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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 ]
영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는 <인디펜던스 데이>,<고질라>,<2012>,<투모로우> 등 화제작들을 만들어온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18세기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평범한 한 농부가 영국군에게 아들을 잃고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린 시대극이죠.
치밀한 조사와 고증을 거친 대작이며, 멜 깁슨이 25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고, 총 1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다시 한번 '문제는 크기(Size Does Matter)'라는 에머리히의 지론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각본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로버트 로닷이,그리고 에머리히 감독의 명콤비 딘 데블린이 이번에도 공동제작을 맡았고 영화음악의 대가 존 윌리암스가 장중한 영화음악을 담당하였습니다.(사진:영화에서 주인공 프랜시스 마리온)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멜 깁슨이 연기하는 주인공 벤자민 마틴은 실존했던 전쟁 영웅 프란시스 마리온을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실제 마리온은 사랑하는 조카 가브리엘(영화에서는 아들)을 전쟁 중에 잃은 후 무시무시한 전쟁광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벤자민의 아들로 나오는 가브리엘 역은 떠오르는 청춘스타이면서 미래가 촉망되던 연기파 배우 히스 레저가 맡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2008년 영화 <다크나이트>를 끝내고 약물복용으로 사망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벤자민에게는 전쟁 영웅 이전의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엿보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결국 그를 전쟁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습니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어쩌면 개인을 움직이는 건 그럴 듯한 대의명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사진: 늪속의 아버지와 아들)
오히려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 한 개인이 꼭 지키고 싶은 것, 이를 테면 가족이 개인을 전쟁 속에 몰아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자신도 상당히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기꺼이 안고 강인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벤자민이라는 인간을 통해 미국 독립 전쟁사의 단면을 엿보게 합니다.
대서양 건너 영국 영화평론가와 역사학자들은 이 영화가 역사를 심히 왜곡했다고 들고 일어났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모두 다 간악하며, 독립전쟁 자체도 매우 단순하고 편향적으로 묘사됐다며 맹비난을 해댔습니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영국인들은 모두 악마와 같은 존재들인 반면 식민지 개척자들은 매우 순결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독립전쟁 자체도 편향적이고 단순히 유혈 스펙터클의 배경으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습니다.
실제 영국군 장교였던 태빙턴(실제인은 태를턴)은 영화처럼 천인공노할만한 놈은 아니고 죽지도 않고 전쟁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원의원을 지내다 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거꾸로 실제 인물 프랜시스 마리온(주인공 벤자민)은 아주 고약하고 잔인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독립전쟁의 영웅 벤자민 마틴으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사진:태빙턴을 아작내는 마리온)
공교롭게도 멜 깁슨이 제작,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영국 평론가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래저래 깁슨은 영국인들(특히 잉글랜드인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미국 독립전쟁(1775년~1783년) ]
* 배경과 결말
처음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1607년, 제임스 1세에게 허가를 받은 100여 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도착한 지역에 '제임스 타운'을 건설했습니다. 1620년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이 제임스 1세의 청교도 박해를 피해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의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모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18세기가 되자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어 7년 동안 싸웠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나라를 운영할 돈이 부족해진 영국은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설탕 조례와 인지 조례를 만들어 모든 설탕과 각종 문서에까지 세금을 납부하게 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분노하여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두 가지 세금을 철회하는 대신에 종이, 유리, 차 등에 무거운 관세(수출·수입하는 물품에 부과하는 세금)를 물게 했습니다.화가 난 식민지 사람들은 1773년 12월,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에 실린 홍차 상자 342개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었습니다.(사진:독립운동을 벌인 13개주)
영국 정부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식민지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사람들이 차 값을 모두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봉쇄시키는 '보스턴 항구 폐쇄법' 등 여러 가지로 식민지에 불리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식민지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13개 주 대표로 구성된 대륙 회의에서 대륙 헌장을 제정하고, 벤저민 프랭클린을 영국에 보내어 식민지인들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결과는 '식민지인들도 영국인이므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영국 의회의 결정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로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라고 주장하며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차에 대한 관세만 남기고 다른 세금을 모두 없앴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의 식민지인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니다.
독립 선언서에는 생명, 자유, 행복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천부 인권 사상과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담겨 있어, 이후 제정되는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독립 선언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775년 4월, 보스턴 서쪽 렉싱턴과 콩코드 지역에서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 식민지인들은 무기와 병사, 군자금이 부족하여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사진:미국대륙회의)
이 험난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1781년, 요크타운에서 대승리를 거뒀습니다. 이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도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원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은 식민지인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영국은 마침내 1783년 파리 회의에서 미국 식민지 내 13개 주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출하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 '미합중국'을 세우게 됩니다.
