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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5호 전차 판터(Panther)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개발, 운용한 중형전차이다. 어원은 표범이다. 정식 명칭은 Panzerkampfwagen V „Panther“로, 5호 전차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양산이 개시되어 전선에 등장한 것은 동부전선이 한창이던 1943년으로 오히려 6호 전차인 6호 전차 티거보다 1년 가량 늦었다. 강력한 성능에 많은 활약을 했지만 2차대전 최악으로 꼽히는 신뢰성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는 등 유명세에 비해 명암을 가진 전차다.
히틀러 앞에서는 감히 아무도 말도 못했지만, 판터가 T-34의 장점을 모방한 것은 분명했다. 우선 측면의 경사구조 덕분에 중량을 늘이지 않고도 장갑판 두께가 늘어났다. 또한 T-34를 모방한 동륜이 기동력을 높여주었고, 마이바흐 700마력 가솔린 엔진을 장착해 동력도 4호 전차의 두 배에 달했다. 물론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판터는 T-34를 이길 수 있었겠지만, 독일은 실제 성능에 대한 검증도 없이 급하게 생산부터 시작했다.
-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원래 독일군에게 있어서 구식인 1호 전차와 2호 전차는 물론이고 3호 전차와 4호 전차도 일종의 징검다리에 가까웠다. 앞의 두 전차는 아예 전차가 없는 상태에서 기초적인 기갑부대 훈련 및 최소한의 전력 구축을 위해 개발된 실험적인 전차였고 후자도 독일군이 생각하는 현대적인 기갑부대의 구축을 위한 첫 삽질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첫 양산 및 실전배치가 시작되던 1938년부터 독일군은 이들의 대체를 위한 새로운 전차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당초의 목표는 주력전차와 지원전차로 이중화된 전력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20톤급 주력전차 계획 VK 20.01가 제시되었다. 초기의 계획안은 사실상 기존의 3/4호와 별 차이가 없는 섀시의 전차에 조금 더 강력한 엔진과 조금 더 두꺼운 장갑을 적용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개발 목표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한 것이 바로 동부전선이었다. 'T-34 쇼크'로 불리는 독소전 초기의 기갑 조우전은 말 그대로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본 적 없는 경사장갑을 대폭 채용한 형태에 우수한 기동력, 거기에 등장 당시로서는 강한 화력은 그때까지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력이던 3호 전차, 4호 전차 초기형보다 우위에 있을 만큼 충분했기 때문이다.
비록 동부전선 초기에는 스탈린의 삽질로 소련군의 참모진이 붕괴되었던 탓에 T-34가 실제로 독일군에 준 피해는 무시할 수준도 못 되었다. 결국 독일군은 VK20.01을 폐기하고 장포신 7.5cm 주포(크루프의 60 구경장 7.5cm 대전차포가 고려되었으나 관통력 부족으로 라인메탈의 70 구경장이 채택되었다.)를 장착할 차세대 주력전차의 개발을 결정, 벤츠의 VK30.01 (D)와 MAN의 VK30.02 (M)이 차세대 전차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이게 된다.
두 경쟁 전차와 4호 전차, T-34, 벤츠사의 안이 전체적으로 T-34를 모방한 티가 강하게 나는 반면 MAN사의 안은 전형적인 독일전차 설계에 경사장갑 설계를 반영했다. 그래서 벤츠사와 MAN사가 주축이 된 경쟁입찰이 시작, 1942년에 결국 MAN 사의 안이 채택되었다.
다임러-벤츠 개발안은 기존의 독일 전차와 차별점이 많았는데 토션 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육군병기국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전통적인 리프 스프링 현가장치를 고수했고, 소련전차처럼 후방변속기를 채용하면서 후방변속기의 우수성을 강조하는등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임러-벤츠의 안이 탈락한 것은 상기한 특성과 디자인이 지나치게 'T-34 짝퉁'에 가까워서 군 수뇌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 원인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디자인은 오히려 히틀러가 생산 지시를 내릴 만큼 좋아하던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 원인은 전차에 탑재될만한 크기의 디젤 엔진을 개발하는데 시간이 지나치게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고(선박용 디젤 엔진은 있었고, 이 전차에 사용할 MB507 디젤엔진도 해군의 소형 모터보트에 탑재할 예정이던 엔진을 전용한 것이었다.), 기존에 연구되던 포탑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포탑을 개발해야 하는데 전차가 하나라도 급한 시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고, 개발해도 성능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벤츠 사 계획도 엔진 수급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HL210을 탑재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바꾸었고, 이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됐다. 벤츠 계획은 디젤인 MB507 탑재가 전제였고 차체도 작았기 때문에 연료적재량 자체가 적어, HL210을 탑재할 경우 항속거리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안 그래도 좁은 차체에 더 많은 연료탱크를 탑재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연히 승무원의 행동편의나 탄약탑재량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벤츠 사의 안은 포탑링이 너무 작은 관계로, 개발 도중 T-34만이 아니라 KV-1 중전차와도 표준교전거리(800m)에서의 교전능력 확보를 요구받으면서 탑재가 확정된 7,5cm Kwk42 L/70 전차포를 탑재하기 힘들다는 문제도 크게 작용했다.
이에 비해 MAN의 VK 30.02는 그때까지의 독일전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경사장갑을 대폭 채용한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독일 전차의 구조를 답습하였다. 또한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크기의 섀시를 확보했다. 이에는 리프스프링 현수장치를 채택한 벤츠 형과 달리 토션바 현수장치를 채택한 덕이 컸다. 토션바 현수장치는 리프스프링에 비해 같은 폭의 차체라면 더 넓은 차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그만큼 포탑링의 폭을 넓게 잡을 수 있었다. 대신 차체 높이가 2~30cm쯤 높아진다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노출면적을 넓히고, 방어력 증가에 따른 무게증가가 더 크다는 악영향도 있지만 대신 그만큼 더 좋은 전장 시계를 확보해준다는 장점도 있었으므로 단점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개발 당초부터 티거용 엔진과 사실상 동형인 HL210 엔진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당장 동력계통의 수급에 문제가 없고 출력 역시 충분하며 현수장치의 지형대응능력 역시 벤츠 사 계획보다 훨씬 높다는 평가를 군부로부터 받았다. 당시 독일군이나 대전 이후의 독일군이나 전차의 기동력을 특히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으므로 결국 독일군은 MAN의 계획안을 '5호 전차', 즉 판터로 결정했다. 물론 580hp 12기통 수냉식 디젤엔진인 MB507엔진의 개발도 계속되어 대형 자주박격포 칼에 1944년 5월부터 장착되어 사용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판터는 기존의 설계안에 더욱 강한 장갑을 더한 결과 무게가 크게 늘어 무장을 완비하면 47톤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했고 이는 티거 전차 설계 초기 당시의 무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후에 일어난 트랜스미션의 과부하와 엔진 누수는 기초 설계 당시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가 차체 전면에 집중되어 벌어진 일이었고 이는 독일 전차들의 특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판터는 연합군의 지속적인 폭격과 소재 부족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1943년엔 한 달에 평균적으로 148대, 1944년엔 315대 생산을 기록하며 독일 육군의 주력 전차으로 활약했다.
