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2011)’ 중 ‘가을’에 메리는 시들어 가는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싱그러운 젊음을 질투하며 고립을 자초한다. 사진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DB
✺[漢詩 映畵로 읊다] 〈142〉세상의 모든 가을
중양절 지나니 벌[蜂]은 근심하건만 나비[蝶]는 알지못해,
새벽 뜰에서 여전히 꺾이고 남은 가지 주위를 맹도네.
그저 오늘 사람 마음이 달라진 탓이지,
가을 향기가 하룻밤 새 쇠(衰)한 것은 아니겠지.
節去蜂愁蝶不知(절거봉수접부지),
曉庭還繞折殘枝(효정환요절잔지).
自緣今日人心別(자연금일인심별),
未必秋香一夜衰(미필추향일야쇠).
―9월 10일의 국화( 十菊花) 정곡(鄭谷, 851-910·唐)
✵鄭谷(정곡) : 중국 당(唐)나라 말기 시인. 자는 수우(守愚), 원주(袁州) 의춘(宜春) 사람. 890년대에 활약하였고,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897) 도관낭중(都官郞中)에 부임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정도관(鄭都官)이라 불렀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 간다. 언제나 돌아오는 가을이건만 꽃잎 지고 나면 마음도 스산해진다. 당(唐)나라 시인 정곡(鄭谷, 851-910)은 중양절(重陽節) 지난 뒤의 국화(菊花)를 소재로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노래했다.
중국 전통에 양수(陽數) 9가 겹치는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 하여, 높은 곳에 올라 가을 경치를 즐기고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며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시는 다음 날인 10일의 국화를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가을을 느끼는 마음은 같지 않다. 절기가 지난 줄 아는 벌[蜂]에겐 근심의 시간이고, 이를 모른 채 남은 꽃가지 주변을 맴도는 나비[蝶]에겐 아직 즐거운 때이다. 시인은 이런 차이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좋은 시절이 지났다고 예단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일 뿐, 하룻밤 새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같은 시(詩)를 두고도 후대 시인들은 저마다 다른 가을을 읊었다. 송(宋)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이 고사를 인용하여 지은 '구일차운왕공(九日次韻王鞏)' 시에, “서로 만났으니 서둘러 돌아갈 것 없고말고, 내일이면 국화를 보고 나비도 시름할 걸세. "相逢不用忙歸去(상봉불용망귀거) 明日黃花蝶也愁(명일황화접야수)”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즐겁게 놀자는 뜻으로 한 말이다.”, 고려 말(高麗 末)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자신의 남은 삶에 대한 위안으로 삼고자 했다.
✺구일차운왕공(九日次韻王鞏·왕공(王鞏, 1048-1117)의 시 ‘九日(중양절)’에 차운해서 짓다
我醉欲眠君罷休(아취욕면군파휴),
취해서 잠이 오니 자네도 그만 쉬시게나
*罷休(파휴) : 멎다. 쉬다. 벼슬을 그만두다.
已敎從事到靑州(이교종사도청주).
맛 좋은 술이야 얼마든지 쌓여 있다네
*從事(종사) : 일을 처리하다. 관직이름.
*靑州從事(청주종사) : 좋은 술을 가리키는 은어隱語.
鬢霜饒我三千丈(빈상요아삼천장),
흰머리는 자네가 나보다 많아 보이지만
*鬢霜(빈상) : 귀밑머리가 서리처럼 희어지다.
詩律輸君一百籌(시율수군일백주).
시(詩) 내기는 내가 져서 벌주 벌써 백 잔이네
*詩律(시율) : 시의 격식格式과 운율韻律
*籌(주) : 산가지. 여기서는 ‘酒籌(주주)’, 즉 술을 마시면서 벌주를 마시게 하기 위해 세는 수를 가리킨다.
聞道郎君閉東閣(문도낭군폐동각),
소문에 그대가 손님 맞는 곳을 닫았다니
*聞道(문도) : 듣기에. 듣자니(=聽說(청설)).
*郎君(낭군) : 귀한 집 자제를 부르는 호칭
*東閣(동각) : 손님을 불러 응대하던 곳을 가리킨다.
且容老子上南樓(차용노자상남루).
오늘은 이 사람을 남루(南樓)에 오르게 하시게나
相逢不用忙歸去(상봉불용망귀거),
우리 서로 만났으니 돌아가겠단 말 하지 말게,
明日黃花蝶也愁(명일황화접야수).
