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성 - 압록강아 두만강아 kpop 韓國歌謠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중국 역사에 시대별로 등장하는 수많은 황제를 칭할 때,
나름 우리에게도 익숙한 호칭이 있습니다.
저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수(隋)나라의 개국 황제는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당(唐)나라의 개국 황제는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익숙한 호칭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송(宋)나라의 개국 황제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으로,
명(明)나라 개국 황제는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패턴으로 구성된 황제를 칭하는 호칭이지만,
수(隋)의 문제(文帝)나,
당(唐)의 고조(高祖)와 송(宋)의 태조(太祖),
명(明)의 홍무제(洪武帝)는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주의왕(周懿王) 희간(姬囏)
먼저 양견(楊堅)을 부르는 문제(文帝: 文皇帝)는
양견의 "시호(諡號)"입니다.
시호(諡號)는 황제, 왕, 고관(高官) 등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이 죽은 뒤,
그 후손들이 죽은 사람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이를 기리기 위한 호칭으로
서주(西周: 기원전 1046∼기원전 771) 시대 중반부인
7대 의왕(懿王)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시호(諡號)를 올리는 시법제도(諡法制度)는
춘추전국시대의 각국에서도 널리 시행되었는데,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 중단되었다가,
이후 중국을 재통일한 한(漢)나라 때 다시 시행됩니다.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진시황(秦始皇)
시호(諡號) 비(碑)
당시 군주의 시호(諡號)는 예관(禮官)이 안(案)을 정하고,
제위를 승계한 군주가 결정하여 선포하였으며,
고관들의 시호는 군주가 하사(下賜) 하였는데,
진시황(秦始皇)은 "어른이 죽은 후에
아들이 아버지를 논하고, 신하가 황제를 평가하는
(子議父 臣議君: 자의부 신의군) 것은 안 되는 일"이라며
시법제도(諡法制度)를 폐지한 것입니다.
초기의 시호는 대부분 한, 두 글자로 만들어졌는데,
황제를 비롯한 지위가 높은 고인(故人)들의
시비(是非)와 공과(功過)를 한 글자로 함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 올리는 시호이다 보니
어지간한 폭군(暴君)이나 암군(暗君)이 아니면,
대부분 좋은 의미의 글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미시(美諡) 무(武)를 붙인 한무제(漢武帝)
따라서 시호(諡號)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좋은 뜻을 담아 고인을 칭송하는 "미시(美諡: 上諡)"와
특별히 잘한 것은 없지만 좋게 평가해주는 "평시(平諡)"로
구분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인을 폄훼하고 비판하는
"악시(惡諡: 下諡)"도 만들어집니다.
"미시(美諡)"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호(諡號)로,
문(文: 천하를 잘 다스림),
무(武: 위엄과 덕을 갖추고 강함),
명(明: 천하를 밝게 비춤),
예(睿: 지혜롭고 현명함),
강(康: 온유하고 풍류를 좋아함),
경(景: 의로움으로 굳건하게 행동함),
선(宣: 선하고 성스러우며 견문이 넓음),
성(成: 백성과 나라를 편안하게 안정시킴),
평(平: 기강을 세우고 다스림) 등이 주로 등장합니다.
평시(平諡) 혜(惠)를 붙인 한나라 2대 혜제(漢惠帝)
"평시(平諡)"는 격이 좀 떨어지지만,
비난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의미를 담은 평가인데,
주로 혜(惠: 근본이 부드럽고 백성을 사랑함),
헌(獻: 총명하고 밝고 지혜로움), 목(穆: 의로움을 지킴),
충(冲: 맹렬하게 치솟음), 상(殤: 요절함)을 비롯하여
천(賤), 애(哀), 도(悼), 사(思), 회(懷) 등이 쓰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어지럽힌 어리석은 군주에게 쓰이는 영(靈),
방탕하고 악랄하며 황음무도하면서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해치는 군주를 표현하는 양(煬),
놀고 즐기느라 나라를 돌보지 않은 군주를 뜻하는 황(荒),
사나우면서 세찬 려(厲) 등이
고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부정적인 뜻을 담은
"악시(惡諡)"입니다.
시호(諡號)의 분류: 1. 상시(上諡: 美諡), 2. 중시(中諡: 平諡), 3. 하시(下諡: 惡諡)
궁녀들과 놀고 즐기는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그러나 시호(諡號)는 후대에 정하는 것이니만큼,
정말 형편없는 황제가 아니라면,
굳이 후손들이 선대(先代)를 폄훼할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악시(惡諡)를 올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대표적인 악시(惡諡) 황제가,
수(隋)나라의 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라고 할 수 있는,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입니다.
아버지 수문제(隋文帝)와 형제들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양광은,
자신을 위하여 충성한 신하들을 도륙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으며,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자신은 여자를 밝히고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즐겼던
"천고(千古)의 폭군"으로
수(隋)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황제였습니다.
악시(惡諡) 양(煬)을 붙인 수양제(隋煬帝)
인터넷 사이트에서 "중국의 폭군"을 검색해 보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모두 17명의 황제가 소개되는데,
통일 왕조의 황제 중에서는 유일하게 양광(楊廣)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양광은 악시(惡諡)로 칭해도 무방한 황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양광(楊廣)도 후대(後代)가 처음 올린 시호는
천하를 밝게 비춘 것을 뜻하는 명(明)으로,
수명제(隋明帝)로 불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隋)나라의 뒤를 이은 당(唐 )나라 때,
양광(楊廣)을 폄하하고,
당(唐)나라 건국의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시호(諡號)를 양(煬)으로 바꾸었으며,
따라서 후대에 수양제(隋煬帝)로 불리게 됩니다.
