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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언제 거행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왜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에 나타난 가르침을 따라서 주일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주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입니다. 이 휴식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느님의 ‘휴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여기서 말하는 창조주의 ‘휴식’은 하느님의 ‘무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손수 하신 일을 둘러보시며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고 하신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찬 하느님의 시선’을 표현합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바라보듯 하느님께서는 사랑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주일의 휴식은 바로 하느님의 이 열렬한 사랑의 시선과 마주하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주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주일은 매주 돌아오는 부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창조의 완성과 ‘새로운 창조’(2코린 5,17 참조)의 시작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일 다음 첫째 날’을 일찍이 ‘주님의 날’(주일)이라고 부르며 우리 신앙의 근원적인 축일로 삼았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영적 의미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주일은 ‘기억’하는 행위를 중심 주제로 갖습니다. 주일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채우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때 주일의 휴식은 비로소 충만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주일의 핵심은 무엇보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주일 성찬례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생생한 현존을 강렬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시작된 첫 신앙 공동체의 삶의 중심에 늘 ‘빵 나눔’이라 불린 성찬례 거행이 있었음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미사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명칭 가운데 하나인 ‘빵 나눔’은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동작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루카 24,30 참조) 때에야 비로소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놀라운 체험을 상기시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와 참으로 하나가 된 신앙인은 빵을 나누는 행위를 자기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기쁨의 몸짓이 되게 합니다.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줌으로써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사에 따른 전례] 전례 용기들(8-11세기)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의 시작부터 성찬례에 사용되었다. 사도들과 그 이후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를 성찬례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일상적으로 식사 때 먹던 빵과 같은 재료를 사용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표지를 넣거나 고유한 형태로 빚기 시작했다. 또한 특별한 표지를 넣기 위한 빵 스탬프도 발달했고, 납작한 원반 모양의 성찬례용 빵을 준비하는 전통이 생겼다.
10세기까지는 발효된 포도주와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 그리고 포도 주스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1140년?)은 미사 때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던 율리오 1세 교황(337-352년 재위)의 말을 인용한다. “필요한 경우, 포도송이들을 성작 안에 짜 넣고 물을 섞을 수 있다. 교회 계율에 따르면, 주님의 잔은 물이 섞인 포도주와 함께 봉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줄어드는 성찬례 참석자와 봉헌 행렬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교회가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참으로 신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신도가 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출현한 ‘원죄 교리’는 평신도에게 스스로 죄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하여, 영성체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다.
이렇게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성찰한 평신도들이 정기적인 성찬례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 결과 교회에 예물과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성체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고, 많은 지역에서 봉헌 행렬이 사라졌다. 이 기간에 사적 미사가 많아지면서, 봉헌 행렬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면서 수도자나 성직자가 성찬례에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를 직접 준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수도원과 다른 종교 기관이 예식화된 절차에 따라 성찬례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룩 없는 빵
성찬례의 초현실성을 강조하자, 일반 식탁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빵을 사용하는 편이 적합해 보였다. 특히 유다교 성전 제사에 사용한 누룩 없는 빵은 성찬례에서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특별한 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성찬례를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재현으로 이해했던 것도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다. 미국의 신학자 러셀(James C. Russell)은 저서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의 게르만화」(1994년)에서 이 요인이 게르만화의 영향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누룩 없는 빵을 강조한 사람이었던 카롤루스대제의 핵심 고문 요크의 알쿠이누스(730?-804년)는 리옹의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798년)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 빵은 누룩이나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매우 순수한 빵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성체 방식의 변화로 작아진 제병과 성반
늘어나는 사적 미사와 줄어드는 영성체하는 사람의 수, 그리고 누룩 없는 빵의 사용은 모두 제병 크기가 작아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9세기 이후부터는 손이 아니라 입으로 성체를 모시는 관습이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이 또한 제병의 크기가 작아지게 만든 요인이었다. 11세기 무렵, 교회는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위해 전반적으로 작은 제병을 준비했다.
성찬례용 빵의 변화는 빵을 담는 그릇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성찬례용 빵을 담던 바구니가 사라졌으며, 큰 빵 조각이나 영성체하는 사람 모두를 위해 빵을 여러 개 담을 정도로 충분히 컸던 성반이 작아졌다.