• 선행양산형 : 본격적인 양산이 이루어지기 전인 42년 말부터 일종의 선행양산형으로서 20량의 극초기형 판터A형이 제작되었으며 변속기를 Olvar사의 것으로 교체한 B형이 계획되었으나 실제로 생산되지는 않았다고한다. C형에 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후 A형의 개량을 통해 판터의 본격적인 양산형 모델을 43년 1월부터 생산하게 되며 이를 D형이라고 명명했다.(1942년 12월에 제작에 들어가 43년 1월에 출고) 이와 함께 선행양산된 극초기형 판터A형 또한 D형으로 개칭되었으며 나중에 생산된 D형과 구분하기 위하여 D1형이라 호칭하였고 D1형과 D2형의 차이점은 전면장갑의 두께가 60mm에서 80mm로 변경된 것과 엔진이 마이바흐 HL 210에서 마이바흐 HL 230 변경된 것 등이다. 외형 상으로는 포탑의 형상으로만 구별이 가능한데, D1형은 포탑 좌측면이 큐폴라의 곡면을 따라 돌출되어있었다.
전반적으로 판터의 프로토타입인 VK3002(MAN)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던 형식이다.
• 양산형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판터D형이다. 1943년 1월부터 생산되었으며 당초에는 총 1000대가 생산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A형으로 개량되면서 850대로 조정되었다. 생산과 동시에 끊임없는 개량 및 보수를 받았으며 따라서 같은 형식이라 할지라도 세부적인 디테일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 몇가지 예로서 43년 4월 소련 보병의 대전차 소총에 대한 방책으로서 일종의 사이드 스커트인 쉬르첸이 채용되어 8mm의 장갑판을 차체 측면에 6매 부착하였다. 5월에는 상기한 엔진 교체가 있었다. 조준기는 TFZ 12 쌍안식 조준기로서 2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A형 후기형에 가서 TZF 12a 단안식으로 교체된다. 차체 전면부 좌우측에는 전조등이 있으며 포탑 좌우측에 연막탄발사기가 있다.
• 후기형 : 차체 전면부 전조등이 7월 생산분 부터는 좌측의 1개로 조정되었다. 포탑측면의 탄피배출/연락용 소형햇치는 폐지되었으며 일부차량은 생산도중 용접하였다. 포탑의 연막탄발사기는 폐지되었고 9월에는 치메리트 코팅이 적용되었다.
A, B, C, D에 이은 E형으로 명명되는 것이 정상이겠으나 어째선지 A형으로 명명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나 명확한 설명이 제시된 적은 없다. 다만, 문제가 많았던 D형을 시제품으로 인식해서 신규개량형을 A형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43년 9월부터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외형적으로 포탑에서는 신형 큐폴라, 피스톨포트 및 측면의 연락용 해치 폐지가 있었다. 차체는 볼형 전방 기관총 총좌 및 무전수석 페리스코프 폐지, 후방 배연기(머플러)교체 등을 제외하고는 D형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던 변속기의 개량, 포탑 및 주포의 회전 성능 개선 등 기계적인 신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수가 이루어졌다. 엔진의 RPM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진 것도 이 때 부터이다. 또한 생산시기가 치메리트 코팅시기와 거의 일치하기때문에 모든차량에 코팅이 되어있다.
최초생산분은 D형후기 포탑을 전용했기 때문에 측, 후면의 피스톨포트가 그대로 있었다. 11월부터 피스톨포트는 폐지하였고 1944년 3월부터는 대보병 방어를 위해 S마인 발사기가 포탑상면에 신설되었다. 초기형이 포탑의 큐폴라와 연락용 해치 외에는 차이점이 없어 한동안 전방 볼형 기관총 마운트를 기준으로 A초기형을 D후기형으로 구분하는 오류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외형적으로 큐폴라의 형태로 구분짓는다.
생산량은 851호차 이후 MAN, 다임러 벤츠, MHN, 데마크 사에 의해 약 2200량이 생산되었으며 차대번호는 151000 ~ 160000 및 210255 ~ 211000이다.
개발 중지된 판터 2에서의 개량점을 더한 판터의 완성형으로서 44년 3월부터 생산되었다. G형으로 명명된 데에서 A형이 실질적으로는 E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A형으로부터의 개량점은 크게 측면 상부 장갑이 40mm에서 50mm로 강화된 것과 D, A형에선 측면 장갑이 수평하게 뒤로 이어지다가 기관실 부위에서 장갑판이 덧대어져 돌출되었던 것이 G형에 와서는 일직선의 사선형 장갑으로 처리된 점, 전면 장갑 좌측에 있던 조종수용 관측창이 폐지되고 대신 조종실 상부의 회전식 관측창 하나로 통일된 것 등이다. 측면 상부 뿐 아니라 부분부분 장갑이 강화되었으나 대신 정면 하부 및 일부분의 장갑 두께를 줄여 중량이 크게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기존의 포방패에서 숏트랩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포방패 하단에 턱이 추가되었다. 또한 후방 배연관(머플러)하단이 각진형태이며 D형처럼 쌍열로 바뀌고 배연관에 철제 보호판을 덧대거나 소염장치를 부착하여 눈에 띄지않도록 한것도 특징.
후기형 일부 차량에 한하여 기존의 고무림이 덧대어진 전륜이 아닌 고무림이 내장된 강철제 전륜이 사용되었으며 고무가 부족해서 나온 임기응변으로 1944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 마쉬넨파브릭 아욱스부크 뉴른벨크 MAN사에서 급조된 차량이었다. 강철제 전륜을 모두 장착한 차량(G형 중기모델)은 아르덴공세시 1SS기갑연대 221호 등 여러대가 확인되며 1~2개만 장착한 차량도 확인된다. 다만, 철제전륜은 궤도에 심각한 무리를 주어 종종 파손되는 일이 많아 양산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양산되지는 않았으며 차체 8대, 포탑 1기(1기는 목업)가 개발 도중에 종전을 맞이한 판터의 마지막 개량형이다. 개량점의 대부분은 포탑에 집중되어 있으며 D, A형의 운용경험으로부터 판터 포탑 개량의 필요성이 제기되고(G형의 개발 시기보다도 이른 시점이었다.) 이에 따른 신형 포탑 개발 계획이 판터 F형의 개발로 확대된 것이다.
후에 슈말투름(Schmalturm, 좁은 포탑이란 뜻) 포탑이라 명명된 이 신형 포탑의 원형이 제시된 것은 43년 중후반으로서 라인메탈 사에서 설계한 설계안을 그 기초로 한다. 이 신형 포탑 은 44년 2월까지 라인메탈에서 개발되지만 이후 다임러 벤츠로 이관되어 그곳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슈말투름 포탑의 형태가 완성된다. 이 포탑은 기존의 판터 포탑에 비하여 전면 장갑이 120mm로 강화되고 포방패의 형상이 돌격포에 사용되던 포방패와 유사하게 변경된 것이 큰 특징으로 전면과 상부의 폭을 줄이고 좀더 가벼운 소재를 사용하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포탑의 중량은 오히려 감소되었다. 포탑 전면 면적이 줄어듦에 따라 주포는 스코다 사에서 설계한 7.5cm KwK 44/1 L/70으로 교체되었는데, 주퇴복좌기의 성능이 강화되어 머즐브레이크가 폐지되었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신형장비인 스테레오 식의 거리측정기가 도입된 것으로 후에 미국의 M47 패튼에 장비된 것과 같은 방식이다.(그러나 차량 가동시와 포사격시 생기는 진동으로 정밀 광학기기인 조준기가 잦은 고장을 일으켜 정확한 거리측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조준기 자체의 문제는 아니고 조준기를 포탑 전면에 배치한 설계상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판터F형의 포탑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으니 판터 또한 똑같은 문제를 겪었을 것이다. 참고로 M47 패튼도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어서 M48 패튼은 광학 조준기를 측면으로 옮겨서 문제점을 해결했다.)
