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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환목사님과 크리스탈장로님의 변치않는 믿음이 한가지 있다.
오직 부활은 한번 !!!!
예수님 재림때 !!!!
이러한 잘못된 믿음이 가져다 주는 폐해가 두증인의 부활을 소생으로 만들었고.
계14장의 사람들중에 처음익은열매를 영혼으로 보게되는 결정적 실수였다.
첫째부활
Ⅰ 서론
요한계시록 20장 5-6절의 첫째부활1)을 사람가운데 첫 번째 부활자라고 했을 때 매우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든 성도의 부활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당연히 여겨온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첫째부활은 첫 번째 부활로 보아야지 전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첫째 부활이 누구인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좌에 앉아있는 두 부류가 첫째 부활자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나는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누가 보아도 순교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들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가장 큰 논쟁거리이다.
이 말씀을 요약해보면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짐승 표(666)를 받지 않은 자들’이다.
먼저 이 본문은 시기적으로는 7년 환난이 시작된 이후로 보아야 한다. 짐승 즉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당시까지 생존한 성도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서’라는 단어에 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제산’ἔζησαν이다. 부활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때까지 살아있던 모든 성도들이 부활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 기간에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들에 대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였다(계11:3).
7년 환난 중 전 3 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폭로하고 성도들을 무장시켜 예비처 보호를 받도록 이끌어낼 두 증인인 것이다.
이들은 그 후 적그리스도에 의해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다(계11:7).
그 유해가 온 세계에 걸쳐 널려져 있다가 삼일 후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계11:11,12).
이것이 바로 첫째부활자인 것이다.
‘두 증인’, ‘144000’, ‘첫째부활자’는 동일 존재라는 사실은 이 후 연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로서 첫째부활자들에 대한 결론은 분명해진다.
7년 환난 이전의 순교자들과 이 후 전 3년 반 1260일 동안 종말의 예언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런데 무천년주의자들은 중생으로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신자들로 해석하고,
5,6절에 기록된 첫째 부활에 대해 모든 성도의 부활로 단정해 버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크나큰 오류를 범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천년왕국 후 악인이 부활하여 흰 보좌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첫째부활자를 제외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은 동시에 있을 사건이지 별개로 나타날 것이 아니다.
추후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 둘 사이에 시간 차이를 두고 부활한다는 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한 시점에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영혼들이 살아났다면 그것은 부활이다.
더욱이 일반 성도들의 영혼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라면 순교자들이 틀림이 없다.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왜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려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단어가 나왔을 때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지 참으로 우려스럽다.
이제 본론에서 첫째부활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성경적 논지를 기술하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성경의 증언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만 첫째부활자가 기록되었지만 이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동일한 계시들을 연결하여야 한다.
스가랴 14장 5절 재림시 주와 함께 임할 ‘모든 거룩한 자들’이 누구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3절 ‘그에게 속한 자’, 그리고 유다서 1장 14절 ‘수만의 거룩한 자’로,
이들이 바로 종말의 사명자들인 ‘십사만 사천’(계7:4), 곧 ‘두 증인’이요(계11:3),
예수님 재림 때 함께 임할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자들’로서(계17:14),
‘하늘에 있는 군대’요(계19:14),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자’라는데 까지(계20:6) 성경 전체에 나타난 첫째 부활의 맥을 연결하여 한 문장으로 완성할 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1) 고린도전서 15장 23-24절 - ‘속한 자’
① 사람 가운데 첫 번째 부활자
성경에 부활은 다같은 부활이지만 분명히 순서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하였다(고전15:23-24).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모든 자는 그와 같이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이 모두 한 시점에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차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들이 두 번째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 다음으로 두 번째 이지만 사람가운데는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예수 재림시 함께 이 세상에 오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속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첫째부활자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가장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 23절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에서 ‘속한 자’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에 대한 것이다.
② 고린도전서 15장 23절 - ‘속한 자’
‘속한 자’를 개역성경에서는 ‘붙은 자’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원문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한 자’라는 뜻으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본문만을 놓고 따진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째부활자도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구절뿐만 아니라 스가랴 14장 5절부터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유다서 1장 14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 12절, 17장 14절, 19장 14절이 모두 한 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맥들을 묶어 하나의 해석으로 내린 것이 첫째 부활자요. 그러한 해석이 문장적해석2)이요.
이 해석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한 자를 모든 성도로 해석한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가 함께 임한다는 말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답변이 곤란하다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 성도의 휴거를 속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사변을 내세워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 재림할 때 함께 임하는 성도들을 환난 전 휴거한 성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대주의 견해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 된다.
③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는 전통적으로 예수 재림하실 때 그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이 모습을 상상하여 무덤을 열고 재림하시는 예수를 맞이하는 성화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속한 자에 대한 해석을 연계하여 답할 수 있다. 첫째부활자도 먼저 죽은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역시 이 한 구절을 보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한 자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동일한 계시가 나타난 성경 전체 구절들을 종합해서 볼 때,
죽은 자들 중 먼저 일어난 자는 첫째부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말씀은 모든 죽은 자들을 포함한 것이 아니고 그 중에서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부활한 첫째부활자는 7년 환난 이전의 순교자들이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인 것이다.
이들은 제단아래서 하나님께 피 값의 신원을 호소했던 환난 전 순교 성도들이다(계6:9-10).
그 다음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첫째부활자 가운데 두 번째 부류이다.
이들은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에 활동 후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가 이들의 부활시점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 수가 차기까지’라고 하신 충원되어야 할 순교자들이다(계6:11).
이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인 것이다(‘두 선지자’, 계11:3,7-11). 두 증인인 144000은 전 3년 반 예언의 사역 후 짐승에 의해 순교한다.
