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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문예바다 | 2021. 6. 30 | 128페이지 | 100×160㎜ | 값 8,000원 | ISBN 979-11-6115-131-1
1979 봄, 광주에서 육명심 선생 촬영
도서출판 문예바다가 생애토록 시를 써 오신 우리 문단 유명 시인들의 서정시선집을 기획하여
그 두 번째로 강인한 시인의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를 출간하였다.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
나의 종교는 시다.”
‘목숨을 걸고 시를 쓴다’는 안으로의 치열한 정신과 불길을 단련하는 각오로 시를 써 온 강인한 시인의 짧고도 강렬한 시론詩論이 실린 작은 시집으로,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 그동안 출간한 시집 11권에서 54편을 가려 뽑아 묶은 서정의 진수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친한 벗과의 만남에도 악수가 조심스러운 이 시절, 벗에게 손보다 이 조그마한 시집을 내미는 것은 어떨는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영사운드의 「등불」, “고동을 불어 본다, 하얀 조가비~” 박인희의 「하얀 조가비」 노랫말이 강인한 시인이 작시한 것임을 아는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블록 깨진 틈새로
어린 쑥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 낸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 「지상의 봄」 전문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는 2010년에 쓰고 2012년 제9시집 『강변북로』(시로 여는 세상, 절판)에 수록된 시입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오페라의 유령
빈 손의 기억
브릭스달의 빙하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우렁각시
점화
장미의 독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사랑의 기쁨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철길의 유령
자작나무 숲
늦은 봄날
제2부 ∙ 유리창에 구르는 빗방울
귓밥 파기
보랏빛 남쪽
가을의 차
분수
율리의 초상
등불
나비 환상
풀잎에 쓴 시
얼룩
유리창에 구르는 빗방울
바다를 위한 베리에이션
어떤 사랑 이야기
물결 노래
제3부 ∙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연애통화
지상의 봄
봄 회상
우물 속으로
잠들기 전에 눈물이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강변북로
해 지는 곳으로 가서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물속 풍경
겨울밤의 꿈
토파즈빌 통신
호텔 베네치아
제4부 ∙ 유턴을 하는 동안
사과의 시간
유턴을 하는 동안
당신 가슴의 서랍엔
꿈꾸는 돌
내 손에 남은 봄
비의 향기
입술
마리안느 페이스풀
입맞춤 혹은 상처
그늘의 조건
두 개의 인상
물 위의 오필리아 2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서정抒情을 향하다 ∙ 끝없는 도전의 시절
끝없는 도전의 시절
술에 강한 자 소주 2홉, 술에 보통인 자 소주 1홉, 술에 약한 자 소주 반 홉. 수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소주, 약주, 탁주로 구분하여 개인의 적절한 주량을 술에 강한 자, 보통인 자, 약한 자 등으로 세분하여 써 놓은 안내판이 술집 앞에 의무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또한 그 주량을 초과한 술꾼은 적발되는 즉시 체포될 것 같은, 우습지만 우습지 않은 포고령의 시대. 그게 단기 4294년이었다. 아니, 새벽의 방송국을 점령함으로써 쿠데타를 성공시킨 그들은 단기를 곧바로 서기로 바꿔 쓰도록 하였으니 1961년이란 표기가 맞을 것이다.
그들의 힘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높은 산허리에 돌무더기를 쌓아 ‘재건’이란 구호를 먼 데서도 잘 보이게 써 놓았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수들에게도 모택동복 같은 재건복을 입게 하였고, 인사말도 ‘안녕하십니까’를 쓰지 말고 ‘재건합시다’를 쓰도록 간단히 통일시켰다. 연말에 전주로 내려온 고려대 국문과 신입생 오홍근 형은 「거꾸로 읽어도 청산이 되는 1961년이여」라는 대학생 김재원의 시를 들려주기도 했었다. 군사 독재 30년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전주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그해 10월 성균관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고교생 백일장대회에 나갔었다. 명륜당의 아름드리 은행나무 이파리가 세상모르고 황금빛으로 아름다웠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고교생 백일장은 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는 날을 위한 꽃
꽃다움은
공명할 수 없는 항아리
속으로 지는
잎새.
지난날을 잊기 어려워
차마
버릴 수 없는
곳
그 점을 두고
까악
까악
우짖는 갈가마귀.
― 배앵 돌다
아래로 떨어진다.
아아, 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날개를 퍼덕이다
가루 된
심장.
나갈 수 없는
구멍으로
바람
불어와
오는 날을 앗아 가는
항아리 안
벽.
― 「오늘」 전문
어제-오늘-내일 중의 오늘. 도망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오늘의 시간을 “항아리 안/ 벽”으로 마무리한 시였다. 오후 늦게 강평을 곁들여 입상자가 발표되었다. 입선에 내 이름은 들지 못했고 가작 입선된 몇 사람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아, 떨어졌구나 싶었다. 차하, 차상에 입선한 이름이 불리고, 그리고 장원에 이르러 ‘전주고등학교 강동길’이라는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상장을 받는 자리에서야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뵌 고등학교 은사 양동식 국어선생님은 그 장원 작품이 당시 『현대문학』에 발표되는 기성시인의 수준에 비견될 만하였노라고 회고하셨다.