차체는 상면장갑이 강화되었고 조종수와 무전수의 햇치는 슬라이드식으로 옆으로 미는 형태로 바뀌었다. 다만 이 차체가 F형 차체인지 판터G의 1945년형 개량형 차체인지는 명확치 않다. 공장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별도의 생산라인이 아닌 일반 G형차체와 나란히 조립중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우선 신형 전차의 성능이 예상외로 좋지 못했다. 판터 전차들이, 몇 ㎞ 진격도 못하고 기계결함으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보수차량의 부재와 병사들의 경험부족으로 작전 개시 첫날에만 200대 판터 중 160여대가 참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수뇌부가 큰 기대를 걸고 투입한 첫 실전 데뷔인 동부전선 쿠르스크 전투에 최초양산형인 D형이 실전투입되었으나 작전이 시작된지 겨우 이틀 만에 184대중 40대만 기동 가능할 수준이었다.(정확히는 소련군이 미칠듯한 우주방어를 찍어놓은 이유도 있지만 기동중에 변속기가 나가버려 폭파처리하거나 대전차포의 사격으로 격파당한 차량이 많다.) 원래는 200대가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20대 정도가 이동 과정에서 엔진 화재로 손실되었다. 일부는 철도 적재를 위한 단거리 이동에서조차 사고가 발생, 심지어는 겨우 열차에서 내리는 동안에 판터 2대가 불타버린 사례도 있다. 그나마 더 많은 숫자가 고장이 났던 것을 상당수 수리해서 184대를 가동 상태로 전투에 투입했는데도 이 꼴이 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에는 판터의 엔진과 트랜스미션, 현가장치가 기존의 설계보다 지나치게 무거워진 무게를 견디지 못한데다 설계 자체가 격렬한 전장에 맞지 않게 마모가 심했고, 덤으로 설계 미스 및 소재 선택 실수로 엔진 연료도관에서 연료가 새고 이게 뜨거운 엔진에 접촉하여 불이 나는(!) 문제가 제일 큰 원인이 됐다. 엔진 문제는 이내 개선됐지만 트랜스미션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생산된 A, G형부터 문제 자체는 줄어들었지만, 이는 엔진의 개량뿐만이 아니라 RPM을 2500까지만 올릴 수 있게 억제하는 엔진 출력의 제한조치 덕분이었다.
현가장치에 가해진 부담의 원인은 차체 정면 장갑의 강화로, 프로토타입 격인 VK3002(M) 시절의 차체 전면 60mm 경사장갑을 강화한 80mm 경사장갑의 채택으로 대전기 전차들 중 손꼽히는 방어력을 갖게 된 것은 좋았으나 그 부담이 고스란히 정비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사실 초기형인 A형에서 19톤 이하이던 4호 전차가 후기형인 H형에서 25톤을 찍으면서 차체 전면 현가장치와 여타 구동계에 심한 부담이 간 사례나, 75mm 70구경장 주포, 80mm 경사장갑, 거기에 차체를 돌려 조준해야 하는지라 태생부터 현가장치에 부담이 걸리는 4호 구축전차의 사례를 보면 당초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차체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는 편이 옳다. 두 4호 계열의 문제는 차체 전면부의 현가장치를 더 튼튼한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몇몇 사진이나 삽화를 보면 4호 계열 차량의 후기형들 앞부분의 보기륜 2조의 색과 재질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판터는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개선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마이바흐 엔진에 불만이 많았다. 이미 많은 문제점이 쿠르스크 전투 이전부터 발생했고.... 카브레이터부터 시작하여 뜨거워진 배기관 위로 퍼져나간 연료 때문에 발생된 화재를 몇 번 경험하게 되었고 이런 화재는 보통 전기식 라이닝과 개스켓을 태우며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런 문제는 거의 다 해결되었지만 나는 불꽃이 작렬하던 배기관을 결코 잊을 수 없으며 때로 이반은 이 불꽃을 한 밤중에 타켓으로 이용하곤 했다.
- 독일군 전차병의 회고
더구나 그 기계적 결함만으로도 모자라 스펙상 티거와 대등하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판터들을 보병지원없이 밀집화망 속에 밀어넣는 전술적 실책까지 범했다. 이는 현장의 지휘관보다는 전차의 집중운용이라는 당연한 원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압도적인 기갑전력으로 적의 보병방어진을 완전히 격멸해 버리기를 기대했던 당시 48기갑군단 군단장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 대장 및 그 상급지휘부인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차원의 문제였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긴 하다. 또한 예하 판터가 배속된 GD사단에서는 황당하게도 10기갑여단과 GD전차연대간 서로 협조없이 앙숙으로 지냈다. 이유는 판터여단인 10기갑여단에게 GD전차연대를 통합지휘토록 하였지만 실제는 같은 규모의 부대이다보니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비협조적으로 나왔다는것. 보병지원없이 판터만 투입한것도 이런 사례중 하나. 원래 중전차는 보병지원 없는 상황에서 전차전을 상정한 것이므로 티거라면 그런 임무에서도 그럭저럭 활약할 수 있는데, 판터는 절대 그럴 수 없다. 4호보다야 조금 낫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면..지못미
덕분에 판터 D형은 제대로 된 활약도 실전 데이터도 얻지 못한 채 일개량부터 들어가야만 했다. 이후 본격양산형인 A형이 등장한 이후에는 연합군의 어지간한 경/중(中)전차는 압도했으며 중(重)전차 상대로도 호각 또는 우세에 가깝게 싸우는 등의 활약을 했다.(연합군 중전차에 호각 또는 우세에 가까워야 하는게 정상이다. 판터는 연합군의 중전차인 퍼싱보다 무겁고 IS-2와 무게가 거의 같다. 설계 및 운용상 임무영역은 중(中)전차라도 체급은 연합군의 중(重)전차에 맞먹는다.) 숙련된 전차병이 조종하는 판터는 셔먼 전차 3~5대와 싸우는 것이 가능했고 판터 전차와 겨우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전차는 스탈린과 퍼싱 뿐인데 퍼싱 중전차의 실전 배치 시기를 생각해 본다면 무게도 거의 같은 IS-2가 실질적인 판터의 적수이다.
1944년 중반 이후엔 아예 4호 전차보다도 많은 수가 배치되어 독일군의 주력 전차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75mm 포 셔먼 전차를 주력으로 내세운 연합군 상층부 앞에는 그 예상을 박살내는 전차손실 보고서와 일선의 아우성이 돌아왔다.(결국 가을안개 작전(아르덴 대공세) 이후 아이젠아워는 더 이상 유럽에 75mm 셔먼 전차를 보내지 말고 M26 퍼싱 중전차의 배치를 서둘러라고 했다.)
성능
ㅡ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초기 판터 특유의 잔고장을 비롯하여 변변치 못한 초기 활약에 대한 보고를 들은 히틀러의 한줄 평가였다.
운용이 정착된 후는 다음과 같다.
1943년 9월 13일, 제2 SS 기갑 척탄병 사단 '다스 라이히'의 제2 SS 기갑 연대 소속 제1 전차 대대 소속의 홀저 대위(SS-Hauptsturmfuehrer Holzer)가 지휘하는 판터 전차 7대가 콜로마크(Kolomak) 근교에서 70여대의 T-34와 교전했다. 20여분간의 전투 끝에 판터는 단 한대도 피해입지 않고 T-34 28대를 격파했다
독일 플로버리히(Floverich)에서 벌어진 일이다.
400미터 거리에서 판터의 전면장갑에 철갑탄 3발을 때려넣었지만, 판터는 건재했다.
이후 판터가 같은 거리에서 반격을 가해왔고, 초탄 한방에 우린 끝장났다.