그리고 삼일 반 후 부활승천 하여 시온산에 가 있게 된다(계14:1).
이곳에 있다가 주 재림 때에 부활하는 환난 전 전 순교자들과 함께 하늘군대로 아마겟돈에 내려오게 된다(계19:14, 두 증인과 144000의 관계는 다음 연구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이 두 부류는 같은 첫째부활자들이지만 이들의 순교의 시기가 다른 것처럼 이들의 부활의 시점도 다른 것이다.
④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 부활
한 가지 더 명심해야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록 목적의 차이이다. 성경에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관련 성구 모두를 한 해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중요 포인트Point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한 교훈이라고 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있었던 여러 문제 중 부활에 관한 논란에 사도 바울이 명확히 답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1절부터 부활에 관한 기록의 연속으로 20절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가장 첫 번째 부활한 것을 명시하고 있다.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그 다음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는데 23절에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하였다.
부활의 본질이 성도마다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똑같은 부활인데 부활에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23절에 ‘강림’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강림 또는 재림에 대한 주제로 혼돈하면 안 된다.
부활을 설명하던 중 연관되어지는 예수님 재림을 언급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재림이 핵심이 아니다. 포커스Focus는 부활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3)
고린도전서 15장 50-52절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도 부활에 관한 기록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활의 시점이 어느 때를 두고 말하느냐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50절의 ‘하나님 나라’가 어느 곳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가? 다른 견해를 갖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도 천국으로 보는 것이 자명하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혈과 육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반드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시점이 예수님 재림 때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때요. 주제는 여전히 부활에 관한 것이다.
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주제 재림
반면에 데살로니가전서를 해석할 때는 전체 구성이 재림 신앙 즉 살아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갈망하는 성도들을 위해 쓰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 2장 19절, 3장 13절, 4장 15절, 5장 23절 등 전체가 강림 즉 예수의 재림에 관한 주제로 가득 기록되어 있다.
그 재림 주제 중의 주제 핵심이 4장 17절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이다.
살아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영광을 누구보다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위해 쓰인 것이다.
18절에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
재림의 소망으로 당시 교회를 파하려는 세력들의 핍박을 이기라는 것이다. 16절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을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예수님 재림시 죽었던 성도들의 부활로 해석한다.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데에는 데살로니가전서 기록 목적이 부활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재림을 갈망하는 성도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중심이 부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재림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부활은 상대적으로 적게 축소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예수님 재림시 성도들의 부활에 관점을 두고 해석 하게 되면 포인트Point가 벗어나게 된다.
성경 한 구절을 바르게 분별하려면, 그 구절을 항상 그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문맥(Contex)이란 ‘본문’(Tex)과 함께’(CON) 간다는 뜻입니다. 문맥이 언제나 해석을 좌우합니다.
저자의 기록 목적을 파악하면 어느 한 구절의 문맥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자가 기술하는 내용은 자신의 기록 목적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4)
그러므로 부활을 해석할 때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재림을 해석할 때는 데살로니가서 4장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 저자인 사도 바울이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이 다르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는 첫째부활자를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천년왕국 후에 부활한다고 기록하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는 예수 재림시 부활한다고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성경을 그와 같이 모순되게 기록했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상이한 것이 아니라 서신 중심 주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중심 주제 외의 기록들은 굉장히 낮은 수준으로 언급되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중심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19장 14절 - ‘하늘 군대’
요한계시록 19장 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는 예수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때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다.
14절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고 하였다.
‘하늘 군대’와 함께 오신다고 하였다(‘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KJV)). 이 ‘하늘 군대’를 누구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흔히들 ‘천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하늘 군대’란 표현과 유사한 구절들이 많은데 그것을 ‘천사’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창32:1;왕상22:19;왕하6:17).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왕하19:35;삼하24:16;수5:15;단10:13;마26:53).
그러나 이상에 열거된 천사란 표현과 심판은 예수 재림 때 심판자와 심판의 의미는 동일하지만,
격Class과 대상Target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마겟돈에서의 적그리스도의 심판은 순교자들의 피 값에 대한 보응이다(계6:11).
그렇기 때문에 순교자들이 심판을 담당하는 자들이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3) 스가랴 14장 5절 - ‘모든 거룩한 자’
이러한 체계 아래서 스가랴 14장 5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의 ‘모든 거룩한 자’도 동일한 계시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스가랴 14장 5절을 구약에 기록된 예수 재림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 때 함께 임할 ‘모든 거룩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문에 천사로 기록했으면 그대로 천사로 번역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번역본의 한글 및 영어 성경 등을 보면 상대적으로 ‘천사’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도’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KJV는 ‘All The Saints With’이 그렇고 킹제임스흠정역성경도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4) 유다서 1장 14절 - ‘수만의 거룩한 자’
유다서 1장 14절에도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수만의 거룩한 자’는 누구인가? 이 역시도 스가랴 14장 5절과 같이 천사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이 많다. 그러나 현대인성경은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KJV는 ‘Ten Thousands of His Saints’로 JB는 ‘His Saints in Their Tens of Thousands’로 번역하고 있고, 킹제임스흠정역성경도 ‘수만의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5) 요한계시록 17장 14절 -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도 동일한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고 하였다.
이 말씀에 ‘어린양이 그들(짐승과 그를 따르는 세상 임금과 그의 군대들)을 이기실 것이요’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대역사의 순간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이들에 대해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14장 4 ,5절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와 한 계시이다.
이 말씀은 144000에 대한 자격을 기록한 것으로 바로 첫째부활자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 중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는 주의 깊게 보라.
이것은 사람 가운데 첫 번째 부활 자를 뜻한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첫째부활자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6) 요한계시록 20장 6절 -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자들
이들은 성도들 중 가장 먼저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 있다가(계14:1), 예수 재림시 하늘 군대로 적그리스도와 이 세상을 심판할 자로(계19:14), 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자인 것이다(계20:6).