전주고등학교 입학식 날, 교장선생님이 교사 소개를 하면서, “우리 학교에는 시인 선생님이 네 분이나 계신다.”고 자랑스레 소개할 때 나는 그저 덤덤히 들었었다. 신석정, 김해강, 백양촌(신근) 선생님과 『현대문학』으로 막 등단한 박희연 선생님이 그분들이었다. 생전처음 듣는 시인들이라 나는 그저 이름 없는 지방 시인인가 보다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러다가 1학년 여름방학 작문 숙제로 처음 써 본 소설이 계기가 되어 나는 미술반에서 문예반으로 끼어들게 되었다. 신석정 선생님은 전북대학교에도 출강하시면서 우리 학교 문예반을 맡아 지도하고 계셨다. 과분하게도 문예반 소년들에게 ‘맥랑시대麥浪時代’라는 동인의 이름까지 지어 주시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해 주셨다. 3학년 오하근 형은 서라벌예술대학 주최의 전국 고교생 문학콩쿠르에 시가, 2학년 강일부 형은 같은 문학콩쿠르에서 소설이 당선된 쟁쟁한 서클이 전주고 문예반인 맥랑시대였다. 그 무렵 학생 잡지 『학원』은 고교생의 소설을 원고지 30매 분량으로 싣고 있었으나, 맥랑시대 동인들은 보통 70매 이상 1백 매 이상도 곧잘 써냈다. 2학년 때 낸 국판 총 110쪽의 『맥랑시대』 2집에는 이한기, 오하근, 오홍근, 강일부, 강동길, 송준오, 박기운, 이추원, 김준일의 시, 수필, 소설이 실렸고 「젊은 문학도에게」란 제하의 신석정 선생님의 서문이 얹혀 있었다.
…나는 일찍이 프랑스가 나치의 더러운 발길에 온갖 억압을 받았을 때, 국민과 더불어 젊은 문학도들은 지하에서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감행했던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문학은 선구하기에 피투성이 싸움을 했고, 그러기에 조국을 구원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 걸어야 할 형극의 길인 동시에 또한 영광의 길이 아닌가 한다. 불행하게도 맥랑시대 동인이 호흡하는 오늘의 역사는 그렇게 평탄한 길이 아니다. 항상 의연한 모습으로 탁류에 항거하여 그대들이 요구하고 그대들이 살아야 할 명일을 위하여 그대들의 노래와 이야기는 역사에 앞장서서 우리 이웃과 나아가서 인류 역사에 새롭고 억센 기록이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
1962년 봄, 나는 가정 형편상 서울로 진학하지 못하고 전북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다. 국문과 선배들은 각 학년 40명 내지 50명쯤 북적거렸으나 우리 1학년은 군사 정권의 대학생 정원 축소 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10명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기껏 여섯 명이 전부였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학생기자를 뽑는다기에 나는 대학신문사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다.
대학 생활은 강의실보다 대학신문사가 더 좋았다. 나는 본명과 여러 개의 필명으로 시, 소설, 수필을 가리지 않고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하는 게 재미있었고, 때때로 컷(삽화)도 그렸다.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 가는 1963년 2월에 전라북도 공보관 전시실에서 맥랑시대 동인 시화전을 열었다. 선후배가 망라된 자리로 이상렬, 손풍삼, 양선섭, 이철건 등 후배들도 함께 있었다. 그 팸플릿에 신석정 선생님의 「온실」이라는 작품명도 보인다.
내가 신문의 신춘문예나 잡지의 신인 작품 공모에 열을 올리고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시만 써서 응모한 게 아니었다. 소설도 쓰고, 동화도 쓰고, 시조도 쓰고 한마디로 닥치는 대로 나는 썼고 번번이 나는 낙선했다.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두 문예지가 추천제도로 신인 작품을 모집하고 있었는데도 나는 좀 더 떳떳하고 큰길을 가고 싶었다. 『사상계』의 신인상이나 중앙지 신춘문예가 아니면 내 길이 아닌 것이다. 그게 신석정 선생님께 대한 제자의 도리라 생각했다.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각 대학의 대학생 현상문예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은 습작기의 내게 항상 좋은 표적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청구대학의 청구춘추사 대학생 현상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힌 게 2학년, 그리고 이듬해에도 같은 곳에서 시가 또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혔는데 소설은 오영수, 시는 신동집 선생의 심사였다. 3학년 늦가을 경북대학보사의 대학생 문예에 나는 처음으로 시 「사자死者공화국」이 ‘당선’되었다. 김춘수 선생이 심사한 자리였다.