ㅡ 조종수 존 새들락(John Sadlak) 기술 상병
전차에서 주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M4 전차는 독일 4호 전차보다 우수한 75밀리미터 고속포와 포구 제퇴기(Muzzle brake)를 장비하고 있다. 독일 판터와 티거 그리고 최신예 쾨니히스 티거 전차는 화력 면에서 75 혹은 76밀리미터 주포를 장착한 셔먼을 훨씬 능가한다. 지근거리인 300~500미터 사이의 거리에서조차도 셔먼이 판터와 티거의 전면 장갑을 관통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와 반대로 판터와 티거는 장거리인 1,500~2,000미터 거리에서 셔먼을 격파했다.
게레온스바일러(Gereonsweiler) 근방의 로어(Roer) 강 유역에서 벌어진 11월 공세 동안, 제67 기갑 연대의 전투단이 판터나 티거 1, 2대에 의해 진격을 지연당하거나 돈좌되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같은 시기에 셔먼 1개 소대와 판터 1대가 맞붙는 장면을 보았는데, 800미터 거리에서 벌어진 이 교전 중 판터는 10발도 넘는 75, 76밀리미터 철갑탄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판터는 단 5분만에 아군 셔먼 4대를 격파하거나 전투 불능에 빠뜨렸다.
ㅡ 제67 기갑 연대 3대대 행정관 폴 A. 베인(Paul A. Bane) 소령
1944년 7월 28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던 Siedice 전투에서 제5 SS 기갑 사단 '비킹'소속 제5 기갑 연대 소속의 제2 전차 대대는 4호 전차 1대와 판터 전차 5대를 잃고, 대신 소련군 전차 107대(T-34, 셔먼, 발렌타인 포함)를 격파했다.
전면 방어력
전면을 놓고 보면 판터 G형을 기준으로 55도 경사에 80mm 두께를 가졌는데 수직장갑의 두께로 환산하면 140mm에 이르는 방어력을 가진 셈이고, 여기에 60도에 가까운 경사는 실제 관통거리의 증가량보다 절반에 가까운 관통력 저하를 유발한다. 물론 이는 판터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100mm의 포탑 전면은 충분히 두꺼워 보이지 않겠지만 반원형 포방패가 포탑 전면 대부분을 덮고 있었고 포방패도 100-110mm 정도였지만 탄착각이 매우 양호하게 나오지 않는 이상은 관통이 어려웠다. 다만 이 반원형 포방패의 하부에 철갑탄이 명중할 경우 탄이 도탄되면서 전투실 상부를 뚫어 버리는 숏 트랩(Shot-Trap) 현상이 왕왕 일어나자, 1944년 9월부터는 포방패 하부를 직선화하여 도탄을 방지한 친(Chin. 독일어로 턱주가리.) 타입 포방패가 G형에 도입되었지만 대전 말기의 독일이 그렇듯 기존의 반원형 포방패도 그냥 마구잡이로 뒤섞인채 생산되었다.
카탈로그 스펙으로는 납득이 안 가긴 하지만 독일 병기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17파운더 APCBC가 판터의 차체 전면을 관통하려면 하단부를 노려야만 400야드, IS-2의 122mm 철갑탄의 경우엔 차체 전면 하단을 노려 100야드에서나 가능하다고 한다. 포탑은 그만큼의 방어력이 안 나오는데 IS-2의 122mm에 포탑전면이 1500m, 포방패도 500m에서 뚫린다. 미군쪽 테스트 자료에서는 76mm M62 APC로 차체 전면은 건드릴 수 없는데 포탑전면을 1천 야드에서, 포방패를 200야드에서 뚫으며 90mm M77 AP로는 차체전면을 600야드, 포방패 1000야드, 포탑전면 1600야드에서 뚫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90mm HVAP로 사격했을 때 기관총 접합부 등을 취약한 부분을 700m 중반대, 차체 하단을 500m에서 관통하는데 그쳤다. 미군의 신형 90mm T33 철갑탄으로는 차체 상부를 1km 거리에서 문제없이 관통 가능했지만 보급량이 적었다.
한 마디로 중형전차의 탈을 쓴 중전차 라고 말할수 있다. 실제 체급도 소련의 중전차급이 맞다. 다만 어디까지나 헤비급 미디엄이지 헤비가 아니다. 판터는 중전차에게 요구되는 전방위 중장갑을 갖추지 못했고 판터의 40~50mm급 측,후면은 40~45mm급 T-34의 측후면과 사실상 별 차이가 없으며 위의 이런 낮은 측후면 방어력으로 인해 IS-2는 판터를 상대할때 굳이 철갑탄을 사용하는 수고를 하는 대신 그냥 장전되어 있는 고폭탄으로 적당히 측면이 보이는 판터를 쏴서 날려버리는 방식이 더 간단했다고 한다.
관통력
(복원) 작업장에 관광객들께서 종종 찾아오시거든요. 2차대전 때 전차병으로 복무하신 분들께서 셔먼에 탔다가 피탄당했을 때의 사연을 말씀하시고는 하는데, 여기있는 판터를 보시고서는 몸을 부들부들 떠시더라고요. 주포를 보시면서 말이죠. 아직도 그 때의 악몽이 떠오르시는 거죠.
ㅡ 탱크, 다시 태어나다(Tank Overhaul) - 판터 편
주포의 관통력은 매우 우수했다. 판터의 주포는 판터에서 처음 실전 도입된 물건이었지만, 75mm 계열 중에서 못해도 1~2위를 다투는 우수한 포다. 퍼싱의 90mm도 HVAP가 아닌 M82나 M77 철갑탄의 경우 경우 판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관통력이다. 물론 영국의 17파운더 도 만만찮은 관통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명중률까지 고려하면 판터의 주포가 더 우수한데 시험사격(완벽하게 이상적인 조건)시 400야드(약365m) 에서도 56.6%, 800야드(약730m)쯤 가면 21.9%... 이건 뭐 답이 없다. 더군다나 이 시험시 사용한 표적은 폭 2.5m, 높이 2m이다! 같은 조건에서 판터쪽은 2000미터에서 48% 수준이다. 따라서 당시에 구할 수 있는 75mm 포 중에서는 최상급이므로 당시의 모든 중형전차는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으며 관통력 면에 있어서는 표준 전투거리에서 티거의 88mm를 능가했다. 근거리에서 판터의 70구경장 75mm 포가 더 강력한 이유는 탄속이 더 빠르고 탄 구경이 작은 만큼 좁은 면에 그 에너지가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단 고폭탄 성능은 구경의 한계로 인해서 88/56구경장이 강력했고, 표준 전투거리 및 그 이상의 거리에선 무거운 88mm 쪽이 더 오랫동안 자기 운동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88mm가 더 우수한 위력을 보인다.
2차대전 이후 별다른 후계가 없는 88mm와 달리 이 75/70 주포는 전후 판터를 보상으로 받아 운용했던 프랑스가 배럴을 상당히 줄이는 등의 개조를 하여 AMX-13에 장착하여 냉전시기에도 사용된다. 프랑스가 15톤도 안되는 경전차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화포는 체급 대비 화력으로는 매우 쓸만했다. 그러나 포탄을 바꾸는 등의 개량을 거쳐도 2차대전 말에 개발되어 46년부터 배치된 신형전차인 T-54와 센츄리온의 전면을 무슨 수를 써서도 관통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AMX-13은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하는 90mm로 바꿔달게 된다. 이스라엘 역시 공여받은 셔먼전차를 개조하여 원래 판터의 주포를 변형한 이 AMX-1375의 주포를 장비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T-54를 잡을 수가 없어 AMX-30에 장착된 105mm포를 변형한 프랑스제 105mm포를 장착하게 된다.