아래는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인 ‘렉싱턴,콩코드 전투’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남부의 격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 웃기는 최초의 충돌, 렉싱턴, 콩코드 전투 >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인들과 영국 본토정부의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본토에서 파병된 정규군 병력이 속속 증강되기 시작했고, 식민지 민병대도 이에 맞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메리카 총독 토머스 게이지는 불온한 메사추세츠 민병대의 싹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민병대가 콩코드 지역에 비축해놓은 무기들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775년 4월 18일 밤 10시, 스미스 대령이 4백 명의 척탄병과 4백명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정예 특공대를 선발하여 건방진 식민지 촌놈들에게 주제를 알게 해주기 위해 콩코드로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 상사 한 명이 출동 전에 생각없이 떠벌리는 바람에 개나 소나 영국군의 계획을 다 알게 된 것입니다. 폴 리비어라는(사진:말을 달려 첩보를 알리는 폴 리비어)
사람이 밤새 정신없이 말을 달려 콩코드로 가는 길에 있는 렉싱턴에 가서 그 곳에 은신 중이던 식민지인들의 지도자 존 핸콕과 새뮤얼 애덤스를 피신시킨 다음 "레드코트(영국군)가 몰려온다!"라고 법석을 떨고 다니며 렉싱턴의 민병들을 잠에서 깨웠습니다.
존 파커 대위가 지휘하는 130명의 민병들이 서둘러 렉싱턴 그린이라는 곳에 집결했습니다.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막상 모이고 나니 이제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파커 대위조차도 뭘 해야 할진 모르지만 모여서 결정하려고 민병대를 소집한 것이었습니다. 민병들이 한 시간이 넘게 한밤의 추위에 벌벌 떨던 끝에, 파커 대위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이건 너무 춥다. 일단 해산하자."라고...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안전한 이불 속으로 퇴각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몸도 녹일 겸 술집에 한잔하러 몰려갔습니다. 단, 파커 대위는 중요한 명령을 하나 내렸는데, 북소리가 들리는 즉시 달려와 재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시 30분에 다급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북소리를 못 들은 사람, 따스한 이불 속에서 곪아 떨어진 사람, 술에 취한 사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쳤다고 정규군하고 한판 붙겠다니 웃긴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 등등해서 다 빠지고 나니 70명으로 반 토막난 민병대가 허겁지겁 렉싱턴에 재집결했습니다.
잠시 후 붉은 제복을 입은 8백 명의 정예부대가 동트는 햇살에 총검을 번득이며 기세등등하게 나타났습니다. 영국군이 전투 대형으로 변경한 뒤 천천히 코앞까지 다가오자 겁에 질린 한 민병대원이 "대장님 우리 해산해야 말까요?"하고 다급하게 물었지만 파커 대위는 비장하게 선언했습니다.
"누구든 첫 번째로 달아나는 자는, 영국군이 아닌 우리의 총에 죽으리라."
그 직후 두 명의 부관을 대동하고 30미터 앞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영국군 존 핏케언 소령이 "야! 이 반란군놈의 새끼들아,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너희들 대갈통을 다 날려버리겠어!"라고 외치자 파커 대위의 마음이 싹 바뀌어 버렸습니다. 파커가 해산 명령을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기다리고 있었던 민병들은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미국 독립혁명전쟁의 서막이 "될 뻔했던"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끝나려는 순간, 분노조절장애가 의심스러운 핏케언의 부관이 순순히 도망가고 있는 민병들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 죽여 버릴 테다!" 그 순간 독립혁명전쟁의 첫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8명의 민병이 죽고 10명이 다쳤으며, 영국군은 단 1명이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것도 전투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영국군은 허공에 축포를 쏜 뒤 의기양양하게 콩코드로 행진을 재개했습니다.(사진:민병대)
렉싱턴의 민병들은 본인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가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첫번째는 영국군과 대치하는 동안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콩코드로 허겁자겁 달려가던 나머지 민병대가 집결할 금쪽같은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영국군이 이젠 최소한의 긴장의 끈조차 놓아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콩코드에 도착한 영국군들은 수색 작업을 시작했는데, 병사 몇 놈이 대장간과 법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결하긴 했지만 기가 죽어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던 400명의 콩코드 민병대들은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보자 눈이 뒤집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타격을 받아 12명의 사상자가 난 영국군은 화가 나서 퇴각하는 민병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울창한 숲 속 산길에는 훨씬 많은 민병대가 매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민병대가 제대로 된 통제없이 각자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기에 영국군은 전멸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 바위, 울타리 뒤 등 사방에 숨어서 쏘아대는 민병대의 총격에 영국군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망신스럽게 달아나는 쪽은 민병대가 아니라 영국군이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겨우겨우 빠져나온 영국군 선발대가 퍼시 준장이 이끄는 1천 명의 지원군과 합류했지만 영국군 입장에서 상황은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사방에서 꾸역꾸역 몰려온 민병대의 숫자가 이제 4천에 육박했던 것입니다.