작은 성반은 이미 콘스탄티누스대제 시대 뒤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세 초기에는 전례 공동체의 규모나 본질에 상관없이 작은 성반으로 규정되었다. 신자들에게 분배할 빵을 전부 성합에 보존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성반은 더 이상 평신도를 위한 빵이 아니라 사제를 위한 빵만 담는 그릇이 되었다.
작아진 성작
지난 시대의 성작과 비슷한 크기의 성작은 손잡이가 달린 형태와 손잡이 없는 음료용 큰 잔의 형태가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성작은 시간이 갈수록 희귀해지다가 12세기 이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보다 성작 크기가 작아졌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 특히 잔으로 성혈을 영하는 평신도의 수가 줄었고, 사적 미사가 점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성혈을 흘릴 수 있다는 두려움 탓에, 성찬례에 참여한 평신도는 대부분, 성혈을 받아 모시는 경우가 점점 더 드물어졌다.
이 기간 성작 디자인이 발전을 이루었다. 잔과 받침대를 잇는 손잡이 부분에 마디를 넣은 것이다. 이전 시대에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성작이 있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손잡이 대에 마디를 넣는 것이 표준화되는 데에 영향을 준 한 가지 요인은, 축성된 성체를 만진 뒤에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붙이고 있는 사제들이 점점 많아진 것이다. 이 관습을 반대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13세기 무렵에는 일반적인 규칙이 되었다.
성혈용 대롱
이 시기에 등장한 매우 특이한 성찬용 도구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빨대 같은 성혈용 대롱이다.8세기 로마에서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한 봉사자들이 성혈을 영할 때 이 대롱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최초의 증거로 전해진다. 최소한 13세기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전까지, 교황이 집전하는 전례에서 교황이나 부제가, 그리고 가끔은 주교들이 특별한 경우에 대롱을 사용했다.
이 시대에 빵과 포도주 형상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냈던 전통적인 방식은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게르만화된 전례 거행에서 성체와 성혈을 담는 그릇들은 공동체 자체보다도 더 귀하게 간주되기 시작했다.
전례 탐구 생활 (63)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로 묵주기도 배우기 ①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묵주기도는 성모송을 반복해서 바치면서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펼쳐진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아주 단순해서 남녀노소, 학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바칠 수 있고, 매우 심오해서 이 기도에 의지하는 이에게 큰 효과를 가져다주는 기도입니다. 많은 성인들과 교황들이 묵주기도를 사랑했고,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기도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묵주기도의 기본 형식을 결정적으로 확립하고 전파하는 데는 묵주기도를 통해 교우들을 그릇된 가르침의 위험에서 지켜내고자 했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묵주기도에 관한 최초의 교황 회칙은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미니코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탄원하는 아주 단순한 방식의 기도, 모든 이가 쉽게 따라 바칠 수 있는 신심 가득한 기도에 주목했습니다. ‘묵주기도’ 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시편’이라 불리는 이 기도는 다윗 시편의 숫자에 맞춰 150번 반복하는 ‘천사의 인사말’(성모송)과, 매 단의 시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로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공경을 드립니다. 기도 사이사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드러내는 묵상 주제들이 있어서, 거룩한 로마 교회의 교황들이 세운 기도의 규율을 완전하게 따르고 있습니다.”(교황 비오 5세, 「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 1항, 1569년 9월 17일)
이후 묵주기도를 다룬 교황 문헌이 많이 나왔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002년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하시며,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추가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이 문헌에서 교황님은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수세기 동안 축적된 경험의 소산”인 다양한 방식들을 존중하면서도, “묵주가 한갓 부적이나 주술 도구로 여겨지게 되어 근본적으로 묵주기도의 의미와 역할을 왜곡할 위험을 피하고자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식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설명을 주의 깊게 되새기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의 방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1. 시작과 끝맺음
현재, 각 지역 교회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도록 일깨우는 의미에서, 시편 69[70]의 첫 구절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로 묵주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신앙 고백을 관상 여정을 시작하는 토대로 삼을 수 있도록 신경을 바치면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습들과, 이와 유사한 관습들이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면 모두 똑같이 정당한 것입니다.