대학신문사에서 받는 적은 월급과 고료로 나는 『현대문학』이나 『문학춘추』 같은 문예지를 읽어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고서점을 들락거리며 백수사에서 낸 한국단편문학전집 두어 권을 사서 읽기도 하고, 월부로 큰맘 먹고 산 신구문화사의 『세계전후戰後문학전집』 몇 권은 내 알뜰한 문학 교과서가 되기도 했다. ‘시론詩論’을 강의해 줄 교수가 없었으므로 학교에서는 김현승 시인을 초빙해서 특강 형식으로 강의하기도 했고, 4학년 여름에는 고려대 김종길 교수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해 봄 나는 고대신문사의 대학생 현상문예에 「내 이마의 꽃밭에서」라는 시가 또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혔었기에 김종길 교수와의 만남은 정말 뜻 깊은 것이었다. 한번은 그 작품에 대해서 조용히 여쭤 보았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건… 가작佳作이지.” 하는 한마디뿐이었다.
시 창작에 관한 이론서가 지금은 넘쳐날 정도로 많지만 당시로서는 『시의 원리』나 『문장강화』 그리고 유치환, 박목월, 장만영 시인들의 자작시 해설집이 고작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읽은 것으로는 장만영 시인의 책이 그래도 쉽고 인상 깊었었는데, 김종길 교수의 동서양을 활달하게 넘나드는 시론 특강은 내게 벼락이 치는 듯이 눈이 번쩍 뜨여지는 탁월한 시론이었다. 시의 이미지, 운율, 비유, 상징을 비로소 나는 알게 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무작정 쓰기만 해 왔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신석정, 김수영 두 분 시인을 내 시정신의 스승으로 흠모하는 동시에 김종길 시인을 시론의 은사님으로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있다.
1965년 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신 앞에서」로 또다시 당선 없는 가작에 머물렀던 나는 김광림 시인이 주재하는 『현대시학』이라는 월간 시지에 「귓밥 파기」를 응모하여 신인 작품으로 처음 문예지에 활자화되는 기쁨을 얻었다.
돌아보면 내 젊은 날은 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내가 목숨을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없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하루에 한 편씩 50편의 시를 써 보기로 작정하고 또 그렇게 쓰기도 했다. 대학 졸업 전까지는 기필코 문단에 당당히 나서리란 일념으로 나는 고집스레 쓰기만 했다.
졸업을 앞둔 1965년 겨울의 크리스마스이브를 잊을 수 없다. 동아일보사에서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기쁨은 사흘 만에 사라져 버렸다. 열흘 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당선을 취소한다는 사연과(그런 규정이 명문화된 것은 그다음 해부터지만) 내가 보낸 당선소감이 반송되어 온 것이었다. 아마 심사평을 다시 썼을 것이다. 심사위원 조지훈, 김현승 시인이 내 시 「1965」와 「빙하기」에 대해 알쏭달쏭한 선후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사정에서였다.
1966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궁금했다. 「빙하기」의 이가림(이계진), 그는 바로 내 고교 동창 친구가 아닌가. 친구의 카추샤 부대 주소가 너무도 낯익었다. 문예반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아무도 몰래 혼자서 문학의 외길을 밟던 그 친구였다.
그해 봄 교직에 들어선 나는 여름철에 문고판 크기의 첫 시집 『이상기후』를 냈다. 물론 당선된 뒤 취소된 「1965」를 포함한 30여 편의 시를 담고 300권밖에 못 찍은 처녀시집이었다. 첫 시집의 참담한 기쁨이란 어쩌면 미혼모 같은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967년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조선일보에 당선되었다. 김수영, 박태진 시인 두 분이 심사위원이었다.
지각생이 뒤늦게 교실 문 앞에 다가와 머뭇거리는, 꼭 그런 심정이다. 지금껏 낙선을 한 횟수가 아마 이십 번쯤은 될 거라. 너무 늦었어. 「대운동회의 만세소리」는 입체적 구성 방법을 시도했을 뿐, 작년에 퇴학 맞은 「1965」와 같은 계열이지. 구경꾼들이 다 흩어져 가 버린 지금에 와서 내 무슨 케네디라고 혼자서 무대도 없는 연극을 해야 하나. 날도 저물었는데, 참말로 죽을죄를 진 성싶다.
그때의 솔직한 심경을 쓴 당선소감이다. 대학 졸업까지는 기필코 등단하고야 말리라는 열망을 한 해 늦춘 결과였다. 그래서 당선의 기쁨은 하나도 눈부시지 않았다. 쓸쓸하고 허허롭기만 할 뿐이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기쁜 일입니다.
문예바다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기억하겠습니다.
저는 강인한 시인의 <신들의 놀이터>란 시집에 소개된 <시인의 말> 전문을 아주 주의깊게 읽었습니다.
전체 글이 다른 시인들에게도 귀감이 될 내용이지만 끝 부분만 여기에 옮깁니다.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
제목부터 남다릅니다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선생님의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