찰스타운까지 후퇴하는 고난의 행군 동안 영국군은 끊임없는 추격과 기습을 받아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백병전까지 벌어졌고 총검이 없어 급한 대로 집에서 대신 챙겨온 벌목용 손도끼를 휘두르는 민병대의 무지막지한 기세가 영국군의 혼쭐을 빼놓았습니다.
해지기 직전에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영국군이 찰스타운에 닿으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첫 전투는 끝났습니다. 영국군 사상자 273명, 민병대 사상자 95명 뿐이었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모인 70명의 동네 아저씨들이 벌인 렉싱턴의 1분간의 전투가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남부의 격전, 늪속의 여우 >
북쪽에서 허드슨강을 장악하는 대전략이 사라토가 패전으로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군은 전장을 미국 남부로 옮겼습니다. 상대적으로 대륙의회와 대륙군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고 왕당파들이 많은 남부 공략에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왕당파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영국군을 지지할 것인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왕당파들이 본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전쟁 초기 독립파들에게 쫓겨 런던으로
피신한 왕당파들로, 이들은 남부로 돌아가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을 생각에서 남부 왕당파의 지지를 과장해 런던 정부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했기 때문입니다.(사진:영화에서)
그러나 이들의 말을 믿은 영국은 군을 미국 남부로 돌려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고 1778년 12월에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함락하고, 이어서 조지아주 오거스타를 향해 진격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습니다.
영국군의 오거스타 점령 이후 전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영국군은 전쟁을 수월하게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사령관 클린턴은 그 여세를 몰아 찰스턴까지 함락합니다.(사진:남부에서 전투를 지휘한 그린 장군)
찰스턴은 독립전쟁 중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항복한 병력도 매우 많았으며, 무엇보다 미국 땅에 영국이 마음 놓고 병력을 들여놓을 수 있는 대규모 항구가 영국군에 장악된 것입니다.
남부에서 영국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클린턴은 뉴욕으로 떠나고 콘월리스가 미국 남부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한편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잔여병력은 찰스턴 함락 후 전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콘월리스 휘하의 바나스터 태를턴(영화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영국군 윌리엄 태빙턴 대령)은 이를 추격해 미군을 크게 무찌릅니다.
이때 태를턴이 미군과 민병 포로들을 학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미군은 그의 이름인 Banastre에 빚대어 그에게 ‘피투성이 반(Bloody Ban)’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태를턴은 혁명전쟁 중 미군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후 ‘이게 태를턴의 자비(Tarleton's Quarters)다’는 대륙군의 전투 구호가 되었습니다. 이후 몇몇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꺾었을 때 그들은 적이 항복을 청해도 ‘이게 태를턴의 자비다! 받아라!’라고 외치며 항복하려는 영국군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합니다.
영국군에 계속 밀리던 남부의 대륙군은 영국군과 정면대결하기 보다는 영국군을 따라다니면서 기습하거나 영국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잠깐 전투를 벌인 다음 빨리 후퇴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게릴라전이었습니다.
병력의 소모를 막는 동시에 영국군을 지치게 하려는 히트 앤 런 전술이었습니다. 남부 대륙군을 지휘하는 그린은 북쪽에서의 증원군과 주변에서의 지원병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며 1780년 말에서 1781년 초에 이르는 수개월 동안 계속해 영국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린의 군은 약 15차례 영국군과 싸우면서 한 번도 속 시원히 이긴 전투가 없었지만 영국군도 속 시원히 이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린의 지연 전술과 더불어 프랜시스 마리온(의 게릴라전은 영국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늪속의 여우’라 불린 마리온(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 마틴)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이민 온 프랑스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일부 흑인까지 포함된 수십 명의 민병으로 영국군에 대한 정찰을 하고 소규모 부대와 보급행렬에 기습을 가하는 등 영국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사진:영화에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영국군이 그를 잡으려 하면 그는 늪지대 사이에 난 지름길을 통해 영국군을 따돌렸습니다. 그의 별명이 된 ‘늪속의 여우(Swamp Fox)'는 그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아 그를 잡으려다가 번번히 놓친 태를턴이 ‘저 놈의 늪 여우는 악마도 못 잡을 거다’라고 푸념한 데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린의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그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충원 받으면서 병력이 4천명까지 늘었지만 콘월리스는 이곳저곳을 지키려고 병력을 흐뜨려 논 까닭에 그의 본대는 약 2천으로 줄어있었습니다. 아울러 그의 본대도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지연전술로 일관하는 그린의 부대를 쫓아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콘월리스에게 남은 선택은 결국 버지니아로 북상하여 필립스 장군과 미국을 배신한 아놀드의 군과 합류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콘월리스가 북상하면서 대륙군은 다시 남부를 장악하게 되고 영국의 남부군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는 곧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짓는 요크타운 전투의 전주곡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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