게 스스로 만족하여,
늙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그가 즐기는 일에 권태를 느끼거나
또 자신의 감정이 그 일에 따라 옮겨가서 변하게되면,
여러 가지 감회가 이어서 나온다.
이전의 즐거웠던 일이 잠깐 사이에 옛 일이 되어 버리니,
그 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목숨의 길고 짧음이 자연의 조화를 따라
마침내는 죽음에 다다르는 것이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생사가 또한 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옛 사람이 가졌던 감회를 매번 볼 때마다 내 생각과 합치되는 듯하다.
아닌게 아니라 글을 보고 애도하지만,
마음속에서 그것을 깨우칠 수 없었으니,
죽고 사는 일이 같다는 것이 허황하다는 것을 참으로 알 것 같다.
팽상(彭殤)이 같다는 것도 망령된 일이다.
뒷날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우리가 옛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터이니,
슬픈 일이로구나.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 지은 바를 기록하니,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도 변하겠지만
회포를 일으키는 까닭은 그 이치가 하나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이 글에 대해 감회가 있을 것이다.
(원문)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是日也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舍萬殊,
靜躁不同,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得,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仰之間, 以爲陳迹, 尤不能不以之興懷.
況修短 隨化, 終期於盡, 古人云死生亦大矣, 豈不痛哉.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
. 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 悲夫.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난정서> (수. 개황 모본)
<난정서>(청. 강희 모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