(7) 요한계시록 11장 3절 - ‘두 증인’
첫째부활자를 연구하면서 빼놓지 말아야할 존재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기록된 두 증인이다.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예언사역을 감당한다(계11:3). 그 후 짐승(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한다(계11:7).
그의 유해는 전 세계에 걸쳐 널려지는 모욕을 당한다(계 11:9). 땅에 사는 자들로 상징된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이를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계11:10).
그러나 하나님은 대 반전을 준비하고 계셨다. 삼일 반 후 두 증인은 부활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계11:11,12).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 승천한 이후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기록된 시온산 천상에 서있는 144000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재림 때 하늘의 군대로 함께 임하게 되는 것이다.
(8)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을 심도 있게 관찰해 보면 강림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첫째 부활에 대해 암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 중 14절에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셨다. 15절에는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16절에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14), ‘자는 자’(15), ‘죽은자’(16)는 모두 예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고 했을까?
이 구절에 들에 대한 해석의 관건은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이다. 여러 번역본과 주석들을 보면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입니다’(새번역),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예수님처럼 죽은 자들도 부활 한다’,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현대인성경),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등 다양하다. 이러한 해석들의 잘잘못을 평가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다.
주해가들 마다 자신의 신학사상에 따라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도 일치하는 해석이 없다는 사실이다.
14절이 15절로 이어지는 말씀인 것이 분명한 바, 14절의 시기는 예수 재림 때에 있을 사건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에서 하나님이 데리고 오는 자를 모든 성도로 볼 것인가? 첫째부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스가랴 14장 5절,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유다서 1장 14절, 요한계시록 11장 12절, 17장 14절, 19장 14절과 한 맥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에 4장은 첫째부활자에 대한 계시가 기록된 성경의 각권들을 연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주제가 강림이기에 거기에 중점을 두고 첫째부활에는 터치Touch하는 정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엷은 물감으로 색칠된 그림들을 모아 뚜렷한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문장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왜 첫째부활에 관해서 성경은 아주 작은 분량밖에 남기고 있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대상이 지극히 한정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록목적이 구원이고 대상은 전 인류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아야 할 대다수인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반면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첫째부활과 함께 천년왕국이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이 한 구절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도출해 냈다. 천년왕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경 전체에 해석이 달라질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치열할 정도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느 신학자는 성경 한 곳에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적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요계시는 반드시 반복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성경에서 ‘목사’라는 칭호는 에베소서 4장 11절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만 있는 직분을 부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용어는 한 곳에 기록되었지만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사역을 뜻하는 구절들을 찾아 정립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천년왕국이 교회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대한데 부인하려드는가?
그와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 첫째부활이다. 첫째부활은 종말계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와 같다.
그런데도 이것을 왜 묻어 두려하는지 목회자들은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부활을 통해 한 맥들을 찾아 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9) 히브리서 11 3절5 - ‘더 좋은 부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일컫는다. 그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35절에 그들 중에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한 자들A Better Resurrection(KJB)이 있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더 좋은 부활’Better Resurrection은 무엇인가? 똑같은 부활인데 그 부활을 좀 더 값진 것으로 표현할 말인가?
이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문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악형이 무엇인가? 형벌을 가리킨다.
이는 복음을 전하다가 겪게 되는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순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악형으로 설사 죽는다 해도 구차히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순교자가 받을 더 좋은 부활 바로 첫째부활자가 되어,
예수 재림시 수많은 거룩한 자인 하늘의 군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영광을 소망했기 때문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라는 구절을 이전 구절들과 연결하여 사르밧 과부(‘그 집 주인 되는 여인’)와 수넴 여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주해가들이 있다(왕상17:17-24;왕하4:18-37).
이들은 죽은 아들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두 여인도 그 안에 포함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것보다 ‘더 좋은 부활’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영생체를 입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더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가? 부활을 귀하고 높게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인가?
‘더 좋은’을 뜻하는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κρείττονο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것을 모든 믿는 자의 부활로 볼 것인가? 아니면 특정 부류를 지칭한 것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아닌 첫째부활자들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곳에 열거된 인물들을 보라 그들이 모두 순교자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적자들에게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은 것만을 순교자로 보는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순교의 기준만큼 일생 동안을 살았다면 그것도 순교자로 볼 수 있는가? 한 예로 사도 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밧모 섬에 유배되어 종말의 계시를 받아 기록하고 인생의 마감했다.
이런 그의 삶을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순교로 보는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순교자로 보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35절의 더 좋은 부활은 순교자가 받는 첫째부활과 한 맥이 되는 것이다.
부활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부활이 있고 그 다음 모든 성도 부활이 있다.
첫째부활자들을 찾아가다보니 그들이 순교자들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가 재림할 때 함께 임할 자가 되게 하셨고 악의 무리들을 멸하도록 하셨으며,
그 후 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교자들이 일반 성도들과 확연한 구분되는 영광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고 성경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거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판타지Fantasy 또는 픽션Fiction 소설로 보는 독자가 있다면,
첫째부활을 해석하기 위해 신구약에 나타난 동일 계시를 연결한 것에 대한 성경적 반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성경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10) 마태복음 24장 45절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더 좋은 부활과 함께 첫째부활자의 또 다른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이 마태복음 24장 45절에 기록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A Faithful and Wise Servant’(KJB)이다. 이들에 대해 먼저 염두 해두어야 할 것은 마지막 시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첫째부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첫째부활에 참예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문맥상 첫째부활자와 전혀 관계없는 종들로도 볼 수 있다.
