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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와 메추라기
(출 16: 13-21)
광야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저주스럽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에게 광야는 축복이요, 기쁨과 흥분의 연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 도착해서 경험한 첫 번째 고통은 갈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과 고통이 항상 공존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는 축복도 주고, 고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삼일 째 고생하던 날, 한 물을 발견하고 가 보았더니 먹지 못할 쓴 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가끔 이런 일을 겪게 됩니다. 기적인 줄 알았는데, 축복인 줄 알았는데,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또 한 번 절망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제일 쉽게 나오는 반응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고통이 오고 절망이 올 때, 그 뒤에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만 보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쓴 물을 기적같이 단 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한 나무를 보게 하시고, 그 나무를 꺾어서 쓴물에 던지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쓴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광야에서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쓰디쓴 인생이, 단 물 같은 인생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쓴 물이 단 물이 되었던 장소를 떠나, 물샘이 있고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엘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살만한 곳을 찾아 산악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엘림과 시내 산 중간쯤에 신 광야가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할 즈음 되어서 그들은 또 한번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내용이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 월 십오일이라”
이월 십오일이라면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날이 1월 1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그날부터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떠날 때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준비한들 한 달 보름이 지나가는데 그때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사막을 계속 걷고 있는데, 음식은 떨어지고, 갈 길이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든 음식이 떨어지면 불안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저는 자취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너무 잘 압니다.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잘 다니던 직장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지금 먹고 있는 밥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이 될 때,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불안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식량이 몇 끼 밖에 남지 않자 불안해지고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에 대하여 미리 연습을 한 사람입니다. 여기가 어디쯤 되고, 얼마만큼 가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행길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더욱 불안합니다.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 하는가? 혹시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하나님께는 대들지 못하고 모세에게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2-3절)
사람은 고생하면 과거를 생각하고,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픈 고통 앞에서 약해집니다. 모세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원망합니다.
사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나약합니다. 겉보기에는 멋있고 이상을 꿈꾸는 것 같지만, 실제는 언제나 현실의 벽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문제들은 대개 위대한 주제가 아닙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작은 일 앞에 우리는 인생을 걸고 고민합니다. 잠 못 이루고 합니다. 자고 나면 다 이루어져 있는 일을 밤새 동안 고민하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왜 광야가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지 압니까? 고통스러워서도, 돈이 없어서도, 건강이 안 좋아서도, 환경이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광야에서 제일 힘든 때는 꿈과 이상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람은 비전이 없고, 이상이 없고, 꿈을 잃어버렸을 때, 비참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픈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주셨던 기막힌 축복과 약속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잊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환상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었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에게는 확실한 내일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잊어 버리고, 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삶의 비전을 가지고 나갈 때, 어떤 고통과 여경도 이겨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꿈이 있고, 비전이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과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루실 때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미래의 우리를 보고 다루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리를 보고 다루신다면, 여기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형편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실 때, 현재의 모습을 보고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형편없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변하고 새로워질 그들을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현재 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미래를 보십니다.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광야에서 “너희를 위하여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배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양식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만 관심이 있으신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살이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가 낫기를 원하십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중풍병을 고쳐주셨고, 죽은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축복하듯이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면에만 관심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필요한 양식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공급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급해 주었는데, 왜 안 받은 것처럼 고민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에 음식을 다 차려 놓으시고, 정말 따뜻하고 맛있는 만나를 준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4절에서 또 하나 배울 것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3:1,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리스도의 양식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온 천지에 만나를 비같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월급 많이 올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올려 달라 하고, 큰 건강 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건강하길 바라며, 집도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방 한 칸 정도 더 달라고 합니다. 직위도 갑자기 사장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직위 정도 진급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이 다 모이면 원망과 불평과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 만사가 행복합니다. 행복이란 양이 아니고, 질입니다. 좋은 조건이 있다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 속에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좋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발견하는 축복이란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임했던 재앙이 하나도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고,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식에는 두 종류의 양식이 잇습니다. 즉 세상 양식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식은 노력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식은 어떤 양식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하루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따뜻한 음식을 주기 원하십니다. 상한 것도 아니고, 식은 것도 아닌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틀분도 한 달치도 일 년치도 아닙니다. 양식은 매일 먹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틀분을 수확하면 그 음식을 썩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음식에 욕심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재물에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나는 해 뜨기 전 아침에 거두어야한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고 말합니다.
13-1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만나는 새벽 이슬이 내린 후에 만들어진 꿀과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비같이 40년 동안 주셨습니다. 만나는 해뜨면 없어집니다.
