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계2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옆에서 자던 병휘는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군복을 다리고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30분쯤 전”
“그렇게 일찍”
“응 습관이 돼서”
영우도 일어나 씻었다. 그리고 적당히 옷매무시를 갖추고 방문을 열자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어딘가 모르게 친숙하고 후덕해 보이는 40대 중반쯤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순간 아주머니도 놀라고 영우도 놀랐다. 주인아주머니임을 직감한
영우가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병휘오빠 동생입니다. 오빠면회 왔다가 늦어서... 오늘 갈 거예요”
황급이 지어낸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했다. 아주머니는 인사도 받지 않고
영우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귀엽게 생겼네, 몇 살이야”
“네 올해 스무 살입니다”
“아이고 애기네”
그때 병휘오빠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병휘총각 어디서 이렇게 예쁜 색시를 데려왔어. 아주 꽃이네. 꽃이야 세상에나
집안이 다 환하네 “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아침인사에는 아랑곳없이 영우 칭찬에 입이마를 지경이다.
영우가 분명히 여동생이라고 밝혔는데, 병휘오빠 색시로 단정 지어 버린 것이다.
영우는 얼굴이 붉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우선 당장 숨고 싶은 심정뿐이다.
“아주머니 색시 아니고요, 아는 동생인데 잘 데가 없어서 어젯밤,,,”
“그럼! 처음엔 다들 그렇게 아는 동생으로 시작하는 거지 뭐,,, ”
아주머니는 병휘오빠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만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주머니의 그 자신만만한 직감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군부대 지역 특성상 영외에 거주하는 직업군인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고립된 시골마을에서 마땅히 취미 붙일 거리도 없고 문화시설은 더더욱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외로움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외거주 군인들이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안 됐어도 결혼을 했거나 동거형식의 살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빈방이 남아도는 이곳에 가정집들 대부분은 군인들을 상대로 하숙을 하거나 군인부부들을 상대로 방을 임대해 주고 월세를 받아서 쓰고 있었다. 이 집 아주머니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곳 사정이 그러하니 아주머니는 영우를 보자마자 병휘색시로 짐작을 했던 거다.
주인아주머니가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병휘오빠는 부대로 출근을 했다. 조금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평소에 병휘오빠는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을 했었다. 그런데 어젯밤 두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아주머니는 조금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했던 거다. 아마 가족이나 친구가 왔을 거라 짐작을 하고 아침 준비를
했던 건데, 예상밖에 어린 색시가 나타나서 놀랐던 모양이다. 차라리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안 했더라면 대충 뭉개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도 있었을 텐데, 거짓말이 오히려 아주머니의 직감을 자극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애인사이의 단서를 제공한 꼴이 돼버린 거다.
병휘의 출근을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 어젯밤 얼핏 보았던 뜰안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였다. 어제는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담장 쪽에 핀 꽃을 먼저 보았다. 배롱나무였다. 꽃말이 꿈과 행복인 배롱나무 가지에 붉은색의 화사한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차분하게 영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눈에 익은 게 보였다. 부천 집에서 쓰던 거와 똑같이 생긴 지하수
펌프가 자리 잡고 있다. 아마 어제 부엌에서 씻은 물은 여기 펌프로 퍼 올린 물
일 것이다. 집 벽은 시멘트 벽돌집인데, 낮은 담장은 흙벽돌과 자연돌로 둘러쳐
있고 낡은 곳을 최근에 보수를 했는지 흙냄새가 났다.
현관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세 개나 매달려 있는데, 두 곳은 이미 새끼들을 다 키워 냈는지 빈집으로 남아 있고 그 중 한 곳에만 제법 다 자란 듯한 새끼 제비들이 몸을 반쯤 밖으로 내민 채 영우를 내려다 보고 있다. 집 뒤쪽으로 자작자작
발걸음을 옮긴 영우는 안방 부엌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부엌문 옆에는 장작과 몇 장의 연탄이 쌓여있고 집벽을 돌아서자 뒤뜰에 장독대가 보였다. 어젯밤에 부엌문을 열었을 때 보았던 모습이다. 식구 수에 비해서 커다란 항아리가 많이 있는 것이 영우의 눈에 의아하게 보였다.