"역사상 수양제 양광은 폭군이다"
악시(惡諡) 영(靈)을 붙인 한영제(漢靈帝)
악시(惡諡)를 받은 또 한 사람의 통일 왕조 황제로,
후한(後漢)의 12대 황제 영제(靈帝)가 있습니다.
11대 환제(桓帝)의 5촌 조카로,
12살의 어린 나이에 조정을 쥐고 흔들던 환관들에 의해
졸지에 황제로 세워진 영제(靈帝)는,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질병이 만연한 나라 상황 속에서도,
주색에 빠져 지내며
오직 환관들을 위해 일하는 황제였습니다.
게다가 직접 매관매직에 나서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긁어모았는데, 이런 악정(惡政)으로 인하여
결국 한나라가 망국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 되는
농민봉기 황건적의 난(黃巾起義)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영제(靈帝)는 한(漢)나라 멸망의 문을 연 황제가 되고,
따라서 악시(惡諡) 영(靈)을 시호로 받게 됩니다.
당(唐)나라 개국 황제 이연(李淵)
그러나 한, 두 글자로
선대(先代)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따라서 선대의 공적을 좀 더 거창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수(隋)나라 이전에는 한, 두 글자로 만들어지던
시호(諡號)의 글자 수가,
당(唐)나라 때부터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후손들이 자신이 훌륭한 핏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많은 글자로 만든 거창한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한 것입니다.
따라서 당(唐)나라 개국 황제 이연(李淵)은
처음에는 태무(太武)라는 시호로 올려지면서,
태무황제(太武皇帝)라고 불렸지만,
훗날 후손들에 의하여
신요대성대광효황제(神堯大聖大光孝皇帝)라는
긴 시호를 얻게 됩니다.
청(淸)나라 6대 건륭제(乾隆帝)의 묘호와 시호
이렇게 되자 긴 시호로 황제를 칭하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묘호(廟號)"가 등장합니다.
묘호(廟號)는 황제(군주)가 죽은 뒤 태묘(太廟) 등에서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던 이름으로,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묘호(廟號)는 유교식 왕실 예법(禮法)으로
고대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개국 군주나 중흥 군주와 같이
업적이 탁월한 특별한 군주들에게만 허락된 칭호로,
따라서 한(漢)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묘호(廟號)를 가진 군주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군주들의 위패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당(唐)나라 때부터는 모든 황제가 묘호(廟號)를 갖게 됩니다.
베이징의 태묘(太廟)
당(唐)나라 4대 황제 중종(中宗) 이현(李顯)
묘호는 시자(諡字)와 종호(宗號), 두 글자로 이루어집니다.
시자(諡字)는 시호(諡號)를 정할 때와 같은 방법과
과정을 거쳐 정해지는데,
주로 나라를 건국한 황제에게는 태(太),
많은 공(功)과 업적을 남긴 황제에는 고(高),
중흥을 일으킨 황제에게는 중(中)을 사용했습니다.
또 종호(宗號)는 나라를 세운 황제에게는 조(祖),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나라를 잘 다스린 황제에게는 종(宗)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후대로 가면서 비슷한 개념으로,
나라를 구한 공(功)이 있거나, 새롭게 일어나면 조(祖)를,
나라를 덕(德)으로 다스린 경우에
종(宗)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
이렇게 되면서 당(唐)나라 때부터는
글자 수가 많아 복잡한 시호(諡號)보다는
두 글자로 된 묘호(廟號)로 황제를 칭하게 되면서,
당(唐)나라 개국 황제 이연(李淵)은 당고조(唐高祖),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은 당태종(唐太宗)으로,
송(宋)나라의 개국 황제 조광윤(趙匡胤)은
송태조(宋太祖)로 불리게 됩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도 시호(諡號)는 계속 있었는데,
청(淸)나라의 개국 황제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로 모두 25자였습니다.
한(漢)나라 건국 황제 유방(劉邦):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한무제(漢武帝)의 연호(年號)
이후 명(明) 나라가 시작되면서,
황제의 호칭으로 "연호(年號)"가 등장합니다.
연호(年號)는 황제가 자신의 치세 연차에 붙이는 칭호로,
어떤 특별한 이벤트를 상징하거나,
자신의 이상(理想)을 표명하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종교나 고전(古典)의 유명한 글귀에서 따온 것도 있었습니다.
연호는 한(漢) 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시작인데,
한무제(漢武帝)는 54년의 재위 기간 동안,
건원(建元)을 시작으로 마지막으로 후원(後元)까지
모두 11개의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다른 황제들도 여러 개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따라서 초기에는 몇 차례나 바뀌는 연호를
황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명(明)나라 개국황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그러나 명(明)나라 때부터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적용하여,
한 황제(군주)가 재위 중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게 되면서,
명(明), 청(淸) 시대에는 연호(年號)에 제(帝)를 붙여,
황제를 칭하게 됩니다.
따라서 홍무(洪武)라는 연호를 사용한
명(明)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홍무제(洪武帝)로,
선통(宣統)을 연호로 사용한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선통제(宣統帝)로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명(明), 청(淸) 시대에도
시호와 묘호가 여전히 사용되었고,
따라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처럼 묘호(廟號)로 부르는 이름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혼창통
주: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