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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년 개국 수(隋)나라 영역도
서기 581년 중국 대륙에서는,
370년 동안 계속된 분열과 전란의 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년∼ 589년) 시대를 정리하고,
대륙을 재통일하는 수(隋)나라가 등장합니다.
수나라는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개국 공신인 양견(楊堅)이, 자신의 의붓 외손자로 당시 8살이었던
북주의 5대 황제 정제(靜帝)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빼앗아 황제에 등극하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비록 황위를 찬탈하는 형태이기는 했지만,
수문제(隋文帝) 양견은 589년 진(陳)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통일 대업을 완성하였으며,
각종 제도의 정비와 개혁을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역사에서는 그의 치세를
"개황성세(開皇盛世)"라고 부릅니다.
수나라 개국 황제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인터넷 위키백과 "나무위키"에서 "중국의 폭군"을 검색해보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모두 17명의 황제가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그 중 13명이 수나라 이전 위진남북조 시대의 황제들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부정부패를 멀리 하고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친 수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을 착취하기에 바빴던 이전의 수많은 황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큰 존경과 칭송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학계에서도 수문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수문제를 진시황(秦始皇), 당태종(唐太宗),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와 함께
역대 최고의 황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개황성세(開皇盛世)를 통하여 인구 50% 증가
마이클 하트의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
미국의 작가 마이클 하트(Michael H. Hart)는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A Ranking of the Most Influential Persons in History)"에서
"카롤루스 대제(Carolus 大帝)가 이루어낸 통일 유럽은
그의 사후에 다시 분열되었으나,
수문제가 이루어낸 통일 중국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라고 평가하며,
수문제를 랭킹 85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중국의 황제 중에는 진시황(始皇帝: 17위)과 수문제만이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문제(隋文帝: 재위 581년∼ 604년) 양견에
의하여 훌륭하게 출발한 수(隋)나라는,
3대 황제 수공제(隋恭帝: 양견의 증손자) 때인 618년,
3대 38년만에 멸망합니다.
수공제(隋恭帝) 양유(楊侑)- 중드 "수당영웅"에서
공식적으로 3대 38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3대 황제인 공제(恭帝) 양유(楊侑)는,
당(唐)나라 개국 황제가 되는 이연(李渊)에 의하여 세워진
13살의 허수아비 황제로,
재위 기간이 6개월도 되지 않으니,
수나라는 2대 38년만에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수문제 양견이 세우고 키운 나라를,
다음 황제가 바로 말아먹었다는 것인데,
그가 바로 수문제의 둘째 아들로
수나라 2대 황제인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 17명 중에,
통일 왕조의 황제는 딱 한 사람만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바로 수양제 양광으로, 역사에서는 그를
"천고(千古)의 폭군"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수양제 양광은 폭군이다"
수양제능(隋炀帝陵) 비(碑)
그런데 원래 후대에 의하여 추증된 양광의
시호(諡號: 사후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밝을 명(明)"을 쓴 명황제(明皇帝)로,
수명제(隋明帝)로 불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개국 황제 이연(李渊)이
"쬘 양(煬)"을 쓰는 양황제(煬皇帝)를 다시 추증하면서
수양제(隋煬帝)로 불리게 됩니다.
시호(諡號)는 좋은 뜻을 담은 선시(善諡)와
나쁜 뜻을 담은 악시(惡諡)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죽은 후에 올려지는 것이다보니 정말 막장인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적당히 좋은 뜻을 담은 선시(善諡)로 추증됩니다.
그런데 "쬘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밝히고 예(禮)를 멀리하며,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해치는 경우"를 표현하는 글자입니다.
강소성 양주(揚州)시 수양제 능(隋炀帝 陵)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
따라서 양황제(煬皇帝)는
악시(惡諡) 중에서도 최악의 시호인데,
그만큼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은
수양제 양광을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는,
정말 형편없는 폭군으로 평가한 것 같습니다.
물론 수나라를 무너뜨린 당나라 입장에서는,
수나라 황제가 무능했다는 것을 부각시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 전해지는 수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당나라 때 위징(魏徵) 등에 의하여 정리된 역사서
"수서(隋書)"를 근간으로 한 것임을 감안하면,
양광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까지 감안하더라도 양광은 최악의 아들로
바로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자식은 개)"였습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589년 통일로 확장된 수(隋)나라 영토
양광은 북주(北周) 시대인 569년
수문제 양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서(史書)에서 "훤칠하고 수려한 자태에
어릴 적부터 총명했다"라고 평가되는 양광은,
581년 아버지 양견이 수나라 건국 황제가 되면서,
열세 살의 나이로 진왕(晋王)에 봉해져
병주(幷州)와 양주(揚州)의 총관(總管)을 역임하는 등
여러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20살 때인 588년 겨울에는
명장 고경(高熲), 하약필(賀若弼), 한금호(韓擒虎) 등과 함께
진(陳)나라 정벌 전쟁에 지휘관으로 출정하여,
589년에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통일 수나라의
일등 공신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활약을 보인 양광이었지만, 둘째 아들이었기에 황제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고황후(獨孤皇后)- 중드 "독고천하"에서
수문제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정실 부인인 문헌황후(文獻皇后) 독고가라(獨孤伽羅)가 낳은 자식으로, 그 중 장자인 양용(楊勇)이
법도(法度)에 따라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독고황후는 북주(北周)의 명문가 독고(獨孤) 가문의 막내딸로,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지혜로우면서 착한 품성,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 절약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황후였으며,
수문제의 치세에도 큰 도움을 주는 유능한 참모였습니다.