또한 묵주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교회의 모든 요구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로 끝맺습니다. 또는 당신의 힘찬 전구로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를 뒷받쳐 주시는 성모님을 찬미하며 성모 찬송가(살베 레지나)나 성모 호칭 기도를 바칠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서귀복자본당)]
전례 탐구 생활 (64)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로 묵주기도 배우기 ②
2. 신비의 선포
각 신비를 낭독하는 것은, 말하자면 줄거리를 전개시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를 낭독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특별한 사건이나 순간을 향하게 됩니다.
3. 성경 봉독
성서적 토대를 제공하고 묵상에 깊이를 더하려면, 각 신비를 선포한 다음 상황에 따라 길거나 짧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성서를 봉독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공동으로 장엄하게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성서를 봉독한 다음에 간략하게 해설을 할 수도 있습니다.
4. 침묵
신비를 낭독하고, 말씀을 선포한 뒤에는 제시된 신비에 얼마 동안 관심을 집중한 다음에 소리 기도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전례에서 침묵의 순간이 권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인 다음, 잠시 머물러 특정 신비의 가르침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좋습니다.
5. 주님의 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신비에 집중한 다음에,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들어 높이기 위하여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후 성모송을 반복하며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묵상하는 토대로 놓였으며, 신비에 대한 묵상 전체가 교회의 경험이 되게 합니다.
6. 열 번의 성모송
묵주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모송은 묵주기도를 탁월한 마리아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성모송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성모송의 축은 전반부를 마무리할 때 부르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때때로 급하게 성모송을 외우다 보면 이를 놓치기 쉬우며, 성모송과 함께 관상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관계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를 의미 있고 효과 있게 바치는 표시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의 신비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이름을 강조하고자 성모송의 ‘예수님’ 다음에 관상하고 있는 신비의 내용을 덧붙여 성모송의 전반부를 확장하는 특별한 형태의 성모송을 바치는 곳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통의 신비 1단을 바치면서 성모송을 외울 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 태중의 아들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 하고 바치는 것입니다.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서귀복자본당)]
전례 탐구 생활 (65)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로 묵주기도 배우기 ③
7. 영광송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송은 모든 그리스도인 관상의 목표입니다.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영광송을 노래로 불러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고유한 구조에 다가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8. 짧은 마침 기도
오늘날의 묵주기도에서는,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합니다. 한국 교회는 관습적으로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9. 요일 배분
묵주기도는 날마다 전체를 다 바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많은 사람이 한 주간의 어떤 순서에 따라 하루에 묵주기도의 일부 밖에 바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관습은 묵주기도의 신비를 요일에 따라 배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추가하시면서 교황님은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를, 목요일에는 ‘빛의 신비’를, 수요일과 주일에는 ‘영광의 신비’를 바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개인이나 공동체 기도의 합법적인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묵주기도를 언제나 관상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묵주기도를 통하여 한 주간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0. 유의할 점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기억은 모든 일에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당신 아드님 곁에서 보내신 삶의 여러 순간들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느 모로 성모님께서 지상에 사시는 동안 몸소 끊임없이 바치셨던 묵주기도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더없이 훌륭한 관상 기도입니다. 이러한 관상의 차원이 없으면 묵주기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관상이 없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아져 기도문만을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본질상 고요한 운율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느릿한 속도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과 눈길로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 생애의 신비를 더 쉽게 묵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신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가 드러나게 됩니다.
[빛과 소금] 누가 거행하는가?
마스크로 가려진 신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그 마스크 뒤에 감추어진 표정이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비대면의 불안한 시간이 길어질 때면 눈빛마저도 교환할 수 없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더 그리워집니다. “눈은 몸의 등불”(마태 6,22)이라는 복음 말씀처럼 눈을 통해서라도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가 아니라 영혼의 눈빛으로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라는 하나의 표징처럼 여겨집니다.
