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큰 부자가 된 기생, 만덕
1)천민 신분으로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고 그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한 만덕은 성이 김씨이고, 1739년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만덕의 아버지 김응렬은 나주와 제주를 오가며 제주의 미역과 전복, 귤 등을 팔고, 육지의 쌀을 제주에 가지고 와서 파는 상인이었는데, 만덕이 11세 되던 해 풍랑을 만나 사망하였고, 이듬해에 어머니도 사망하였다. 이후 퇴기인 월중선(月中仙)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기적(妓籍)에서 벗어났다. 양민이 된 뒤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장사를 했는데, 돈을 버는 재주가 있었고, 특히 물가 변동을 잘 알아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사고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
기생 김만덕의 표준영정
2)제주에는 1792년 이래 잇따른 흉년과 태풍의 피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1794년에는 바람과 해수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인 심낙수가 연달아 구휼미 2만 섬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다. 상황이 심각하자, 1795년에 조정에서는 5천 섬의 구휼미를 내려보냈다. 그런데 쌀을 실은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하자 만덕은 가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다가 백성들을 구휼해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는 칭송과 함께 만덕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자, 정조 임금은 만덕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제주목사에게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했다
“노기 만덕은 그가 무엇을 구하기에 이렇게 100포(包)에 가까운 백대미(白大米)를 마련하여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인가. 면천(免賤)을 해 주든지 별도로 보상해 주든지 간에 경은 그가 원하는 대로 시행해 준 뒤에 거행 상황을 장계로 보고하라.”
그러자 만덕은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대궐에 들어가 성인의 모습을 우러러본 뒤 금강산에 들어가 비로봉 꼭대기에 올랐다가 만이천봉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기대 밖의 엉뚱한 소원을 말했다.
만덕의 묘비
3)평민인 여자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소원대로 해주라고 하명했다. 그러자 내의원 소속 여의(女醫)의 우두머리라는 임시 직책을 하사하는 방편을 써서 각 고을의 역참에서 그를 호송케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만약 남자가 만덕과 같은 일을 했다면, 아마도 3품의 관복을 입고 만호(萬戶)의 인끈을 임시로 차게 하는 정도의 특전을 베풀었을 것이다. 만덕은 1795년 한양에 왔고, 선혜청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급받았다. 궁궐에 나아가 중전과 세자빈도 알현했고, 세자빈은 “네가 여자의 몸으로 의롭게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라며 후한 상을 하사했다.
행수내의녀김만덕지묘(묘비)
2.금강산 관광을 가다
1)기생이 왕에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는 처음이고, 만덕이 한양에 오자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홍도(紅桃)란 기생은 만덕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다음 시를 지었다.
행수(行首) 의녀는 탐라의 기생이라(女醫行首耽羅妓)
만리 길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네.(萬里層溟不畏風)
이제 또 금강산으로 구경길 떠나며(又向金剛山裡去)
꽃 같은 이름 교방(敎坊)에 남기네.(香名留在敎坊中)
만덕의 기념탑
2)이듬해 봄에 만덕은 드디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왕의 특명에 따른 여행이므로 일반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성대한 등산길이었다. 김만덕은 73세이던 1812년에 작고하였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된 해에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자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고, 후손이 간직하다가 모충사(慕忠祠)에 기증되었다.
추사의 은광연세
만덕 묘의 석물들
[출처] 굶주린 백성을 구한 기생, 만덕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