독고황후는 수문제와 결혼을 할 때,
절대로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결혼할 정도로 첩실을 두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그래서인지 수문제에게도 후궁이 몇 명 있었지만,
후궁이 낳은 아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기 중드 "독고천하(獨孤天下)"
태자 양용(楊勇)- 중드 "수당영웅"에서
따라서 수문제는 여러 자리에서
"짐의 아들들은 모두 한 어미의 소생이라
자식들 간에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문제도 독고황후도, 백성들을 위한 나라 살림에
신경을 쓰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또 자식 농사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섯 아들은 하나같이 사치에 빠져서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형제 간의 우애라고는 조금도 없이,
오로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는 말종(末種)들이었습니다.
이런 형제들 속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둘째 양광(楊廣)이
태자 양용(楊勇)을 끌어내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2남 양광(楊廣)- 중드 "수당영웅"에서
태자 양용도 사치를 즐기고 여자를 밝히는 것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좋아하고
사부(詞賦: 운을 달아 지은 한시)에 능했으며,
성격도 너그러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는 남의 눈치나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고, 자신을 포장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갑옷을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여
사치를 싫어하는 수문제에게 지적을 받기도 하고,
모친 독고황후가 가장 싫어하는 첩실을 대놓고 많이 두어
독고황후에게도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둘째 양광은 누구보다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자신을 포장할 줄 알았으며, 특히 술수에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양광은 수문제에게 영향력이 가장 큰 독고황후를
움직이기 위하여, 독고황후가 가장 싫어하는
첩실 문제로 태자 양용을 모함합니다.
수당 교체기의 이야기 인기 중드 "수당영웅(隋唐英雄)"
독고황후 - 중드 "수당영웅"에서
양용은 독고황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첩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많은 미인들을 첩실로 거느렸는데,
이에 양광은 "양용은 첩실을 두고 여색에 빠져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는 소문을 퍼트렸으며,
자신은 마치 첩실이 없는 것처럼 최소한의 첩실 외에는
모두 숨겨서, 독고황후가 태자 양용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던 중 양용의 부인인 태자비 원씨(元氏)가
갑자기 죽는 일이 생기자, 독고황후는 첩실들간의 싸움으로
태자비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양용을 감시하고
태자비 죽음의 원인을 찾게 할 정도로 양용을 불신합니다.
양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자비의 죽음에도 태자 양용이 그리 슬퍼하지 않는 것은,
양용이 태자비를 독살했기 때문이다"라는 소문도 나게 만듭니다.
태자의 후궁이 되는 장서희- 중드 "수당영웅"에서
둘째 양광은 이렇게 태자 양용을 모함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은 여색을 밝히지 않는
성인군자와 같은 모범생으로 포장을 합니다.
양광은 신하들을 공손하게 대하고 예의범절을 지켰으며,
의관도 아주 평범하게 차리고 다녔습니다.
수문제가 집으로 찾아오면, 젊은 미녀들은 모두 숨기고
늙고 못난 여인들에게 시중을 들도록 했으며,
수문제의 눈길이 잘 닿는 곳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이고
현(絃)이 끊어진 거문고를 놓아두어,
수문제가 자신은 가무(歌舞)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 사냥터에서 소나기를 만났을 때
시종이 비옷을 가져오자,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는데,
어찌 나만 비를 피하겠느냐"며 비옷을 입지 않았으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수문제와 독고황후는
양광을 훌륭한 군주감으로 생각합니다.
독고황후와 수문제 양견의 아들들 - 중드 "수당영웅"에서
3남 양준(楊俊)- 중드 "수당영웅"에서
이렇게 양광이 자신의 포장에 힘을 쏟으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효(仁孝)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양용을 미워하고 신뢰하지 않게 된 독고황후는
수문제에게 태자를 바꿀 것을 계속 종용했으며,
결국 600년 양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둘째 양광이 황태자가 됩니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던 양용은 궁궐 정원의 나무 위에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본 수문제는 "둘째 말대로 첫째 저 놈이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라며, 오히려 자신이 결정이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둘째 양광이 황위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셋째 양준(楊俊)도 사라집니다.