장독대 뒤쪽으로 닭장이 있었고 몇 마리 닭들이 연신 흙을 파헤치며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볏짚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둥지에는 닭들이 알을 낳으려는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외부인의 등장에 잔뜩 겁을 먹은 닭들이 경계를 하려는
듯 작은 소리로 ‘구구’ 거리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 영우네도 닭을 길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심적으로 정겨움을 주기에 충분 했다.
다시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려보니 대문 옆 한쪽에 지어진 창고기둥에 열쇠꾸러미가 풍경과 함께 매달려 있었다. 영우가 다가가 살짝 건드려 보았다. ‘찰랑’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무슨 도둑질하다 걸린 기분이랄까.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저기 아주머니 제가 모르고...”
“색시 거기 열쇠꾸러미 들고 이리 와”
‘왜 그러시지 내가 뭘 잘못했나?’ 잔뜩 겁을 먹은 영우가 열쇠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스친 풍경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열쇠꾸러미를 받아 든 아주머니가 열쇠의 용도를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평소에는 어디 문이건 잠글 필요가 없는데 내가 아들 보러 서울을 갈 때가 있어, 그때는 색시가 열쇠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집을 비울 때는 문을 잠가야 돼.
이거는 현관열쇠인데 닳아서 잘 안 맞을 때가 있는데, 몇 번 돌리다 보면 되고
이건 곡식 창고열쇠야, 밤에는 산짐승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곡식을 먹고 가기도 하니까 꼭 잠가야 되고 이건 안방 열쇠고 이건 색시네 방 열쇠야”
“네”
얼떨결에 대답을 한 영우가 열쇠를 건네받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알고 있어야 되지’
‘나는 오늘 병휘오빠 퇴근하면 저녁 버스타고 집에 갈 건데,,,’
‘정말 나를 병휘오빠 색시로 인정해 버린 건가’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에이 모르겠다.’
열쇠더미를 다시 창고기둥에 걸어놓고 대문 밖을 나가보았다. 어젯밤 언덕을 오르는 느낌이었는데, 우리 집이 아니! 병휘오빠가 사는 집이 살짝 높은 위치에 있는 게 맞았다. 넓지 않은 골목 양옆으로 시골풍경의 집들이 마주 보고 있었고 아래로 몇 걸음을 걸어 내려가니 큰길이 나왔다. 버스 정거장 앞까지 걸어 나온 영우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있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낯선 미지의 장소에 홀로 남겨진 미아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버스 정거장 앞에서 마주친 스물한두 살쯤 먹어 보이는 남자가 영우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아마 마을에서 못 보던 외부인이 보이니까 궁금했나 보다. 얼핏 보기에 영우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기 때문일까,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영우가 시선을 피하며 다시 집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오늘 공휴일도 아닌데 면회를 왔나,,,?”
남자는 영우를 보고 군부대 찾아온 면회객으로 착각했나 보다. 보통은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면회객들이 오는데, 휴일도 아닌 평일에 면회를 왔으니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남자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해진 영우가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표정을 감추려는 듯 본능적으로 한 손을 빰에
갖다 댔다. 그런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남자가 한마디 더 던졌다.
“부대에 면회를 왔으면 저쪽에 면회소가 따로 있어요. 그리로 가야 돼요. 여기는
군부대가 산꼭대기에 있어서 부대까지 가지 않고 마을에 있는 면회소에서 신청하면 군인이 차를 타고 내려오지요,,,”
남자는 면회소 방향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자세히 알려 주었다
영우는 면회 장소에는 관심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흘려들었다. 그러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지나치면 더욱 이상하게 볼까 봐,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여기서 버스를 타면 어디 어디로 갈 수 있나요?”
영우의 물음에 남자는 반가운 듯 이곳의 버스노선부터 배차시간 그리고 도착시간까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다. 예상대로 버스 배차는 자주 있지 않았지만 노선은 그런대로 여러 곳이 있어서 생활에 크게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지 않은 정보를 얻게 되어 밝아진 영우가 평온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네, 고맙습니다”
남자가 알려준 설명을 되뇌며 걸었다. 이 길로 시골버스는 하루 두 번씩 다니는데 노선이 구석구석을 돌게 돼 있었다. 강릉 가는 버스는 생각보다 자주 다녔는데, 아마도 생활권이 강릉이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이곳 사람들은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말고는 외부로 통하는 교통수단 중 강릉행 버스가 도시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