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 신정효
일요일 아침,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타닥타닥, 하루를 여는 청량한 소리다. 비가 내리는 소리는 잠결에, 눈이 반쯤 감긴 상태에서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며 들을 때가 낮이나 저녁 무렵에 듣는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낭만적이지, 싶다. 왠지 비가 오는 날은 조금 게을러져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늘처럼 일요일까지 겹치는 날이면 한, 두 시간 더 뒤척이며 빗소리에 빠져든다 한들 누가 뭐랄 것 같지 않아서다. 더구나 봄으로 가는 길목에 오는 나른한 연두색 봄비 아닌가. 잠시 더 머물며 눈꺼풀에 힘을 빼고, 공기중의 습기를 서서히 받아 들인 뒤 몸을 세운다.
부엌으로 가 아침 준비를 위해 수도 꼭지를 돌리자 쏴아 하는 소리가 쏟아지며 조금 남아있던 잠을 쫓는다. 도마를 펼치고, 이것저것 썰고 다지고, 칼과 도마가 만나 맛있는 소리가 만들어진다. 플라스틱 도마를 잠깐 쓰다가 아무래도 찜찜해 얼마 전 다시 나무 도마로 바꾸었더니 생산되는 소리 또한 더욱 싱싱하고 건강하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부침개가 바삭하게 구워지는 소리, 식탁에서 젓가락과 예쁜 보시기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 사람 사는 소리들이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앉자마자 휴대폰이 카톡카톡 안달이다. 비 오는 날 아침에 친구가 보낸 음악 선물이 도착했다. 내가 산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멋진 친구가 보낸 노래는 ‘꼬마야,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김창완의 목소리가 너무나 감미롭다. 오늘 같은 날은 목청을 다해 고음으로 부르는 노래보다 읊조리듯 나긋나긋한 이런 소리가 제격이다. 나지막한 기타 선율도 지금 이 순간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내친김에 컴퓨터를 켜서 몇 곡 더 듣는다. ‘회상, 그래 걷자, 청춘..’ . 학교 다닐 때 참 많이도 들었던 노래들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켜켜이 들어 앉은 소리들도 있다. 내가 일부러 데리고 들어와 마음속 자리를 내준 것도 아닌데 주인도 모르게 자리잡고 앉아 있다. 추억과 함께 버무려진 소리들, 진심이 가득 담겨 청신경을 건드렸던 소리들, 이런 소리들은 시간 앞에 바래지도 않고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내민다. 듣는 순간에는 폭포수처럼 내리 꽂혔어도 그냥 흘러가 버리기도 하고 들릴 듯 말듯 무심하게 말했어도 몇 십 년 동안 기억 되기도 한다. 산울림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했던 말들, 소리란 녀석이 마술을 부리면 나는 꼼짝없이 오래된 사진첩이 다 넘어갈 때까지 그 소리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겨우 산울림에서 빠져 나올 무렵 또 다른 소리들이 다가온다. 멀리서 앰뷸런스가 지나가고 집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이고 딸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다. 성당 종소리도 들린다. 비가 조금 잦아들었는지 밖에서 누군가가 잔디를 깎기 시작한다. 맑은 날 다 놔두고 왜 하필 이렇게 젖은 날 잔디를 깎는지 알 수 없지만 조금 열린 창문으로 풀 냄새와 함께 들어오는 잔디 잘리는 소리는 나를 멀리 계시는 부모님 곁으로 데려간다. 두 분이 사시는 집에는 잔디가 꽤 넓게 깔려있다. 그런데 그것이 잔디 중간중간에 크고 작은 돌들이 놓여있어 기계로 밀기에는 옹색하고 그렇다고 손으로 일일이 다듬기에는 힘에 부쳐서 엄마는 늘 불평이시다. 아파트로 이사하자 하신지가 꽤 오래 전인데도 그렇게 답답한 데서 어떻게 살겠느냐는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에, 엄마는 어찌하지 못하고 40년째 그 집에서,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무거운 집을 머리에 이고 사신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잔디와 잡초가 힘을 합해 하루가 다르게 쑥쑥 밀고 올라올 테고, 두 분은 또 곱지 않은 몇 마디를 주고받으실지라도, 그래도 그 안에는 우리 다섯 남매가 쏟아낸 수많은 소리들이 함께 있으니 엄마도 막상 쉽게 떠나지는 못하실 것이다.
참 많은 소리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세상에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있을까, 싶다. 비 맞으러 나온 지렁이나 보송보송 올라오는 새순은 물론이고, 햇빛이 창창했던 며칠 전에는 살아있다 할 수 없는 아파트빌딩마저도 햇살에 반짝거리며 무슨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오늘 기분 최고예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오감을 열고 조심스럽게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소리들..
하루를 지내며 이렇게 많은 소리들이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나가고 또 다시 들어오곤 하지만 저녁 무렵 하루를 돌아 보면 되새겨 지는 건 역시 사람의 목소리다. 꾸미지 않은 소리, 과장되지 않은 소리, 거기에 맑은 표정까지 함께 따라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깊숙이 들어온다. 우리의 눈은 자주, 자연이 빚어 놓은 장관 앞에 한참 동안 넋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귀는 자연의 소리보다는 사람이 내는 소리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동을 받는 것 같다. 멋진 풍경을 만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이듯이 우리 마음속 풍경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착한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 간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속 소리 창고에 이런저런 소리들을 저축하듯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고 가끔 다시 꺼내 들으며 미소 짓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는 일인 것 같다. 잠깐 쉬며 충전을 해야 하는 때에 나를 일으키는 소리가 많다는 것은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았다는 의미가 될 것도 같다. 그리고 이제는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았으니 그것들을 나만의 방법으로 정리하고 가다듬어 더 너그럽고 따뜻한 소리로 되돌려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불러도 30년을 넘어 듣게 되는 김창완의 노래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이다.
첫댓글 4월 18일 <문학가 산책> 글 입니다
여과가 잘된 맑은 소리를 내는 모든 것들이 부럽습니다.
유림씨도 무척 맑아 보여요
'가슴속 깊은 곳에 켜켜이 들어 앉은 소리들'
그중에서도 사람의 말소리를 으뜸이라치시니...
감동을 줄때도 있지만 때론 고통이 될 수도 있겠지요.
'꾸미지 않은 소리, 과장되지 않은 소리, 거기에 맑은 표정까지
함께 따라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깊숙이 들어온다.'
삶의 많은 시간을 두고 큰 화두로 삼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읽어 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