종말의 시대에 사명을 감당했다고 모두 첫째부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부활자의 선택은 하나님 주권에 있다.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함되지 않았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첫째부활자에 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 3년 반 동안 성도들을 깨어 준비시킬 하나님의 종들이다.
적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인 후 3년 반 양 무리들을 안전한 예비처에서 함께할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사역은 전 3년 반 이전에도 종말의 사명을 감당할 주의 종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이들은 문맥상 첫째부활자와 전혀 관계없는 종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 중에서,
첫째 부활자들이 배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4장 46절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은 성도들과 함께 예비처에 있다가,
7년 환난이 끝난 시점에 예수님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올 때’라는 표현을 예수님 재림뿐만 아니라,
전 3년 반 동안 성도들이 경성하여 재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로 볼 수 도 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에게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리고 예수 재림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47절에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첫째부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는 ‘왕 노릇’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계20:6).
그러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과는 달리 ‘악한 종들’은 종말의 시대 거짓선지자의 미혹에 빠져 자신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적그리스도에게 숭배토록 할 가능성이 지대하다(마24:48-49). ‘외식하는 자의 벌’이 그들이 결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마24:50-51;참고구절/사56:9-12;빌3:2;계14:9-10;21:8,15;21:27;22:15)
2.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다.
무천년주의자인 이승구 박사는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것에 대한 원어 ‘에제산’ἔζησαν을 “이 단어는 이미 죽었던 신자들의 영혼들이 지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 상태 동안에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다 후크마 교수님은 덧붙여서 ‘ἔζησαν’을 ‘중생’으로도 해석하여,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서 왕노릇 하는 신자의 숫자에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5)고 해석하고 있다.6)
이와 같이 첫째부활을 중생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살아서’를 영적인 부활로 보기 때문이다. 그
러면서 5절의 ‘살다’는 육체적인 부활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모순이 많은 해석이다. 원문에 살아서는 ‘카이 에제산’καὶ ἔζησαν으로 살다는 뜻의 ‘자오’ζάω의 제1부정과거 직설법 3인칭 복수이다.
그 뜻은 첫째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의 용법을 볼 때에 살아서라는 단수 헬라어 에제산은 무천년주의 대표적 학자인 렌스키R C.H.Lenski 조차 항상 완전한 몸과 영이 혼합된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어로서 몸 없는 상태로서의 영靈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주장하였다.7)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4절의 동사는 5절에서처럼 같은 뜻(육체 부활)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면서,
“4절의 ‘살아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갖는 영적 부활을 뜻한다면,
우리는 한 작은 단원 안에 있는 똑같은 동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8) 이와 같이 4절의 ‘살아서’와 5절의 ‘살다’ 모두 육체적 부활을 명시하고 있는데,
4절은 성도들의 죽은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왕 노릇하는 영적 부활로, 5절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전 인류의 육적 부활로 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못하다. 언어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5절의 사는 것이 육체적 부활을 의미한다면, 4절의 살아서도 육체적인 부활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문맥적 표현과 원어의 사용이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천년주의 해석에 대한 알포드Henry Alford,1810-1871의 주장이다.
만일 두 부활이 언급된 말씀에서…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한다는 뜻이고 둘째가 무덤에서부터 일어나는 문자적 부활이라면 언어의 모든 의미가 끝장이 날 것이며, 성경도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9)
따라서 원어적 의미로 볼 때도 살아서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 자체가 첫째부활은 영적인 것으로 둘째부활은 육체적인 부활로 구분하지 않는 한 임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부활은 죽은 자들의 육체와 영이 결합되는 사건이고Lived Again, 중생은 영이 거듭나는 사건이다Born Again.
서로 엄연히 다르다 부활과 중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10) 왜 본문이 분명하게 언급하지도 않는 것을 영적인 부활로 바꾸는지.
또 두 구절에 똑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지.
이것은 종말론 연구에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지지가 없는 한 아무도 그렇게 할 권리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살아서를 중생으로 해석하는 데에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살아서로 번역된 에제산의 기본형 ‘자오’ 동사가 주로 영적 부활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에제산 역시 영적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단어는 뚜렷한 육적 부활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9장 18절, 로마서 14장 9절, 고린도후서 13장 4절, 요한계시록 2장도 예외 없이 다 육적 부활의 의미로 쓰였다. 그럼에도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술한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쓰인 ‘자오’ 동사는 영적부활이라고 하면서 5절에 기록된 ‘자오’는 육적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관성이 결여된 자신들의 해석에 대해 무천년주의자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상징으로 본다(순교자포함). 전 성도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흰보좌 심판’(계20:11)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계20:5)이 ‘불신자’들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들이 ‘둘째 사망 당할 자들’이라는 것이다(계20:14).
그러나 첫째부활자를 해석하면서 ‘일반 성도’들도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에서 ‘천 년이 차기까지’라는 시점을 통해 천년왕국 후 흰 보좌 심판 때 부활할 것임을 알 수 있다(계20:5).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사도요한은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부활자들이 받을 최상의 상급을 말씀해 주면서 이들 순교 성도들이 아닌, 그 나머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 이곳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첫째부활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곳에 심판 받을 자들의 부활이 언급되겠는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째부활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보좌 심판시 부활하게 되는 성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부활을 통해 연결된 값진 해석이다.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해석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과도 연결된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부터 시작되고 있는 부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부활의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에게 ‘속한 자라고 하였다’(고전15:23).
그리고 ‘그 후에’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고전15:24). 그런데 대다수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무시해버리고
‘그 후는 끝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분명 부활의 순서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후에 부활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나라’ 즉 천년왕국을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한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흰 보좌 심판 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 맥임을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도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에 관한 것이라면,
‘그 후’는 당연히 믿는 성도이어야지 불신자로 강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과 동일한 말씀이요(요5:29).