어떤 나비(蝶)가 때 놓친 꽃 좋다 하며 반기겠나.
*明日黃花(명일황화): ‘明日(명일)’은 내일, 즉 여기서는 중양절 다음날을 가리키고, ‘黃花(황화)는 ‘국화’를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중양절에 국화꽃을 감상했는데 ‘明日黃花(명일황화)’는 때를 맞추지 못해 그럴 수 없게 된 것을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 말로 쓰였고 이후 이 말은 ‘過期(과기)’, 즉 때가 지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소식(蘇軾, 1037-1101)
‘노는 것’에 방점을 찍어 읽으면 배울 것이 없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에 방점을 찍어 읽는다면 선시(禪詩)가 따로 없다 하겠다. 때를 놓쳐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十日菊(십일국)
十日黃花照窮谷(십일황화조궁곡)
열흘 날의 황국이 외진 골짜기에 환한데
*黃花(황화) : 노란 빛의 꽃, 국화, 황국.
主人白髮立於獨(주인백발입어독)
백발의 주인은 홀로 우뚝이 서있네.
採之手中揷其頭(채지수중삽기두)
손 안에 뜯어서 그걸 머리에 꽂으니
東籬悠然山色綠(동리유연산색록)
동쪽 울타리 유연하고 산 색은 푸르구나.
*東籬(동리) : 陶潛(도잠)의 "飮酒(음주)" 시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면서,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悠然(유연) : 悠悠(유유)하여 泰然(태연)함. 침착하고 여유가 있음.
主人早歲似梅花(주인조세사매화)
주인은 젊은 나이에 매화 꽃을 닮았고
衆木不敢爭開葩(중목불감쟁개파)
뭇 나무들 감히 꽃 피우길 다투지 못했네.
如今眞同澗底松(여금진동간저송)
지금은 참으로 골짜기 아래 소나무 같아서
猿攀鶴宿山萬重(원반학숙산만중)
원숭이 의지해 학이 쉬는 소중한 산 겹치네.
明知一夜香不減(명지일야향불감)
분명히 아는건 하룻 밤에 줄지 않는 향기로움
弄芳何惜逞衰容(농방하석령쇠용)
향기 즐기며 잠시 아끼니 쇠한 얼굴이 상쾌하네.
只恐風霜漸刻骨(지공풍상점각골)
다만 두려운 건 풍상이 뼈를 깍듯 스며들어
天地閉塞將成冬(천지폐색장정동)
천지가 꽉 막히어 장차 겨울이 되는 거라네.
*天地(천지) : 예기 月令(월령)에 天地不通(천지불통) 閉塞而成冬(폐색이성동)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아 꽉 막혀서 겨울을 이룬다." 하였다.
―牧隱 李穡(목은 이색, 1328-1396)
♣마이크 리(Mike Leigh) 감독의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2011)
https://youtu.be/syvYD2pL43w
이렇게 계절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마이크 리(Mike Leigh, 1943-) 감독의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2010년)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는 중년 부부 톰과 제리와 그들의 평온한 삶을 선망하는 주책맞은 메리를 중심으로 사계절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 부부 주변의 인물들이다. 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모두 지난 시절에 연연하고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톰의 형인 로니는 아내를 잃은 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친구 켄은 젊은이들 중심의 세상을 탓하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자조한다. 또 제리의 직장 동료인 이혼녀 메리는 젊은 날의 기억에 연연하며 중년이 된 자신을 직시하지 못한다. 같은 계절을 맞지만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르다.
가을도 그렇다. 교외에서 주말 텃밭을 일구는 주인공 부부에겐 결실의 계절이지만, 자신의 집 정원도 가꾸지 않는 메리에겐 외로움이 더 심해지는 계절이다. 가을 어느 날 메리는 부부의 아들 조이가 데려온 여자친구 케이티에게 영문 모를 심술을 부린다. 시들어 가는 자신과 대비되는 싱그러운 사랑에 질투가 난 것이겠지만, 이 일로 부부로부터 외면당해 고립을 자초한다.
한시와 영화를 엮어 감상한다면 두 작품은 때가 지나면 존재의 가치도 사라진다는 통념에 대한 질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한시는 메리에게 건네는 조언처럼 읽히기도 한다. 지난 세월이 야속할지라도 남은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는 결국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漢詩를 映畵로 읊다(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6년 10월 15일(목)〉, Daum∙Naver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