병으로 쓰러지는 독고황후- 중드 "독고천하"에서
셋째 양준도 사치를 심하게 하고
여색을 밝히는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자신의 유흥비를 감당하기 위하여
비싼 이자를 백성들에게서 갈취하는 고리대금업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게다가 바람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참다못한 그의 부인이
독약을 넣은 과일을 먹여 그를 독살하려고 했으며,
그로 인하여 병을 얻은 양준이 600년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2년후 602년 8월에는
양광을 태자가 되도록 만들어준 사람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던 어머니 독고황후가
59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수문제 양견과 문헌황후 독고가라
당나라 때 정리된 수나리 역사서 "수서(隋書)"
독고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독고황후 덕에 태자가 된 양광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여
수문제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장례식이 끝나고 처소로 돌아가서는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어머니 독고황후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실제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범생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해야 했던 힘든 시절이
끝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당나라 사가들이 양광을 깎아내리기 위하여
편파적이고 악의적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화부인(宣華夫人)- 중드 "수당영웅"에서
독고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을 공처가로 살아온 수문제는
큰 충격으로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며,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자신이 멸망시킨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14녀인 선화부인(宣華夫人)이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그녀를 총애하며 향락에 빠져 지내다가
604년에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러자 양광은 부친을 잘 치료하여 낫게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좀더 빨리 황제가 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람이었던 재상 양소(楊素)에게
황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예상되는 문제에 미리 대비하라는 서찰을 보냅니다.
그런데 재상 양소가 태자 양광에게 보낸 답신이
배달 사고로 수문제의 손에 들어갑니다.
독고황후의 빈 자리를 힘들어하는 수문제- 중드 "독고천하"에서
수양제 양광- 중드 "수당연의"에서
서찰을 읽어본 수문제는, 믿었던 양광이 자신이 죽기도 전에
제위에 오를 궁리를 했다는 사실에 진노합니다.
그러던 중에 수문제를 간호하다가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던
선화부인(宣華夫人)이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울면서 뛰어들어 옵니다.
사실 선화부인은 양광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수문제가 선수를 치면서 어쩔 수 없이 빼앗긴 여자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곧 황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 양광은
우연히 마주친 선화부인을 겁탈하려 했으며,
선화부인은 이를 뿌리치고 도망쳐 온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문제는
"이 짐승에게 어떻게 국가 대사를 맡길 수 있겠느냐!
독고가라가 나의 판단을 그르쳤다"라며 한탄합니다.
수말당초 영웅들의 이야기 중드 "수당연의(隋唐演义)"
그리고 재상 유술(柳述)과 원암(元岩)에게
양광을 폐출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는다는
조서를 쓰도록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양광은 조정에 심어둔 눈과 귀를 통하여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고,
곧바로 자신의 수족인 우문술(宇文述), 곽연(郭衍)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수문제가 기거하고 있던
인수궁(仁壽宮)으로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재상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고,
궁에 있던 궁인들을 전부 밖으로 몰아냈는데,
잠시후 수문제가 사망합니다.
따라서 수문제 양견의 사망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는 것이 없이, 어떤 기록에서는
양광의 수하인 장형(張衡)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어떤 기록에서는 양광에게 시해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중드 "수당연의(隋唐演义)"에서 묘사되는 수양제 양광의 모습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상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 하더라도
부친을 직접 살해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황제가 되고 싶어했던 양광의 행적을 놓고 볼 때,
수문제 양견이 빨리 죽는 것을 원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수문제가 사망할 때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
양광이라는 "수서(隋書)"의 기록을 감안하면,
아마도 수문제 양견을 죽인 것은
둘째 아들 양광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친을 시해한 양광은 태자였던 형 양용에게
조작된 수문제의 유언장을 보내 자결하도록 종용하였으나,
겁에 질린 양용은 자결하지 않았으며,
결국 양광은
수하 장수 우문지급(宇文智及)을 보내 형을 살해합니다.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이렇게 황궁 내부의 반란을 통해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이 탄생합니다.
수양제 양광은 모친인 독고황후의 믿음을 배신하고
독고황후를 사리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만들었으며,
자신의 아버지와 친형을 죽이면서 황제가 된 것으로,
한마디로 "패륜(悖倫)" 그 자체인 황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황위에 오르는 과정 뿐만 아니라,
이후 나라를 다스리는 15년 세월에서도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따라서 양광은 아버지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이룩한
"개황성세(開皇盛世)"의 모든 것을 갈아엎으며,
역사에 "천고(千古)의 폭군"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고,
대표적인 "호부견자(虎父犬子)"의 사례가 됩니다.
도대체 양광은 얼마나 엉망진창인 황제였을까요?
3代로 끝나고 만 수나라 황제
출처: 혼창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