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오는 8일부터 미국과 세계보건기구(WHO)가 승인한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의 접종자들에게 국경을 연다. 미국이 승인한 화이자와 모더나, 얀센과 WHO가 인정한 아스트라제네카, 중국의 시노백·시노팜 백신을 접종한 외국인들에게는 별도의 제한조치 없이 출입국을 허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러시아산 '스푸트니크V' 백신을 접종한 수억명 이상에게는 여전히 미국 출입국에 견고한 장벽이 만들어진다. '스푸트니크V'는 출입국 허용 백신 목록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미 듀크대학 국제보건혁신센터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에 수출된 '스푸트니크 V' 백신의 물량이 4억4천800만 회분에 달한다. 적어도 2억~3억명은 백신을 접종했으면서도 미국 출입국이 거부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이름하여 '백신 장벽'이다.
미국, (외국인 입국에) WHO 인증 신종 코로나 백신 접종 인정하기로/얀덱스 캡처
해외로 수출되는 스푸트니크V 백신/현지 TV채널 러시아-1 캡처
일각에서는 수십년 전 미국과 소련이 정치·군사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했던 정치경제적 '냉전 구도'는 무너졌으나 새로운 '백신 냉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가 제기된다. 러시아가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촉발된 '신냉전 구도'가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으로 '백신 냉전 체제'로 옮아가는 모양새다. 러시아측은 스푸트니크V의 WHO 승인이 '정치와 자본의 논리'에 밀려 늦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스푸트니크V 백신 개발사인 '가말레야 센터'의 알렉산드르 긴츠부르크(러시아 식으로 긴쯔부르그) 소장은 지난 31일 WHO와 유럽의약품청(EMA)의 '스푸트니크 V' 승인이 '자본의 논리'와 '법률적인 차이'로 미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WHO에, EMA에는 지난 1월(등록 심사는 3월부터) 스푸트니크V 승인을 신청했다.
러시아측의 불만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백신과 같은 의약품은 안전성이 생명인데, 상대방의 안전성 심사 기준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전세계 70여개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고, 지난 1년 가까이 실제로 접종한 후 나타난 효능으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선진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어렵다.
푸틴 대통령, G20정상회의서 신종 코로나 백신의 상호 인정 (협의) 가속화 촉구/얀덱스 캡처
가말레야 센터의 긴츠부르크 소장/사진출처:트윗
긴츠부르크 소장은 "백신이 러시아에서는 18개 카테고리에서, 유럽에서는 16개 카테고리에서 평가된다"고 설명하면서 "유럽의 2개는 러시아와 다르다"고 했다. 그는 "다르다는 것이 절대로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며 "다른 것은 서로 맞춰가야 하는데, 이게 어렵고, 그래서 심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스푸트니크 V'가 전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감염을 예방하고 있지만, EMA와 WHO는 이 사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인식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동서간의 '백신 장벽'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코로나 팬데믹은 백신 접종으로 서서히 꺾이고 있지만, 지구촌은 거꾸로 '냉전 구도'로 빠져드는 셈이다. 미국이 끝내 스푸트니크V 접종자에 대한 출입국을 거부할 경우, 러시아도 같은 조치를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30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화상 연설을 통해 "백신의 접종 증명서를 상호 인정하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할 것"을 촉구한 이유다.
미국은 지난해 코로나 사태 확산 이후 의료 교육 무역 등 필수적인 목적을 제외하고는 항공은 물론, 멕시코·캐나다로부터 자동차, 철도, 선박을 통한 외국인 입국을 엄격히 통제해 왔다. 8일부터 적용되는 새 출입국 정책은 이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인데, '스푸트니크V' 접종자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스푸트니크V 백신의 유통을 맡고 있는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는 미국의 새 출입국 정책에 대해 “전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 대응을 정치화하고, 경제적 이득을 위해 백신을 차별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고 반발했다. 러시아 정부도 대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 외국인 출입국 새 정책 준비중/얀덱스캡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달 8일 러시아내 유럽기업협회 회원들과 만나 “러시아 연방의 출입국을 보장하는 방법에 대해 투명하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준비하고 있다"며 "몇 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아직까지는 음성확인서를 제출하고 입국뒤 검사만 하면 되지만, 앞으로는 그 절차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미국과 러시아간의 인적교류가 팬데믹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가 힘들 수도 있다. 양국은 또 상대국 주재 외교관 수를 놓고 분쟁을 겪으면서 러시아에서는 미국 비자의 발급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백신 냉전구도가 형성되면 불리한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다. 벌써부터 업무상 혹은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자주 해야 하는 러시아인들은 WHO 승인 백신을 맞기 위해 '백신 여행'에 나서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에선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기 위해 발칸바도의 세르비아로 '원정 접종'을 떠나는 행렬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호텔·식당·접종센터 등에는 '백신 여행'에 나선 러시아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관광사업자협회 관계자는 "백신 여행 상품은 백신의 종류에 따라 300~700달러부터 시작한다"고 귀띔했다. 최근에는 1회 접종 백신인 '얀센'을 원하는 여행객들을 위해 '크로아티아 원정 백신 접종' 상품도 나왔다고 한다.
무라쉬코 보건장관, 미국측 대표단과 백신 접종 상호 인정 문제 협의/현지 매체 rbc 캡처
'백신 냉전' 구도를 깨뜨리기 위한 노력도 물밑에서 진행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와 미국간에, 러시아와 EU간에 서로 상대방의 백신 접종 확인서를 인정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지난 7월 "(EU측과) 백신 상호 인정 문제가 협상 의제로 올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러시아 현지 온라인 매체 rbc는 지난달 2일 "미하일 무라쉬코 보건부 장관이 제네바에서 미국과 백신 접종 증명서 인정 문제를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도 미 연방정부와 스푸트니크V 백신 접종자들의 입국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은 스푸트니크V 백신을 대거 구매, 접종한 바 있다. 멕시코의 움직임은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