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누가울어 1968 재취입곡( 공연영상 재현)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생애의 마지막 순회 중 사구궁에서 병사했습니다.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한 후, 다섯 차례의 순회를 하였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순회는 그럭저럭 순조로웠으나, 기원전 218년의 세 번째 순회 중 함곡관을 나와 동으로 이동하면서 하남양무박랑사에 다달았을 때, 길가의 숲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 나와 수중의 무기를
안차(安车)에 던졌습니다. 그때 진시황은 뒤에 있는 차에 있어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자객은 120근이 되는 철퇴를 들어 진시황을 공격했으나,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진시황의 네 번째 순회에서도 진시황에게는 기분 나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11년, 운석이 동군에
떨어졌는데, 누군가가 운석에 ‘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눠진다(始皇帝死而地分)’이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진시황은 소식을 듣고 사람을 동군에 파견 보내 조사하게 했지만 결과가 없자, 아예 운석이 떨어진 곳 주변의 주민을 모두
살해했습니다. 이후, 진시황은 늘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을에 조정의 사신이 어느 날 밤 화음평서를 지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손에 옥벽을 들고 사신을 막아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올해 조룡이 죽는다!(今年祖龙死!)’ 사신은 더 깊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 사람은 옥벽을 땅에 내려놓고 돌아서서 도망쳤습니다. 진시황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사신을 불러 물어봤으나 정확한 해석을 듣지 못했지만, 대신들이 다
물러난 후 조룡은 인간의 조상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옥벽에 대해 분석하게 했는데, 놀랍게도
이 옥벽은 진시황이 몇 년전 강에 떨어뜨린 물건이었습니다. 진시황은 불가사의하다 느껴져 점을 쳐보았고, 결과에 따라 기원전 210년에 다섯 번째 순회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진시황은 이번 순회 때 원래 좌승상 이사(李斯)만 데려가려 했지만, 아들 호해도 같이 가겠다고 해서 함께
데려갔습니다. 10월, 진시황은 함양에서 출발하여 강남으로 순회하면서 멋진 풍경도 보면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차갑고 습한 강남의 기온이 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미처 느끼지 못했습니다. 진시황은 장생불로약을 찾지도
못했고, 거기에 바닷바람을 맞았기에 장기간의 순회로 건강이 나빠져 병마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순회대오가
사구에 다달했을 때, 진시황은 이미 숨이 넘어갈 직전이어서 어쩔 수 없이 사구궁에 머물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구궁에서 병사했습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진시황이 위독할 때 황제의 자리를 부소에게 물려주라고 유언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조고와 이사의 수중에 들어갔고, 진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조고와 이사는 잠시 세상에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진시황의 죽음을 알았던 자들은 조고, 이사, 호해 및 진시황 옆에서 수발을 드는
내시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사는 진시황의 시체를 몰래 차량에 실어 함양으로 옮기려
했지만, 7월이라 날씨가 더워 얼마 지나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그래서 차량에 건어물을 실어, 생선의
비린내로 시체의 악취를 가려 순회 차량이 지나가는 곳의 백성들은 진시황이 죽은 줄 몰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마차는 함양에 도착했고, 이사 등은 몰래 수정한 유언이 담긴 조서를 선독하여 호해가
태자가 되었습니다. 이어 호해가 태자의 신분으로 진시황의 장례를 주최하였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진시황의 50년 일생은 길지 않았지만, 천고일제가 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봉건전제주의의 다민족 국가를 세웠고,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군현제를 확정하여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폭군이기도 한데, 그의 집권 후기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2세 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민앤차이나
주: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