‘마지막 부활’ 도 이 때임을 증명한 것이다(요11:24). 이것은 첫째 부활에 대한 문장적해석을 통해 얻어진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한다.
3. 천년의 어간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17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1절은 전통적으로 한 사건(휴거)으로 보았다.
전자가 예수님이 재림시까지 생존한 성도의 휴거 사건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때 성도는 변화체가 아니라 육을 입은 상태 그대로 들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말씀 어디에도 변화되어 휴거된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암시가 없다. 약간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를 전자와 동일한 사건으로서 휴거시 변화를 입증하는 말씀으로 본 것이 기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성도의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체를 입는 시점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50절의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입성할 성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의 ‘변화’는 휴거시와는 전혀 다른 시기에 관한 말씀이다.
최종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의 존재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의 변화는 휴거시가 아니라 부활시점인 천년왕국 후 마지막 부활과 동시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해석들은 문장적 해석을 통해 첫째부활을 성경적으로 입증하면서 찾아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 두 구절들을 전혀 다른 시점으로 나누고 무려 천년의 어간이 있는 사건임을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휴거와 천년왕국 후).
휴거된 성도들만이 첫째부활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임을 밝혀냈다.
천년동안 모든 죄의 저주에서 회복된 온전한 몸으로 번성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 전에 이미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은 천년왕국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떻게 영생체인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자손을 낳을 수 있는가?”라는 난제와 비판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해석도 문장적으로 첫째부활을 연구하면서 얻게 된 보배들이다.
4. 사망이 영원히 멸할 시기는 흰 보좌 심판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이같은 부활의 날이 오면, 그 날은 바로 이사야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이 응하리라’가 성취된 날이 될 것이다(사25:8).
이 이사야의 예언은 천년왕국이 끝나서 이 세상의 사망이 전부 사라질 때, 흰보좌 심판에서 사망과 음부까지 둘째 사망 속에 집어넣는 사망 그 자체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사야서에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사25:8), 이 예언에 대한 성취로써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고 말씀해주고 있다.
사망이 흰 보좌 심판에서 영원히 없어진다면 그 전 천년왕국이 끝난 이후에는 사망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자외의 모든 성도의 부활은 흰 보좌 심판 전인 천년왕국이 끝난 이후가 되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죽음이 천년동안 보류 된 곳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끝날 즘에 무저갱에서 풀려나는 사탄에 의해 미혹된 자들은 흰 보좌 앞에서 천년왕국 이전에 죽었던 불신자들과 영벌을 받게 된다. 그들에게도 부활 있지만 그 부활은 심판의 부활인 것이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천년왕국에서 마귀에 미혹되지 않은 성도들과 천년왕국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된다.
이 때 비로소 모든 사망은 흰 보좌 심판에서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 후로는 더 이상 죽음 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망을 영원히 멸할 시기로 볼 때도 첫째부활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의 부활은 흰 보좌 심판에서 있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흰보좌 심판에서 첫째부활자를 제외한 의인과 악인 모두가 부활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정리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다(고후5:10). 이 말씀에서 ‘심판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심판이 아니다. ‘대’를 ‘심판’에 묻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재림의 심판과 본문의 심판대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같은 시기의 심판이 아니다. 전자는 예수님 재림시 심판주로서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세상 임금과 그 군대들을 멸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후자는 ‘심판대 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그 존재가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되는 흰 보좌 심판을 말한다.
흰 보좌 심판 때 부활자는 의인의 부활(생명의 부활), 악인의 부활(심판의 부활) 모두 있게 된다.
악인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심판 받기 위해 모두 서게 된다(계20:12). 이를 위해 무덤에 자는 모든 자들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8절에 ‘무덤 속의 모든 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간에 죽은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외의 많은 성경 구절에서 의인(생명)과 악인(심판)의 부활 시기는 동일함을 밝히고 있다(단12:2;요5:29;6:39;행24:15;롬14:10;고전15:51,52;고후5:10;계20:5)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왕 노릇 하였던 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도 흰 보좌 심판 때이다(롬5:14;계20:14). 사망은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데 이곳에는 이미 마귀도 적그리스도도 거짓선지자도 가 있는 곳이다(계19:20,20:10).
사망 뿐 아니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진다고 기록하고 있다(계20:14). 음부는 지금까지 악인들이 죽어 육과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으로 가있는 지옥의 상태를 말한다. 영혼만을 심판할 수 없다.
흰 보좌에서 악인의 영혼 만을 심판하는 것으로 본다면 개혁주의 신학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되는 것도 흰보좌 심판 때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악인은 ‘보좌 앞에 있는 책들’(계20:12)인 행위책11)에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또 다른 책’(계20:12)인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서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는 것이다(참고구절/시69:28;단12:1-2;빌4:3계3:5;13:8;17:8;20:12).
Ⅲ 결론
지금까지 첫째부활에 대한 결론을 문장적해석을 통해 입증했다. 요한계시록 20장 5, 6절에만 명시된 첫째부활은 그 표현만 다를 뿐 성경 전체에 산재해 계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첫째부활을 설명한 것이 문장적해석의 전형이다.
이뿐 아니라 첫째부활을 해석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 5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과 이 후 천년왕국이 마친 시점의 차이로 천년이라는 어간이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 하나님 나팔, 일곱 번째 나팔 등 나팔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나팔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논증했다. 나팔은 종말의 사건 계시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록된 것도 있고, 재림을 알리는 신호로 기록된 것도 있으며, 흰보좌심판의 시점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는 사실도 밝혀낸 것이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같은 의미를 뜻하는 단어가 있는 구절이라 할지라도,
그 문장의 주제에 대한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서신서는 보내는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재림이 중심 주제이다. 그 외의 것들은 구성상 설명을 위한 부제 혹은 배경정도로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잊고 성경이 기록한 주제가 아닌 주제에 주안점을 두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부활에 관해서 탈피하여야 할 고정관념이 있는데 부활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에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활을 설명할 때는 고린도전서 15장 23절을 보아야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한 단어가 언급되었다고 그것만을 보지 말고 전체 문맥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하며, 어떤 포커스로 기록되어 있고, 무엇이 주제 중의 주제 핵심 포인트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러한 연구들도 문장적 해석을 통한 열매이다.