새벽의 이슬이 만나였다면 만나를 얻어 먹기 위해 새벽 기도에 나와야 합니다. 새벽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새벽에 매일 나와서 새벽을 사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살아갑니다. 힘이 있습니다.
새벽은 축복의 보고입니다. 새벽은 축복의 열쇠입니다. 새벽을 깨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많을 때 교회는 부흥합니다.
이제 만나에 대한 신약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31-33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구약에는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셨는데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단 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식탁에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 놓으시고 지치고 배고프고 상처받은 우리들을 초대하셔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통 떡을 먹으면 다시 배고프겠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는다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너, 그럴 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먹이고 난 후에도 따지지 않으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광야의 식탁에 우리 한 사람을 한 사람을 초대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이다. 이 피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이것을 먹고 세상에서 승리해라”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떡을 먹고 다시는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설교와 예화나라(효성선교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종민
만나 메세지
출 16: 13-25
출애굽기 16장은 온통 만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는 도구로 만나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한 번도 빠짐없이 하루 세끼 만나를 다 공급해 주시고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를 주셔서 안식일에는 굶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남자만 60만명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여자는 인구의 계수에 넣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여자와 아이들까지 대략 계산해보면 200만명이 넘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200만 대군을 하나님이 40년 동안이나 하루 세끼 200만을 다 먹이셨으니 이 하나님이 도대체 얼마나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냐 하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은 너그럽고 후한 분이십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주시되 모자라지 않게 주셨고, 거저 주셨습니다. 부자도 돈 안내고 가난한 사람도 돈을 안 냈습니다. 거저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것을 거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4]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만나야 말로 광야에 가장 적합한 음식입니다. 만약에 하늘에서 자장면이 내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장국이 내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광야에 가장 적합한 음식은 만나입니다.
성경에 만나를 먹고 소화불량 걸렸다는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매일 돌보시고,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고 너그러운 분이시며, 무궁히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과 신광야를 지나갈 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셔서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에 도착한 것은 애굽에서 떠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2월15일날 도착하게 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안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마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아끼고 절약해서 양식을 먹고 살았을 텐데 이제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어요. 양식이 완전히 다 떨어져 버렸어요. 애굽에서 들고 나온 양식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눈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만나를 언제 주셨느냐. 언제 주셨느냐가 참 중요해요. 다 떨어졌을 때 만나를 주셨다. 떨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 떨어지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셨어요. 잘 생각해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들고 나온 양식이 있는 동안에는 만나를 안 주셨어요. 그런데 양식이 다 떨어지고 이제는 먹을 것이 없는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셨는데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어요.
언제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 다 떨어졌습니까? 여러분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떨어졌을 때 은혜주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 보니 다 떨어져 본 경험이 있어요.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진짜 절박한 겁니다. 저는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해서 목회 초년 때에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남들은 아쉬우면 이 목사님 쫓아가고 저 목사님 쫓아 가고 여기 가서 도와 달라고 하고 저기 가서 도와 달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잘 못해요. 진짜 완전히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길이 없을 때 열어 주시고 떨어졌을 때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어디서 주셨느냐. 광야에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만나를 구경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나오니까. 그것도 애굽에서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사실 만나가 필요 없어요. 왜 필요 없는지 아시죠? 땅에서 난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모았던 것으로 살기 하기 때문에 만나가 필요 없어요. 그러나 광야에는 만나가 필요합니다. 광야는 먹을 양식도 없는 곳입니다. 또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예요.
여러분, 내 힘 가지고 살려고 발버둥 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생각을 바꾸셔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이제부터 살아야 되겠다. 양식이 떨어진 것은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 양식이 떨어져야 하나님이 하늘 만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노력해서 사는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사는 곳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경험을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왜 못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잘 깨달으실 줄로 믿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만나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광애 생활, 믿음 생활 하는 데는 만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우리가 공급받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고 영적인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서 하늘 만나를 공급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잘 분석해 보면 그 믿음이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시인하는 믿음, 그리고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시인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반면 신뢰하는 믿음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겁니다. 만일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고 불안하다면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한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행자가 등산을 하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겁에 질려 소리칩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 주세요!” 그때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나는 하나님이다.” “오, 하나님! 반갑습니다.” “내가 너를 구해줄 텐데, 먼저 네 믿음을 확인하겠다. 너 진짜 믿음이 있느냐?” “당연하죠. 매주일 교회에 나갑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죠. 헌금도 한다고요.” “아니, 네가 정말 나를 믿느냐고?” “아멘! 믿습니다!” “그럼 좋다. 네 믿음을 테스트해 보겠다. 정말 나를 믿는다면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라. 그럼 내가 구해줄게.” 그러자 그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사람 없소?