하여간 2차대전 기준으로 보면 무척 높은 관통력을 가진 주포라고 보면 되고 단지 구경의 한계는 확실하여 아직까지 사용되는 소련제 100mm D-10등과는 달리 아무리 냉전기 기술을 사용한 개량을 해도 46년형부터의 전차들에게는 이빨이 안먹히는 한계가 확실한 주포라고 보면 된다.
전술적 기동성
방어력과 화력의 양립으로 무게도 적절하게 맞췄고, 여기에 티거에서 썼던 강력한 마이바흐 엔진을 실어 상당히 우수한 기동성을 가졌다. 게다가 티거와 동일하게 제자리 선회가 가능해 전술 기동은 훌륭했다. 특히 독일 특유의 여러 겹으로 된 보기륜은 정비 면에서는 악몽과도 같았지만 궤도가 지면에 닿는 압력을 줄여서 부드러운 지형에서도 타국의 30톤급 중형전차 이상의 적응성을 보일 수 있었다. 스웨덴의 노획 판터 테스트에서는 험지 기동성에서 파이어플라이를 간단히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보기엔 판터와 타이거가 우리 전차보다 기동성은 물론 험지 주파능력이 뛰어났다. 셔먼이 퍼지는 장소에서도 판터와 타이거가 기동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 미국 전차 소대 부사관 찰스 A. 카든하사
- M4 sherman at war, michael green & brown
판터 전차 궤도는 1인치 정도 지면을 파고든 상태에서 시속 18마일을 기록함. 같은 조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M4A3E8의 속도는 대략 동일 했다. 일부는 판터보다 늦거나 빨랐다. 포장 도로에서의 비교는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판터의 최고 속도는 시속 38마일임. 일반적인 지면에서 판터의 궤도는 기동시 2분의 1인치 깊이의 자국을 남겼다. M4A3E8역시 비슷하였으나 기존의 좁은 궤도를 사용하는 셔먼 전차들은 궤도가 지면 아래로 파고 들었으며 2인치 깊이의 자국을 남겼다. 연결 핀 2개를 제거하면 분리가 가능한 궤도를 가지고 있으며 궤도 장도는 대형 너트 하나를 통해 조절이 가능. 시험에 참여한 승무원들은 판터의 궤도 관리가 미국 전차 궤도보다 간편하다는 점에 동의햇다. 75마일 정도 도로와 야지에서 기동했지만 지침서에서 예상된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전차를 노힉했을 당시 궤도는 손상되어 있었다.
- 1945년 3월 27일 노획된 판터 G형을 셔먼과 비교 테스트한 미군 보고서
다만 후진의 경우 변속기의 기어가 영국의 처칠 시리즈마냥 1단밖에 없다는 문제로 시속 2~4km라는 굼뱅이 기어가는 속도를 보여준다.
성공적인 양산
이전모델인 4호전차가 1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25톤의 중량을 갖추었으나 판터는 주포와 조준경, 포탄 등의 무장을 완비시켰을 때 약 17만 라이히스마르크의 가격으로 45톤의 중량을 갖추었다. 무게가 거의 2배 증가한 것에 비하면 생산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다. 또한 4호전차보다 늦게 양산되었음에도 생산량 자체는 엇비슷할정도로 성공적인 양산품이었다. 실제로 온갖 폭격과 특수강 고갈 등의 악재에 시달리던 1944년에도 판터 전차는 한달에 약 300대 가량이 뽑혀나오며 제법 훌륭한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단점
부족한 측후면 장갑
판터 운용 메뉴얼인 판터피벨에 따르면 판터는 전면과 약간의 전측면을 포함하여 잘 쳐줘야 90도 가량의 각도를 제외한 나머지 270도 방위에서 구형 T-34와 KV-1의 76.2mm 포를 전혀 막지 못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틸다와 발렌타인에게 조차 2km 이상의 거리에서 무조건 관통당한다고 한다. 실전에서도 측면은 확실한 약점이었고 소련의 T-70 경전차가 고작 45mm 주포로 판터의 측면을 공격하여 격파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 소련의 경우 심지어 14.5mm 대전차 소총으로 판터의 측면을 가격하여 장갑을 관통해 승무원이 부상시킨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는 50m 안이라는 근거리에서 쏘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100m 밖에선 관통하지 못했다.<텅스텐 탄심을 가진 철갑탄 사용시>
또 대전차소총으로 3호 전차나 4호 전차를 격파한 사례는 있으나 판터를 격파한 사례는 아직 보고된 바가 없다. 하지만 14.5mm는 대전 초기부터 독일 전차병들의 노이로제 증상 악화에 이바지 했던 무기이고 실제로 판터의 측면에는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에 쉬르첸이라는 측면 장갑을 장착한다. 쉬르첸은 아주 효과적으로 PTRD의 14.5mm를 방어했기에 측면을 강화했던 판터2 계획은 취소 되었다.
이 측면 장갑 부족은 셔먼 전차와 완전히 동일 한 이유 인 너무 큰 차체 때문이다. 하지만 판터는 애초에 중형(medium) 전차로서 설계 되었고 타이거 같은 중전차 처럼 전선 돌파를 주 목적으로 설계된 전차가 아니기에 당시 소련의 주력 대전차포였던 zis-3를 막아낼 만큼의 측면 방어력을 요구받지 않았다. 그래도 퍼싱, 센츄리온, t-44와 비교하면 확실히 측면 장갑은 무게에 비해 심각하게 얇다. 아무리 중형전차라 한들 판터 자체의 무게는 40톤 중반으로 타국의 중전차급의 상당히 무거운편에 속한다 후대에와서 판터가 평가절하 당하는 이유중 하나.
느려터진 포탑 회전속도
티거와 유사하게 포탑 회전속도가 느려 상황대응력이 떨어진다는 문제는 판터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작은 포탑에 큰 포를 장착해 밸런스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군의 KV-2나 가질만한 문제가 있었는데 20도 정도의 경사만 되어도 포탑을 돌리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그보다 더한 경사에서는 포탑이 멋대로 돌아가기도 했다. 판터 D형에서는 360도 선회에 1분이 걸릴 정도였다. 1초에 약 6도 가량을 움직였던 것이다. 동시기 셔먼은 360도에 15초로 1초에 약 24도, T-34는 12초로 1초에 약 30도를 움직였다. 다만 A형부터는 엔진 출력에 따라서 1회전을 15초 ~ 93초로 선택할 수 있는 유압식 회전 장치를 장착하였였기에 여타 전차에 비해 특별히 빠르다곤 할 수 없어도 크게 향상 되었다.
T-34가 무고장 전차로 보이게 만드는 답이 없는 한심한 신뢰성
붉은 군대가 3호 돌격포나 4호 전차를 사용하는 것은 그 신뢰성과 부속품의 충분함으로 권할 만 하다. 하지만 신형 판터와 티거를 노획하여 사용해도 부서지면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마라. 그것들의 엔진과 변속기, 현가장치는 너무나도 나쁘다.
