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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한 잔의 여유 스크랩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늘뫼 추천 0 조회 301 16.07.04 0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懷)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

 

 

 그리운’, ‘서글픈’, ‘잃어진 추억’, ‘싸늘한 추회등 도처에 애상적인 정조가 깔려 있다. 으레 눈 내리는 밤의 정경이 그러하다. 그리움,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시인은 노래하고자 한 것. 그렇다면 이 시의 꽃은 역시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위해 이 시가 존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다. 그러나 현재 중등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 표현이 주는 매혹을 제대로 음미해 볼 여유도 없이 안타깝게도 주로 기법적인 측면에서만 공부를 하게 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대목을 두고, 바로 시각의 청각화’, ‘공감각적 이미지등을 운위하는 것이다. 헌데 명색이 시 전공자인 나 자신도 도대체 그런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먼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귀에 들리겠는가. 왈가닥 처녀 아이도 아니고 여인이, 그것도 옆방에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옷을 벗는데 그 소리가 들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옷은 하늘하늘한 실크 잠옷이거나 곱고 단아한 한복이거나 어딘가 그런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안 들린다. 김광균이 주목한 것은 바로 밤눈의 이러한 속성, 소리 없음’,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눈은 소리 없이 내릴 뿐 아니라 눈 내리는 밤은 평소보다 더 고요하기까지 하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눈의 입자가 육각형 흡음 구조라서 밤에 눈이 쌓이면 사위가 고요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누구나 경험해 보았듯이 밤눈은 눈치도 못 채고 있다가 무심코 창밖을 보거나 방을 나서야 알 때가 많다. 그때의 감동과 설렘을 떠올려 보라. 어떠면 이 시의 화자도 방 안에 있다가 눈을 맞이했고 그래서 뜰에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이었으니 정녕 그는 눈 오는 줄 미처 몰랐으리라.

 

 하지만 소리가 나는 것은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어찌 표현할까? 시냇물이 졸졸흐른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시냇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는 것은 달리 어찌 표현하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표현의 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한번 인터넷에서 용각산광고를 찾아보라. 이 광고는 우리나라 광고사에서 손꼽히는 명카피와 음향 효과로 유명하다. 그 이전까지 제약회사들의 광고는 약품의 효능을 선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광고는 그런 말 하나 없이 신생 제약회사 하나를 일약 중견회사로 성장케 했을 정도로 광고 효과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 광고는 우리나라 음향 효과계의 대부인 김벌래가 <형사 콜롬보>에서 주인공 콜롬보의 목소리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성우 최응찬의 목소리를 동원해 만든 라디오 광고였다. 이 광고는 제품을 좌우로 흔들자 뚜껑 속에 들어 있는 숟가락이 흔들리는 소리인 듯한 잡음으로 시작한다. 서걱서걱. 이어지는 성우의 멘트. “이 소리가 아닙니다.” 다시 또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사각사각. “이 소리도 아닙니다.” 그리고 1초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1초의 공백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그 순간 비로소 들리는 성우의 목소리. “, 이 소리입니다.” 이로써 소비자의 호기심과 진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제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제품의 특성과 신뢰성을 인식시켜 주는 광고가 될 수 있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곧바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멘트가 이어진다. 사실 진해거담제인 용각산은 가루약이라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거부감이 있었지만 이 광고를 통해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분말의 생약 성분이란 점을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다른 잡소리를 들려주는 아이디어. 침묵에 소음을 섞고 그 소음을 제거함으로써 침묵을 전하는 이 광고의 발상.

 

 내친 김에 자동차 레간자광고도 찾아보라. 당시 대우자동차는 엔진 소음이 크다고 악명이 높았다. 대우는 레간자라는 신형자동차를 통해 그런 이미지를 불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나는 건 표현하기 쉽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이 광고 역시 텔레비전 광고로는 드물게 침묵 장치에 의존한다. 아름다운 들녘 도로를 소리 없이 자동차가 지나간다. 그러자 작은 잡음처럼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 차장이 스르르 올라가며 닫히자 개구리 울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침묵 속에 자동차가 질주한다. 그런가 하면 속편 광고에서는 바셋하운드 강아지 한 마리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편안히 잠을 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잠시 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벌의 날갯짓 소리. 차창이 소리 없이 열리고 벌이 날아가자 차 안은 다시 고요해진다. 강아지의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 정적 끝에 마지막 멘트가 흘러나온다. “! 레간자!”이 광고 역시 발상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야말로 용각산의 숟가락 소리요, ‘레간자의 개구리 울음 소리, 벌의 날갯짓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눈 내리는 밤은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거나, 눈 내릴 때 나는 소리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처럼 거의 나지 않는다는 뜻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설야는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러나 그것은 숟가락 소리도 개구리 울음 소리도 아니기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기에, 신비하고 야릇하고 관능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던지며 아련한 그리움까지 선사해 주는 게 아닌가. 일찍이 김기림은 김광균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시인이라고 평했지만, 이 시는 침묵조차 모양으로 만들어냈던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의 매력이다.

 

정재찬 / ‘시를 잊은 그대에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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