우리도 믿는다고 하지만 이럴 때가 많습니다. 보통 때는 잘 믿는 것 같아도 막상 어려움에 봉착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인간적으로 불안해 하고, 인간적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산물을 먹을 때까지 무려 40여년 간 당신의 백성을 한끼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광야 생활처럼 힘들고 불확실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빽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사람도 의지하면 안 됩니다. 결국 책임져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시146:3~5 “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때때로 우리의 현실을 보고,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불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대책입니다! 아무 것도 안 보여도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노후대책입니다. 죽기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사후대책도 됩니다. 죽어도 천국 그리고 영생입니다. 세상의 권세가, 저금통장이, 집문서가, 생명보험증권이 우리의 대책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본문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날 먹을 것만 딱 주셨습니다. 넉넉하게 며칠 분을 주면 좋으련만 ...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대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 있으면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쌓아 두는 게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절대로 우리를 배반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복음송 중에 「오 신실하신 주」라는 노래가 있죠. 그 노랫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부디 이 노랫말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광야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늘 평안한 마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만나를 통해서 주시는 멧세지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광야 까지 끌고 오면서 세 가지를 시험하셨습니다.
1]홍해 바다 사건은 믿음 테스트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시려고 믿음을 한 번 테스트 해 보셨습니다.
2] 마라의 쓴 물 테스트입니다. 마라의 쓴 물은 감사 테스트입니다. 쓴 물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 테스트에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합격했습니다. 감사할 줄 몰라요.
3]오늘 본문에 만나는 순종 테스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순종하나 순종하지 않나 이것을 보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시험해 보시고, 감사를 시험해 보시고, 순종을 시험해 보신 다는 것입니다.
출16:16을 보시죠.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 ” 여기서 1 오멜은 약 2리터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먹을 충분한 양입니다. 이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출16:17~18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16:19~20 “19 ...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 ” 많이 짊어지고 오느라 고생, 썩은 냄새가 진동해서 고생, 갖다 버리느라 고생, 주위 사람들에게 창피하고, 하나님 앞에 면목 없고 ... 좋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순종을 테스트하고 연단해 가셨습니다. 출16:4 “ ...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또 신8:3 보면 “ ...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신의 떡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삽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할 때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하나님이 100% 보장입니다. 시119:165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막힘이 없다는 겁니다. 축복의 대로(Highway)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영적인 축복의 원리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만나는 영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6장 48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를 먹는 자는 먹고 죽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영생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죽어도 다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는 성도의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먹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먹은 만나를 가지고도 지금까지 배부릅니다.”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필요 없습니다.” 해도 안 됩니다. 만나는 매일 먹는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양식이 되어야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성경 멀리하는 분 계십니까? 다시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신교의 영성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단순한 것에 있는 것입니다. 또 만나는 본인이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거둔 것을 자신이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읽고 자기 영혼의 양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만나에서 주는 세 번째는 멧세지는 영혼의 안식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안식을 누리고 새 힘을 얻으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육체 외에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함으로 영적인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서 새 힘을 얻고 광야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데 왜 곤고하고, 왜 실패합니까? 하나님 안에 그 영혼이 거함으로 안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철저히 요구하신 게 있습니다. 안식입니다! 23절. “ ...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 ” 이 말씀대로 백성들이 안식일을 준비하면서 6일째 이틀 분을 거두었고, 하루 동안 보관했는데도 어떻게 됐나요? 24절 보세요!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만나를 내려주신 것도 기적이지만, 평일에는 하루 분 이상 보관하면 썩고 벌레가 생겼는데 안식일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도 기적입니다.
29절입니다.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이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매일 내리는 만나는 똑같고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안식의 날이 돌아올 때가 되면 이틀 분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틀 치를 거두어서 그것을 안식일 날 먹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안식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요즘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일입니다. 주일날 여러분들이 모든 삶의 것을 다 중지하고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유대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안식일 날 문을 열지를 않습니다. 장사를 아예 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난뱅이 인생을 사느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기계도 쉬지 않고 계속 돌리면 망가지듯이 사람도 안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인간은 육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안식이 필요합니다. 영적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주일이란 좋은 날 허락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와서 주일날 안식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갑절로 채워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서 큰 풍성한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主日)은 주유일(注油日)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넣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새 힘으로 승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더욱 크게 축복하십니다! 보상하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고 주 안에서 참 안식을 얻고 그 힘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출 16: 13-27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의 네 번째 청원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양식”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좁은 의미로는 빵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양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엄격한 의미의 빵만 먹고는 살 수 없습니다. 물도 마셔야 하고 고기류나 채소류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리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만나만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메추라기도 내려주시고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양식”이란 말 그 자체는 일단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하는 말이겠으나 그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우리의 육신적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시는 것 다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상적인 삶의 염려를 언급하실 때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 이어 “입을 것”을 언급하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25, 28-31) 의복은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기존하는 물질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써 빛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말씀으로가 아니라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가지고 지으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첫 사람 아담입니다. 창2: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합니다.