단언하건대 첫째부활을 바로 해석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은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첫째부활과 한 맥인 ‘144000’, ‘두 증인’, ‘하늘군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종말 계시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부활이 마지막 시대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재차 질문한다면 ‘그들이 없다면 장차 7년 환난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 수 없고,
그 간교한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전 3년 반 동안 대배교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이 후 폭풍 같은 환난이 몰아닥칠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로 인도함 받을 수 없게 된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싶다.
첫째부활자들은 결코 가상의 인물들이 아니다. 이미 성경에 약속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첫째부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왕노릇을 하게 된다.
그들은 부활체로서 천년왕국에서 육적인 몸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다스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세상에서 왕노릇 할 존재로 창조하셨다(창1:27,28).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왕노릇은 상실되고 말았다. 타락함으로 오히려 인간을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롬5:14,6:12).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이 성도 안에 왕노릇하게 되었다(롬5:17,2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 왕노릇하게 된 것은 에덴동산에서 왕노릇하는 것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자는 현재 교회시대에서 성도들에게 영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천년왕국에서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왕노릇은 첫째부활자만이 에덴동산이 회복된 천년왕국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계20:4,6).
둘째 사망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흰보좌 심판때도 심판받지 아니한다. 그들은 일반 성도들과는 달리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이 끝날 시점에 부활했기 때문이다(계11:11,12). 흰보좌 심판대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계20:4).
이렇게 첫째부활 자들은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함으로 에덴동산 타락전의 왕 노릇을 하게되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순교자에 대한 상급이다.12)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선택한 후 시작된다.
종말 때에도 예외일 수 없다. 적그리스도에 맞서 당당히 진리를 선포할 하나님의 종들이 택함 받는다.
이들을 통하여 교회를 깨우고 준비시켜 성도들을 마지막까지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그들이 144000이고 두 증인이요 바로 첫째부활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자를 빼놓고는 종말 계시를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첫째부활을 연구한 중요성이다.
이재현목사.
脚註>
1) 논문의 제한 상 첫째부활에 대한 연구를 많은 분량으로 기재할 수 없다. 첫째부활은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종말계시이다. 민병석. 『종말론시리즈(3) 첫째부활의 비밀』. 서울:도서출판 신생. 2006. 이재현, 『징조는 픽션보다 참혹 했다』,「첫째부활」, 도서출판 좋은땅, 2013.2.8. pp317-368. 이재현. 『종말론 연구시리즈(11) 첫째부활』. PGMC. 2014. 본서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태동」을 참조하라.
2)문장적해석에 관해서는 『징조는 픽션보다 참혹 했다』,「영적해석과 상징적해석의 폐해」, 도서출판 좋은땅, 2013.2.8. pp218-253. 이재현, 『문장해석의 고찰』, 도서출판 신생, 2010. 이재현, 『종말론 연구 시리즈(16) 영적해석과 상징적해석의 대안 문장적해석』, PGMC, 2014.을 참조하라.
3) 민병석 목사는 이에 대하여 본서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태동」에서 부분계시와 전체계시라는 용어로 구분하고 있다.
4) 『프리셉트성경』. 프리셉트성경 편찬위원회. 편찬책임 김경섭. 도서출판 프리셉트. 2009.4.12. p.387.
5) 이승구. 『이승구교수의 개혁주의 종말론 서평』. http://blog.daum.net/7gnak/15712012
6) 개인적으로 이승구 박사를 존경한다. 단 그 분의 종말론에 관한 반론이다.
7) 이광복. 『계시록 원어강해』. 도서출판 흰돌. 2002. pp.407-408 요약.
8) Robert H. Mounce, 홍성철역,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요한계시록 20, 생명의 말씀사, 1987. p.427.
9) Ibid.
10) 이광복. 『계시록 원어강해』. 도서출판 흰돌. 2002. p.411.
11) 행위책은 ‘책들’로 복수로 쓰여 있고 생명책은 ‘책’으로 단수로 쓰여 있음을 보라 이것은 서로 같은 책이 아닌 것을 구분해줌과 함께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얼마나 많고 큰가를 알게 한다.
12)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첫째부활자의 왕노릇에 대하여 “적그리스도의 우상숭배의 주장에 굳게 대항할 값으로 생명을 내놓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보상이다.”고 하였다. 마운스는 백위트(Beckwith) 글을 인용 종말시대 변절하지 않은 “순교자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안에서 최고의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는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응답)이다.” 설명하고 있다(로버트 마운스, 홍성철역,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요한계시록 20, 생명의 말씀사, 1987. p.426.).
[출처] 첫째부활|작성자 Parousia G M C
첫댓글 이 글은 이재현목사님의 견해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천년왕국 이후의 모든 성도들의 부활은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첫째 부활의 의미가 재림때 오직 한번이라는 등식은 틀린해석이란 취지에서 이 글을 올렸다.
하사님께서 저에게 상급에 잇어서 거지 나사로와 바울의 상급이 왜 똑 같은지를
성경으로 증거하라고 해서 증거를 햿는데 왜 가타부타 말이 없어서....
첫째 부활은 재림 때 한 번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데도
이런 글이 나오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시록은 반드시,반드시, 이스라엘을 먼저 말씀하시고 더불어 이방인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분리가 되어 있다할 것입니다.