ㅡ 소련 병기국 1944
트랜스미션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어 주행거리 100km 이하로는 전체 판터의 5%가 고장나지만, 주행거리 1500km 이하에선 전체 판터의 90%가 고장나는 내구도를 보였다. 엔진도 티거보다 좁은 공간에 억지로 집어넣으면서 티거 때에는 없던 트러블이 생겨나며 공간 부족으로 정비도 까다로워지는 등 문제가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위에 언급된 D형의 대량 비전투손실. 결국 트랜스미션은 개량하고 엔진은 종전 때까지 출력 제한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계는 있었다. 사실 아무리 독일이 기갑장비를 잘 만든다고 해도 45톤급의 사실상 헤비급인 판터를 중형전차급으로 빠르게 달리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고, 초기 설계안에서 무게를 지나치게 증가시킨 것도 무리수가 되어서, 후에 연합군이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엔진의 평균수명이 주행거리 1,000km밖에 안 된다고 깠고, 또한 신뢰성 면에서도 말이 많았다. 1944년에 영국군이 노획한 판터를 테스트했을 때는 오르막을 오르던 중 화재가 발생하고 이어서 3단 기어가 고장나서 저단으로 시험을 계속했는데 화재가 또 발생해 전소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1945년에 신품 판터를 노획해 테스트했을 때도 온갖 고장과 화재가 빈발하여 결국 테스트를 그만두어야 했다.
실제 독일군은 이 짧은 수명을 지닌 전차를 어떻게든 더 오래 써먹기 위해 짧은 거리라도 열차에 실어서 이동시켰다고 하는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는 항상 열차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는 만큼 전략적으로는 심각한 난점이 되었다. 판터는 2차 대전 이후 프랑스가 자국 내에 버려져 있던 걸 가져와서 사용해봤지만 마찬가지로 막 사용하긴 힘든 물건이라는 것만 재확인하고 퇴역시켰다.
뒤떨어지는 정비성
고장 잘나는 전차가 수리하기도 힘들었다. 가령 말 많던 변속기 정비만 해도 차체전면 기관총과 무전기를 들어내고 천장 일부를 들어내고 차체 위로 크레인을 써서 통째로 들어올려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을 필요로 했다.(도면을 보면 운전수와 무전수의 출입구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교체해야 했다.) 또한 오버랩식 현가장치의 단점으로 경우에 따라선 토션바 수리를 위해 멀쩡한 보기륜 다 떼어내고 수리해야했다.
엄청난 무게와 그에 비례하는 짧은 항속거리
판터는 연합군의 중전차급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연합군의 중전차들 만큼 운송이 힘들고 연료를 많이 소모했다. 판터는 애초에 연료를 다 쓰기도 전에 퍼지기 마련인 낮은 신뢰성을 가진 전차지만 어떻게 안퍼진다고 해도 T-34의 반도 못가는 항속거리는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높은 무게는 교량이나 특수지형의 이용도 불편하게 했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을 정리하자면 신뢰성 문제로 오래 자력주행을 할 수 없으며 어차피 기름먹는 하마라 퍼지지 않아도 항속거리가 짧은데 정비까지 힘들었다. 즉 여러모로 지원체계와 높은 숙련도가 필요했던 물건.
부족한 관측장비
조준경의 경우 TZF 12a 2.5배 ~ 5배로 조정할 수 있는 가변배율 조준경에 시야각도 2.5배율일때 28도. 5배율에서 14도라는 상당한 고성능이었다.게다가 SF14Z 같은 삼각관측기 덕에 장거리 조준능력도 좋았다. 다만 소련 전차나 미국 전차에는 달렸던 포수용 보조조준경이 없었기 때문에 시야각이 좋다고는 해도 숙련된 전차장이 정확히 표적 방향을 지시해주지 않으면 포수가 표적을 찾기가 어려웠고, 이는 후술될 프랑스군의 운용 보고서에서도 비판되는 요소다. 사실 이는 독일군 전차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다.
조준장치를 만만한 셔먼과 비교할 경우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조준경이 장착되었기 때문에 간단한 비교는 어렵다. 극초기형 셔먼의 경우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무배율 조준경만 달렸을 정도로 뒤쳐졌지만 흔했던 M70의 경우 3배율 13도 스코프로 열세인 정도였다. 그러나 후기형 76mm 셔먼의 경우는 M71처럼 5배율 13도 같은 고성능 스코프도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후기형 셔먼의 경우 포수용 보조조준경으로 1.x~6배율 가변식 M10D 잠망경도 흔히 장착되었고 조종수나 무전수도 회전 가능한 잠망경으로 주변을 감시할 수 있어 근거리에서 위협을 찾는 것이 빨랐다. 덧붙여 소련과 달리 미국은 명품 민수용 사냥용 스코프를 만든 경험이 많기 때문에 독일처럼 품질은 좋았다. 전설적인 셔먼 전차장인 에이브람스가 아라쿠르 전투에서 75mm 포로 판터를 때려 잡을수 있던것도 안개낀 환경에서 셔먼의 근거리 표적 획득 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셔먼의 경우 전차장이 탈취레버로 포수가 정밀조준을 하기 앞서 포탑을 선회에 표적에 지향할 수 있었던 데 반해 판터는 그런 것도 없어서 더욱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후기형 셔먼의 경우 전차장이 지시한 표적을 5~6초 정도면 포수가 사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판터는 그 4~5배의 시간이 걸렸다.
기타
포탑 내부가 상당히 좁았다. 실제 내부를 살펴본 영상을 본다면 쉽게 느낄 수 있는 점으로서 특히나 탄약수의 공간의 경우 탄약을 원활히 장전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보이는 점으로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상당한 피로도와 전투능력 저하를 보일 수 있었다. 원래 전차의 포탑 자체가 좁기는 한데 승무원의 거주성에 직결되는 포탑링이 좁은게 문제. <그런데 2차대전기 전차 중 판터보다 포탑링이 큰 전차는 셔먼과 퍼싱... 챌린저 정도 뿐이고 워낙 판터 주포가 거대해서 그렇지 75mm급 주포가 탑재된 전차중에서는 평범 수준이지 작은 수준에 포함되진 않는다.> 판터 포탑링은 셔먼보다 작고 T-34/85보다 조금 넓은 수준밖에 안된다. 심지어 거주성이 거지같기로 유명한은 IS-2보다도 좁다. 물론 판터는 포의 사이즈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IS-2급은 아니겠지만 T-34/85와 비슷한 포탑링에 크고 강한포를 달았으니 승무원의 거주성이 좋을수가 없다.
평가
즉 판터는 전체적으로 장갑, 화력, 기동성의 주요 요소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스펙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상당히 컸다. 측면을 잡힐 일 없는 장거리 교전, 그리고 장거리 이동이 필요없으며 미리 적들이 올 방향을 예상하고 대비 가능한 방어적 상황과 고관통포가 유리한 대전차전투에서 확연한 고성능을 발휘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취약점을 보일 수 있었는데, 이는 특히 수세에 몰린 43년 이후의 나치독일 상황에서 우월한 교전비를 내기에 유리했다. 일단 정면 장거리교전에서는 우월하니 우선 전투에서 승리한 뒤 포위당하면 전략기동이 안되어 많은 경우 도망이 불가능하거나 도망가다 퍼져서 전차를 자폭시킨 후 버리고 후퇴 했는데 이는 죄다 비전투손실로 기록되어 판터가 서류상으로 우수한 교전비를 내도록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나치전차들의 교전비를 볼 때에는 단순한 전차간의 교전비가 아닌 유기/자폭/포격으로 인한 손실 등을 모두 포함해서 봐야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역사적으로 사용한 측과 상대한 측의 평가가 가장 상반되는 전차 중 하나로 직접 사용한 독일과 프랑스군의 평가는 영 좋지 않고 당한 측인 미소영 3국의 평가는 아주 높은 전차이다.