두 번째가 인류의 첫 여자 하와입니다. 창2:21-23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가 아니라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가지고 지으신 세 번째 것으로서, 사람 외에 친히 손으로 만드신 첫 번째 작품이 옷입니다. 옷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첫 번째 산물입니다. 창2:25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3:7에 의하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나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함께 수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최초의 작품인 치마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인간 최초의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의 산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치마를 만들어 걸치고서도 두려움과 수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8). 창3:9-11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에게 그 이후의 그들이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알리시고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걸친 무화과 나뭇잎 치마 대신 새 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창3:21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죄 많은 인간들이 마치 아무런 죄 없는 존재인 듯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히신 옷을 자꾸 벗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다 죄인 된 사람이라면 옷을 입어야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옷을 입습니다. 스스로 옷 만들어 입는 짐승 보셨습니까? 사람이 짐승과 다른 중요한 차이의 하나가 옷을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옷은 사람만이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의 증거물입니다. 옷은 인간의 수치심을 가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릇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양식을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의 육신적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로 확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먹을 것, 마실 것보다도 우선하여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또 빛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잠 또한 먹고 마시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래 잠을 못 잔 사람은 먹고 마실 것 다 제쳐놓고 우선 잠부터 자고 보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27편 기자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의 은혜에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거창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청원하고 그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기원하며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좀스럽게 먹을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청원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는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일갈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3)”고 말씀하실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양식을 주시기를 굳이 기도하라 하셨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신 데서 “오늘 ... 일용할”이라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봅니다. “오늘 ... 일용할”이라는 말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가르치시면서 구하라고 하신 것이 그저 “양식”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만의 양식”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청원은 양식에 관심하는 청원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양식에 관심하지 않는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양식에 관심을 두는 청원을 한다면 굳이 구차하게 “오늘 하루 먹고 마실 것만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매일같이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기도할 때 최소한 십년 치의 양식을 구하든가, 아니면 은퇴할 때까지의 양식을 구하든가, 아니면 구하는 김에 아예 죽을 때까지의 양식을 구할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실컷 먹고도 남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의 양식”을 달라는 것은 양식에는 관심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주시고 또 내일은 내일대로 그렇게 해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빌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참된 의도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양식으로 내려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지정하신 몇 가지 제약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매일 각 사람의 머리수대로 하루 먹을 분량의 만나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많이 거두거나 몇 일분의 식량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출16:16).
둘째는, 매일 그 날 거둔 것을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출16:19).
셋째는, 제7일 즉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 것이며, 그 대신 그 전 날, 즉 제6일에 이틀 분의 식량을 거두어 그것으로 그 다음날 안식일의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출16:23-26).
이러한 제약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매일 매일의 양식과 삶의 염려를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만나를 거둘 때 각 사람이 그날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고 거둔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도 또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의 양식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하는 염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염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었던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은(출16:20)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의 풍족함은 자연이나 인간 스스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거둔 만나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데 반해 여섯째 날 거둔 만나는 다음날 아침까지 간수해도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기 않은 것이(출16:23-24) 만나 자체의 성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일주일 중 여섯 날에는 만나가 있고 일곱째 날에는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던 광야 자체의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출16:25-26, 29).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일 뿐입니다.
넷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행하는 수고는 실상 얻을 것이 없는 헛수고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으나 얻지 못했음이 그것을 보여줍니다(출16:27).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주신 명령처럼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라 가르치신 뜻이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일상생활의 염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루도 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오.”라는 믿음의 간구입니다.
허황되고 부정한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벼락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정직한 갈망입니다. 잠30:8-9에 보면 이런 간구가 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물질적 부요함에서 오는 교만의 유혹과 물질적 궁핍에서 오는 실족의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만을 살기를 열망하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을 고려할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아니 언제나 우리의 삶이 유지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그를 믿는 믿음뿐이라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지켜주실 것을 비는 청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청원은 오늘도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살게 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기원은 오늘도 우리의 삶이 육신적 삶에 그치지 않고 영적 삶이 되게 해달라는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네 번째 청원 속에서도 “우리”가 강조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타적인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식구만 사람답게 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살게 되기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과 은혜 아래 살게 되기를 기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가 또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아래 들어와 살게 하는 전도의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전도를 더욱 힘쓰기를 다짐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