1260일,1290일,1335일을 참조 하십시요
또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바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144,000은 성경에 분명히 이스라엘 남은 자 12지파로 이마에 인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동시에, 이방인의 휴거자 역시 이마에 인 치심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방인에게 전부 적용하는 것은 대체신학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이방인으로 대체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님 크리스마스를 맞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엡1:10 > 하늘에 잇는 것이나 땅에 잇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통일되게 하신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따로 따로가 아니고 하나로 연합되게 한다고 말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서 그랫지요 내가 백성이 아닌자를 내 백성이러하겟고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한자 라 하겟다고 말슴합니다
딤전2;5-6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셧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그리고
@아담 엡3:6 >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게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갈3:8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안아 복을 받으리라 하엿느니라
고전 12: 13 > 우리가 유대인이나 핼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레를 받아
한 몸이 되엇고 또 다 한 성
@아담 한 몸이 되엇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예수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공평하신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햇는데 부활도 차별이 잇다고 하는 자들은 도데체 어떤 자들 입니까
14만4천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맞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체하면 안됩니다.
14만 4천이 세계각처에서 나오는 혈통적 열두지파입니다.
이 주장은 이미 전에 피력했으니 패스합니다
@하늘사랑.. 왜 저에게는 말이 없으십니까
@아담 거지 나사로가 님에게 준 상징적 의미를 게시글로 설명해주세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사랑.. 허...참...우리 모든 사람은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지 바로처럼 걍퍅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강퍅한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바로이면서 바로는 다른 사람으로 여깁니다
실은 알면서도 애써 피하지요 그것과 마추치기 싫으니까요
왜 두려울까요 하나님의 무서운 불꽂 같은 눈으로 쳐다보니 두렵지요
하나님의 말슴을 어기고 자기의 올다함으로 행한것이 죄로 들어나 무서운 것이죠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깨닫지 못한다고 햇듯이 왜 깨닫지 못할까요 다 자기의 옳다함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기지 못할자가 첫번째로 두려운 자라고 계시록은 말합니다
하사님이 게시록을 연구 햇다니 제일 먼저 지옥에 갈 자가 두려운자
@아담 제일 먼저 지옥에 들어 갈 자로 두려운자라고 나오는데
하사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두려운 자가 천국에 제일 들어 가지 못한다고 제일 먼저 말합니다
어디 한번 지옥에 가는 자들이 어떤자들이 가는지 볼까요
계21:8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시님 큰일 낫습니다 두려운자 가 믿지 않는 자보다 먼저내요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라네요.성경 말씀은 이렇게 확실히 나와 잇는데도 남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님 생각에 두려운자 거짓말하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아담 님 제가 게시글로 올려도 님의 옳다함으로 틀렷다고 할 것 아닙니까
님에게 이것을 가르켜 드릴게요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고 하지요
그말이 뭐냐면요 님의 옳다하는 생각을 포맷시키는 것을 두고 십자가에 서 죽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님의 옛 생각 =엣 사람 = 옛 생명입니다 다라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으로 살아왓고 연구하고 일평생 붙잡고 가르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을 큰 자부심으로 자존심으로 살았는데 그것을 놓으라 이것은
죽엇음 죽엇지 못내려논다 이것이 내 생명인데 어떻게 놓으라고 택도없는 소리 어림없는 소리
....그것 자기 옳다함을 포맷 할 때를 천지개벽이라 합니
@아담
거지 나사로가 갖고 있는 해석이 구원의 열쇠를 갖고 있는것 처럼 중요하다 생각하시네요^^
그렇다면 저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귀중하다 여기는것을 공표해주십시오^^
게시글로 또박또박 설명해 주세요^^
기대됩니다.
거지 나사로의 상징적 해석이....
@아담 야곱이 마지막까지 끝가지 붙들고 놓지 않고 잇엇던 것이 베냐민이엇지요
베냐민을 내 놓는 것은 곧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두려워햇지요 그 두려움을
개시록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하는 자가 제일 먼저 들째 사망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네 죽게 되엇을때 (양식이 덜어져 이제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게 되엇을 때 이것을 성경에서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네 문둥이가 양식을 구하려 (참된 양식인 얘수님 상징) 적인
아람군대를 비틀비틀 처참하게 혈루병 여인처럼 나아 갑니다 그래 마침내 놓고 갓더니 야곱은 에수님을 상징한 생명 양식의 주인임 요셉을 만ㄴ
@아담 주인인 요셉을 만나 얼사안고 감격의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됩니다 .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공중에서 예수를 만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님을 그리고 잇습니다
네 문둥이들도 생명양식을 발견하고 배불리 먹고 그 양식을 다시 들고 나눠주러 갑니다
쓸려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같아 여기서 줄입니다 그리고 님은 거지 나사로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구지 올릴 필요가 잇을까요 ..올려도 시끈둥할것이 뻔 한데요 보니 님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옛날 왕이 어쩌네 미레에 천녀이 어쩌네 맨날 님도 상관 없고 다른 사람도 상관없는 과거나 미래만
생각하고 연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다 때가 잇지요
@아담 본 게시글과 무관한 글은 다른곳에서 주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하늘사랑.. 왜 무관합니까 제가 처음에는 왜 저에게 거지 나사로와 사도 바울의 상급이 똑같은지
그래야 믿을 것 아니냐고 성경으로 말하라고 해서 햇는데도 도통 여기에 맞네 아니네 아무말도 하지 않아서
물엇던 것이고 다음에는 님이 부활도 차별이 잇다고 게시글을 올렷길래
저는 예수께서도 우리보고 사람을 차별을 하지말라고 햇는데 님은 부활만큼은 차별이
잇다고 하여 제가 댓글로 단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우리들 보고 차별하지 말라고 해 놓고 정작 부활때는 차별해서
부활시킨다는 해괴한 글에 대한 에수님의 말슴으로 댓글을 단 것인데
주제와 무관하시다고 합니까 제가 님의 글에 동의를 않아서 그럽니까 어쩐 것입니까
@아담 부활순서가 앞서고 뒷서고가 차별인가요?