폴란드 국내군이 바르샤바 봉기 당시 판터G형 2대를 노획하여 사용하였다. 이 노획 판터들은 푸델과 펠렉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노획된 판터들은 봉기군을 공격하러 시가지로 진입하던 판터 3량 중 2대 였다. 푸델은 화염병과 영국제 대전차 수류탄등으로 무력화되어 독일 전차병들이 차량을 유기시키고 탈출했는데. 의외로 멀쩡하여 약간만 손봐서 쓸수있었고. 곧바로 기술자들과 독일군 포로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곧바로 수리된 이 푸델을 이용해 독일군에 의해 유기된 또다른 판터를 견인하였다. 수리되어 사용된 또다른 판터의 이름이 바로 펠렉. 허나 펠렉은 주행문제로 인해 거의 사용되진 못하였지만, 푸델은 폴란드 봉기군의 몇 안되는 전차로써, 여러작전에 든든한 우군으로 투입되어 수도를 수복하려는 바르샤바 봉기군들을 최전선에서 지원했으며 단순히 보병지원이나 후방 엄호뿐만이 아닌 독일군 기갑차량들과 직접 교전을 벌이기 까지 하는 활약을 펼쳤다. 교전 도중 헷쳐 혹은 4 전차 H형의 공격을 받아 승무원이 부상을 당했지만 차량은 건재했고 이후 독일군의 자주포 1대와 장갑차 1대를 격파하는데까지 성공하였으나 바로 다음날인 8월 11일 '배터리 부족으로 인해 결국 유기된다. 바르샤바 봉기당시 폴란드 국내군이 노획해서 사용하던 판터들은 별다른 활약도 못한채 오히려 독일군의 공격으로 격파당하거나 고질적인 신뢰성 문제로 제대로 운영되지도 못했다. 현재 봉기군에 노획된 판터를 격파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은 SS 기갑사단의 3호 돌격포나 4호전차라는 말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노획하여 루앙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그 중 두 대가 독일군의 티거에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을 끝까지 괴롭혔던 낮은 신뢰성은 여전해서 프랑스는 1947년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겼다.
언덕을 내려가거나 후진할 때, 혹은 고르지 못한 지면을 주행할 때는 기어를 낮출 때 조심해야 한다. 또한 견인시에는 반드시 종감속기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 조향 레버 두 개를 동시에 조작해서는 안된다.
독일과 소련은 전차 부족을 메꾸기 위해 적의 전차를 노획하면 현지에서 수리해서 바로 전투에 투입했는데 독일이 T-34를 열심히 먹고 굴렸듯이(주포를 독일제로 바꿔달아서 굴릴 정도였다.) 소련 역시, 그중에서도 판터를 특별히 취급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수한 전차병들에게 포상으로 지급한 것이다. 또한 정비를 위해 독일 포로중에 기계공도 징발하였다. 1944년에는 판터의 매뉴얼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승무원들에게 배포하였다.
전쟁 이후
1945~1946년까지 판터 9대가 영국군에 의해 생산되었다고 한다. 영국군이 탈취한 판터 생산공장에 남은 부품들을 영국군 감시 아래 독일 노동자들이 조립한 것으로, 현재 남은 5대의 가동가능 판터 중 2대가 이놈들이라 한다. 보빙턴 전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판터도 이때 생산된 것인데 때문에 독일군이 사용한 적 없는 요상한 위장도색을 하고 있다.
전후 프랑스군이 운용하던 판터 G형, G형 외에도 A형도 일부 프랑스군에게 공여되어 사용되었다.
전후에는 일종의 침공에 대한 배상으로 프랑스 등 몇몇 주변국들에게 공여되었다.
프랑스가 판터를 주력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총 3개 대대 분량을 운용했으며 이중 2개 대대는 1950년이 되기 전에 자국산 전차인 ARL-44로 대체되었다. 프랑스군의 평가서류에 따르면 방어력이나 공격력, 광학장비 등은 우수했으나 기계적인 결함이 많고 구동부 마모가 심했기 때문에 철도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활약하기 힘든 물건으로 보았다. 결국 프랑스군은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 판터를 모두 퇴역시켰으며 예외적으로 소대급으로 보유하고 있었던 야크트판터만이 1968년까지 현역에 유지하거나 사실상 현역에 준하는 예비역 장비로 운용했다.
프랑스는 이렇게 판터를 운용하면서 1947년에 판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 포탑 구동계의 출력이 부족해서 20도 이상 기울어진 경우에는 포탑을 회전시키거나 고정시킬 수 없다.
• 포의 오르내림은 일반적으로 쉽지만 압축된 공기에 의해 작동하는 안정기의 압력이 떨어지면 어렵다.
• 7개의 잠망경을 가진 전차장 큐폴라는 거의 완벽한 전방위 시야를 제공한다. 포탄에 의해서 손상을 입은 잠망경은 매우 신속하게 교체될 수 있다.
• 잠망경 조준경(훌륭함)을 제외하면 포수는 별 다른 관측장비가 없다. 시야가 매우 좁으며 이는 판터의 가장 큰 단점의 하나이다. 2단 배율 조준경은 상당히 선명하고 중앙 사아가 선명하다. 이 조준경은 3,000m 거리의 표적과 탄을 관찰할 수 있다. 일단 전차장이 표적을 발견하면 포수가 발사할때까지 20~30초가 걸린다. 이는 셔먼에 비해서 상당히 긴 시간이며 이는 포수용 잠망경이 없는것에서 유래한다.
• 분당 20회의 사격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 사격시 차체는 안정적이며 이는 포탑의 위치에 무관하다.
• 기계 부품들의 설계 수명은 5,000km이고 일부 부품은 기대 이상이지만 궤도와 구동륜 수명은 2,000~3,000km 정도이다. 궤도는 바위투성이 지형을 주행해도 잘 파손되지 않으나, 접지륜의 경우 험지에서는 변형될 가능성이 있다. 구동계 부품들(최종구동장치 제외)의 수명은 대체로 설계 수명에 부합하는 편이다. 변속기 교체는 하루 이하를 요구한다. 반면 엔진은 1,500km 이상을 작동하지 못한다. 평균 수명은 1,000km 정도이다. 엔진 교체는 8시간과 삼각대형 크레인 또는 베르게판터(판터 차체 기반 구난전차)와 부사관이 지휘하는 8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주포 교환 역시 같은 장비로 수 시간이 필요하다. 독일군의 정비부대의 효율은 상당히 뛰어났다.
• 결과로서 판터는 전략 전차가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엔진 수명을 늘이기 위해서 아주 짧은 거리도(25km) 철도로 이동하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판터의 진짜 단점은 최종 구동계로 이는 너무 약하게 설계되어 기대수명이 150km이다. 구동장치가 부서지 는것을 막기 위해서 다음을 따를것이 요구된다 : 언덕을 내려가거나 후진할 때, 혹은 울퉁불퉁한 지면을 주행할 때는 낮은 기어로 전환할때 조심해야 한다. 또한 견인시에는 반드시 최종구동장치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황에 관계없이 조향 레버 두 개를 동시에 조작해야하는 환경은 없다.
• 후방갑판이나 엔진 환기구에 연막탄을 던지면 화재가 시작될 것이다.