한 곳에 함께 모인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 공동체는 미사 거행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전례, 특히 미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모인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디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의 어원은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당신과의 만남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가 믿는 이들의 모임을 가시적이고 살아있는 교회, 곧 하느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의미하지도, 내가 좋아해서 선택하는 여러 친목 단체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든 활동은 그 참여 인원이 많든 적든 ‘사적인 행위’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비대면 상황에서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는 경우에서도 거룩한 미사 참례는 내가 선호하는 어떤 프로그램의 채널을 선택하는 행위처럼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전례는 ‘온전한 그리스도’(Christus totus)의 행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 전체가 거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례는 그리스도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행위입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깊이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두 한몸을 이루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희귀한 질병은 교회 안에서마저 이 믿음의 체험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텅 빈 성전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없이 봉헌되는 미사 거행은 너무나 당연히 여겨 왔던 신앙의 가르침을 되짚게 만들었습니다. 한 신학자는 교우들과 함께 하는 미사와 각종 행사들이 중단된 ‘텅 빈 교회’의 현 상황을 하나의 카이로스, 곧 교회의 시대적 표징이자 호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안에서부터 문을 두드리시며 밖으로 나가시길 원하신다면, 우리도 교회 밖에서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텅 빈 교회’는 분명 교회 문밖에서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표징입니다. 믿음, 기도,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교회-건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친교’로서 존재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라는 하느님의 간절한 메시지입니다.
전례 탐구 생활 (62) 미사의 마침 예식
사제의 영성체 후 기도로 성찬 전례는 끝이 납니다. 이제 미사의 전체 예식을 완전히 마치는 간단한 마침 예식만 남았습니다. 마침 예식은 미사를 시작할 때의 동작과 말을 거울에 비춘 듯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과 십자 성호, 사제의 인사와 교우들의 응답으로 미사의 문이 열렸고, 이제 거꾸로 사제의 인사와 교우들의 응답에 이어서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며 비는 축복과 십자성호로 그 문이 닫힙니다.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하는 시작 권고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는 마침 권고와 짝을 이룹니다.
부제나 사제가 하는 파견사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Ite, missa est)는 이제 막 거행한 미사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대에는 미사(missa)라는 단어가 단순히 ‘파견’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의 관습에서 점차로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파견’에 ‘사명’의 뜻이 더해진 것입니다. 이 짧은 몇 마디 파견으로, 우리는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90항) 파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드렸다는 기도의 내용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당신의 몸이 아니라 여러분의 몸을, 당신의 손이 아니라 여러분의 손을, 당신의 발이 아니라 여러분의 발을 지니게 되셨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그리스도의 자비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여러분의 발은 그리스도께서 좋은 일을 하려고 돌아다니시는 발입니다. 여러분의 손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손입니다.”
이제 바로 우리가 세상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의 여정을 지속하게 됩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받아 모신 우리가 이제 ‘삶의 전례’에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다른 사람들에게 중개하게 됩니다. 성찬례의 기쁨과 따뜻함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일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우리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도로시 데이는 이 사명 앞에서 움츠러드는 이에게 이런 말로 격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그 가운데에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방에, 식탁에, 빵을 배급받으려고 늘어선 줄에, 방문객과 함께, 농장 안에 계십니다. …… 우리가 하는 일은 매우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빵 몇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온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받아 많아지게 하십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면 우리가 거행한 것이 파급 효과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는 우리가 체험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2코린 13,13)가 이제 우리 안에 머물며 성찬례 거행을 넘어서는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빛과 소금] 신앙의 신비여!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란 말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공들여 양성하신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주님을 따랐던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길 앞에서 모두 걸려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유다는 고작 은돈 서른 닢에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여정의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의 길에서 주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제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겟세마니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신 제자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버림받으신 고독한 스승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에게도 감추어져 있어서 도무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하느님의 뜻을 가리켜 교회는 ‘신비’란 말로 표현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미사 전례문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 ‘신비’의 뜻이 궁금하시다면 바오로 사도의 서간인 코린토 전서 1-2장과 에페소서 1-3장을 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중요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5.10)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신비’란 성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시작하시고 ‘때가 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이 뜻은 과거의 모든 세대에게는 감추어져 있었고, 또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을 만나러 찾아오시는 사랑의 대서사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이 지극하고 애절한 사랑이 ‘때가 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짝 꽃피우기까지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의미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자 구원의 결정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뜻합니다.
전례는 바로 이 구원의 시간을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합니다. 특히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 곧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과 치욕의 표지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새로워진 눈,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난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할 때 바로 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교우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응답할 때 미사에서 기념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건, 곧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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