천국을 공산당 사회주의로 몰아가는 주사파가 님같아 보이니 해명의 기회를 주는겁니다.
게시글로 올리세요^^
@하늘사랑.. 차별이 무엇입니까 앞서고 뒤서고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앞서고 뒤서지 않고 같이 동시에 서는 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이지 그러지 암ㅎ습니까
누구 말대로 국어 공부 좀 하셔야 겠습니다
@아담 답답하면 님의 주장을 게시글로 올리세요^^
대체 뭔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요....
질서있게 토론합시다^^
@하늘사랑.. 뭔소린지 정말로 모르겟다니 저도 어절 수 없지요 제가 님에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햇나 보군요
헌데 저도 님이 하도 예수님 말슴과 달라
당췌 뭔 소리를 하고 잇는지 너무나 훼게하여 정말로 모르겟군요 ..이만 나갑니다
"동시에, 이방인의 휴거자 역시 이마에 인 치심 받은 자입니다."
이방인의 휴거자 역시 이마에 인 치심 받는 자??
환난시대에서 이방인도 이마에 인 치심을 받는다는 말일가요??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
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
에서 모으리라 (마24;15-31)(막13;14-27)(눅21;20-38)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
에서 모으리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큰 환란후의 휴거의 장면이 아닙니다.
큰 환란 중의 첫째부활자들의 영혼을 모으십니다
큰 환란후의 휴거의 장면이 아닙니다
말을 하시고..
아래 글은?
땅의 사방에서의 모으심은 이마에 인 치심이요(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휴거자)
이방인들의 휴거자??
먼 말이지요??
땅의 사방에서의 모으심은 이마에 인 치심이요(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휴거자)
하늘의 사방의 모으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위하여 첫째부활자들의 모으십니다.(계20;4-6)=생명의 부활
참조로, 그리스로 심판석에서 일부 왕들 중 생명을 연장받은 자들도 천년시대에 입성합니다(슥14;16)). 허나, 이 들은 천년을 살지 못합니다..(계20;5)
무슨뜻인지요?
첫번째 부활중에 천년을 살지 못하는자가 일부 왕들인가요,
이 왕들은 누군가요?
@하늘사랑..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불못으로,
나머지 10뿔 속에 있던 땅위의 왕들로 군림하던 자들 일부 일 것입이다.
이 짐승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생명을 연장 받아 천년시대에 입성합니다 (슥14;16)
허나, 이 짐승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할 것입니다.(계20;5)
이 들은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석에 설 것입니다.(계20;12)
@산소캡슐 열뿔의 열왕이 짐승인가요?
슥14:16의 <남은 자>가 짐승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추론에 추론이 연속입니다.
1. 짐승은 열왕이 아닙니다.
2. 슥14장의 남은 자들은 전쟁을 하려 올라온 이방인의 일부로 남은 사람들입니다.
3. 이 남은자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
---> 짐승이라고 추론하시고는 살아나지 못하다니요?
짐승은 사람이 아니라 영적존재입니다. 죽는 존재가 아니기에 이런 추론은 틀렸습니다^^
@하늘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심판석에서 심판하는 내용을 살펴보십시요
@산소캡슐 백보좌심판은 부활한 사람들을 심판합니다.
사탄은 천년후에 풀려나 미혹하므로 불못에 들어갑니다.
짐승들의 심판은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추론은 좋지만 어느 정도 말씀의 기반으로 하셔야지 이런 추론은 근거가 없습니다.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자들은
왕들이 아니고.. 민족들..
마태복음 24장은 선택한 민족이죠. 이스라엘.. 계시록 12장에서 예비처에 있은 자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은 모든 민족을 모으시고. 양과 염소로 나누죠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님이 재림을 보는 자들은 두 부류입니다.
@산소캡슐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찌른 자는 유대인과 모든 민족이 예수님의 재림을 눈으로 봅니다.
그 모든 민족중에 양과 염소로 나누죠..
양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25장 34-40절은 잘 읽어 보세요
환난시대에 예수님의 형제를 대접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들이 천년왕국에 들어 갑니다..
@산소캡슐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죽은 자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간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백보좌 심판 때 부활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ㅡ 심판의 부활할자들이죠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자들은 천년왕국 끝나고 부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 죽은자들은 심판을 받을 자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잠자는 자라고 표현을 하죠..
부활에 차례가 있다면 여러번 있다는 말씀이죠. 예수님, 예수님께 속한 자, 세상 모든 사람들 순으로요. 글 감사합니다.
네^^
맞습니다.
부활의 순서를 혼동해서 오직 부활이 재림때에만 있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많은 해석의 오점을 남기고 있기에 이 글을 소개했습니다.
@하늘사랑.. 성경이 부활에는 순서가 있는데,
먼저는 그리스도 예수요,
그 다음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들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증거를 보여 주었으니
성도들도 반드시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질 않나요???
@하늘사랑.. 한번이라고 욱일때는 언제고??
@crystal sea 고전 15장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왕노릇을 하는 부활은 총 세번..
심판의 부활이 한번..
@나그네1004 왕 노릇하는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부활
딱 두번!
님이 세번 째라고 주구장창 주장하는 것은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부활시키실 때 어떤 일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
예수님이 모든 정사과 능력과 권세를 멸하시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는 때가 바로 재림의 때입니다.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서 하나님 나라에서 천년 왕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11:15)."
절대무오 최종권위역 흠정역 번역을 보시라
좀 아시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