• 구동륜이 고폭탄에 민감하다. 105mm 이상의 구경은 기동불능상태로 만들 수 있다. 파편탄이나 75mm가 전면 동일 부위에 수 차례 피탄당할 경우 관통하거나 용접된 곳이 파괴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포의 긴 사거리는 최대한 사용되어야 한다. 2,000m 거리에서도 상당히 정확하게 사격을 개시할 수 있다. 타격의 다수가 1,400m에서 2,000m 구간에서 성취되었다. 탄약 소모는 상대적으로 적은편이라, 4~5발 정도면 고폭탄을 사용했을 때도 목표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가 운용하고 있던 판터의 75/70주포는 배럴을 줄이는 개조를 거쳐 AMX-13의 주포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13톤급 경전차의 화력으로는 매우 강력했으나 워낙 구식이라 46년부터 배치한 소련의 주력전차인 T-54를 전면에서 전혀 상대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후 T-62나 T-64 같은 더 진보된 전차까지 등장하여 T-55가 주력전차 외에도 AMX-13과 비슷한 정찰용 경전차 역할로 배치되기까지 하자 정찰 중 마주치는 T-55를 상대할 수 있도록 66년부터 HEAT탄을 장비한 90mm 저압포로 변경하게 되며 구식 75/70은 버려진다.
소련군 역시 입수한 판터 상당수를 비축하면서 1950년대 중반까지 동독 소재의 구 판터 부품공장들에 정비부품을 생산케 했다는 구소련 문서도 있다.
T-34의 경사장갑에 크게 영향을 받아 도입된 전면 경사장갑은 이후 티거 2가 충실히 물려받았다. 이후 레오파르트1도 이런 경사장갑을 가지게 되는데 레오파르트와 판터는 시간상으로든 설계상으로든 차이가 큰 까닭에 판터와 레오파르트의 관계를 일반적인 후속 전차로 볼 수 있는건 아니다. 다만 힐러리 도일에 따르면 판터의 후속형으로 기획되었던 E-50/75의 설계 도중 처음 도입되었던 구상들이 1955년 인도 수출용 전차 설계에 접목되었고, 곧 레오파르트로 이어져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레오파르트가 판터의 후속이라는 시각이다. 한편 E-50/75의 뒤를 잇는 전차들은 프랑스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AMX M4나 AMX-50 같은 실패한 전차들이 그것이다. 빠른 항복으로 미국, 소련, 영국 3국에 비해 전차설계능력이 떨어지던 프랑스는 비교적 미국, 소련, 영국 3국의 우월한 전차기술에 어느정도 따라가는 것 처럼 보이던 나치 독일의 전차들을 대량으로 입수하여 분석 발전시켜 새로이 전차를 개발했으나 나치 전차들과 동일한 저 신뢰성 저 정비성 등의 문제가 동일하게 발생하여 그대로 실패하고 이쪽도 독일제 기술을 참고 수준으로만 사용하고 20년간 새로 기술을 발전시켜 AMX-30을 만든다.
판터를 주력전차로 분류가능한 최초의 전차라는 주장이 와전되어판터가 MBT의 시조라고 주장되기도 하는데, 이 두 주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미소영 3국의 1세대 MBT들은 사실 판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데다 전부 자체개발 전차들의 발전형이기에 판터와 1세대 MBT는 전혀 상관 없다. 거기다 주력전차로 분류할만한 특성도 상당히 얕은데, MBT의 기준은 단순한 공방 성능이 아니라 그걸 운용하는 군대의 독트린에 따라 주력으로 생산된 다목적 전차를 아울러 말하는것이다. 주포는 소구경인 대신 고관통력을 가졌으며, 정면은 매우 튼튼한 대신 측면이 얇아(측면 하부 40mm 수직장갑, 상부 50mm 60도 상부는 괜찮은 편이지만 하부는 M4 셔먼(38mm 수직)보다 조금 튼튼한 수준이다.) 일반적인 중형전차의 역할을 수행하게 끔 설계되었고 또 판터가 실제로 수행한 임무와 역할 또한 MBT와는 거리가 있었다.
공수의 성능은 준수하였으나 패전 이후 더 이상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끝내 해결되지 않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차 중 최악으로 손꼽히는 구동계통의 문제는 평가가 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는게 판터 전차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프랑스와 소련에서도 공장을 한동안 가동하고 프랑스의 경우 상당한 규모로 사용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사실상 해결불가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판터가 도입된게 1943년 6월인데 종전까지 저 구동계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출력을 조절하는등 임시조치를 취하는데 그쳤다.) 결국 2차대전기 독일 전차들 중 가장 오래 사용된 것은 유명한 과중량 전차들이 아니라 전쟁 초기부터 활약한 중형전차 4호 전차였다.
2015년에 복원도 아니고 개조된 것도 아닌 오리지널 판터를 78세의 독일인이 개인 물품으로 가지고 있다가 정부가 소유권 주장하며 압류했다. 판터는 몇년전에 고장 난 것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가동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30년 전에 판터가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았고, 심지어 1978년에 눈사태가 있던 날에도 판터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이 사람의 집에는 8,8cm FlaK과 어뢰, 심지어 V1 로켓까지 있었다.
판터는 현대 전차들이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야간 투시장치를 전 세계 최초로 장착한 전차였다. 이 투시 장치의 이름은 FG-1250으로 개발은 칼 자이스의 잉그 가르트너 박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원리는 IR 투광기를 이용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파장의 적외선 빛을 투사하고 반사되는 빛을 센서 배열에 전기반응 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아날로그 시각화 장치를 개발하여 영상으로 변환해 전차장에게 제공한 것이다. 오늘날 방범 카메라의 야간 감시 기능이 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시제품이 완성되고 실용성 테스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야간에도 유리하게 전투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히틀러는 모든 판터전차에 이 장치를 추가하라고 명령했으나.... 현실은 독일 본토까지 밀리기 시작하면서 양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수의 판터 중대들이 장착했으나 알려진 전과는 거의 없다. 판터에 달았던 것 말고 몇몇 전투에서 FG-1250으로 야간전투에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전후에는 소련과 미국이 야간투시장비 개발에 참고하여기도 했다. 물론 미국은 관련 연구를 동시기에 진행하였고 저격수용 스코프로 실전 투입까지 성공하으니 최초로 전차에 사용된 야간투시장비라는 정도에 의의가 있다. 위 컬러 사진의 차량이 FG-1250을 장착했던 생존 차량으로 현재 독일 코블렌츠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
추가 개량 및 파생형 계획
만일 전쟁이 지속되었으면 엽기적인 업그레이드들이 계획되어있던 전차이기도 하다.
크기가 좀 더 작지만 오히려 더욱 튼튼하고 내부 용적도 더 넓은 슈말투름 포탑, 7,5cm KwK 42용 자동장전장치, 티거 2와 같은 88mm 71 구경장 주포로 업그레이드, HL-234(800~900마력, 최대 1000마력까지의 출력 요구도 있었다)으로 엔진 교체, 조향장치 개선 등이다.(Doyle et al., 1997, 11) 특이하게도 후속작을 개발하다가 포기한 후, 개발과정에서 얻은 개량점을 기존 전차에 적용해서 G형이나 F형 등의 개량형을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 후속작 전차가 판터 2다.
첫댓글 6호전차 티거보다는 생산량이 많았지만 북아프리카 사막과 소련의 혹한의 전차전을 치르면서 많은 잔고장과 약점을 보였습니다. 독일이 6호전차 티거를 많이 생산할 수 있었다면 전장에서 연합군 전차는 그야말로 무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데이타에 의하면 티거 전차 1대가 평균 T-34 전차를 20대를 파괴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T-34 전차는 티거전차 1대로 격파 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티거 전차가 고장이 나거나, 후퇴하는 경우에는 파폭시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K2 흑표 전차는 독일의 티커(타이거) 전차를 모델로 설계 제작한 세계 최고의 전차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실전에서 쓰여지지 않아 평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K9 자주포도 K1 전차를 개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상 전차 보다는 자주포가 더 위력을 발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